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은 집으로 돌아간다,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
영웅을 믿지 말고, 영웅이 되어라
이 영화는 마블의 만화를 원작으로 했고 그에 대해선 코믹스 팬들이 더 잘 알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영화 속에 담긴 만화사적 의의와 재미에 관한 설명은 그들에게 넘겨둔다. 다만 이 영화가 지금 우리 시대에 도착하게 된 과정과 연유는 다 같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지금 우리에겐 불안한 사회가 있고, 그래서 영웅들이 속속들이 모여든다. <어벤저스>의 영웅들은 1편에서 뭉쳤고 2편에서 분열했으며 3편에서는 공공의 적을 만났다. 아마도 이런 흐름에 따르면, 곧 개봉할 4편은 공공의 적으로 파멸되었던 현실 자체를 부정하거나 조작하려는 류의 이야기일 것이다. 비슷한 영웅들의 모임인 <엑스맨 :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가 잘못된 현실을 바로 잡으려 시간 여행이라는 초월적 도구를 사용했듯이, 지금 이 시대에 벌어지는 큰 사건들이 처음부터 없었으면 하는 ‘현실조작’의 힘이 타노스에게 주어졌다. 그런 타노스는 모든 영웅이 한 번에 덤벼도 죽지 않을 불멸자로 묘사되며,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어떤 영웅이라도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주어졌다. 이 우주적 악당의 등장은 이전까지 나왔던 사소한 악당들을 모조리 ‘쩌리’로 만들어 버렸고,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마주했던 문제는 고작 ‘쩌리’에 불과했을 뿐 앞으로 더 큰 우주적 재앙이 남아있다.
십여 년에 걸친 마블 영화의 행진을 바라보며 무언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면 <어벤저스 3>의 도착지점이 우주적 재앙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아니라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그 우주적 존재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 닥친 재앙이다. 그렇다면 이 재앙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럼에도 그들은 실패를 딛고 일어나 사악한 타노스를 무찌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언제까지 영웅이라는 특출난 개인, 타자에게 문제 해결의 과오를 맡겨둔 채로 제 갈 길만을 갈 것인가. 우리 스스로가 영웅이 되어야 한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영웅을 믿지 말고, 영웅이 되어라.
어떤 체계의 유령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는 이른바 시점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전지적 관찰자가 될 수는 없다. 가까이 있으면 보이지 않던 게 멀리서는 보이기도 하지만 그 누구도 멀리까지 갈 수가 없다. 우리는 결국 지구라는 운명 공동체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은 여러 시점으로 분할되어 많은 갈등을 빚고, 그것들을 모아보면 비로소 대략의 윤곽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영웅들이 특별한 개인이자 평범한 사람이라는 문구는 히어로 영화 곳곳에서 강조되는데, 국회의원을 설명할 때도 우리는 같은 표현을 쓴다. 일반 시민을 대리해 의사권을 행사하는 이들이 바로 국회의원이다. 국민의 투표가 그들을 뽑았고 그것은 곧 국민의 의무를 ‘대행’하는 이들이라는 뜻이다. 이 대행은 말 그대로 대행일 뿐 권력이 아니라 그저 시민의 의무 중 하나일 뿐이다. 즉 우리는 동등하다.
