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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ug 22. 2018

서편제 영화의 한국 국적에 관하여

<서편제> 작품론, 서편제 영화의 한국 국적에 관하여.


1. 영화에 국적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지만 그럼에도 가능성을 따진다면, 아마도 임권택은 가장 한국적인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임권택이 한국영화사에 등장한 시기는 무척 절묘한데, 이르지도 않고 무르익지도 않은 어중간한 시기이다. 말하자면 해외의 영향을 최대한 피하면서도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철저히 임권택이 되어갔고 후에 이르러서는 임권택이 한국을 대표하는 것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서술한다.


물론 당시 한국 영화인들이 해외 영화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영화 인프라가 제대로 갖추어지는 때는 90년대 초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그들의 영화는 영화사의 흐름을 밟아가는 듯 보이는 게 사실이다. 이는 어쩌면 인류의 진화처럼 필연적인 진보 과정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광복 이후 유현목과 신상옥의 영화에서 당시 영화사의 흐름이 느껴지는 것처럼 임권택의 영화도 처음에는 해외 영화의 야류정도로 보이는 면이 있었는데, 이는 80년대 후반에 들어 약간의 변화를 겪게 된다.


이 약간의 변화에 대해선 다른 지면을 빌려 이야기하는 게 좋을 듯하다. 그 이야기는 너무 길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약간의 변화 덕분에 임권택의 영화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우리가 이것을 논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임권택의 93년 작 <서편제>가 한국영화에 미친 영향은, 한국영화 전반의 수준 향상과 관객들에게 만족감을 가져다줄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2. 아마도 우연이겠지만 <서편제>는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신호탄 같은 작품이다. 본편의 비평적, 상업적 흥행을 제하고도 이후의 영화들이 무척 화려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영화들을 만든 감독들이 홍상수, 박찬욱, 봉준호와 같은 신예감독이었음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임권택의 영화는 본의 아니게 르네상스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고, 덕분에 후발주자들에게 자연스러운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아마도 그 영향이란 것은 단지 한국영화라는 자부심뿐만이 아닐 것이다. <쉬리>처럼 할리우드를 국내에 들여온 영화들에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믿음뿐만 아니라 어떻게 ‘한국화’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말하자면 그전까지의 영화는 단지 따라잡기식의 모방에만 불과했다. 그것도, 무언가를 배우려는 목적이 아니라 이렇게 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잘못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 한국 영화사의 물줄기에 자신이 작가임을 고집하는 두 사람이 등장하게 된다. 그게 바로 김기영과 임권택이다.


다른 훌륭한 한국의 고전 영화감독들을 지나치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의 자의식이 워낙 세기 때문이다. 김기영의 영화가 작법이나 외부환경을 무시하고 철저히 개인화에 몰두한 것이라면, 임권택의 영화는 무엇이 한국적인가에 몰두한다. 김기영은 어떤 영화든지 기괴함이 풍기도록 만들었고, 임권택은 어떤 영화든지 가슴 속이 몸서리쳐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영화의 기술적인 면모가 아니라 내용 전반에 드러나는 것이기에 어느 누가 보아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다른 감독처럼 후대 사람들에 의해 ‘작가’로 인정받은 게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작가임을 인지하고 영화를 만들었던 한국 최초의 1세대 작가 감독이다.



영화 <서편제>의 작품 포스터 © 태흥영화



3. 김기영의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김기영의 영화는 한국적인 소재에서 출발해 기괴함으로 가득 차오르다가 뜬 구름처럼 맥이 빠지는 결말로 끝이 난다. 말하자면 그의 영화는 어느정도 예상되는 소재로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고등어를 집었더니 고등어에서 김치 맛이 나는 듯한 그의 영화에는 아무쪼록 실실 웃으면서도 기꺼이 보게 되는 매력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나사빠짐은 비슷한 느낌의 스탠리 큐브릭과 그가 명확하게 구분지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반대로 임권택의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어떻게 이런 울림을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말하자면 임권택의 영화는 이야기가 아니라 마음을 보여준다. 그의 영화는 항상 익숙한 소재를 가져오지만 그 전개 방식에 있어 판소리와 같은 흐름이 있다. 어느 면에서는 무척 길어지고 어느 곳에서는 리듬을 타는 그의 편집방식을 보면, 중중모리 장단과 같은 멜로디가 들려올 때가 있다. 말하자면 그의 영화 전편이 하나의 음악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그의 영화에 매번 변화하는 새로움은 없지만, 영화 한 편이 감독의 세계 전체를 이룬다는 점에서 퍼즐을 맞춰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임권택이 그걸 알고 찍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는 분명 후대 사람인 우리가 볼 때 그를 영화 작가라고 부를 만한 포인트 중의 하나이다.


