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회고하는 주마등

기묘하고도 신성한 꿈

by 수차미


Wild.Strawberries.1957.720p.BluRay.x264-HD4U [PublicHD].mkv_20181121_153120.022.jpg 영화 <산딸기>의 한 장면 © 잉마르 베리만
Wild.Strawberries.1957.720p.BluRay.x264-HD4U [PublicHD].mkv_20181121_153107.025.jpg 영화 <산딸기>의 한 장면 © 잉마르 베리만
Wild.Strawberries.1957.720p.BluRay.x264-HD4U [PublicHD].mkv_20181121_153102.158.jpg 영화 <산딸기>의 한 장면 © 잉마르 베리만
Wild.Strawberries.1957.720p.BluRay.x264-HD4U [PublicHD].mkv_20181121_153054.452.jpg 영화 <산딸기>의 한 장면 © 잉마르 베리만
Wild.Strawberries.1957.720p.BluRay.x264-HD4U [PublicHD].mkv_20181121_154358.359.jpg 영화 <산딸기>의 한 장면 © 잉마르 베리만


이것은 노년의 신사가 죽음을 예견하고 지난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50년 동안 의사 생활을 한 이삭 보리(빅토르 시외스트롬)는 오늘 명예학위를 받게 되어 있다. 그가 몸담았던 대학이 의사로서 성공한 그에게 명예를 수여하려 한다. 그런데 그는 아주 기묘하고도 신성한 꿈을 꾸게 된다.


이삭은 한가로운 아침 산책 중에 길을 잃는다. 어느 마을에 당도한 그는 고독함이 행인을 집어삼킨 듯한 모습을 목격한다. 당황한 표정으로 시계를 바라보았지만, 길거리에도 손목 위에도 시계의 시침이 없다. 사람 하나 없이 황량한 이 공간에서 시간조차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바로 앞의 행인에게 말을 걸어본다. 그런데 그는 얼굴이 없다. 이삭은 자신을 닮았지만 닮지 않은 그에게 혐오감을 느낀다. 그 혐오감에 카메라조차 눈을 돌리는데, 다시금 사내를 조명할 때는 맥없이 바닥에 쓰러져 있다. 가만 보니 혐오스러운 얼굴은 풍선을 닮았는데, 이윽고 풍선처럼 터져버린다.


이윽고 화면 밖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오더니 관을 운반하는 마차가 거리에 들어선다. 마부가 없는 마차는 방향을 돌리지 못해 가로등에 부딪혀 반파된다. 뒤쪽의 관이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이삭은 그것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관 속에는 자신이 있다. 다음 장면은 잠에서 깬 이삭의 모습이다.


꿈의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이 될 수 있다


영화의 제목이 내용에 관해 어떠한 힌트도 주지 않지만, 도입부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모험에서 우리는 힌트를 얻는다. 세트의 인위성이 강조된 이곳은 어딘가 모르게 표현주의적이고, 그런 곳에 잘못 들어선 이삭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이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이곳은 ‘오즈랜드’처럼 흑백이 칼라로 변하는 ‘마법’이 없다는 점이다. 마법만이 없는 게 아니다. 희망조차 없다. 꿈의 힘으로 왜곡된 세계에 들어선 이삭 보리는 그곳에서 자신의 죽음을 본다. 얼굴이 갑작스레 터져버린 사내가 자신의 거울상임을 조심스레 말하던 영화는 관 속의 이삭 보리를 통해 그의 죽음을 확정한다. 그래서 이삭은 깨어난다.


꿈의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이 될 수 있다. <매트릭스>에서 스미스 요원이 그러했듯, 꿈의 이미지는 내부에서 근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내는 곧 이삭이기도 하다. 그런데 얼굴이 없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삭은 무덤덤하다. 영화에서 이 장면만 잘라내 보면 몹시 우스울 것인데도 말이다. 꿈이기에 웃지 않는 걸까. 그러나 이삭과 우리가 웃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꽉 조이는 스타킹을 얼굴에 뒤집어쓴 듯한 이 사내는 이삭 보리의 압박감을 상징한다. 영화 도입부에서 50년간의 의사생활로 학위수여를 받는다는 말이 제시되었는데, 이 사내의 등장은 그의 의사생활이 막연하게 기쁘지만은 않았음을 말해준다. 학위수여를 받을 정도로 명예로운 삶이지만, 그만한 압박감이 있노라며 삶의 희로애락을 영화는 제시하는 것이다.


