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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28. 2018

<어느 가족>에 관한 개인적인 단상

이 글은 작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느 가족>에 관한 개인적인 단상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티캐스트


1.  


고레에다의 영화에는 어떤 형태로든 항상 가족이 있다. <하나>는 시대극인 듯했지만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던 무사 소자에몬이 과부와 사랑에 빠져 가족을 이루었고, <세 번째 살인>은 추리극인 듯했지만 피해자의 딸을 보며 자신의 딸을 생각하는 시게모리 변호사가 있다. 말하자면, 가족과 동떨어져 보이는 소재에서 어떤 방법으로 가족을 말할지 생각해보는 재미가 있다. 이번에는 가족 영화가 아닌가 싶다가도 결국은 고레에다라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여기서 어쩌면…이라는 가정을 해본다. ‘가족 영화가 아닌가 싶다가도 가족을 말한다’라는 이 문장에서 ‘가족 영화’란 무엇일까? 가족 영화가 무엇이기에 고레에다를 가족 영화로 판단하고 있을까? 아마도 그냥 가족 영화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보기를 원하는 이 가족 영화는 전형적인 일본의 홈드라마다. 집안을 배경으로 끈끈하게 뭉친 가족을 보여주는 이 영화들은 영화인에게는 오즈와 나루세를 떠올리게 하고 일반인에게는 ‘일본’ 영화라고 불린다. 그리고 대체로, 이 홈드라마들은 어느 가정의 집안에서 시작되어 잠깐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금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니까 결국은 집안에서 시작해 집안으로 끝난다. 말하자면,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의 홈드라마는 집이 아니면 안되는 듯 보인다. 괜히 ‘홈’ 드라마가 아니다.  


나는 고레에다가 이 고정관념을 깨려 한다고 생각했다.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만이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고,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범주가 넓어진 만큼 가족의 이야기는 집 밖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집을 소재 삼지 않은 <하나>와 <세 번째 살인>에서 가족의 형태가 나타난 건 가족을 그려내는 게 아니라 홈드라마라는 장르를 개혁해보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밖에서 안으로 이어지는 흐름도 결국엔 ‘집’으로 통하기에 홈드라마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아마도)에 어느 정도 동감이 갔다.  


하지만 내가 아는 ‘또 다른’ 고레에다는 <걸어도 걸어도>에서 일본의 옛 홈드라마를 자신의 방식으로 각색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다른 영화와 비교해보았을 때 <걸어도 걸어도>는 유난히 예스러웠다. 고레에다에게서 오즈를 떠올리는 건 지극히 당연하지만 그 영화는 정말로 오즈의 영화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전의 영화가 <하나>였기에 이렇게 뚜렷한 차이는 그가 세계관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그는 홈드라마의 계승과 개혁을 함께 시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고레에다의 노력이 언제쯤 결실을 볼지 생각해 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레에다의 신작에 관한 짧은 시놉시스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시놉시스를 읽자마자 무릎을 탁치게 되었다. 그건 바로 도둑질로 살아가는 어느 가족이 낯선 아이를 주워 오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어느 가족>이었다.  


2.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티캐스트


 ‘도둑 가족’이라는 제목이 ‘가족이 되어간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 같았기에 이야기가 어느 정도 진행된 후 ‘사건’의 형태로 버려진 아이를 보여줄 것으로 짐작했었다. 작품의 시놉시스에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주워 온 아이를 가족의 품에 안는다는 점은 마치, 키운 정이 낳은 정에 비견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낯선 아이가 발견되어 가족의 품으로 들어온다. 예측과는 달리 진행되는 이 이야기에 몹시 당황했다. 혹시, 가난하지만 선하게 사는 이들이 사실은 남남이라는 게 작품의 반전은 아닐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들이 남남임이 바로 밝혀졌다. 결국 의문은 여전히 의문으로만 남았다.  