물론 국회의원이 히어로 영화 속의 영웅들이 될 수는 없다. 국회의원은 거미줄도 없고 방패도 없으며 인공지능 슈트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신체적 능력이 아니라 어떠한 시선의 대리자로서는 영웅으로 기능할 수가 있다. 요컨대 진정한 영웅이란 헐크처럼 자아를 잃고 난동을 부리는 신체적 강자로서의 난봉꾼이 아니라, 모두의 의견을 하나로 모아서 원활하게 이끌어 가는 리더쉽이라고 200년대 이후의 히어로 영화들은 말해왔다. 냉전이 끝나자 파괴적인 이성은 사라졌고, 감성처럼 따스한 ‘이성’이 우리 앞에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그런 것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건 근본적으로 피터 파커라는 인물이 자본의 가난함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정치란 먹고 사는 것에 도움이 안 되는 것에 불과하다. 공사장에서 일하며 하루를 사는 이들에게는 티브이를 보며 현실 정치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결국 가난과 저학력으로 인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공사판으로 흘러들어온 이들이 사회 구조 개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서 다시금 가난과 저학력에 빠지게 되는 굴레에 빠지고 만다. 이 굴레를 어떻게 끊을 것인가. 이에 대해 <스파이더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사람들은 이 문구를 갑자기 주어진 힘을 바른 곳에 사용하라는 상투적인 동기부여 문구쯤으로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의 역할을 떠올려 볼 때 정말로 무서운 교훈이다. 왜냐하면 피터 파커의 힘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로또와 같은 이 힘을 사용하는 것에 ‘왜’ 큰 책임이 필요한지 우리는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것을 피터 파커가 거주하는 자본주의 시장의 체계 안으로 편입해 보았을 때, 큰 힘으로 다른 재화를 구매하는 것에는 큰 쾌락이 생길 뿐 책임이 필요하지는 않다. 돈을 쓰는 것에 책임이 필요하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애초에 시작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돈을 써야만 사회가 돌아가기에 돈을 쓰는 것에 책임을 부여한다면 책임을 피하려 사회에 참여하지 않을 테니까.
아마도 당신은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눈치챘을 것 같다. 돈이라는 게 힘으로 작용하는 사회에서 어느 날 갑자기 큰 힘을 부여받은 피터 파커의 모습은 그야말로 아이러니 그 자체이다. 그는 빈털터리이지만 신체적으로는 힘이 있다. 요컨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방식으로 살고 있지 않은 게 피터 파커이고, 다시 말해서 피터 파커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이면을 시원하게 긁어줄 수 있는 인물이다.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히어로가 스파이더맨이기도 하다. 그는 거미줄을 뿜으면서 빌딩 숲 사이를 활공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인사하는 히어로이다.
이것은 마치 자본주의 사회가 가시화된 세계이고 그 이면의 보이지 않는 세계, 반대된 체계의 왜곡된 세계,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이가 마치 ‘유령처럼’ 도심 한복판을 활공하는 느낌을 준다. ‘친근한 이웃’이라는 스파이더맨의 아이덴티티는 어쩌면 그가 일상 속에 체화되어 있기에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권력의 흐름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한다. 이것은 냉전 시대에 자본주의의 반대편에 자리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은유하면서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곳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을 심어주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냉전 시대가 아니다. 냉전이 아니라, 냉장고와 같은 시대다. 무언가를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게 더 속이 편한 시대가 되었고, 과거의 침묵이 권력의 협박에 의해서였다면 현대의 침묵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등을 돌렸다는 점에서 더욱 슬프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요즘의 스파이더맨은 어떤 체계의 유령으로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일까.