말하자면 임권택의 영화는 촬영기술의 동일성보단 감정이 지속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분명 각각의 영화마다 다른 세계가 펼쳐져야 함에도 그의 영화는 늘 같은 감정을 안고 간다. 그 느낌이 바로 한(恨)이라 불리는 한국인의 무언가인데, 영화 전반에 이어지는 감정이 마치 풀리지 않은 천추처럼 느껴져 몹시 애달파지는 면이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게 <서편제>이다. 그 이유는 그 작품이 대상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판소리라는 소재를 차용했고 그 울림이 우리에게 가슴 깊이 온다는 점이 그럴 뿐이다.



영화 <서편제>의 한 장면 © 태흥영화



4. 임권택의 영화는 단지 한국적인 것을 진정 표현해냈다는 것에 불과하지 않고, 그 느낌을 외국인에게도 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뛰어나다. 그 울림은 국적을 불문하고 가슴 깊숙이 온다. 하지만 한국 사람과 외국인이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서 느낌을 받는 경로는 다르다. 한국인이 임권택의 영화에서 마음속에 와 닿는 무언가를 곧바로 느낀다면, 외국인은 아무래도 감독의 기술적인 면을 먼저 보게 된다. 일차적으로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고, 부차적으로는 영화가 철저히 한국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외국인이 한국적인 울림을 받게 되는 것은 기술적인 보조를 통해서이다. 등장인물보다 머리 하나쯤 높은 위치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듯한 카메라의 구도가 반복되고, 이는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손을 내밀면 닿을 듯 말 듯한 느낌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 아슬아슬함이야말로 임권택이 극의 이입과 관조를 균형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분명 미조구치의 그것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그냥 영화를 찍었을 뿐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한 바가 있으니 서로 비교는 적절하지 않은 듯하다. 어찌 됐든 서로 연관성이 없는 두 감독에게서 어떤 공통분모가 보인다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그리고 미조구치와는 달리 임권택이 한국인이라는 점 또한 그렇다. 아마 임권택이 한국이 아닌 곳에서 태어났다면 (생각하기도 싫지만) 그의 영화는 이토록 한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조구치의 미묘한 눈길이 인물의 뒤를 밟는 듯한 염탐의 쇼트라면 임권택의 그것은 동반자로 기능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비유하자면 미조구치의 카메라는 짝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가졌고 임권택의 카메라는 자식을 지켜보는 죽은 부모의 마음처럼 느껴진다.


나는 인터넷 세대이기에 임권택의 카메라 워크에서 <야인시대>의 어느 장면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쓰러진 김두한의 머릿속에 아버지가 일어나라며 일갈하는 장면이다. 비록 <야인시대>의 그 장면은 우스꽝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자식이 죽은 부모를 빌려 상황을 타개할 힘을 얻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분명 그 장면에서 실제 부모는 죽었기에 응원 같은 것은 할 수가 없으니, 김두한이 본인의 상상으로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김두한 스스로가 만들어 내어 외부에서 개입해온 이 의지는 마치 영화가 주는 느낌과도 비슷하다. 우리는 김두한 상상 속의 부모처럼 영화 밖에 위치하며 김두한 (주인공)을 응원하게 된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 응원 관계는 영화 속 인물들이 영화 밖의 우리를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무척 재미있다. 그러니까, <서편제>에서 주인공인 동호에게 삶의 의지를 준 것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동호 자신이 만들어 냈다. 결국 동호가 말한 것처럼 살다 보니 가족이 그리워진 것이 아니라, 동호는 살기 위해 그리움을 택해야 했다는 뜻이다.