그 의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동안의 고레에다 영화를 떠올려 보면 기조가 나오는 시기가 일렀다. 갈림길에 서서 고민하다 끝내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던 전작들은 작품 중간쯤에서 사건이 일어났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도 자식이 친자가 아니라는 건 중간쯤에서 밝혀진다. <하나>에서도 소자에몬이 본격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건 중반부 이후부터다. <환상의 빛>은 사건이 일어나는 시기가 이르긴 했지만 <어느 가족>만큼 빠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물음을 던지게 되었다. 이게 과연 홈드라마의 계승과 개혁 중 무엇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런 마음으로 영화를 줄곧 보았다. 그리고 홈드라마가 항상 그렇듯 별다른 사건 없이 평이하게 흘러갔다. 밥 먹고 도둑질하고 후반부 이전까지는 비슷한 풍경, 그런데 아무래도 감독 본인이 전작에서 끌어온 듯한 장면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고레에다 사단이 비슷한 배역으로 비슷한 영화에 출연했었기에 더욱 그랬다.  


이를테면 할머니 하츠에 역의 키키 키린은 <걸어도 걸어도>에서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는 역할인데, 이 영화에서는 죽은 남편을 그리워한다. 자식 위주로 살아오던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는 배우자를 중시하는 요즘 이야기로 바뀌었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가족상에서 벗어났다고나 할까. 물론, 단지 이것만으로 하츠에가 요즘 사람처럼 보이는 건 아니다. <걸어도 걸어도>에서 이혼한 자식의 모습이 이 영화에서는 하츠에 자신에게 투영되어 전 남편과의 관계를 그리고 있었다.  


하츠에가 남편을 그리워한다는 건 집안에 놓인 사당(일본 가정집에서 고인을 기리기 위해 만드는 아주 작은 제단)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들 가족이 남남이라는 걸 떠올려 보면 이 제단의 존재는 조금 낯설어진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 이혼한 것인데 미워하지 않고 명복을 빌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혼한 것을 보면 용서하지 않은 듯한데, 그럼에도 남편을 그리워한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혼자가 되기 두려워서다.  


하츠에가 자신의 집에 남남인 사람을 모아 새 가족을 만든 이유는 죽음 이후에 장례를 치러 줄 사람이 필요해서다. 이는 대사를 통해 언급되기도 하고 보험을 들었다는 말로도 확인된다. 그런 걸 보면 아무래도 고레에다는 하츠에라는 캐릭터를 노인 고독사 문제에서 찾아낸 듯 보인다. 홀로 남은 집에서 어느 날 죽으면 발견될 때까지 방치되어야 한다는 이 고독사 문제는 일본이나 한국과 같은 고령화 사회에서 큰 사회문제다. 가족 관계가 사라지며 나타나는 이 문제는 모든 인간은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다고 위로해 보아도 무척 비극적인 일이다. 그래서 하츠에는 그 외로움을 피하려 ‘도둑 가족’을 만들어 낸다. 그러면서도 가짜 가족 사이에서 진짜 가족의 향수를 그리워한다. 그게 설사 바람난 전남편이라 하여도 유일한 가족이기에 어쩔 수가 없다.  


말하자면 하츠에는 요즘 세대에 과거의 향수를 지닌 사람으로, 현재 가족의 붕괴를 편하게 여기지만 동시에 과거의 안정된 가부장제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면에서 <어느 가족>의 하츠에는 요즘 사람처럼 보였다. 혼자가 편하지만 너무 외로운 나머지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만들어내는 요즘 젊은이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꿈의 제인>에서도 다뤄진 ‘가출팸(가출한 청소년들이 모여 사는 형태)’이 떠오르기도 했다. 가출팸은 남남인 그들이 본래 가족을 떠나 ‘유사 가족’ 형태를 만든다는 점에서 <어느 가족>과 무척 유사하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점까지도 말이다.  


