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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ul 13. 2018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영화

스탠리 큐브릭의 우주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작품 포스터ⓒ 워너브라더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그 웅장함만큼 난해하기 짝이 없어서, 사람들에게 여러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를 보고 나면 머릿속에 남는 게 음악뿐이라는 우스갯소리처럼, 일반적인 상업 영화의 문법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이 영화에서 '이야기'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영화가 시작하면 20분 동안 원숭이들의 현란한 춤을 보아야만 하고, 영화가 끝나기 전 20분 동안 꿈의 세계에 진입한 듯한 환영들을 마주하게 된다. 게다가, 2시간 44분의 러닝타임 중 일렁이는 40여 분을 제하고 나면 새까만 우주의 모습만이 남을 뿐이다.

단언컨대, 이 새까만 우주의 풍경에서 무(無)를 떠올리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건 눈을 감으면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게 새까만 어둠인 탓도 있다. 말하자면, 잠을 잘 때 사람은 새까만 무의식에 빠지게 된다. 이른바 '꿈'이라고 불리는 환상 속의 세계, 그 무의식이 계속되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불이 꺼지면 어둠이 찾아오는 것처럼, 생명이 꺼지고 나면 영원한 어둠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래서 보통, 광활한 우주란 바라볼 때는 아름답고 내쳐질 때는 두려운 장소다. 우주미아가 되어 돌아오지 못함을 기약한다는 건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주를 다루는 수많은 영화에서 낭만과 공포를 함께 묘사하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이다. 우주의 검은 배경이 인간의 무의식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우주에서 꿈을 떠올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콘택트>나 <인터스텔라>에서 우주는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나아가야 할 곳'인 동시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곳'이다. 또 다른 영화 <그래비티>와 <마션>은 우주에서 재난을 만나지만 나름의 용기를 내어 지구로 귀환한다는 짤막한 스토리이다. 이 네 가지 영화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목표를 수행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보통 둘 중 하나다. 우주의 이면, 낭만과 공포 둘 중 어느 것을 취할 것인지. 공포를 이겨내어 집으로 귀환하거나, 혹은 낭만을 위해 그 속에 빠져들거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카메라는 이들의 눈에 비친 우주를 무척 아름답게 묘사한다. 이것은 낭만이다. 그렇지만 밖으로 나가면 죽으니 창을 통해 내다볼 수밖에 없다. 이것은 공포다. 그런 면에서는 우주는 독이 든 성배에 비견될 수 있다. 무섭지만 몹시 아름다워 손을 대고 싶어진다. 말하자면, 우주 영화에서 우주란 식민지 시대의 신대륙처럼 '위험하지만 꼭 가보아야만 할 곳'이다.

그래서 우주를 떠다니는 우주선은 마치 푸른 바다 위를 항해하는 것처럼 고고하게 느껴진다.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낭만이라고나 할까. 여러 매체에서 우주선을 '선박'처럼 묘사하는 것과 바다 사나이를 우주 사나이와 대비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목성으로 향하는 거대 우주선이 나온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처럼 오래된 고향으로 향하는 듯한 우주항해의 배경에는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이 있다.

공허 속에 메아리치는 이 아름다운 음악은 우주에 대한 양가감정을 잘 보여준다. 음악과 어울려 무척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우주선 안에서는 겉과는 달리 힘겨운 사투가 벌어지는 중이다. 승무원 보우먼(케어 돌리아 분)은 인공지능 컴퓨터 'HAL 9000'의 반란에 맞서 싸워야 한다. 말하자면 인간과 기계의 대결, 영화의 상징적인 오프닝 신에서 유인원이 쏘아 올린 작은 뼈가 우주선으로 치환되는 모습을 떠올려 보라. 인간 욕망의 산물이 자신을 파괴할 도구로 사용될 때의 공포는 우주에 대한 양가감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그런 양가감정이 영화 전반에 작용하고 있다. 불쾌하지만 눈을 떼놓을 수 없고 아름답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쾌하다. 이러한 양가성은 우리가 어떤 것에 미련을 버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장점과 단점이 있고 그렇기에 섣불리 단정할 수 없는데, 양극단이 멀어질수록 결단을 내리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스탠리 큐브릭이 영화에서 구축하고자 한 게 바로 그것이었다. 낭만과 공포라는 두 가지 심리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 <시계태엽오렌지>에서 폭력이 아름다움을 품었었고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냉전이 유머를 품었었다.

'그로테스크'의 미학  

이른바 '그로테스크'의 미학이라 불리는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 세계에서 이상하지 않은 것을 찾아내기란 어렵다. 처음에는 멀쩡해 보이다가도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모순된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테면 <시계태엽오렌지>의 오프닝 장면에서 질서정연한 채로 사악한 표정을 짓는 알렉스(말콤 맥도웰 분)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이어서, 진 켈리가 부른 사랑의 노래 'Singing in the Rain'을 범죄 전에 읊조리는 알렉스의 모습은 사랑의 정의를 뒤엎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것이 강간도 사랑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혹은 강간이라는 행위를 사랑한다 말하는 것인지, 어찌 됐든 이러한 방식이 관객에게 그로테스크함을 자아낸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는 큐브릭 완벽주의 성향과 합쳐져 더욱 큰 압박감을 준다. 그것이 모호하다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이 남아 있을 테지만, 본래부터 완벽하기에 상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의 영화는 대체로 예상할 수 없는 지점에 빠져든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후반 20분은 물론이고, <샤이닝>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렇다.

