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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25. 2018

어쩌면 아주 정직하게 산다는 것

영화 <아들의 방>의 작품 포스터ⓒ 제이넷이미지


어쩌면 아주 정직하게 산다는 것 


<아들의 방>이라는 제목은 작품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대변한다. 아마, 그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라는 한 줄기의 문장에서 남겨진 자의 슬픔을 읽어내지 못할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효에 해당하는 ‘참척(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음)’이다. 이제, 아버지는 ‘남겨진 자’로서 아들의 흔적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 중에서도 ‘아들의 방’은 마음 속에 남은 흔적이 아닌, 물리적으로 맞닥뜨리는 현실이기에 더욱 견디기 힘들다.  


참척은 이야기로 쓰기에 진부한 소재 중 하나지만 그럼에도 매번 사람을 울린다. 소중한 사람이 죽었고 그게 둘도 없는 내 자식이라면 세상에 울지 않을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런 면에서 참척은 진부함을 넘어 나태해 보이기도 하는데, 모든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감정이어서 굳이 관객을 설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식이 죽었고 그게 슬프다는 건 어떤 경우에도 당연하기에 그들이 왜 슬픈지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건 마치, 육식동물이 고기를 먹는 것처럼 자연의 섭리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진부함에 함부로 손댈 수는 없다. 단순히 ‘자연의 섭리’에 불과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채소를 먹는 육식동물은 그저 흥미로운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사냥하는 인간의 모습은 도덕적인 거부감을 일으킨다. 평소에 고기를 즐겨 먹는 사람조차 그 사냥장면을 보면 입맛이 뚝 떨어진다. ‘죽음’이라는 공포가 눈을 통해 온전히 전달되고, 그 모습을 보며 자신 혹은 타인의 죽음을 상상한다. 도덕이 무엇인지에 관해 여러 의견이 있지만, 이런 맥락으로 보면 아마도 본능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영화 <아들의 방>의 한 장면ⓒ 제이넷이미지


본능, 그 진부함에 관하여 


<아들의 방>이 보여주는 건 본능적이면서도 진부하기까지 하다. 그 대략적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정신과 의사인 조반니(난니 모레티 분)는 매너리즘에 빠진 채 환자를 마주하는데, 가족에게만큼은 친절하다. 그러던 어느 날, 조반니는 환자의 연락을 받고 아들 안드레(쥬세페 산페리스 분)와의 조깅을 다음으로 미루게 된다. 그런데 환자를 진료하던 중, 조반니는 스쿠버다이빙을 하던 안드레가 사망했다는 부고 전화를 받는다. 안드레의 사망에 모두가 슬퍼하던 중 안드레가 누군가와 주고받던 편지가 발견되는데, 아마도 안드레의 여자친구로 추정된다. 이에 가족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 초대하고, 집에 방문한 그녀는 새로운 남자친구와 함께다. 이후, 영화는 그녀와 그녀의 남자친구를 목적지에 데려다주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 영화가 진부하게 느껴지는 건 진부함 탈피를 위한 그 어떤 가공처리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날것 그대로의 슬픔을 보여준다. 아들의 죽음에 분노하는 모습은 있어도 원인에 관해 의문을 품지는 않으며, 아들이 죽자마자 바로 애인을 바꾸는 아들의 여자친구에게 화를 내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아들의 사망 전까지 매너리즘으로 달려오던 조반니의 일상이 줄곧 유지된다고 느끼게 된다. 큰 사건 없이 환자와 상담하며 돈이나 벌던 조반니의 일상에서 아들의 사망 같은 건 그다지 큰일도 아니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조반니가 아들의 죽음을 매정하게 대하는 냉혈한일까? 그것도 아니다. 조반니의 일상은 줄곧 유지되지만 감정만큼은 동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를 상담할 때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매너리즘’ 신념이 깨어지고, 오히려 그전과는 반대로 환자에게 너무 이입해 제대로 진료를 볼 수 없게 된다. 말하자면, 조반니는 정신과 의사로서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정신적으로 이상한 사람들로 둘러싸인 곳이 자신의 진료실이라면, 직업적 소명을 핑계 삼아 그들과 자신을 분리하던 건 바로 ‘익숙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조반니에게는, 이곳은 원래 문제가 있는 사람이 오는 곳이고 그렇기에 자신은 그들에게 문제의식을 가진 채로 대해야 한다는 ‘익숙함’이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고정관념’이고, 이것은 마치 이 영화가 죽음에 관한 도덕적 의무를 보여주는 방식과도 유사하다.  