아직 무슨 압박감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윽고 사내의 머리가 터진다는 점에서 압박감은 해소되었다. 그러나 압박은 사라졌을지언정 사내가 죽어버렸으니 오히려 불행하다. 이삭은 지난 삶으로부터 해방된 셈이지만, 이 장면을 목격함으로써 학위수여 이후 자신이 사망할 것임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장면은 영화의 도입부로서 의미가 깊다. 삶은 압박의 연속이며, 그 끝에서야 비로소 해방될 수 있노라고 영화는 말한다. 큰 힘에 큰 책임이 따르는 것처럼, 어쩌면 이 이삭 보리도 원숙한 노년에 대한 삶의 당위성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머리란 생각의 근원이요 시각의 발원


이삭은 사내의 머리가 터진 후에 남겨진 몸을 바라본다. 찰나이지만 이 장면 또한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를 제공한다. 사내의 압박감은 몸이 아니라 머리에 가해졌다는 점이다. 다른 시점으로 보면, 모든 기쁨과 슬픔은 몸이 아니라 머리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머리 없이 사는 게 가장 마음이 편할 것이다. 그러나 머리가 없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없다. 머리란 생각의 근원이요 시각의 발원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친절하게, 이삭의 머리가 없을 때를 가정하고 그것을 관객에게 설명해준다. 이 장면 뒤에는 마부 없는 마차가 거리에 들어선다. 그 마차는 장애물을 피하지 못하고 계속 나아가려다 바퀴가 빠져버린다. 그래서 뒷자리의 관은 넘어지고 말은 홀로 달아난다. 즉 마부/머리가 없다면 마차/몸은 전복되고야 만다. 이 대목으로 영화는 말한다. 무언가를 잊을 수는 있어도, 그것을 잊게 된다면 살아남을 수 없노라고. 앞의 사내와 연결해보면, 압박감을 잊을 수는 있어도 그것이 없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삭이 바닥에 내쳐진 관의 틈새를 들여다볼 때, 관 속에 있던 이삭의 죽은 몸이 그의 목을 졸라 버린다. 니체의 말처럼, 우리가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도 우리를 들여다본 셈이다. 노년의 신사가 내면의 압박감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압박감이 그를 찾아왔으니, 그도 압박감을 찾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압박감인가. ‘산딸기’라는 영화의 제목이 바로 그것이다. 삶에서 잊을 수 없는 처음의 순간들, 그중에는 산딸기를 따던 첫사랑 사라(비비 안데르손)도 있다. 이삭은 신이 자신에게 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너는 곧 죽을 것이고, 그전까지 모든 아쉬움을 떨쳐내 보아라.”라는 계시를 꿈을 통해 받은 그는 여러 번에 걸친 꿈속에서, 지난 첫사랑과 그녀를 둘러싼 사랑싸움, 부모님과의 갈등을 마주한다.


과거가 이곳에 올라탄 셈


사람은 태어날 때 꿈을 꾼다. 정확하게는, 누군가의 탄생을 꿈을 통해 알게 된다. 동방박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예견한 일화나, 우리네 어머니가 태몽을 꾸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꿈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태몽과 대척점에 서 있다. 태몽이 누군가의 탄생을 예견하는 것이라면, 이삭은 누군가의 죽음을 예견하는 꿈을 꾸었다. 다만, 꿈속에서 사망한 누군가가 자신의 모습이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꽤 아이러니한 일이다. 자신의 탄생은 필연적으로 타인을 통해 예견되지만, 자신의 죽음은 자신을 통해서도 예견될 수 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이삭은 갑작스레 죽음을 예고 받는다. 그가 꿈속에서 목격한 것은 ‘죽은 자신’이었고, 죽은 사람은 말이 없기에 예고장에는 ‘무엇’을 떠올릴 것인지 적혀 있지 않다. 이삭은 그것을 아쉬워하며, 현실로 돌아와 ‘무엇이었는지’ 떠올려 보려 한다. 그러나 꿈의 추상성은 감정조차 뭉뚱그려놓는다. 무슨 감정이었고 무슨 추억이었을까. 기억이 선명하다 하여도, 감정은 꿈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그는 책상 위의 아들 사진을 보며 자신의 사랑을 되내여 본다. 하지만 결혼한 자식에게 아직 자녀가 없다는 말이 불길하게 다가온다.


현실로 돌아온 이삭은 그저 한없이 초연하기만 하다. 막연하게 주어진 압박감 속에서 이삭은 첫사랑을 떠올려 낸다. 그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첫사랑과 같은 이름과 같은 얼굴을 한 사라가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운명적인 느낌이 강하다. 어린 시절의 자신처럼,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남자가 차에 올라탄다. 즉 과거가 이곳에 올라탄 셈이다. 이 운명적인 만남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이삭이 꿈을 꾸었던 오늘 오전부터일까, 아니면 첫사랑을 했던 수십 년 전부터였을까.


이삭은 쉽고 빠른 비행기 대신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는 자동차를 택했다. 어쩌면 죽음을 향해 ‘빠르게’ 가는 걸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찌 됐든 이 자동차 여행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과거를 마주할 수 있었다. 불현듯 찾아온 심연을 그가 외면할 수 없었듯, 도로 한복판에서 찾아온 추억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자비로워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른 이도 태워보지만, 공간이 비좁아 밖으로 내보내고야 만다. 결국 그의 지난 삶/자동차에 동승할 수 있는 건 사라와 친구들뿐이었다.


