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하는 너구리 가족과 변하지 않는 계급론

<유정천 가족>을 보고 나서.

by 수차미

변신하는 너구리 가족과 변하지 않는 계급론



000.jpg 애니메이션 <유정천 가족>의 작품 포스터 © P.A.WORKS


바케다누키, 변신하는 너구리 요괴


일본에는 너구리가 변신의 귀재라는 속설이 있다. 한국으로 치면 여우 포지션에 해당하는 이 작고 귀여운 너구리는 어느 사람으로도, 어느 사물로도 쉽게 변신할 수 있고 또 그것으로 사람을 속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케다누키(化け狸) 이다. 정확하게 ‘너구리 요괴’를 지칭하는 이 단어는 그 유명세만큼이나 여러 매체에서 소재로 차용되었는데, 이 작품도 그 중에 하나다.


모리미 토미히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P.A.WORKS 사에서 만든 <유정천 가족>은 총 2기 25화로 구성된 TV 애니메이션이다. 너구리 요괴 가족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독백이 많다는 이유로 흥행에 의구심이 있었는데, 귀신같이 성공했다. 이는 자극적인 소재와 흥미 위주로 이어지는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이례적인 일로, 어떤 면에서는 틈새시장을 잘 공략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틈새시장을 공략하다


이 작품이 흥행에 의구심이 있었던 이유를 따져 묻자면 단지 순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먼저, 너구리 요괴라는 소재는 일반적으로 사람을 골리거나 하는 등으로 재미를 주고는 하는데 이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 너구리의 변신은 너구리만의 특색으로 온전히 드러나며, 인간들 사이에도 자연스럽게 퍼져 있다. 말하자면 ‘변신’이라는 속성이 기만의 용도로 사용되지 않고 삶의 일부로 사용된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특이한 편에 속하는데, 우리가 여우라는 단어에서 사람으로 둔갑해 사람을 홀리는 모습을 떠올리듯이 너구리 요괴하면 사람을 골리는 모습이 자연스레 연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너구리 요괴라는 소재를 차용하면서도 기존의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동안의 우리를 반성하게 되기도 하는데, 자연스레 연상된다는 점이 고정관념을 뜻하므로 그러하다. 너구리 요괴는 단지 변신에만 능할 뿐, 그 능력으로 무엇을 할지는 딱히 정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작품에서 너구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덜어 놓은 채로 관람을 시작하게 된다. 어쩌면 누군가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반성의 태도를 취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반성이냐고 묻는다면 고정관념에 관한 것이다. 너구리의 변신 능력이 사람을 기만하는 쪽으로 사용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규정하는 하나의 정체성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현실 세계의 어떤 사람들을 떠올릴 수가 있다. 능력은 능력일 뿐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쓰일지는 개인의 몫이라는 점을 말이다.



02144C4451D67C101A.jpg 애니메이션 <유정천 가족>의 한 장면 © P.A.WORKS


인간, 텐구, 너구리


능력이라는 말은 특성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곤 한다. 일대일로 대응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런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변호사라는 직업에서 논리를 떠올리고, 국회의원이라는 직업에서 암투를 연상하며, 교사라는 직업에서는 정갈함을 예측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고정관념이며, 이때 우리는 그 직업의 모든 사람을 하나의 특성으로 묶어버리게 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직업이 사람의 첫인상을 결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분류가 선천성에 귀인할 때 문제는 보다 심해진다. 예를 들어, 직업은 후천적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지만 성별이나 인종과 같은 신체 특성은 바꿀 수가 없다. 이를테면 손이 크면 밥을 많이 먹는다거나 한국인은 게임을 잘한다는 등의 분류가 대표적이다. 물론 이것이 순한 예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현실 세계에는 남녀갈등과 난민 문제와 같이 무척 예민한 문제들이 많이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유정천 가족>에서는 종족의 능력이 특성을 대변하는 일이 생긴다. 작품은 텐구(일본의 요괴로하늘을 날며 바람을 일으킨다고 알려져 있다.)와 너구리와 인간이라는 세 가지 세력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중 극을 이끌어 가는 건 너구리다. 이 너구리들은 인간-텐구-너구리라는 계급도에서 최하위를 차지하며 피식자로서 살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변신의 귀재라는 특성은 계급적 우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오히려 인간과 텐구의 장난거리만 될 뿐이다. 말하자면 이 작품에서 변신 능력은 누군가를 속이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주는 능력이며, 계급 압력에 의해 변신을 강요받게 된다. 즉, 너구리는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변신하는 즐거움의 대상으로 취급된다.