분명 <어느 가족>과 <꿈의 제인>은 유사 가족이라는 형태 말고는 닮은 구석이 없다. 하지만 두 영화가 유사 가족 형태를 빌려 사회적 문제에 관해 무언가 말하려 한다는 점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일단 그게 왜 사회적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도둑 가족’은 후반부에서 그냥 남남이 아니라 ‘범죄자’ 혹은 사회 하류층이라는 점이 밝혀진다. 쇼타(죠 카이리 분)의 자수로 시작된 경찰수사에서 도둑 가족은 각자의 사연을 꺼내 놓는데, 지금까지 무척 낭만적으로 보이던 사건들이 경찰의 취조 앞에서는 한낱 범죄행위에 지나지 않음이 확인된다. 그 확인사살로 인해 마냥 화목해 보였던 가족의 형태에 균열이 가게 된다. 말하자면, ‘도둑질’이라는 범죄 행위를 ‘생존 수단’으로 포장하던 이 영화는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어 문제를 고발한다. 그리고 이런 진행 방식은 <꿈의 제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고발 행위가 비겁하다거나 불편하지는 않다. 죄를 지었으면 값을 치러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 고발이 막연히 처벌을 위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반대다. 그들의 그릇된 행동에는 사회적 병폐가 배경으로 있다.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지만, 나쁜 선택지에 높은 확률을 걸어 그들이 그곳에 배당하게끔 유도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아마 고레에다는 그들 가족에게 각각 부여한 사연들을 일본 사회 전반에서 따왔을 것이고, 사회가 가진 문제를 거울처럼 비추는 게 <어느 가족>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 보였다. 이 사회를 가족에 빗대어 가족이 끌어안지 못하는 문제로 인해 개인에게 벌어지는 사건을 묘사하는 방법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다.  


3.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티캐스트


우리는 한 남자와 한 아이가 마트에서 도둑질하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도둑의 모습을 확인한다. 이어서, 그들이 돌아가는 곳이 평범한 가정집이라는 점에서 가족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버려진 아이를 주워오는 장면이 있다. 말하자면 도둑, 버려짐, 가족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가 차례로 이어진다. 하지만 평범해 보이는 그들은 사실 남남인데, 이 사실은 그다음 시퀀스에서 밝혀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 초반 오프닝 시퀀스에서는 가난한 가족이 좋지 않은 형편에도 낯선 아이에게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세 가지 키워드를 염두에 두고 극을 진행하려는 듯한 감독의 태도가 무척 직접적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는 그들이 처한 상황을 사실대로 보여준다. 도둑임을 부정하지도 않고 버려졌다는 걸 부정하지도 않는다. 대화를 통해 약간의 의구심을 표하기는 하지만 결국엔 인정한다. 쇼타는 오사무(릴리 프랭키 분)를 아버지라 부르지는 않지만 아버지임을 인정한다. 노부요(안도 사쿠라 분)와 오사무도 그들이 부부가 아니냐는 쇼타의 물음에 마음으로 이어진 사이라고 둘러대지만 이후 장면에서 성관계를 함으로써 부부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극의 후반에 수사관의 취조를 통해 뒤집어진다. 말하자면 영화가 그들을 재조명하는 방식은 말 그대로 피사체를 그대로 둔 체 카메라만을 옮기는 것이다. 나는 이 관점의 차이를 통해 고레에다가 사회문제를 말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장면이 하나 있었는데, 하츠에가 죽음을 맞는 장면이다. 이전부터 하츠에의 죽음이 대략 암시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큰 충격을 받았다. 고레에다의 직접화법 때문이었다. 영화는 하츠에의 죽음 직전에 하츠에가 전 남편의 자식들로부터 용돈(무려 3만엔)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츠에는 전 남편 자식들의 집으로 걸어가 문앞에서 돈을 받는다. 이것은 도둑 가족도 몰랐고 우리도 몰랐던 하츠에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자식들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저지른 죄에 대한 속죄겠지만 남들이 볼 때 이 장면은 조금 이상해 보인다. 법적으로 이미 해결된 문제이고 말하자면 남남인데 굳이 도의적 책임에 얽매여 사죄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물론 이유가 합당하니 따지고 보면 이상할 것도 없지만, 이 영화가 가족 관계의 해체에 기반을 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돈을 주면서까지 사죄하는 건 ‘보기 드물게 성실한’ 편에 속한다. 그리고 그 성실함은 요즘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기에 이상하게 느껴진다.  