5. 동호는 살기 위해 그리움을 택해야 했다. 말하자면 동호가 떠난 순간부터 이 영화는 시작되었다. 동호가 소리꾼의 길을 버리고 집을 박차고 나온 순간부터 마음속 한 구석에 그리움이 싹텄을 것이고, 그것은 동호가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끝내 동호는 자신이 만들어 낸 그리움이 자연스레 생겨난 것으로 착각하고서 떠나온 가족을 찾아 떠나게 된다. 그러니까 <서편제>의 시작점은 영화가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있거나, 혹은 영화 중반에 동호가 집을 떠나는 그 순간부터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시간은 비단 일직선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만약 영화 중반이 이 영화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해 보면, 시작점에서 출발한 영화가 중간지점에 도달해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므로 결말에는 영영 도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작점이 영화 시작 이전에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면 이 영화에서 중반 이후의 전개는 모두 동호의 상상이거나 관객의 상상일 것이다. 즉, 동호는 영영 끝나지 않을 판소리에 맞장구를 치면서 누이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결말은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영화가 만들어 낸 가상의 세계일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의 결말에서 송화와 손을 잡고 걷는 어느 꼬마 숙녀를 보게 되는데, 작품상에는 그에 대한 일절의 언급도 없다. 말하자면 이 소녀는 영화상에서 어떤 의미나 위치도 갖지 않은 의문의 인물이다. 그리고 정성일 평론가가 임권택 본인에게 그것을 물었을 때 감독은 별다른 의미를 두지 말라고 말했다. 오히려 그 모습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두고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감독의 이러한 발언이 단지 결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시간은 중간 지점에서 줄곧 시작점으로 회귀하는 형태를 띠고 있으니 결말은 공백으로 남겨지는 것인데, 이는 곧 동호의 선택이 결코 물러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즉 동호가 떠난 이후부터 가족은 절대로 봉합될 수 없고, 이는 곧 판소리가 중간에 끊기면 맥이 끊겨버리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아마 임권택은 영화 중반에 목이 쉬어 곤경에 처한 유봉의 에피소드를 그래서 넣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하나의 거대한 장단이기에, 판소리이기에, 이미 끊겨버린 리듬은 결코 불릴 수가 없고 단지 관객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혹시 그래서 유봉이 그토록 소리의 전수에 집착했던 것은 아닐까? 송화의 눈을 멀게 하면서까지 소리를 이어야 했던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장면이 얼마 지나지 않아 씨암닭을 서리한 유봉이 맞아 죽는 것은 그 끊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결국 이 영화는 시작점 이전에 동호가 떠났기에 영화 전체가 허구다. 사실 허구라는 말보다는 의문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듯싶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작중 인물들의 행동은 아마도 그 의문 속에 갇혀 있을 것이다. 분명 이 애절하고 한 맺힌 <서편제>는 고생 끝에 송화를 마주한 동호가 어찌하여 떠나가느냐는 술집 주인의 말처럼, 마주해도 끝내 서로 모른 체 지나가야만 마음속에 맺힌 응어리가 줄곧 유지될 수 있다는 판소리의 논리를 따라간다. 송화는 판소리를 하기 위해 동호를 모른 체해야만 한다. 반면 동호는 자신 삶의 의지가 끊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 운명의 마주침을 거절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지나쳐가야만 했고, 그런 행동은 운명이라든가 숙명이라든가 하는 거추장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오직 한이라는 감정 하나만으로도 줄곧 전진하게 된다.


