아동용이라기엔 너무 재밌는 영화

by 수차미

나는 성인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아동용 애니메이션을 즐겁게 볼 수 있었다. 남들이 유치하다거나 수준에 맞지 않는다 생각하는 것들도 나는 무척 재미있게 보았다. 어쩌면 내가 동심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아동용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성인용’이었을지도 모른다.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그것들은 알고 보면 잔혹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신데렐라가 구두를 신고 돌아가는 이야기가 사실은 발을 깎는 고통을 포함하고 있던 것처럼 말이다.


s592.jpg 영화 <아이언 자이언트>의 작품 포스터© 워너 브라더스


내가 <아이언 자이언트>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 때문이다. 7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문화에서 인기를 끌던 캐릭터들을 총망라한 이 영화에는 헬로키티나 슈퍼소닉과 같은 익숙한 것들부터 건담이나 드로리안처럼 덕후가 아니라면 알기 어려운 것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후반 전투신에 등장하는 크고 아름다운 로봇이 눈에 띄었다. 난생 처음보는 이 로봇이 영화에 큰 비중으로 등장하는 것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그리하여 검색을 통해 그가 <아이언 자이언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크고 아름다운 로봇이 미국의 어느 마을에 떨어져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이 1시간 26분짜리 영화는 브래드 버드 감독이 만들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만든 브래드 버드가 <라따뚜이>와 <인크레더블 1&2>의 감독이라는 건 사람들도 나도 잘 모르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가 유명 감독이었다는 걸 몰랐기에 이 영화가 유난히 즐겁게 다가왔다. <라따뚜이>의 작은 새앙쥐와 <인크레더블>의 귀염둥이 잭잭처럼 ‘작고 아담한’ 것이 아니더라도 무척 귀여울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이 크고 아름다운 로봇은 덩치에 걸맞지 않게 인간에게 호의적이며 방어적 태도밖에 취하지 못하는 바보다. 마찬가지로 이 로봇을 발견한 아이 호가드 휴즈(엘리 마리엔탈 분)도 미국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평범한 꼬마 아이다. 거기에 이 로봇을 상부에 보고해 승진하려는 나쁜 어른 켄트 맨슬리(크리스토퍼 맥도널드) 또한 전형적인 냉전 시대 미국인이다. 이쯤에서 모두들 이 영화가 지극히 평범하게 직선 대로를 달릴 것임을 예측하게 된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로봇은 단순히 외계인을 넘어 미국을 위협하는 군사적 존재이며, 그것과는 절대로 평화적 타협이 불가해서 조건 없는 선제 타격을 하게 되리라고 말이다.


이 바보 같은 로봇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갈지 시작과 결말에서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지구 위에 갑작스레 등장한 타자일 뿐이며 지구인보다 (그 강대한 미국보다) 훨씬 뛰어난 과학기술을 품고 있다. 말하자면 이 땅에 등장한 ‘아이언 자이언트’는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원폭들처럼 ‘팻 맨’과 ‘리틀 보이’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아이언 자이언트’라는 영어 이름을 번역하면 ‘쇠 거인’쯤인데, ‘팻 맨’과 ‘리틀 보이’ 또한 ‘뚱뚱한 남자’와 ‘작은 꼬마’로 번역되기 때문이다.


571520_401715_357.png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의 한 장면 © 워너 브라더스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아이언 자이언트를 향한 노파심을 감출 수가 없었다. 팻 맨과 리틀 보이, 뚱뚱한 남자와 작은 꼬마의 관계가 만약 ‘다윗과 골리앗’이라면, 어떤 의미로든 그 두 사람을 지칭하는 말은 ‘쇠 거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두 폭탄 중 어느 누가 이기더라도 그들은 ‘육체’와 ‘지혜’라는 힘을 각각 가지고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에서 다윗은 골리앗을 이기지만 현실 세계에서 원폭은 항전하지 않는 일본에 대한 미국의 강한 스트레이트 펀치였다. 말하자면 육체적으로도 강하고 지혜면에서도 호가드를 따를 정도로 똑똑한 이 친구가 어딘가를 향한 스트레이트 펀치가 되지는 않을지 두려웠다.


아마도 그 펀치가 향할 곳은 나쁜 어른 켄트 맨슬리다. 켄트 맨슬리는 ‘미확인 현상 확인 기구’라는 가상의 단체에 소속된 사람인데, 아이언 자이언트의 실체를 확인하고는 조건 없는 선제타격을 주장한다. 그는 이 미확인 생명체 ‘아이언 자이언트’를 원대한 미국에 대항하려는 적국의 숙명적인 ‘적’으로 분류하고 두려움에 떠는 동시에 적대의지를 불사른다. 말하자면 1957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아이언 자이언트는 이제 막 ‘스푸트니크’를 쏘아올린 소련을 대변하는 캐릭터이다. 그에게는 소년 호가드와는 달리 이 크고 귀여운 생명체에 대한 일편의 이해심을 찾아볼 수가 없고, 그래서 소년인 호가드와는 더욱 동떨어져 보이게 된다. 그는 아동용 애니메이션 서사를 지닌 이 영화에서 ‘아이들의 적’으로 설정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시대의 ‘스테레오 타입’이다.


