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의 파리가 가진 색깔
<파리의 딜릴리>를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명확한 비판지점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굳이 지적하기에는 너무 약소한 게 아닌가 싶어서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에 대한 특정한 판단을 끌어내기보다는 다 같이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을 짚어두고 싶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를 것이고, 그렇다면 다양한 생각을 듣고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게 영화를 보는 우리의 행복이 아닐까.
이 글은 스포일러가 있다.
피부색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향하는가
벨 에포크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제국주의 시대의 화려함을 바탕으로 환경과 여성을 비롯한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담론을 말한다. 영화는 ‘인간 동물원’에서 ‘인간’역으로 전시 중인 소녀 ‘딜릴리(프루넬 샤를 암브롱)’의 모습을 클로즈업하며 시작하는데, 이후 오렐(엔조 라트시토)이 그녀에게 다가가면서 카메라가 서서히 줌 아웃한다. 그러자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는 건 그녀가 정말로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아르바이트’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소년 오렐에게 일이 끝나고 4번 출구에서 만나자고 말한다. 그 후 화면은 시간을 넘어가고, 카나키 원주민의 생활상인듯하던 이야기는 딜릴리와 오렐의 대화를 통해서 산산조각이 난다. 파리의 주류 인종이 아닌 딜릴리가 적어도 평범하기만 할 것이라는 오렐의 상상은 그녀를 데리러 온 고급 마차를 통해 깨어진다.
초반에 제시된 오프닝 쇼트만을 보면 ‘Boy meet a girl’이라는 전형적인 청춘 로맨스 공식을 따르는 이 영화가 귀족인 ‘동물’과 노동자 ‘인간’을 합쳐 당대의 인종 차별 문제를 파헤치리라고 생각했다. 딜릴리는 피가 섞였다는 점에서 어디에서 속할 수 없는 것 즉 인간도 짐승도 아니고, 오렐은 현대(당대 기준으로)의 파리에 살면서도 노동자라는 점에서 그 문화적 수혜를 다 받지 못한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소년/소녀, 신체적 혼혈/문화적 혼혈이라는 두 가지 계열을 가진 채로 그에 맞는 이야기를 꾸릴 것으로 예상했었다. 소녀는 소년을 알아가고 소년은 소녀를 알아가리라. 신체적 혼혈인 딜릴리는 문화적 혼혈인 오렐과 친해지며 ‘혼혈’이라는 모호함의 프레임을 지우게 되리라.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고향에서 섞인 피로 차별받던 딜릴리는 프랑스로 향하는 배에 올라타 귀족 부인 엠마 칼베(나탈리 드세이)의 호의를 얻고, 그녀가 사는 파리에의 고급저택에서 함께 머물게 된다. 딜릴리는 귀족 부인으로부터 귀족들의 예법을 배우고 파리의 문화를 배운다. 이때 딜릴리는 (파리의 시각에서는) 문화적인 원시성을 벗어던지고 현대인으로 거듭난다. 복장은 화려하고 마차는 고급지니 그녀를 고상한 현대 파리로부터 떼어놓을 수 있는 건 단지 피부색뿐이다. 하지만 주인공 오렐을 비롯해서 파리의 인물들은 그녀의 피부색을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겉으로 구별되는 원시성인 피부색은 영화 초반의 ‘인간동물원’이 말하던 것과는 다르게 그다지 논의점은 아니게 되었다.
영화에서 딜릴리의 피부색을 문제 삼는 건 귀족 부인의 운전수 밖에 없다. 그는 딜릴리를 고급진 옷을 입은 원숭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조차 약간의 모욕감을 주기 위해서였을 뿐, 악역이었던 운전수가 죄를 회개하고 납치된 딜릴리를 구하러 갈 땐 이미 인종적인 차별은 온데간데없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피부색의 문제는 일단 시작은 했는데 어디에 안착하지는 않은 셈이다. 영화 속의 악역 단체 ‘마스터맨’이 그녀를 찾아다니며 인상착의로 거무튀튀한 피부색을 거론하기는 하지만, 그건 그저 용모에 관한 것일 뿐 인종적인 차별의 뜻을 담은 발언은 아니다. 오히려 상류층 파리 시민들의 피부색과 반대되는 하층민들의 피부색이 딜릴리의 그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의 피부색과 그에 따른 함의는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진다.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마스터맨 조직에 납치된 소녀들을 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러 인종의 소녀들이다. 당대 파리가 어떠했는지에 관한 고증은 애니메이션의 상상력으로 일단은 넣어두도록 하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인종적 다양성이 이 영화에 언급되게 된 이유다. 여성과 성소수자 그리고 난민과 같은 정치적 화두가 하나의 목소리로 떠오른 최근 모습에 맞추어 여러 인종들을 배분한 것일까. 아마도 그럴 테다. 확실히, 신체적 혼혈인 딜릴리가 납치된 소녀들을 구하는 모습은 인종 문제와 여성문제를 의식한 것이다. 영화 엔딩 크레딧에 “자신의 딸을 생각하며 이 영화를 만든 제작진의 이름”이 다섯 줄 정도 적혀 있는 것으로 그걸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영화가 여성 문제에 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주장은 합당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에서 인종에 관한 논의는 여전히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향하는지 그 귀결을 확정 지을 수가 없다. 그녀는 자신을 ‘카나키 인’이라고 말하지만 이 영화에서 카나키 인에 관한 언급은 영화 오프닝 크레딧의 인간 동물원을 제하면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도 영화 초반의 인간 동물원 장면은 아르바이트 생인 딜릴리의 존재로 추측해볼 때 다른 인물들이 정말로 카나키 인인지 혹은 자유롭지 않은 신분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물론 엔딩 크레딧에서 영화 스스로 여성 문제를 언급했다는 것이 이 영화가 여성 문제를 논하는 영화라는 것에 대한 확증은 될 수 없다. 그러나 영화 본인의 발언이기에 그만한 신뢰와 존중을 보낼 필요가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때 인종 문제는 확증을 받지 못한 상태이니 그 귀결에 대해서 우리가 의문을 한번은 품어볼 수 있지 않을까?