살짝 생각의 폭을 넓히면 일본인의 사죄문화인 메이와쿠의 범주 안에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감독이 고레에다임을 상기하면 그건 잠시 접어둘 문제인 것 같다. 고레에다가 홈드라마의 계승과 개혁을 동시에 이루려 한다고 생각하던 내가 그 장면에서 느낀 건, 바로 이 순간이 영화의 핵심이라는 것이었다. 하츠에가 전 남편의 집을 향해가는 모습은 <걸어도 걸어도>의 쇼트와 비슷하게 촬영되었고, 그래서 <걸어도 걸어도>처럼 그가 가족의 붕괴를 목격하러 가는 건 아닐지 짐작했었다. 말하자면, 고레에다는 그 장면에서 <걸어도 걸어도>에서 했던 말을 반복하려는 게 아닐지 궁금했다.  


<걸어도 걸어도>에서 키키 키린은 죽은 자식이 목숨을 바쳐 살린 남자를 가족으로 품는다. 또한 키키 키린의 남편은 재혼한 아들이 데려온 ‘양자’를 친자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외부에서 들어온 누군가를 가족으로 품는 과정을 그려낸 게 <걸어도 걸어도>였고, 그걸 결정하는 게 집안의 어른인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그리고 그건, 그들이 전통적인 가치를 대변하기에 그랬었다. 말하자면 <걸어도 걸어도>는 가족의 개념이 이제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고레에다의 출사표와 같았다. 그런데 <어느 가족>에서 <걸어도 걸어도>의 장면을 재현한 고레에다는 이전과는 달리 전통적인 가치를 우선순위로 두지 않았다. 하츠에는 그 자식들 앞에서 나름 당당한 행세지만 사실은 그들이 주는 돈(전 남편의 연금을 포함해서)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결국 하츠에는 그들이 없으면 살지 못하니, 하츠에가 전통적인 가치를 대변한다면 전통적인 가치는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요즘 가치가 인정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 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영화는 보란 듯이 그다음 장면에서 하츠에를 퇴장시켰다. 사인도 사망시각도 불명이다. 게다가 도둑 가족은 장례식 치를 돈이 없다면서 장례식을 거부한다. 말하자면, 그동안 그들이 주고받은 유대는 노부요의 말처럼 돈으로 이어진 것에 불과했다. 도둑 가족은 하츠에를 집주인쯤으로 여기고 있었으며, 그들은 오히려 사망신고를 하지 않아야 연금이 계속 나온다며 집안에 구멍을 파서 시체를 묻어버린다. 이 전개와 더불어서, 하츠에가 평소 도둑 가족에게 ‘자식들로부터의 용돈’을 숨겼던 걸 보면 하츠에 또한 그들에게 진정으로 의존한 건 아닌 듯하다. 가족의 형태는 하되 끝내 남남일 뿐이라고 재확인해줄 뿐이다.  


여기서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들 가족이 정말로 이기적인 것이었을까? 사실 내가, 가족이라면 무조건 헌신해야 한다는 구시대적 사고에 둘러싸인 게 아닐까? 피 하나 섞이지 않은 그들이 가족인지 가족이 아닌지는 뒤로 하고서도 가족이 과연 서로를 위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 남는다. 가부장제 혹은 위계질서로 언급되는 이 의무가 요즘에는 ‘핵가족화’라는 말로 분열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산 사람이라도 잘 살 수 있게 최선의 선택을 한 그들을 비난할 이유는 ‘부족’한 게 아닐까?  