그래서인지 작품에서는 너구리가 텐구를 섬기고 텐구가 너구리를 가르친다. 이를테면 주인공 시모가모 야사부로(사쿠라이 타카히로 분)는 늙은 텐구 아카다마 (우메즈 히데유키 분)을 스승으로 섬기고 있으며, 너구리회의 수장을 뽑는 자리에서도 텐구 대장의 인정을 요구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두 종족의 관계는 힘으로 지배되기보단 사제지간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다른 작품과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의 관계는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서로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현실 세계의 갈등과는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001.jpg 애니메이션 <유정천 가족>의 한 장면 © P.A.WORKS


이상적인 계급론을 펼치다


작품의 주인공인 시모가모 가(家)의 네 형제는 몇 해 전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사망의 원인은 어딘가 탐탁지 않은 면이 있는데, 모든 너구리에게 현명함으로 추앙받던 아버지가 ‘금요클럽’이라는 인간들의 모임에서 ‘너구리 전골’이 되어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인간들의 클럽에는 ‘벤텐(노토 마미코 분)’이라는 어느 텐구가 있었고, 그는 현재 시모가모 일가의 전담 텐구다. 그리고 이런 부분은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게 다가온다.


시모가모 가의 셋째 아들이자 주인공인 야사부로는 벤텐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고 있다. 그 감정은 사랑이나 혐오도 아니며, 텐구에 대한 너구리의 존경심이라는 말로 포장된다. 벤텐은 여러 사건으로 야사부로와 엮이게 되고 아버지처럼 너구리 전골이 될 수 있다며 농담을 건네지만, 야사부로는 그것 또한 너구리의 운명이라며 벤텐에 대한 동경을 거두지 않는다. 말하자면 벤텐이 자신의 아버지를 전골로 먹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여전히 존경심을 보내는 것인데, 과연 계급에 대한 존중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원한보다 우선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러니 아마 우리가 이 작품에서 풀어야 할 것은, 이 이해되지 않는 모습일 것이다. 텐구는 바람을 일으키고 하늘을 날아다니니 힘으로는 명확하게 인간보다 우위인데, 인간을 섬긴다. 너구리와 텐구의 관계도 대략 비슷하다. 그러니까 이들의 세계는 힘으로 지배되는 게 아니라 요괴와 인간이라는 명확한 계급 차이에 기반을 둔다. 말하자면 선천성을 띠는 절대 불변의 가치다.


물론 계급을 존중하는 게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계급제는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본래 왕과 신하의 관계는 서로의 업무를 보조하는 형태다. 왕은 신하에게 명령을 내리면서 좋은 정책을 펴야 하고, 신하는 왕을 보필하지만 바른말도 해야 한다. 물론 이런 계급제도가 상명하복의 원리로 쉽게 변질된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가 배운 역사와 겪는 중의 삶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작품 속의 계급 관계는 아직 변질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오히려, 그것에서 더 나아가 그저 이름에만 불과할 뿐 서로에 대한 극도의 존중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상적인 계급론이다. 다르게 말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거나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다.



2434304C524854EE25.jpg 애니메이션 <유정천 가족>의 한 장면 © P.A.WORKS


현대의 사무라이


이 작품의 주요한 테마가 변신이라는 것과 계급 존중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다음 논의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너구리의 변신이 ‘여러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면, 너구리 가족의 화합을 강조하는 작품의 주요 메시지는 ‘여러 정체성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가족의 가치’이다. 말하자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너구리는 너구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부분은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가족의 연합을 강조한다는 점과 변하지 않는 정체성을 요구한다는 점이 그렇다. 분명 현대 사회에 가족은 해체되고 있고 정체성 또한 하나에 머물지 않는다. 여기에 덧붙여서 이상적인 계급론으로 묘사되는 인간-텐구-너구리의 관계는, 서로 존중하지만 선은 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수성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작품이 시장에서 흥행한 것은 특이한 일이고, 그런 틈새시장이 존재한다는 점은 우리 시대가 무엇을 그리워하는지를 말해준다. 바로 보수성이다.