계급적인 문제 혹은 인종적인 문제
위에서 말했듯 이 영화에서 딜릴리의 피부색은 프랑스인보다는 까맣고 카나키 인 보다는 하얗다는 점에서 모호하다. 그런 딜릴리의 피부색은 영화 중간에 오렐과 딜릴리가 거쳐 가는 파리의 빈민촌에 거주하는 이들의 피부색과 유사하게 묘사된다. 그들은 씻지 못하거나 태양 아래에서 노동하는 탓에 피부가 하얗지 않고 새까맣다. 당대 산업혁명의 아이콘이 석탄이라는 점에서 숯검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것은 하얀 피부를 가진 고고한 파리의 이면에는 검은 눈물이 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딜릴리의 고향인 카나키가 프랑스 ‘제국’의 침략을 받았다는 점과 그녀와 노동자들의 피부가 유사하다는 점에서 검은 피부/제국주의 피해라는 기호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딜릴리와 노동자들은 당대 프랑스 제국주의의 피해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검은 눈물이라고 할 수 있으니, 영화에서 검은 피부색이란 계급적인 우위에 상관없이 제국주의의 나쁜 면을 대변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제국주의의 수혜를 어떻게 입었든 간에, 그것이 제국주의가 낳은 나쁜 면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딜릴리가 귀족 부인의 품에서 자라고 있지만 결국에는 고향으로부터 도피해온 것이듯 말이다.
그렇다면 검은 피부가 제국주의의 이면이라고 가정해보자. 영화에는 여러 유명인이 나오는데 그들은 모두 피부가 하얗다. 의사인 파스퇴르, 음악가 드뷔시, 건축가 에펠, 소설가 마담 프루스트. 그외 기타 등등. 이들이 하얀 피부를 지닌 게 그들의 명성이 고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단순한 생각일까? 단순하지만 마냥 터무니없는 생각인 것은 아니다. 제국주의의 시대의 아름다운 파리가 각종 식민지와 국내의 노동자들로부터 수혜를 입었음을 상기해본다면, 그들은 ‘노동자’들이 하지 않는 고귀한 일들을 하기에 피부가 그리 까맣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작중의 유명인들 대다수가 예술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도 그런 논리에 한몫을 더한다. 성악가와 작곡가, 조각가와 건축가 등등의 사람들은 하얀 피부에 더해서 검은 정장과 말끔한 복장을 하고 있고 그 중 유명한 이는 뒤에서 후광까지 비친다. 반면, 작중에 등장하는 빈민촌의 사람들의 행색은 꼬질꼬질하고 또한 반정부 단체인 ‘마스터맨’의 조직원도 대다수가 하층민을 영입해서인지 그다지 행색이 좋지는 않다. 즉 이 영화에서 피부색이 계급적인 무엇을 표현하고 있다는 주장은 합리성이 있다.
그럼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보자. 이 이분법은 엄밀하게 말해서 굉장히 허술하다. 파리의 빛이 예술이고 파리의 어둠이 노동이라면, 노동하면서도 예술을 즐기는 배달부 오렐은 둘 중 어느 자리에 놓아야 할까. 또는 반대로, 검은 피부를 지녔으면서도 노동하지 않는 딜릴리의 모습은 어느 자리에 놓아야 할까. 딜릴리가 노동을 피해 도망쳐왔으니 그래서 피부가 옅을 것이라는 주장은 그럴 듯 해보이나 합당하지는 않다. 만약 위에서 말했듯이 이 영화가 소년, 소녀를 만나다 식의 구원이라면 오렐이 딜릴리를 구원하는 것일 텐데, 이 영화는 그런 식의 구도로 짜여 있지도 않다. 오렐이 자신과 친한 여러 예술가에게 딜릴리를 소개하기는 하지만, 오렐은 오렐이고 딜릴리는 딜릴리일 뿐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인맥을 통해서 문제의 근원에 차분히 접근한다.