어딜 가나 세상은 똑같다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를 보며 생각에 잠기게 된 지점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평행차원의 여러 영웅(스파이디)들이 이곳으로 넘어온다. 즉 이곳의 영웅으로만 적을 막기에는 모자라서 다른 차원의 영웅까지 끌어들였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곳으로 소환된 계기와 소환된 후에 남겨진 그들의 차원이다. 스파이디 친구들은 금발 벽안의 타칭 ‘완벽한’ 스파이더맨의 죽음으로 이곳에 소환되었다. 말하자면 타의에 의해서 차원을 뛰어넘게 된 이들은 차원은 달라도 하나의 신념으로 생전 처음 보는 모랄레스(셔메이크 무어)를 도와준다. 그리고 모랄레스의 의무는 앞서 죽었던 선대 스파이더맨(크리스 파커)가 맡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의 신념이 정상적으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이 임무를 맡아야 하며 그래서 이 영화가 말하는 어떠한 ‘지점’은 이제 곧 다가올 마블 영화의 한 시대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는 그들의 기조 문구가 타의에 의해 주어진 ‘큰 힘’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모랄레스가 갑작스럽게 떠맡은 이 임무를 큰 힘에 대응시킬 수 있을 것 같다. 피터 파커는 죽어가면서 모랄레스에게 네가 아니면 이 일을 할 사람이 없다면서 꼭 수행해달라고 약속하자고 말한다. 이 시점에서 모랄레스는 스파이더맨의 의무를 계승했고 그래서 사실상 그가 스파이더맨이 된 시점은 거미에 물린 때가 아니라 피터 파커의 죽음을 목격했을 때이다. 그리고 다른 차원의 스파이디들이 이런 의견에 동조하는 것도 이 하나의 기조에 동의하기 때문이며, 그런 맥락에서 스파이더맨의 의무란 그들이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거나 그들에게만 인지되는 특수한 이데올로기인 셈이다. 요컨대 스파이더맨이 자본주의 사회의 이면에서 보이지 않는 어떠한 불합리들을 ‘감지’해내는 영웅이라면, 위협을 감지하는 스파이더센스란 우리가 마주할 불합리를 예고하고 수면 아래에서 위로 끌어 올리는 것일 테다. 이건 곧 지식인(知識人)의 책무이기도 하다. 다른 표현으로는 지식인이 아니라 그런 지식을 유도할 수 있는 사회적 영웅이기도 하다.
지식인의 개념이 무엇이고 그들의 책무가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은 영화 밖에서 따로 공부하도록 하고 우리는 이 영화에서 나오는 지식인들의 행태를 묘사해보아야 한다. 우리 세계에만 모자라서 다른 세계의 것들까지 끌어오는 이 영화의 발칙함은 지구를 넘어 우주와 아스가르드로 퍼져 나가는 마블의 영화보다 앞선 것이다. 지구가 아니라 우주로 눈을 돌려 갈등과 구원을 찾던 시대는 갔고,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그들로부터 구원을 얻고 싶어한다. 이 세계에서 죽은 사람이 다른 세계에는 살아있을 것이라는 시공간 차원의 존재론은 차치하고, 이 세계에서 죽은 정의가 다른 세계에는 살아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이 무참히 깨어지는 순간을 우리는 이 영화에서 목격한다. 피터 B. 파커(제이크 존슨)와 그웬 스테이시(헤일리 스타인펠드)와 느와르 갱스터(니콜라스 케이지)와 페니 파커(키미코 글렌)와 피터 포커(존 멀레이니)의 세계에도 위협은 있었고 그런 위협을 당하던 중에 이곳으로 납치되어 온 그들의 모습은 어딜가나 세상은 똑같다는 회의감을 주는 것에 일조한다. 더욱 슬픈 것은 그들이 그들의 차원에 두고 온 온갖 범죄가 있을 것임에도 이쪽 차원의 의무를 다할 땐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는 점이다.
오직 이쪽 차원의 의무에 맞추어 설계된 이 영화의 방법론이 비판받아야 한다면, 애초에 이런 종류의 평행세계를 다룬 작품들 모두를 비판하게 될 것이다. 다른 세계로 다른 세상에는 지금보다 더 나은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결코 헛되지가 않다. 이념이 매몰이 아니라 희망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기도 한 것처럼, 그 종교적인 기반의 구축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 도움을 줄만 하다. 그중에서도 이 영화의 영웅들이 이곳 차원에서는 몸이 산산이 부서지면서도 그다지 개의치 않아 하고 또한 그럼에도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확실하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도대체 언제부터 영웅에게 집이 있던 걸까. 서부개척시대와 그에 파생된 모든 여행자가 불현듯 찾아와 불현듯 떠나버린다. 영화는 그들이 왜 그리 강하고 어디서 왔고 어디로 향할 것인지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가 아니라 관객의 차원에서 상상으로 해결된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 영웅들에게 집이 주어지는 경우는 둘 중의 하나밖에 없다. 첫 번째, 가족이 있거나. 두 번째, 그곳이 모나지 않은 무덤이거나.