그것들은 분명 뜬금없다. 하지만 우리는 여태껏 완벽주의으로 일관해온 영화가 이런 선택을 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가 큐브릭 영화의 그로테스크함을 옹호하게 되는 건 양가성에서 상상력이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양가성이 동전의 양면처럼 사물의 의미를 뒤집는 것이라면, 그로부터 제한된 상상력을 다시금 뒤엎어 새로운 상상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끝없이 상상하다 보면 점점 영화의 내용과 멀어지게 된다. A에서 시작했는데 G쯤에서 끝나는 이 의미작용들이 그가 말하는 그로테스크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그런 면에서, 큐브릭의 다른 영화보다 더욱 큰 상상력이 필요한 게 바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다. 영화의 전반적인 이야기를 제하고서라도 이 영화의 '이미지'는 한 점의 추상화에 가깝다. 영화를 보다 보면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저 허구에 불과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음악에 맞추어 진행되는 작품의 연출 또한 이 영화가 추상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에 일조한다. 디즈니가 클래식 음악을 영상으로 만들어보려던 시도가 <판타지아>이었다면, 큐브릭의 영화도 <판타지아 2001> 정도로 부를 수 있을 정도다.

관객이 이 영화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 할수록 더욱 큰 미궁 속에 빠지게 된다. 애당초 이미지를 보여주는 게 목적인 이 영화에서 자꾸만 교훈을 찾아내려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이야기라고 할만한 게 없다. 관객이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 스스로 해답을 찾아내야만 한다. 하지만 원인불명의 물체가 보내오는 신호를 쫓아 목성에 간다는 짤막한 스토리조차 앞뒤를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 이 불친절함에는 작품의 기획의도가 숨어 있다.

영화는 영상으로 말한다

대부분의 이야기에는 교훈이 있다. 그리고 영화는 이야기의 일종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에서 교훈을 찾으려 한다. '대부분'의 영화에는 교훈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대부분'이 아니라 '모든' 영화에 이야기가 있다고 오인한다. 분명 어떤 영화에는 이야기가 없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오인할 만한 이유가 있다. 영화는 '카메라'로 제작된다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영화가 이야기의 일종인 것은 맞지만, 다른 '이야기'와는 달리 '영상'으로 말하는 게 영화다. 책이 문자로 말하고 사진이 이미지로 말한다면 영화는 '영상'으로 말한다. 이렇게 '영상으로만' 말할 때 이야기는 사라지고 이미지는 강화된다.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영화에서 문학은 인물의 대사 형태로 나타난다. 영화에서 회화는 화면구성의 형태로 나타난다. 영화에서 음악은 소리의 형태로 나타난다. 영화에서 사진은 카메라 구도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처럼, 영화는 이전 예술들의 형태를 빌려왔다. 그렇다면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말하자면 영화의 언어는 '카메라'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혹은 어떻게 이미지를 편집하는가에 달려있다. 이게 바로 '영상'이다.

그러니 영화에서 중요한 건 '영상'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는 지다. 말하자면 연출과 편집이다. 그것을 알게 될 때, 영화는 단지 '이야기'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은 영화를 더욱 재밌게 보는 것에 도움이 된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그런 깨달음을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영화다. 원작 소설과 각본을 반씩 나누어 작성해 소설을 읽지 않으면 영화를 이해할 수 없도록 기획된 이 작품은 예술이라는 것의 근본을 탐구하려는 시도다. 소설을 보지 않으면 영화의 이야기를 알 수 없으니 소설이 영화에 우선하는 셈인데, 이는 곧 영화에서 '이야기'의 역할을 소설로 분리했다는 뜻이 된다. 즉, 큐브릭은 영화는 오직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이야기보다 이미지를 강조하는 영화들은 예술영화 중에서도 실험영화에 가깝다. 그들은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고자 철저히 영상만을 고수한다. 고다르의 <언어와의 작별>이나 테렌스 멜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가 대표적이다. 이런 영화는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기존 영화의 어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아낸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말하자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특별한 것은 상업영화에 가까운 큐브릭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영화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는 게 평론가와 연구가들의 몫이라면, 영화의 언어를 새로 만들어 내는 것도 그들의 몫일 테고, 그래서 실험 영화는 항상 '학구적'이고 딱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업영화 감독에 가까운 큐브릭이 대중의 화법으로 만든 이 예술 영화는 평론가와 연구가에 한정되었던 것을 일반 관객들에게도 전파한다. 잘 만들었기에 설득력이 있고, 그래서 더욱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 

고다르가 <언어와의 작별>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 영화에는 '언어'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없다. 언어가 없는 이 영화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던 가장 원초적인 언어로 돌아간다. 원시인들이 동굴 벽에 그렸던 벽화처럼, 모닥불을 둘러싸고 신나게 부르던 노래처럼,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은 단지 클래식 음악과 멋진 영상미뿐이다. 영화 도입부에서 만 년 전에 살았던 원시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영화를 통해 그들 언어를 빌려오게 된다.

카메라가 느리고 유하게 물체를 잡으면 생각 또한 길어진다. 선율을 타고 이어지는 생각의 끝자락에서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공허한 우주에 음악이 울려 퍼질 때 마음속에 남겨진 것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건 마치 영화 끝자락의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채 태초의 것을 떠올리는 편안함이다. 이제 우리는 영화에서 영상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대답할 수 있다. 마음을 놓고 차분히 영화를 감상하면 그 별 중 하나가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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