영화 <서편제>의 한 장면 © 태흥영화



  6. 우리는 인물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 고생 끝에 만난 송화와 동호는 쉽게 헤어지고, 유봉은 좋은 소리를 만든다며 송화의 눈을 멀게 한다. 그리고 송화는 자신의 눈을 멀게 한 유봉을 그다지 원망하지도 않는다. 이런 전개를 보면, 분명 <서편제>의 인물 관계는 무척 이상하다. 그리고 그건 한국적이면서도 한국적이지 않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우리는 한국인인 동시에 외국인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이 영화를 보는 것에 국적은 딱히 의미가 없다. 그래서 이 영화가 한국을 대변한다는 말은 어쩌면 모순이다. 이때 우리가 이 모순을 이해하려면 우선 막장 드라마라는 단어를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막장 드라마의 계보는 훨씬 오래되었는데, 그 이유는 딱히 없다. 언제부턴가 한국에서는 소위 막장이라 불리는 플롯이 유행했고, 그것에 막장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뿐이다. 이를테면 당장 김기영의 <하녀> 연작만 보아도 당최 알 수 없는 이야기로 흘러가는데, 놀라운 것은 그게 실화에 기반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어쩌면, 한국의 막장 드라마는 재미 위주가 아니라 현실 반영의 중추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TV에서 반영한 <아내의 유혹>과 같은 작품은 그 끔찍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기를 끌었는데, 그건 이야기 자체보다 감정선을 유지하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시청자는 점 하나 찍고 들이댄다는 얄팍함보다 복수에 성공함으로써 얻는 쾌감을 더 중요시했다. 그리고 김기영의 영화 또한 실화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재해석을 했고, 그 재해석은 우리가 신문에서 목격한 이상한 살인사건의 당사자들이 어떤 생각이었는지를 대변해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말하자면 요즘 시대에 싸이코패스라고 불리는 이 기행들이 김기영의 세계로 통합되었다. 그래서 김기영은 우리 시대의 선구자라고 부를 만하다. 김기영은 당대에도 흥행 감독이었고, 그게 의미하는 바는 막장드라마와 사이코패스라는 용어가 유행하기 이전부터 그 세계를 관객과 공유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견하면 <서편제>의 인물관계는 어쩌면, 이전 시대와의 작별이면서도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었던 것 같다. <서편제>의 메인 플롯은 유봉이라는 소리꾼이 송화라는 고아를 주워 소리꾼으로 키워내고, 그사이에 낀 친아들 동호가 집을 나간 후 수십 년 뒤로부터 시작한다. 집을 나간 아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서 홀로 남은 누나를 쫓아오는 게 첫 번째 시퀀스이다. 하지만 그곳에 누나는 없고 누나의 소리를 이어받은 누군가, 말하자면 흔적만이 남아있다. 그럼에도 동호는 좌절하지 않고 누나의 흔적을 천천히 짚어낸다. 그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영 능숙하지 않은 솜씨로 선대의 체취를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려 한다. 동호는 북을 치고 붉은 소복의 여인은 노래를 한다. 그리고 이때 영화는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로 돌아간다.


7. 동호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이 영화를 동호의 시점으로 보게 될 것이다. 분명 영화는 동호의 시점으로 시작했고, 동호의 소리 가락으로 감정을 이끌어냈다. 카메라는 천천히 회전하면서도 동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데, 이것은 말 그대로 회오리처럼 동호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플래시백은 현재 동호의 얼굴에서 어린 동호의 얼굴로 전환된다. 말하자면 이 회오리 느낌의 카메라 움직임의 정중앙에는 어린 시절의 동호가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마도, 회오리의 시작과 끝이 용수철처럼 서서히 풀려나듯이,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그들의 시간을 용수철 내로 한정하는 것 같다.


시계태엽이 똑딱이듯이 영화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2시간 이내로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이 용수철과 같은 카메라의 움직임에서 왠지 모를 조급함을 느낄지 모른다. 우리는 동호가 왜 이곳에 왔고 과연 누이를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조급함이 있다. 그런데 그 조급함은 사실 조급하면서도 조급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쇼트가 음악과 함께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들려오는 그 판소리 가락은 명백하게 끝이 있으면서도 끝이 있지 않을 것 중에 하나다. 판소리란 것은 본디 수 시간 내외를 전제하는 것이므로 그들의 세계는 아마도 ‘영화의 두 시간 안에 갇힌 수 시간’일 테고, 그 상황에서 두 시간으로 수 시간을 보여주어야 할 영화의 전반적인 템포는 빠르리라 예측하게 된다. 즉, 이 시계태엽은 정속도가 아니라 배속이다.