호가드는 착한 아이이고 맨슬리는 나쁜 어른이다. 아이언 자이언트는 알고 보면 착한 외계인이다. 말하자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E.T>를 떠오르게 하는 이 영화는 이야기도 캐릭터도 평면적이어서 그저 별 볼 일 없는 작품으로 여기게 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나는 그 단순한 이야기가 어딘지 모르게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흔히 말하는 ‘아동용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의 ‘단순함’이 나에게 즐거웠던 건 마냥 모든 것을 복잡하게 생각해야 하는 ‘어른의 세계’에서 탈피하고 싶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왜 이야기에 반전이 있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뒷 이야기를 추리해야 하는가? 어쩌면 이분법이라며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행위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단순한 이야기에 갈래가 있지는 않을까 하며 그것을 씹고 뜯고 뒤집고 의심한다. 그게 바로 어른의 사회이며, 더는 세상을 순수하게 보지 못하게 된 어른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797141_2.jpg 영화 <아이언 자이언트>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냉전 세계에서 설립된 힘의 질서를 어린아이의 시선을 빌려 통렬하게 비판하는 이 영화에는 단순하지만 우직하게 나아가는 힘이 있다. 슈퍼맨 만화를 좋아하던 꼬마 호가드의 말은 ‘핵과 부딪혀 지구를 구하는 슈퍼맨인 아이언 자이언트’의 모습으로 재구현된다. 나는 최근의 히어로 영화들이 ‘혼자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면서 옹기종기 뭉치는 것을 떠올렸고, 반대로 이 영화는 아주 고전적으로 ‘혼자서 세상을 구한다’라는 메시지를 던진다는 것에 감명받았다. 혼자라는 게 소시민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아이언 자이언트처럼 그 자체로 힘과 지혜를 가진 어느 나라의 통수권자라면 어떨까? 더군다나 그것이 세계의 경찰이라 불리는 미국의 통수권자라면 충분히 혼자서도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 혼자서도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나는 <아이언 자이언트>가 내지르는 우직한 발걸음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세계가 민주주의를 외치며 힘없는 개인이 뭉치면 거대한 단체를 이길 수 없다고 말하는 가운데에, 이 영화를 보면 과연 개인이 힘이 없는 존재일지를 의심해보게 된다. 개인이 강하다는 게 아니라, 사실 우리가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건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이 영화에서 어린 아이 호가드가 우리의 시선에서는 무척 위험해 보이는 아이언 자이언트를 친구처럼 대하는 모습이 그저 철부지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엄마의 입장에서 국가의 입장에서 마을의 입장에서 호가드는 꼬맹이이고 아이언 자이언트는 무기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호가드의 시선으로는 ‘장난감 로봇’ 하나 가졌다고 말할 뿐인 순수함에 자신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안개를 걷어내고 그 본연의 가치에 집중하자 그냥 지금 나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 로봇이 아무런 적개심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언 자이언트’는 정말로 외계 별에서 온 침략자다. 영화에서 그 사실이 짤막하게 언급되지만 반대로 길게 언급되지도 않는다. 그냥 어느 별에서 공격 무기로 쓰였다는 사실만 밝혀지고, ‘총’이라는 물체를 보면 트리거가 되어 방어 모드가 작동한다는 것만 알 수 있다. 작품은 그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면 그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자꾸만 강조하는 데, 이는 작품의 맥락을 볼 때 아마도 냉전 시대의 핵우산 논리를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갑자기 지구에 등장한 오버 테크놀로지적인 파괴 무기라는 점에서, 크고 아름답고 적국의 손에 넘어가면 안된다는 점에서 ‘아이언 자이언트’와 ‘핵’은 동일하다. 그 핵이 지금 이곳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 핵에 버금가는 아이언 자이언트를 적국이 보낸 것으로 의심되는 상황에서 우리 ‘또한’ 그들에게로 핵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29717862_1823230024648711_8109906202067992576_n.jpg 영화 <아이언 자이언트>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말하자면 상호확증파괴, 너희가 나를 죽이면 너희도 같이 죽을 것이라는 동귀어진의 핵 논리는 냉전 시대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잘 말해준다. 그 힘의 균형은 그렇게 유지되었고 ‘아이언 자이언트’를 향한 무자비한 공격이 그가 ‘어린 아이’를 죽였다는 맨슬리의 프로파간다였음을 떠올려 본다면 지금 시대에 이 영화를 보는 건 향수에 젖은 행동일지 모르겠다. 그들과 우리가 서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어느 한쪽의 선행으로 불신이 깨어지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 영화가 과거의 유산이라면,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야만 할까? ‘미러링’이라는 이름으로 적에 대한 무한정의 군비증강이 이루어진 이 순간의 끝이 사실상 핵이라는 것의 동귀어진으로 끝나는 건 아닐지에 대한 불안감이 있고, 그 갈등이 어쩌면 영영 ‘아이언 자이언트’처럼 혜성같이 등장한 어느 누군가가 있어야만 해소되는 건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도 있다.


이 크고 ‘귀여운’ 로봇은 끝내 자신을 희생해 자신을 향한 핵 공격을 막게 된다. 여기서 이 희생은 단순히 자신을 향한 공격을 막는 것에 불과하지 않는다. 그것이 다름 아닌 ‘핵’이기 때문이다. 미국을 침략한 외계인, 말하자면 절대불가침적으로 ‘적’에 해당하는 이 친구에게 핵을 쏘는 행위가 사실상 미국을 향한 공격이나 다름없다고 말하는 이 장면에서 나는 이 영화가 정말로 사랑스러워졌다. 아마 당신도 이 영화의 원작이 동화였고, 그 제목이 <아이언맨>이었다는 점을 알고 나면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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