내 이웃의 집은 어디인가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들의 집은 어디인가. 이때 집이라는 단어는 정말로 그들이 거주하는 거주지가 아니라 마음을 둘 안식처가 어디인가에 대한 용례로 사용된다. 피터 파커의 DNA가 차원이동기기에 스며들어 다른 차원의 스파이디들을 불러오는 장면에서는 어쩌면 이 시대가 원하는 영웅상이라는 게 만약에 만약을 거듭하면서 모든 경우의 수를 소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러분. 여기 하나의 영웅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 영웅은 이런 형태로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전의 과학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자꾸만 묻고 결국에는 철학으로 담론을 넘겨주었던 것을 떠오르게 한다. 원자는 어떤 형태로 존재할 것인가. 이 지구는 둥근가 네모난가. 사실 이에 대해서 가장 명쾌한 해답은 지금 당신이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을 믿으라는 지금-이 순간의 인상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른바 클로드 모네의 인상적인 풍경들. 그러나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는 그러한 인상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지금 이 시대에서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여러 영웅들을 불러오는 게 마블의 영화라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스파이더센스로 차원과 시간을 넘어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이 영화의 모습이다. 마치 <셰이프 오브 워터>가 지구 상에 인간의 손이 닿지 않던 원시 우림에 숨겨진 태초의 인류를 데우스 브랑퀴아라는 모습으로 꺼내왔듯이, 그러한 타자는 우리가 단지 인식하고 있지 뿐이어서 다른 차원으로 인식되는 시공간으로부터 호명된다는 점을 떠오르게 한다. 타자. 얼굴을 가리고 행동하면서 경찰과 위치적인 대립을 겪는 자경단 스파이더맨의 모습은 타자다. 우리와 다른 능력을 지녔다는 점에서도 그는 타자이며 방사능 거미에 물려 자신의 소중한 이들을 잃게 되는 비극적 스토리 또한 ‘타자’로 여기고만 싶다. 그가 정말로 타자라면 우리는 그 혹은 그녀를 외면했을 것이며 우리가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은 그들이 사실은 타자가 아니라는 점을 잘 말해준다. 요컨대 이 여섯 명의 스파이디들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우리가 사는 차원에서 유령의 형체를 벗고 종교적 믿음의 형태로 체현한 것이다.
만약 이 영화를 어떤 미술적 사조로 분류할 수 있다면 아마도 큐비즘에 가까울 것이다. 당신은 시종일관 만화적 리얼리즘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영화가 어째서 팝아트가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소니 Sony가 이 영화의 ‘팝’함을 위해 만든 기술이 특허까지 났다는 기사가 났을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무엇인가. 현실 세계의 이데올로기의 영역 밖에서 비가시화 된 그러니까 마치 자외선의 형태로 우리 곁을 떠도는 이 유령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유령들은 단지 우리 세계의 추상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여러 가정도 존재할 수 있었고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표시이다. 그래서 영웅 하나의 희생이 다음 세대의 영웅인 모랄레스를 불러내었고, 이 작은 아이에게 가르침을 주려면 무려 다섯 번의 만약을 거듭해야 했던 것이다.
다섯 방향의 시선으로 현실을 새롭게 보자. 피카소가 그러했듯이 두 갈래의 현장을 한군데에 모아 애달프게 손수건을 물어뜯는 여인의 얼굴이 보이고, 이것을 단지 찌그러진 여인의 얼굴로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영화 속에서 차원 이동의 부작용을 겪는 스파이디들의 모습처럼 보인다. 그녀의 얼굴은 여러 시선의 집합체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그녀의 표정을 짓게 한 이 시대의 여러 담론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마치 지하철역의 플랫폼처럼, 큐비즘이라는 이름의 입체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스크린이 아니라 우리 현실에서 어떠한 현상을 가시화하고자 하는 3D 시네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