아마도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계급관계를 보면 옛 일본의 그것이 떠오를 것이다. 한국이 양반을 중심으로 유교 사상이 꽃피었다면 일본은 사무라이를 중심으로 한 예도가 발달했고, 그것이 바로 예는 지키되 일은 확실한 문화였기 때문이다. 어제의 친구는 언제든지 오늘의 적이 될 수 있었고, 사무라이는 그 적을 거침없이 베어야만 했다. 말 한마디를 소중히 하는 것은 우리나라와 비슷했지만, 말 한마디에 칼날이 날아온다는 점이 달랐다. 그 위에 축조된 것이 메이지 유신 이후의 현대 일본이고, 이것은 일본 문화 전반에 심플함을 깃들게 하는 원인이 된다.


말하자면, 이 작품에서 인물의 관계는 칼 없는 사무라이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시모가모 가와 에비스가와 가의 집안 대립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작품의 이야기는 마치 세력 싸움처럼 보인다. 그들의 상관에 해당하는 텐구는 너구리 집안싸움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조언은 아끼지 않는다. 결국 싸움 자체는 너구리들의 몫이 된다. 어쩌면 이것은 계급도라기보단 전쟁을 수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삶을 전쟁이라고 부를 만하다면 말이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이전처럼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막부 시대에 쇼군이 사무라이를 움직였다면, 현대의 사무라이는 필요 때문에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그들은 분명 자신이 원하는 것, 이루고 싶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WS002783.jpg 애니메이션 <유정천 가족>의 한 장면 © P.A.WORKS


실체가 없는 적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중 인물들이 서로에게 갖는 감정은 실체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된다. 집안 갈등이라 말하기도 무색한 게,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배척에 가깝다. 쉽게 말해, 집안 갈등이라는 점은 오래전에 희미해지고 그저 서로가 막연히 싫을 뿐이다. 저들이 우리를 싫어하니 우리도 그들을 싫어해야 한다는 선제타격 논리, 그들은 이미 목적을 잃어버린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마치 베트남전처럼 말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사무라이처럼 보이는 계급도가 어째서 목적을 잃었는지를 물을 필요가 있다. 명령을 내리는 상관이 없어서일까? 상관이 있었다면 명령 때문이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이유가 우리가 할 일이 너무 많아서라고 생각한다. 명령을 내리는 사무라이 상관이 현대에 사라졌지만, 사회가 개인에게 주는 압력은 어떤 형태로든 있다. 사회가 직접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더라도, 성공한 삶의 기준이 좋은 대학과 좋은 사업이라는 등의 방향성만큼은 있다.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느 제약이 걸려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하여 현대의 우리는 과거의 조상들과는 다르게 보이지 않는 적, 거대한 사회 속의 무언가와 힘을 겨루고 있다.


살다 보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이 달콤한 문구가 사실은 자본이나 이념에 묶여 있다는 사실은 금방 밝혀진다. 그리고 이 작품의 주요 서사는 1기에서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밝혀낸다는 것과, 2기에서 그 음모를 벌인 범인을 처단하는 것으로 나누어져 있다. 1기에서 범인이 도주하고 2기에서도 돌아오나 끝내 처단 당한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진실 규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들이 겪는 사건사고가 어딘가 모르게 마법처럼 잘 풀린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이도 저도 아닌데도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건 분명 본인의 힘으로 푼 게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내가 이 작품을 보며 든 생각은, 보이지 않는 힘에 조종당하는 것보단 자발적으로 따르는 게 낫겠다는 것이다. 시모가모 가와 에비스가와 가의 갈등처럼 이미 허울뿐인 목표를 자발적으로 타개한다는 생각은 큰 범주에서 좋은 해결책이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정한 목표는 현대의 사무라이처럼 목적 없이 제도뿐이라고 이 작품이 말하고 있고, 그래서 나는 너구리다움을 주장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주인공에게서 즐거움을 느꼈다.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특정하며 현재를 걱정하는 것보다는, 지금처럼만 살아가면 어느덧 미래의 내가 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 작품이 인기를 끈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가 잡아 먹힌 것은 바람 앞의 등불, 화산이 터지는 폼페이처럼 자연재해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주인공에게서 나는, 삶의 덧없음이나 약육강식의 도리가 아니라 현재에 충실해야 함을 느꼈다. 그게 바로 나다움, 너구리다움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유정천(有頂天)은 불교에서 구천의 가장 높은 하늘을 일컫는 말이다. 그곳에는 아무런 것도 없이 이상만이 있다. 어쩌면 그 말끔함이 마음을 비우라는 뜻은 아닐까. 그래, 살아가자. 유정천 가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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