말하자면 시간을 배속으로 거스른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진행은 시작부터 예견되었다. 히치콕이 <사이코>의 욕조에서 주인공의 중도하차를 예견했듯이 <서편제>의 극 진행도 변칙적일 것임을 간접 예고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임권택과 히치콕의 차이점을 알기에 그 시점을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없다. 히치콕은 서스펜스가 극대화되는 지점을 택하기에 죽음이 갑작스러웠는데, 임권택은 주인공으로 간택된 동호를 초반부에 퇴장시킨다. 그러니까 사실 동호는 극의 화자일뿐 주인공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호의 관점으로 진행된다고 생각했던 이 영화에서 감정을 배제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다. 왜냐하면, 동호가 송화를 바라보는 건 관찰자의 시점이기 때문이다. 동호는 송화를 찾아 떠났고 현재 그녀(와 자신)의 마음을 모르기에 이 영화의 미스터리가 시작한다.


8. 다시 원점으로 회귀해서, 이 영화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어째서 이것이 한국적으로 느껴지는 지다. 단지 판소리라는 소재만으로는 이 영화가 한국적이라는 결론이 성립하지 않는다. 덧붙여 말하자면, 임권택이 가장 한국적인 감독이라고 해도 이 영화까지 한국적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우리는 이 영화에서 느낀 것에 합당한 이유를 찾아야만 한다. 그래야 이 글은 끝날 수 있고 이 영화도 끝날 수가 있다.


먼저 이 영화의 시간이 갇혀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분명 이 영화의 시간이란 한 편의 용수철처럼 시작과 중간은 있되 끝은 없는 구조로 짜여 있다. 이 뱅글뱅글 도는 소용돌이 무늬에는 블랙홀의 지평선처럼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우리는 영화의 결말에서 송화와 어느 꼬마 숙녀라는, 동반자의 상징을 찾아냈고 동반 관계가 깨어진 동호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전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동호의 여흥은 판소리를 시작한 시점부터 판소리가 이제 막 끝난 이후까지이다. 판소리가 끝난 후 술집 주인이 송화를 부르는 장면에서 주인은 ‘송화’라는 이름을 명확하게 지칭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 여인은 송화가 아닐 수도 있다. 그 여인은 눈도 동호를 자신의 남동생이라고 칭하지만 그럼에도 그 추측이 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왜냐하면, 이름이 언칭되지 않은 관계는 그 자체로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의 감정은 어딘가 모르게 애틋한 것 같다. 그건 아마도 동호의 상상으로 구성된 이 영화의 출발점이 동호와 송화의 이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작부터 그리움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동호가 집을 떠난 시점부터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가는 반복 속에 그 감정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이 감정의 스노우볼은 영영 해결되지 못한 채 영영 커질 수밖에 없는 종양 같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종양이 양성이든 악성이든 간에 몸에 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영영 품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한에 빗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운명이나 숙명이 아니라, 그저 이끌리는 대로 자석처럼 붙어버리는 이 막장의 계보는 철저히 관찰될 수밖에 없고 관찰되어야만 한다. 어차피 한이라는 게 절대로 타인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면서도, 한국 전체에 퍼져있으니 일종의 공통분모이기도 하므로 그렇다. 한은 하나라는 동의이음어처럼 한민족을 하나로 엮기도 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필연적으로 모든 타인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야말로 같은 민족 아래에 다른 세계를 지닌, 외국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그와 같은 상황을 겪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은 개인마다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서편제>는 한국적이라기보다는 한의 영화다. 한민족이 한을 가졌다고 해서 이 영화가 구태여 한민족의 것만이 될 수는 없다. 그런 맥락으로 이 영화는 한국적이 아니라 한을 재발굴해낸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가닥 좋은 떠돌이 소리꾼, 눈멀고 노래 잘하는 소리꾼이라는 언칭처럼 ‘이름’이 없는 게 아니라, 한이라는 것으로 명확하게 지칭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 영화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라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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