4.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티캐스트


오사무와 노부요는 사람을 죽이고 도피했다. 오사무와 쇼타는 늘 도둑질을 해왔다. 시바타 아키는 유사 성행위로 돈을 번다. 하츠에는 바람난 전남편의 새 자식들에게 돈을 받는다. 여기에 이들 가족에 편입된 유리(사사키 미유 분)는 무관심한 부모로부터 버려졌다. (실종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개인의 정체성을 지워야만 살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람을 죽였기에 가명을 쓰고, 도둑질할 땐 흔적을 지우야 하고, 유사 성행위 업소는 애칭을 쓰며, 하츠에는 전남편의 자식들에게 잊고 싶은 존재다. 여기에 유리가 도둑 가족의 품에 안길 수 있던 건 가정에서의 존재감이 희박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맥락까지 도달하니 작품이 시작하자마자 유리가 도둑 가족이 된 건 무척 당연해 보였다. 유리가 가족으로부터 버려졌음이 추측되고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영화는 도둑 가족의 ‘진짜 가족’ 이야기를 차례로 털어놓는다. 오사무와 노부요는 가족을 버리고 도피했고, 쇼타와 유리는 가족으로부터 버려졌다. 시바타 아키는 가출한 상태로 도둑 가족으로 왔고, 하츠에는 고독사의 위기에 처했다. 그러니까 어떤 관점에서는 그들이 ‘도둑 가족’의 만들어진 유대를 강조하는 게 마치 ‘진짜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을 부정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 내내 그들은 자신의 진짜 가족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는데, 그들은 서로의 과거가 딱히 궁금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가족에 관해 의문을 품는 건 관객 말고는 없었다. 잘 생각해보면 사적 관심이 아니라 범죄 말소라는 공적인 물음을 던지는 수사관들도 그들에게 관심을 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수사관을 통해 언론으로 전파되는 도둑 가족의 모습이 이제까지와는 정반대였다는 것이었다. 수사관은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일을 저질렀는지는 개의치 않고 사실 여부만을 확인하는데, 반대로 대중들은 TV가 보여주는 것만을 믿으며 사실 여부는 확인하지 않는다. 나는 이 모습에서 홈드라마의 계승과 개혁을 떠올렸고, 그렇기에 이 장면이 영화의 씁쓸한 마무리일 것으로 생각했다.  


수사관이든 언론이든 간에 공적 무대 위에 선 가족의 모습은 개인을 지워낸다. 카메라는 도둑 가족의 검거를 알리는 티브이를 뒤로 보여주는데, 거기서 언론은 생판 연고가 없는 그들이 무슨 이유로 한집에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보도한다. 도둑 가족이라는 영화 제목처럼 그들이 했던 행동 하나하나가 전체를 대변하는 문구가 된다. 몸을 팔거나 물건을 훔치고 사람을 죽이고 암매장하는 이 사건 모음집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묶인다. 우리가 보았던 생존을 위한 그들의 몸부림은 시체 암매장과 아동 유괴라는 팩트만이 전달된다. 말하자면 감성 없이 이성만이 있고, 사연 없이 사실만이 있다. 우리는 카메라를 빌려 그들의 유대를 확인했지만 대중들은 그걸 보지 못했기에 이성적으로 판단한다. 대중 앞에서 가족은 작아졌고, 이성 앞에서 감성은 매도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영화를 보는 우리도 수사관을 통해 구체적인 사연을 알았다는 점이다. 카메라를 통해 목격한 게 그들의 개인적인 사연이었다면 티브이를 통해 목격한 건 겉으로 드러난 사실이다. 결국 그들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우리도 그들을 몰랐다는 걸 깨닫는다. 말하자면 이 영화를 보는 우리조차 대중의 일부에 불과했다. 도둑 가족이라는 제목으로 도둑, 버려짐, 가족이라는 키워드를 설정한 것에 역으로 묶여버린 셈이다. 나는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그 키워드를 중심으로만 그들을 왜곡했었고, 스스로 편협한 생각을 했다는 걸 증명한 셈이어서 부끄러워졌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는 대중인 우리에게 여러 비슷한 문제를 끌어다 넣을 수 있는 우물 같은 힘이 있다고 느꼈다.  


5. 


