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에 멈춘 파리의 노트르담
이곳은 15세기의 프랑스 파리. 오랜 전쟁이 끝나고 비로소 평화를 되찾았으나 도시에 떠도는 미신이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그리고 그 미신 중에는 흉측한 괴물이 출몰한다는 괴담도 있다. 하지만 집시들이 즐비한 이 도시에서 괴물이 누구인지에 대한 물음은 무의미하다. 파리의 시민들은 집시를 괴물 취급하며 그들을 ‘밤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표현한다. 밤의 저주를 받은 이들, 집시의 시간은 멈추어 있다. 달빛이 가득한 단 한 번의 날에 힘을 얻는 늑대인간처럼, 그들의 시간은 끝없이 반복되면서도 후퇴하지 못한다.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갈 것인지를 되묻지 못한다. 국가와 민족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역사를 잊은 이들에게 미래와 과거가 멈추어 버린 것이다.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 Notre-Dame de Paris>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미국에서 <노틀담의 꼽추>라는 제목으로 개봉하였다. 말하자면 원작과 번안작은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원작이 ‘파리’라는 지명에서 ‘노트르담’이라는 랜드마크를 뽑아내었다면, 번안작은 ‘노트르담’에 거주하는 ‘꼽추’를 중점으로 둔다. 그리고 우리는 작품을 관람하면서 각각의 기표에 들어갈 기의를 찾아내게 된다. 평화롭지만 불안정한 파리는 과거와 미래가 지워진 집시 민족이 떠도는 공간이며, 그사이에 우뚝 선 노트르담 대성당은 모든 이의 죄가 무화되는 성역이다. 그런 맥락에서는 소설 속의 파리는 죄와 벌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자, 과거와 미래없이 현재만이 존재하는 곳인 셈이다.
인간도 짐승도 아닌 콰지모토
파리의 노트르담, 집시의 죄가 무화되는 곳이다. 노틀담의 꼽추, 이 꼽추는 성당 안에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그리고 1939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후자를 다루고 있다. 불행한 꼽추 콰지모토(찰스 로튼)는 인간도 짐승도 될 수 없다는 말로 자신을 표현한다. 그는 인간인 ‘파리인’도 아니고 짐승인 ‘집시’도 아니어서 양쪽 모두에게 배척받는다. 그런 그를 받아주는 건 단지 종교라는 이름의 성역뿐이다. 그곳은 왕조차 쉬이 접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영역이기에, 콰지모토는 종지기를 하며 불행한 삶을 조금이나마 연장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여타 소설 번안작들과는 다르게 이 영화에서 종교는 성역 그 자체로서만 기능한다. 대주교는 대법원장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종교는 왕이라는 권력과 법이라는 규칙의 틀밖에 존재할 수 있다. 이런 규칙으로부터 시작한 이 영화는 우리가 기존에 알던 것과는 다른 이세계를 활짝 펼쳐 놓는다. 가련한 집시 처녀 에스메랄다(모린 오하라)는 원작과는 다르게 살아남는다. 원작처럼 종교재판을 거쳐 마녀로 몰려 사형대에 서는 에스메랄다의 모습은 법정이라는 틀을 뒤집어쓴 종교라는 점에서 깊은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늙은 왕이 그녀에게 동정심을 보내지만, 잘못된 확률이 택한 그녀의 운명에 쉬이 체념하고야 만다. 결국 이 영화에서 권력의 구도는 집시와 성당처럼 무화되고야 만다.
법 위에 군림한 종교, 법 밖에 떨어진 꼽추
종교처럼 보이는 그것은 사실은 법의 틀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신성한 법정에서 마녀취급을 받는 중세 파리의 모습은 노트르담 성당이 가지는 성역이라는 뜻을 망쳐 놓는다. 그곳은 죄인의 과거를 묻지 않는 곳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없는 죄인을 만들어 내는 곳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곳은, 법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서도 법의 손길이 닿는 이상한 공간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함은 당대의 계급층이 그들의 삶마저 갈라놓는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왕은 종교와 법에게 명령을 내릴 수는 있으나 직접적인 게 아니라 간접적인 접촉일 뿐이다. 결국 종교와 법은 무소불위의 권력인 왕과 대등하거나 더 상위의 개념일 수도 있다고 우리는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 맥락으로 이 영화를 보면 집시들의 공간과 시민들의 공간은 도시의 아래쪽이라는 점에서 두 계급은 별반 다르지가 않게 된다. 그들을 내려다보는 건 대법원장 프롤로(세드릭 하드위케)와 루이 11세뿐이다. 즉 하층민과 상층민의 공간은 분리되어 있으며, 하층민의 삶은 집시의 삶인 무화된 공간임을 우리는 깨닫는다.
