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왕 랄프와 시네마의 미래

by 수차미


주먹왕 랄프와 시네마의 미래


전작이 게임을 다루었다면 이번에는 인터넷을 다룬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실망감을 토로한다. 게임에 대해 다루는 영화는 얼마 없었는데 이젠 그것마저 빼앗아 가느냐고. 더욱이 작품 속 캐릭터가 갖는 정체성이 게임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스티븐 스필버그도 <레디 플레이어 원>을 통해 게임이나 현실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했고, 그의 발언을 큰 범주로 보면, 게임은 더 큰물에서 놀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바넬로피가 슈가러쉬를 떠난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늦게 도착한 게 아닐까 하는 마음도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디즈니 프린세스의 일원이며, 그동안의 공주들은 단지 집으로 돌아오기만 했기 때문이다.



81061162108_727.jpg?type=w966 영화 <주먹왕 랄프 2 : 인터넷 속으로>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그녀들의 현실은 무엇인가


이 영화의 예고편은 디즈니 프린세스라고 불리는 디즈니의 공주들이 바넬로피를 맞이하는 장면이다. 디즈니가 자조적인 농담 삼아 던진 이 장면에서 우리가 찾아내는 건 지난 수십 년의 역사이다. 그녀들은 광고 팝업을 띄우다가 도망쳐온 작은 소녀에게 당신도 공주가 맞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 공세들은 우리가 그동안 시나리오를 분석할 때 사용했던 어느 이론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른바 스토리텔링이라는 그 용어의 기원을 거슬러 오르면 인류 최초의 소설인 길가메쉬에 도달하게 된다. 길가메쉬와 랄프가 비슷하게 느껴지는 건 우연일까. 여기서 방점은 소설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이다. 스토리텔링이란 보는 이로 하여금 작품 속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면서도,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은밀히 삽입하기도 한다. 요컨대 이솝 우화나 단군 신화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동물들이 웃고 떠드는 게 아니라 저 포도는 시어서 먹을 수 없을 것이라는 어리석음에 대한 조롱이다. 다시 말해서 디즈니는, 그동안 공주를 논했던 화법과 그 뒤에 숨어있었던 이데올로기를 이 장면을 통해 반성하고 있다.


그녀들의 질문을 나열해 본다. 공주에게 남자가 필요하고 고난과 역경이 필요하며 슬플 때 노래를 부르면 배경이 바뀌고 노래가 들려온다. 아마도 이것은 할리우드의 고전 뮤지컬에서 따온 클리셰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 이 작품들의 원전이 된 것들과는 거리가 있다. 백설공주나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원전에는 오히려 그녀들보다는 주변 인물의 이야기가 더 도드라져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동화가 아닌 시네마라는 영상 매체로 옮겨올 때 상상은 제약되고 장소도 제약된다. 요컨대 그들의 관객의 이입 대상은 공주를 구한다는 상상이 아니라, 영화관에서 스크린으로 구해질 것이라는 공주됨의 가치인 셈이다. 즉, 그동안의 디즈니가 공주 영화를 통해 관객을 현혹하는 방식은 주체적이지만 사실은 주체적이지 못한, 무대 위의 배우였다.


디즈니의 지난 공주 영화에서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다. 공주라는 고고한 타이틀에 따라붙는 치장들은 어미에 붙는 사족처럼 느껴져 불편하다. 왜 공주는 편하게 살면 안 되는 걸까. 이 영화에서 바넬로피의 후줄근한 복장을 훔쳐 입은 그녀들이 무척이나 만족하는데 디즈니의 영화에서는 늘 신부복장이 필요했던 것 같다. 예외라면 <모아나>정도가 있겠지만 이 영화는 그 영화의 후속작이라는 점에서 계보를 공유하고 있다. 즉, <모아나>는 <주먹왕 랄프2>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성향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답답함을 느낀다. <모아나>나 <겨울왕국>을 통해 주체적인 여성상을 내세운다고 그들은 말했는데, 주체적인 여성상만이 문제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느낀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녀들의 행보는 다음으로 귀결된다. 어딘가로 떠나서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금 집으로 돌아온다. 이 문장을 읽은 당신은 이게 뭐가 문제냐고 묻겠지만, 바넬로피의 집인 슈가러쉬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면 큰 문제가 된다. 슈가러쉬는 1980년대에 출시했으며, 말하자면 구시대의 산물이다. 개발과 보존이라는 두 가지 관점 아래에서 게임기의 행보는 갈리겠지만, 어찌 됐든 구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디즈니 공주들이 느낄 감정은 명확하다. 우리는 과거일 뿐인가. 그렇다면 신시대에 자리를 넘겨주고 사라져야 하는가. <주먹왕 랄프>에서 그들이 떠났던 모험담이 바로 그것이었다. 사악한 킹캔디는 폐기처분이 된 기기에서 도망쳐와 슈가러쉬에 정착해 바넬로피를 내쫓았다. 이에 바넬로피는 정권을 수복하면서 자신의 구시대가 아직 건재함을 널리 알린다. 영화가 그녀의 발언에 추가하는 사항은 왕정에서 대통령제로의 변화를 선포하는, 구시대에서 신시대로의 변화였었다.