영화 <어느 가족>의 한 장면ⓒ 티캐스트


요즘처럼 이혼율이 날이 갈수록 높아져 가는 시대에 가족의 개념은 희미해지는 듯 보인다. 흡사, 관계는 사라지고 가족관계증명서만 남은 느낌이다. 가족관계증명서는 서류상의 가족을 증명할 뿐 정말로 교류하는 가족임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혼신고를 하지 않은 채 집을 나간 어느 부모도 가족 관계 증명서에 떡하니 올라와 있는 일을 발견하고는 한다. 그리고 그런 사연은 때때로, 성공한 자식의 소식을 듣고 20년 만에 찾아와 ‘소유권’을 주장한다는 어이없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물론 이런 고민은 오즈 때부터 늘 있었다. 하지만 분명 그때보다는 문제가 심해졌다. 홈드라마가 가족을 대표하는 것이라면, 그 장르명에서 ‘홈’이 굳이 집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시대가 개인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여러 의견을 마주한 우리는 갈등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집단이든 택해야 했다. 갈등이 두려워 홀로 되기를 택하는 이들도 있지만 끝내 외로움만큼은 참지 못하고 새로운 집단을 만들어냈다. 그 새로운 집단은 갈등은 없고 서로에 대한 존중만이 있다. 말을 아끼고 칭찬만을 늘어놓는 이 집단들은 ‘밥터디’나 ‘혼밥족’이라는 용어로도 발전했다. 그러나 말을 아끼지 않아도 되고 집단의 형태가 뚜렷하지 않은 인터넷 공간에서의 가족은 비관적인 방향으로 발전했다. 어느 집단에도 속할 수 있고 문제가 생기면 존재를 스스로 지울 수 있는 인터넷 공간의 익명성과 신속성은 요즘 시대의 가족을 창조해냈다. 나는 이것이 고레에다가 말하는 홈드라마의 새로운 정의라고 생각한다.  


<공각기동대>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언제 어느 육체에서든 개인이 개인으로 지칭될 수만 있다면 ‘나’의 이야기는 세상 어디에서나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가족은 어느 모습이든 간에 서로를 끈끈히 여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찌 됐든 그들을 잇는 게 무엇이든 간에, 이렇게 쉽고 빠르게 모이고 흩어질 수 있는 유비쿼터스 시대에 단지 모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초중고생들이 친구를 사귀는 게 주로 같은 반 같은 학원이라는 것처럼, 대학생이 되는 순간 소속감은 희미해지고 개인의 생존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동아리나 직장이라는 이름으로도 가족 같은 분위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걸어도 걸어도>가 가족의 붕괴를 목격하고 화합을 꾀하는 형식이라면 이 영화는 마치 이미 벌어진 붕괴를 인정하고 새로운 방식을 꾀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애써 무너진 걸 매워 보려는 게 아니라, 무너진 건 무너진 대로 가족이라는 점이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변화했다고 해서 가족이 아닌 건 아닌 것처럼, 홈드라마 장르는 더는 집에 얽매여 있지 않고 가족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든 집이라고 고레에다가 말했다. 전통을 계승하기를 거부하면서도 유대감만을 성취하려는 모습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육체를 잃고 감정만이 남은 것에 비유할 수 있다고 여긴다. 육체처럼 자신을 속박하는 게 전통이라면 마땅히 육체를 벗어나야 하며, 감정만으로도 사람은 서로에게 따스해질 수 있다. 어머니를 닮은 사람이 어머니가 아닌 것처럼, 얼굴이 바뀌어도 어머니가 어머니인 것처럼 말이다. 


영화 마지막에 구치소에 갇힌 노부요에게 오사무는 언제 어디서든 우리는 가족이라고 말한다. 오사무는 노부요에게 기다리겠다고 말하면서도 쇼타에게는 자신을 더는 아버지로 보지 말라고 충고한다. 말하자면 부부의 연은 맺어지고 자식의 연은 끊긴다. 조금은 비약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을 평등이라고 보았다. 부부는 서로 동등함을 추구하는 관계인데 부모·자식은 명백하게 위계질서로 이어진다. 부모·자식에게 위계가 필요한 건 일종의 사회질서를 위해서인데, 그들 도둑 가족은 이미 사회 질서 바깥에 있다. 여기서 사회를 가족이라고 본다면 그들은 가족 밖에 있고, 그렇게 기존 가족의 형태 밖에서 새로운 가족을 창조해내려면 자연스레 위계질서의 관계를 저버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쇼타는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사귐으로써 새로운 가족을 만들 것이다. 결혼도 할 것이고, 직장도 다닐 테니 가족의 길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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