그래서 이 영화의 시간은 상층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오직 프롤로와 루이 11세만이 흐르는 시간을 살 수 있다. 집시들이 과거와 미래와 같은 삶의 미련을 걱정할 새도 없이 단지 현재만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과는 반대로, 늙은 왕과 프롤로는 젊은과 늙음이라는 육체의 시간에 대해 고뇌하고 있다. 이러한 이분법은 이 영화에서 불멸자를 불행한 곳에, 필멸자를 행복한 곳에 데려다 놓는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노트르담 성당의 종지기 콰지모토가 불멸자와 필멸자의 중간자리에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콰지모토는 추하고 비루한 외모를 가진 바보이지만, 반대로 종탑이라는 도시의 최상층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기도 하다. 즉 그의 외모와 지위가 대법원장과 왕에 비견되지는 않을 수는 있어도, 어느 공간에 자리하는지 만큼은 같은 공간을 향유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눈을 가린 정의
영화는 원작의 이야기를 할리우드식으로 번안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에스메랄다에게 반한 기사단장 페뷔스는 아이러니하게도 법의 수호자인 대법원장 프롤로에게 살해당한다. 그러면서도 프롤로는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부수어 버리겠다며 에스메랄다를 법의 심판대 위에 올린다. 말하자면 우리는 페뷔스를 통해 공적이 될 수 없는 공적인 권력을 목격한다. 그는 왕과 시민을 보호해야 할 치안담당자이면서도 보호의 대상인 시민과 사랑에 빠지는 인물인데, 사실은 에스메랄다를 호기심의 대상으로만 볼 뿐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 모습에 분노한 프롤로는 자신이 법의 수호자임을 잊어버리고 칼에 손을 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장의 모습이 얼마나 졸렬한가. 법을 올바르게 집행해야 할 이는 자신의 사적인 마음을 위해 공적인 힘을 이용한다. 그마저도 이 판결은 공연에 사용되는 염소가 재주가 많은 것을 근거로 에스메랄다를 마녀로 몰아붙이는 어이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불쌍한 에스메랄다는 고문과 억지를 경험하면서도 자신의 도덕적인 순결을 지키려 하고, 그런 모습에 감명받은 왕이 그녀에게로 찾아온다. 그러나 왕은 에스메랄다의 눈을 가린 채 자신의 칼과 살해 증거품인 칼을 들이밀면서, 자신의 칼을 선택하면 무죄로 석방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운다. 물론 불쌍한 에스메랄다는 살해 증거품 칼을 선택하게 되어 여전히 사형이라는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
눈을 가린 정의 여신상이 에스메랄다로 옮겨가는데 그녀는 정의를 수호하지 못한다. 여신상의 의무를 대변하는 그녀의 모습은 노트르담의 사법 체계가 바르게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눈을 가린 채로 양자택일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유죄와 무죄가 원리원칙이나 합리적 증거에 의해 추론되지 못하는 15세기의 파리는 정의의 여신상이 마녀로 몰리는, 과거와 미래가 무화되고 사랑에 빠진 종지기가 무자비하게 종소리를 울려대는 신화화된 장소이다. 그곳은 부정도 긍정도 없고, 과거와 미래도 없으며, 단지 상과 하 그리고 선택과 선택받지 못했다는 계급적 운명론만이 존재하는 장소이다.
언론이 없는 도시에는 눈도 귀도 없다
루이 11세가 노트르담 성당을 바라보는 쇼트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카메라가 창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면서 우리에게 도시로의 접근을 불허한다. 파리의 노트르담의 성당이 신의 신성함이 머무는 성소라면 그것이 자리 잡은 이 도시는 성역일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왕의 시선이 이곳과 저곳을 명확하게 분리한다는 점에서, 이곳 파리는 상과 하 그리고 시민과 비시민의 경계가 중첩되어 있는 불행한 장소이다. 영화 초반에 새로 개발된 인쇄기를 보며 시민들에게 책을 배포할 수 있겠다는 왕의 말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런 내용을 시민들이 알게 되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회의감으로 바뀐다. 그래서 이 인쇄기는 왕의 명령으로 파괴된다.
대법원장 프롤로는 루이 11세의 옆에서 인쇄기가 시민들을 계몽시켜 권력의 유지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초반에 경고했었다. 그리고 그의 의견에 동화된 왕은 인쇄기를 파괴해버린다. 하지만 우리는 마녀재판에 넘겨진 에스메랄다를 구하려는 그랭고르(에드먼드 오브라이언)이 인쇄기를 통해 전단지를 뿌리려는 모습을 목격했었다. 그는 밀집된 군중으로서의 힘을 보여주자는 ‘집시대왕(클로팽)’의 말과는 다르게 문화의 힘을 보여주려 했었다. 말하자면 이 인쇄기는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파리에서 시민의 의견을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는 언론의 기능을 했었다. 그리고 왕의 명령으로 파괴되었다는 점에서 언론은 탄압되었고 왕이 언론의 위에 있음을 우리는 깨닫는다.