어쩌면 사회적 위치가 낮은 노동자 오렐과 인종적인 위치가 낮은 원주민 딜릴리는 그 계급적 구도의 유사점을 목격하고는 서로 친밀해질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오렐은 배달부이지만 예술적으로 박식하고 귀티가 나는 파리 사회의 일원이다. 딜릴리는 귀족이지만 예술적으로 보다 아쉽고 원주민의 피를 받아 파리 사회의 근본적인 일원은 아니다. 두 사람의 지위가 어떤 방식으로 정확하게 나누어지지는 않지만, 우리는 두 사람의 화합과 우정을 보면서 이 파리가 보이는 것처럼 완벽하지만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만약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영화는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현대의 관객이 과거의 파리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역사체험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것은 지구에선 본 달처럼 어두운 이면을 보여주지 않는 월광일 것이며, 때로는 아름다움보다 그 뒤의 진실이 더 고플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니 그런 맥락에서는 이 영화의 피부색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인종 문제를 덮어두자는 것이 아니라, 어찌 됐든 그들이 향하는 목적지가 파리 사회의 어둠에 관한 탐구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는 뜻이다.
현대인들에 대한 현대인들의 비판
이런 결론이 결정론적인 사고일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우리가 이 영화의 결말을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만약 결말을 보지 못하고 두 사람의 여정만을 보았더라면, 이 영화의 전개는 미궁에 빠졌을 것이다. 그런 흐름으로 이 영화는 비판점이 명확하다. 이야기의 흐름은 여의치 않고 결론만을 성급히 내버린다는 점이다. 여성들을 납치해 남성들의 파리로 회귀를 꿈꾸는 악의 집단 ‘마스터맨’을 쫓는 게 작품의 주요 서사인데, 영화는 그들에게 납치된 여자아이들을 구하는 장면에서 끝을 낸 후 남은 범죄자들은 잡혀서 법의 심판을 받았다는 문구로 후일담을 대체한다. 선은 이기고 악은 처벌받는데, 영화는 선이 이기는 장면 즉 두 주인공의 여정에 대한 대가만을 보여주고 그 후의 잔혹한 현실은 배제함으로써 이중적인 자세를 취한다. 전래동화 한 편처럼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훈훈함을 내뿜는 이 영화는 아무쪼록 너무 순한 맛이 아닐까 싶은 느낌이 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점과 파리의 유명인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훌륭한 아동 애니메이션이다. 그러나 성인이 보아도 재미있고, 따라서 이 영화를 누가 보는지에 따라서 어느 정도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이 영화는 그럭저럭 재미도 있고 교훈도 있다. 반면, 어른의 시각은 늘 엄격하기 마련이다. 다만, 이 영화를 보는 어린이들은 가족과 함께할 것이므로 아무쪼록 ‘가족의 시선’도 선택지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세 가지의 시선이 있는데, 아이의 시선은 우리가 알 수 없고 어른의 시각은 이 영화에 적용하기에는 너무 가혹한듯하다. 그러니 우리는 가족의 시선으로 이 논의에 대한 결말을 맺도록 하자.
만약 부모가 딸에게 이 영화를 보여준다면 엔딩 크레딧의 문구처럼 저런 끔찍한 미래에 자녀를 살아가게 하고 싶지 않아서 일테다. 혹은 지금의 여권신장이 저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영화 속 딜릴리의 모습은 충분히 여성운동가의 면모로도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아들에게도 영화 속 마스터맨에 대한 경멸을 전함으로써 올바른 성인식을 심어줄 수 있을 테다. 그러나 이런 교훈적인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파리 사회가 지금의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아쉬운 점이 있다.
이 영화가 제국주의의 벨 에포크 시대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벨 에포크 시대의 위인들이 현대의 이데올로기를 영화 밖의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 대한 우리들의 비판의식으로도 읽을 수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요컨대 그런 끔찍함이 자행될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물음은 현대의 IS가 저지르는 성범죄에 무관심한 세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던져질 수 있고, 그렇다면 이 영화의 ‘현대 파리인’들은 요즘 사회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의 정치적 외면 또는 무관심과도 결부될 수 있다. 그리고 영화 속의 ‘현대인’들은 벨 에포크라는 제국주의적 역사 요즘으로 보면 타인의 뼈 위에서 피를 보존하는 이들에 대한 재현일 것인데, 이런 부분에 대한 논점을 영화 곳곳에서 던져 놓고서 결말에서는 여성문제만을 언급한다는 점이 꽤 아쉽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나의 노파심은 이 영화가 메시지를 너무 많이 깔아두었고 그것을 전부 회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귀인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모두 말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느슨한 완성도인 것만은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영화에서는 ‘카나키 인’이라는 딜릴리의 자조가 인물의 대화나 신문 등을 통해 여러 번 등장한다. 그러나 결말에 가면 그런 논의는 사라진다. 깔끔한 결말을 위해 이야기를 쳐낸 것은 좋은 선택이지만, 그렇다면 전개과정에서 잔가지들을 덜어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