<주먹왕 랄프2>는 전작과 6년의 간극이 있는데 작품 속에서도 같은 시간이 흘렀다. 바넬로피와 랄프는 매번 같은 데이트 코스를 다닌 나머지 권태를 느끼고 있고, 그건 슈가러쉬도 마찬가지다. 전작에서의 부흥으로 낡은 게임기에 인기가 붙었는데, 과도한 인기로 너무 많은 게임을 즐긴 나머지 그녀는 이곳에 질려버렸다. 말하자면 전편에서 신시대를 약속한 그녀는 다시금 구시대에 남겨진다. 하지만 우리는 이때 디즈니 프린세스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공주들이 모험을 떠나 자신과 공동체에 부재한 담론을 획득하는 이야기들. <겨울왕국>의 엘사가 드레스를 입고서 자신을 내려놓았다면, <모아나>의 모아나는 보통 옷으로 부족을 깨우친다. 공주 콤플렉스를 내려놓거나, 공주 콤플렉스가 애초에 없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른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이야기, 그러나 그녀들은 여전히 집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레디 플레이어 원>처럼 해답은 근본적으로 현실에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가상현실을 주제로 한 그 영화에서 집과 현실은 서로 대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집과 현실이 서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건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고, 말하자면 디즈니 프린세스의 집과 현실은 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녀들의 현실은 무엇인가.


요컨대, <주먹왕 랄프 2>가 말하고자 하는 게 그것이다. 그녀들의 현실은 무엇인가. 그녀들의 꿈은 무엇인가. 그녀들이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다시 말해서, 그녀들의 현재가 현실이 될 수 있는가. 그래서 바넬로피는 낡은 구시대를 떠나 새로운 게임에 정착해야 했다. 그리고 이 변화는 단 6년 만에 일어났다. 게임 속 세상에서 인터넷이라는 광활한 대지로 옮겨온 이 영화에는 우리가 시대의 변화를 어떻게 인식하는지가 담겨있다. 6년 동안 세상은 너무 변했다. 그러나 담론은 너무 변하지 않았다. 공주는 공주가 아니지만, 집은 여전히 집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디즈니는 단계적인 변화를 거쳐 공주의 계보를 써내려간다. 너무나도 익숙한 슈가러쉬의 길들,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그들에게 내려진 처방은 와이파이를 통한 인터넷 세상이다. 바넬로피와 랄프는 자신들의 고향을 구하려 낯선 세상으로 떠난다. 여기까지는 이전까지의 영화들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바넬로피는 줄곧 고뇌한다. 이 변화는 작품 중간에 디즈니 프린세스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 게 아니다. 작품의 시작 전부터 이미 예견되어 있던 사항이다. 그래서 그녀가 뜬금없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그녀의 말처럼 “나 장단을 맞추고 있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의 장단에 맞추어야 하는 디즈니의 모습은 온갖 익숙한 것들이 자사의 IP(지적재산물)임을 강조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디즈니는 너무 많이 가졌고 그래서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 바넬로피를 체포하려 드는 스톰트루퍼 군단의 <스타워즈>도 그러했고, 역사의 한구석에 처박힌 소닉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내용도 장르도 다른 두 콘텐츠는 최근 들어 침몰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스타워즈>의 PC 논란과 소닉 신작 게임에 던져진 썩은 토마토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말하자면 언제까지나 신세대일 수는 없음을 몸소 입증한 그들의 모습에서, 어쩌면 우리는 과거는 아무리 최신에 대응해보아도 과거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즉, 디즈니의 프린세스들이 방안에 갇혀 수다나 떨고 있을 때, 디즈니의 신세대인 바넬로피만이 밖으로 뛰쳐나오는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81061162103_727.jpg?type=w966 영화 <주먹왕 랄프 2 : 인터넷 속으로>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평면과 입체라는 이름의 대륙


이 영화를 보며 스탠리 큐브릭의 우주를 떠올린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바넬로피와 랄프의 모험담을 보며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그것은 한순간의 유희에 불과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큐브릭의 우주가 그로테스크함을 기반으로 했다는 걸 떠올렸으며, 그런 느낌은 곧 애니메이션적 상상력이 현실에 적용된 결과라는 것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전장의 한복판에서 상관에게 대들고 핵폭탄을 뿌리고 낯선 이의 섹스를 보며 도끼로 문짝을 내리찍고 우주에서 환각을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애니메이션의 상상력이다. 큐브릭의 우주는 평면인데 그들은 입체이기에 필사적으로 탈출하려 한다. 요컨대 그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시각에 담겨있기에 우리는 그걸 단박에 알아차리지 못한다. <인터스텔라>에서 5차원 공간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려 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큐브릭은 보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이란 게 현실의 담론을 끌어온다면 그 시각효과는 스크린 위의 입체, 눈에 띄어야 하는데 눈에 띄지 않는 시각적 이질감을 품게 된다. 그리고 <주먹왕 랄프2>의 담론, 그녀의 현재는 어디인가. 이것은 작품의 도입부에 평면을 달리는 이들의 이야기인 <트론>을 보여준 것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로도 게임으로도 존재하는 그것에는 입체들이 평면에 들어갔을 때 벌어지는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현상이 아니라 현존으로서, 우리에게는 오류라는 친숙한 말로 표현된다. 즉 이 영화는 무언가를 얻고 획득하는 게 아니라 필사적인 탈출을 하려 한다.