영화 <아들의 방>의 한 장면ⓒ 제이넷이미지


죽음에 관한 도덕적 의무 


아들의 죽음으로 매너리즘을 탈피하게 된 조반니는 이제 정말로 환자들의 고통을 통감하게 된다. 그동안 타인(환자)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슬픔이 자신에게 직접 전해지자,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꿈을 꾸던 태도가 달라진다. 말하자면, 입장 교환을 통해 굳은 마음에 물꼬를 트고 감정적 교류를 허용하게 된다. 그 교류의 일환으로 그는, 교회에서 기도를 해보기도 하고 다이빙용품 가게에 들러 제품을 둘러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은 곧 자신의 마음속에서 곧바로 반박된다. 모든 죽음은 때가 있다는 신의 말에 왜 하필 지금이냐고 묻기도 하고, 이 작은 부품 하나로 사람이 죽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진다.  


조반니가 타인의 상처에 무관심한 건 본능적인 태도다. 분명, 직접 맞닥뜨린 위협이 아니라면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보통, 타인의 고민을 들을 때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어도 공감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내가 더 먹고살기 힘들다거나, 혹은 이미 헤어진 사람을 어서 잊으라든가 하는 대화를 떠올려 보자. 하지만 인간이 이룬 사회가 도덕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타인의 상처에 공감하는 건 필수불가결하다. 공감하지 않는다는 건 서로를 알 수 없다는 것이고, 그런 사회는 무척 매정한 사회일 테니까.  


그런 맥락에서 정신과 의사라는 조반니의 직업은 무척 기만적인 것일 수도 있는데, 정신과라는 게 구체적인 진찰이 아니라 감정적인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의사도 마음의 어디가 아프다고 진단하지는 못한다. 마음의 어디를 콕 집어 수술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말하자면 조반니는 돈 때문에 가짜 공감을 유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건 절대로 정신과 의사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 구체적으로 특징되지 않으니 치료의 진전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환자들이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반니는 그들에게 일련의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돌팔이로 여기며 화내지만 다음 상담에 꼬박 찾아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도 그 환자들이 조반니에게 화내는 모습은 이상하다. 정신과이기에 이상한 사람들만 찾아오나 싶을 정도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적 치료라는 게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말하자면 정신과 진료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 누군가에게는 나쁜 방향이 누군가에게는 좋은 방향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도덕의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정신과 의사는 공감이 가지 않아도 환자를 이해해주어야 한다. 아니, 직업이므로 ‘이해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도덕이라는 건 맥락상의 이해를 요구한다. 말하자면 공감이 가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를테면, 만약 우리가 길거리에 쓰러진 누군가를 보았을 때 그를 구한다면 정말로 아프겠다는 감정적인 공감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음을 이해하고, 그 고통이 무엇인지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간접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모 게임의 프로토스 종족처럼 두뇌끼리 직접 연결되는 게 아니라면 직접적인 감정 공유는 불가하다. 즉, 도덕은 항상 간접적일 수밖에 없다. 


다르게 말하자면 도덕은 항상 간접적이기에 ‘직접’ 목격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간접적으로 보고 듣고 행하는 이 도덕의 중심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도덕은 정확한 기준이 없고, 그 탓에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과연 도덕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사회로부터 도덕을 간접적으로 배운다면, 최초의 도덕은 누가 만들었는가? 그리고 이러한 물음은 마치, 할머니의 할머니를 본 적은 없지만 간접적으로 전해 듣고 그 존재를 확신하는 것과도 같다. 말하자면, 도덕이란 있는 게 아니라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에겐 할머니의 할머니가 있다. 우리가 생물이기에 그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우리는 아주 분명하게 고조할머니의 존재를 믿는다. 하지만 그런 분명함 속에서 때때로 다른 할머니가 진짜 할머니였다는 웃지 못할 사례를 접하기도 한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 이것은 우리가 그 존재를 ‘직접’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논의를 통해 이 영화에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우리는 스크린을 경계로 펼쳐지는 영화와 현실이 각각 다르다는 걸 안다. 영화는 마치 실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묘사되고, 우리는 그 현실감에 몰입해 영화를 본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영화 속 일이 ‘실제’가 아닌 것을 알고 있다. 이 현실감 있는 가짜 영상은 눈으로 보면서도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공감은 못 하고 이해는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조반니의 정신과 진료와도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스크린 속 조반니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의 슬픔에 근본적인 공감을 하지 못한다. 영화관이라는 공간에 함께 있음이 조반니의 슬픔을 통감하게 하진 않는다. 마치, 조반니가 환자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심드렁하게 앉아 도덕적 책무에 관해 생각해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정말로 감정적인 슬픔을 느꼈는지를 물어야 한다.  