우리의 삶이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


과거가 오늘을 만들었다는 말은 몹시 당연하게 들린다만, 만약 그것이 사랑과 같은 것이라면 느낌이 다르다. <러브레터>의 후지이 이츠키가 과거로부터의 편지를 받았듯이, 이삭은 과거의 자신이 보낸 여인을 현재에 와서 마주한다. 동명이인, 같은 얼굴, 이것을 운명이란 단어 말고는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러한 맥락에서는 우리의 삶이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으로 귀결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학위수여가 삶의 마지막 지점이라면 그곳으로 향하는 자동차 여행은 성찰인 셈인데, 이 자동차에 탑승할 동승자는 정해져 있다. 왜냐하면, 이 자동차 여행은 영화 초반에 꾸었던 꿈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삭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고, 압박감을 해소하려 했으며, 마지막 해후로 어머니와 첫사랑을 만난다. 꿈을 꾸지 않았다면 자동차가 아니라 비행기를 탔을 것이고 어머니와 첫사랑을 만나지 못했을 테다.


그러나 결정된 곳에서 결정되기 이전의 순간으로 계속 거슬러 오르다 보면, 밑도 끝도 없게 된다. 할머니의 할머니를 찾아가는 게 모험인 것처럼, ‘만약’을 거듭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운명이라는 낭만으로 포장된 결정론은 첫사랑을 논하기에 적합하지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영화 초반에 예고장을 보내면서 결정론을 취한다. 왜냐하면 이삭은 죽음을 앞두었기 때문이다.


연인과 헤어진 후에 ‘만약’을 가정하는 이가 죽음을 택할 수는 있어도, 죽음을 가정하는 이가 연인과 헤어졌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네가 없으면 살 수 없어.”라는 헤어진 이들의 울부짖음은 그 반대편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헤어진 후에 열릴 가능성이 죽음일 수는 있어도, 죽음을 앞두고 헤어지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세상에서 가장 큰 이별이므로, 죽음 앞에서는 어떤 종류의 이별이든 간에 무마되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는 관계에 관한 어떠한 선택지도 없다. 죽음은 세상의 어떤 관계이든 간에 우리를 갈라 놓는다. 이 영화에서 이삭이 유독 초연해 보이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이삭은 첫사랑에 관한 후회가 없다. 꿈이 그에게 보낸 예고장은 지난 삶을 돌아보라는 것이지 후회하라는 게 아니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이삭은 영화관의 어둠 속에 파묻혀 버릴 테다. 영화의 러닝 타임은 한정되었고, 영화관의 어둠은 걷힐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이 영화의 상영과 궤를 같이한다. 결국 결정론적인 이 상황 속에 이삭이 할 수 있는 건 후회가 아니라 관조뿐이다.


‘죽음’과 ‘죽음과도 같은 현재’


관객인 우리도 이삭처럼 영화를 보게 된다. 죽음과 사랑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현실로부터의 분리가 우리를 관조로 이끈다. 영화의 내러티브 상으로, 도입부에서 제시된 꿈은 이것이 영화라고 우리에게 나지막이 말해준다. 표현주의적인 세트가 이곳이 꿈에 불과하다고 말해주는 것이라면, 관객인 우리에게도 스크린 속은 꿈이다. 즉 이삭을 보는 우리와 꿈을 꾸는 이삭은 서로 대응된다. 그런 맥락에서는 삶의 마지막을 영화관의 필름으로 연출하는 효과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른바 주마등이다.


주마등은 ‘무엇’을 떠올릴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떠올랐는지가 중요하다. 주마등이 우리 삶의 회고라는 점에서 이미 그 내용은 그다지 새로운 게 아니다. 단지, 그것이 지금 이 순간에 떠오른 이유만을 우리는 묻게 된다. 그렇다면 이 주마등은 언제 나타나는가. 꼭 죽음을 앞두었을 때만은 아니다. 죽음 이후를 가정해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주마등이란 앞을 가늠할 수 없을 때도 펼쳐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죽음’과 ‘죽음과도 같은 현재’는 일치한다.


이삭의 꿈이 자동차 여행으로 이끌었다면, 이 꿈은 어디에서 온 것일 것일까. 다시 말해서, 영화의 본편(자동차 여행)을 만들어낸 베리만(이삭)의 꿈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현재의 죽음은 과거로부터 예견된 것일까.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점에서는 그러하다만, 특정한 사건을 염두에 둔다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이 답 없는 꼬리잡기는 무의미하다. 만약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혹은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영화 초반의 죽음을 예견하는 꿈은 꾸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막연히 생각해 본 이삭과 우리는 <산딸기>를 본다.


만약 우리가 스크린 속의 이삭처럼 죽음을 예견 받았다면, 저렇게 초연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대답은 ‘Yes’이다. 영화관에 온 우리는 이 영화의 마지막을 미리 알고 있다. 상영 시간으로나, 내러티브 상으로나 그러하다. 영화 초반에 이삭의 죽음이 미리 예견되었으니 결말은 이삭의 죽음이 확실한 상황에서, 우리는 이삭이 떠나는 삶의 회고전에 동참한다. 그것은 마치, 결말을 알면서도 모든 것이 새로운 꿈의 환상과도 같다. 본래라면 꿈 속에서 이것이 꿈인지를 알 수 없는데, 우리와 이삭은 이곳이 꿈속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바로 그렇게, 죽음을 대하는 초연함이 만들어진다. 이것은 영화의 결정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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