그렇다면 에스메랄다를 구하는 건 정말로 시위 그 밀집된 군중 성난 군중의 힘이었을까. 영화는 성당 위에서 콰지모토가 던진 돌에 맞아서 죽어가는 클로팽의 모습을 보여준다. 음유시인 그랭고르는 그의 옆에서 힘을 쓰지 않고도 그녀를 구해낼 수 있었다고 나지막이 말해준다. 그래서 이 장면은 이 영화가 아주 신기한 지점을 말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힘을 쓰지 않고, 문화의 힘으로 부당한 권력을 타파할 수 있다는 맥락을 몸소 느껴보자. 15세기에서 19세기로 시간이 넘어갈 동안 프랑스는 성난 군중의 힘을 맛보게 된다. 빅토르 위고는 바로 그것을 위해 시간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15세기의 노트르담은 19세기의 콩고르드 광장으로 변화하며 성난 군중의 힘을 보여주었다.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레미제라블>에서 그들이 부르던 “군중의 목소리가 들리는가?”라는 노래는 그것이 문화로부터 기반했음을 보여주지만, 그들의 현실은 자본가 계급이 성난 군중을 이용해 왕과 왕비를 광장의 단두대에 올려두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15세기와 19세기 프랑스가 문화의 힘에 의해 전복되는, 그러나 그것은 최하와 최상단 사이의 이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계급적 아이러니가 동일하게 재현됨을 목격하고 있다.
노트르담의 꼽추
이 영화의 제목이 ‘파리의 노트르담’이 아니라 ‘노트르담의 꼽추’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이 영화는 원작과는 다르게 종교에서 법으로 악역이 변경되었으며 비중이 없던 음유시인은 단순히 개그역할에 불과하지 않고 언론의 힘을 설파하는 인물이 되었다. 또한 불행한 히로인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가식적으로 사랑하는 기사단장을 대신해 살아남게 되며, 자비로운 왕이 영화의 서사 내내 개입하여 그들의 모습을 관조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불행한 콰지모토가 성당의 편에서 서서 성당에 몰려드는 집시들을 무찌른다는 점에서 문화를 위해 무력을 격퇴하고자 하는 신념을 엿볼 수 있다. 사악한 프롤로를 성당 위에서 던져버리는 장면에서는 어딘가 모를 쾌감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쾌감은 단언컨대 공권이자 공권이 아닌 법정에 대한, 인간도 짐승도 아닌 도시의 시간 수호자 콰지모토에게 우리가 이입했다는 가장 큰 증거일 것이다.
집시들은 이곳에 묻혀 있다. 종지기와 대법원장과 음유시인의 대립은 집시의 시간을 멈춘 현재에서 흘러가는 현재로 바꾸어 놓는다. 종지기는 정해진 시간을 알리는 반복성에서 벗어나 무작위로 종을 울린다. 대법원장은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한다는 점에서, 그 욕망은 아마도 집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뒷받침되었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성사되었으리라는 점에서 몹시 안타까운 인물이다. 혹은 그런 막무가내성이 당시의 법이 시민들에게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우리가 이입하는 대상은 콰지모토가 아니라 음유시인이다. 음유시인은 우연히 발을 들인 집시소굴에서 살아남으려 그녀와 결혼하지만 결과적으로 기사단장이나 대법원장보다는 훨씬 진심이다. 아마도 그런 이해는 그가 사람을 노래하는 음유시인이었기 때문일 테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의 불안
할리우드의 클리셰를 정확하게 따라가는 이 영화는 악은 패배하고 선은 승리하며, 여자는 살고 남자는 죽고, 왕과 종교라는 권력의 양극단은 그들을 외면한다는 점에서 당대 미국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과도 같다. 15세기와 19세기의 민중혁명을 반영한 이 영화가 대공황 말기의 미국에 도달했다는 점은 그런 맥락에 대입될 수 있다. 공황을 치료하는 정부는 국민의 자유/현 제도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아픈 병폐를 성공적으로 잘라 내었다. 프랑스 혁명 또한 국가의 계급을 해체하지 않으면서도 썩은 권력의 뿌리를 성공적으로 잘라 내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도 집시들은 집시의 터전과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을 지켜내면서 에스메랄다를 구하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는 아쉬운 점이 있다. 집시들이 도시의 제도를 해치려는 악으로 묘사되는 점은 집시에 감정을 이입할 사회 하층민들의 실망을 자아낼 수 있다. 또한, 에스메랄다를 구하는 과정이 혁명적으로 묘사되는 것과는 다르게 정작 그 혁명의 수행은 자본가 계급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민중 담론이 개입할 자리는 적어진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병폐의 원인이 되는 프롤로와 차별제도가 폐지되었음에도 그 위에 자리한 사회적 구조가 여전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시대에서나 해결되기 어려운 것임이 분명하고, 그런 이해를 가정한다면 이 영화는 당대의 미국 사회에서 대중들을 성공적으로 설득하는 도구였음이 분명하다. 영화가 단순히 오락에 불과하지 않고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도구임을 이 영화는 증명한다. 내용이 그러하듯, 원작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은 각색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