모두는 아니어도 누군가는 분명, 안드레의 죽음을 영화적 사건으로 치부해 심드렁하게 넘겼을 것이다. 안드레가 실존인물인지 그리고 정말로 죽었는지를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건 정상이다. 하지만 오히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의 슬픔을 분석하고 결론을 내리는 행위는 어리석다. 어쩌면 정신분석이라는 이름으로 인물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비평작업에 대한 조롱일 수도 있는 이 태도는, 정신과 의사 조반니가 아들의 사망 전후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사건의 당사자가 되고 나서야 환자에 공감하는데, 이것은 곧 ‘직접’ 겪지 않으면 모른다고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래서 조반니에게 이입하며 영화를 보던 우리는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을 받게 된다. 진부하고 본능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했던 이 영화가 사실은 죽음이란 게 ‘본능적으로’ 슬픈 것인지를 묻기 때문이다.  


영화 <아들의 방>의 한 장면ⓒ 제이넷이미지


진부하고 본능적인 죽음 


가까이 있을 땐 모르던 게 잃고 나서야 뼈아프게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친구라던가 연인이라던가 부모님이라던가 하는 것들, 이들의 공백은 우리에게 삶을 돌아보는 기회를 준다. 무언가를 얻는 건 없어도 그만이지만, 있다가 없으면 허전하기 때문에 그 원인을 찾아보게 된다. 조반니가 평소 드나들던 아들의 방을 아들이 죽고 나서 들어가 보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라는 그의 직업처럼 조반니의 집을 조반니의 마음으로 빗대어 본다면, 아들의 방은 그에게 아들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확장한 것일 테다. 즉, 아들의 방은 조반니의 마음속에서 아들이 차지하는 부피다. 조반니는 죽은 아들을 떠올리려 하지 않고, 그 생각은 아들의 방에 접근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 행동은 꽤 모순적이다. 조반니의 집에서 아들의 방은 접근하기 편한 곳에 있기에 사실상 어떤 형태로든 접근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반니의 집은 평소에 같이 조깅할 정도로 익숙하던 아들의 부재가 올곧게 인식되는 공간이다. 눈으로는 보아도 몸을 들어갈 수 없다는 점에서 다시금 영화나 도덕의 의미에 관해 묻게 된다. 그런 물음으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조반니가 정말로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지고, 그런 의문이 드는 순간 이 영화는 아들의 죽음이 아니라 아들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묻는 게 된다. 남겨진 자의 슬픔이 아니라 ‘남겨진다’라는 문장이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아들’이나 ‘방’이 아닌 ‘아들의 방’을 주목하는 게 된다. 


물론 우리는 생전에 아들이 어땠는지를 모른다. 영화가 말해주지 않는 이들의 시간, 영화가 시작되기 전과 후에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우리는 모른다. 심지어, 영화 속에서조차 아들에 관해 알 수 없다. 이 영화는 철저하게 조반니의 시선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래서 아들은 타인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들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몰랐다 하더라도 그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음은 분명하다.  


분명, 아들이 사회생활을 하며 만났던 이들보다는 더 가까울 것이다. 그 증거로, 아들의 여자친구는 아들의 죽음조차 제때 전달받지 못했다. 게다가, 그 짧은 시간 동안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귀어 버린다. 즉, 안드레는 가족에게는 아들이지만 여자친구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었다. 우리에게도 조반니의 아들 안드레는 스크린이 올라가면 금세 잊힐 영화 속 인물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들 가족에게도 아들의 여자친구나 관객인 우리는 금세 떠나갈 사람이다.  


그래서 아마도,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간접으로 지칭된 대상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시도다. 영화 초반과 후반에 걸쳐 같은 카메라 구도가 반복되는데, 그것으로 우리는 기시감을 느낀다. 이를테면 영화 초반에 가족이 식사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굳이’ 고개를 돌려 본래 각도에서 보이지 않는 전화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구도는 후반부에도 동일하게 재현되지만 카메라가 고개를 돌리는 장면은 생략된다. 만약 이 영화가 아들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보여주려 했다면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언어적인 설명을 생략하고 부모의 심정 안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이렇게 비슷하지만 구분할 수 있는 카메라 구도에서 우리는, 매일 반복되지만 미묘하게 다른 일상을 찾을 수 있고, 그 일상 속에서 사라져 버린 아들의 방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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