바넬로피가 무너지는 슈가러쉬와 슬로터 레이스에서 탈출할 때, 그것은 이 영화가 기존의 디즈니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두 개의 무너진 게임에는 두 개의 인물이 있고 그러나 그들은 같은 현장에 존재하지 못한다. 슈가러쉬가 무너질 때 바넬로피와 랄프는 함께였고 슬로터 레이스가 무너질 때 바넬로피는 혼자였다. 이것은 그들이 정말로 땅 위에 서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 바넬로피와 랄프가 한 몸으로 붙어다닐 때 그것은 일종의 권태를 유발했다. 유발이라는 단어는 딱딱해 보이지만 적절한 용례이다. 왜냐하면 그녀 스스로 말하듯, 매일 같은 코스를 돌던 슈가러쉬에서 탈출해 와서도 매일 같은 데이트 코스를 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관계는 일종의 관습이다.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이 제목과 내용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들의 관계가 주체가 아닌 타자로 변형될 때, 그곳에는 끔찍함에 끔찍함이 더해진다. 악몽의 중첩, 자아를 가진 유령, 내 몸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내 몸이 아니었다는 도둑맞은 신체. 그녀의 자아가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바넬로피는 노래를 부르게 된다. 말하자면 그녀의 공주로서의 자각은 여타 다른 디즈니 프린세스들처럼 현실에 내쳐졌을 때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진단했듯이 그녀에게는 도둑맞은 신체가 있다. 전원이 꺼지고 인터넷 세상에 내쳐지자, 신시대 같은 구시대에서 진짜 신대륙으로 넘어온 순간 그녀는 현재를 자각한다. 즉, 그녀는 혼자가 된다. 동료가 없다는 게 아니라 도둑맞은 신체의 이질감을 지우고 나 자신으로 세상에 남는다. 이제 그녀는 혼자다. <공각기동대>의 소령이 그러했듯이, 분할된 신체의 이질감이 인터넷 세상으로 전송(transmit)된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포스트휴먼이다.


길가메쉬와 랄프가 비슷하게 느껴지는 건 우연일까. 라는 질문의 부메랑을 여기서 받는다. 소설의 주인공 길가메쉬는 젊음과 영생을 얻으려 모험을 떠난다. 그러나 모험은 좌절되고 그는 사망한다. 요컨대 그는 인간이 지니는 한계점을 최초로 드러낸 인물이다. 이것은 설화이기에 소설이자 교훈이다. 그렇다면 어떤 교훈인가. 인간이 지니는 한계점은 바로 죽는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렇기에 우리가 당연함을 인지할 수 없다. 말하자면, 랄프의 모습이 길가메쉬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그들이 영생을 탐하러 떠나는 여행길에 빗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정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들은 탈출한다. 게임기가 리셋되어도 살 수는 있지만 게임기가 꺼진다면 다시는 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구대륙은 파괴와 재건을 반복할지언정 이제는 정말로 안녕을 고해야만 한다. 구대륙에 안녕을 고해야 하는데 그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바넬로피와 랄프는 구대륙을 구하려 신대륙에 발을 내디딘다. 그런데 그곳에는 구대륙이 구대륙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있다. 바넬로피의 현재를 보여주는 디즈니 프린세스들이 전시된 그곳에서 우리는 식민지 시대를 목격한다. 디즈니가 정복했던 어린 아이들의 시네마가 그곳에 있다. 어쩌면 프랑스 혁명 이후의 왕궁이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던 것일 수도 있다. 과거는 과거를 전시하는 장소가 된다. 말하자면, 자신은 자신을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다시 말해서, 구대륙은 구대륙을 드러내는 장소가 된다. 오직 인터넷 세상에서만 슈가러쉬가 구대륙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정확하게는 게임기가 자리한 오락실일 테다.


구대륙과 신대륙이라는 이름의 신체가 영화 속에서 전시된다. 비슷하지만 다른 모습의 그곳은 아기자기하지만 지루하고 따분한 오락실 속 슈가러쉬이자, 폭력적이고 거칠면서도 클라이언트의 형태로 제공되는 인터넷 속 슬로터 레이스이다. 아마도 언젠가 그곳도 바넬로피에게는 시시한 곳이 될 테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까지 예상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이제 집 없이 떠도는 노마드가 되었다는 것이며, 어쩌면 이것은 서부 개척 시대에 악당들을 포착하려 다니던 존 웨인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 노마드는 집이 없는 게 아니라 대륙 전체를 집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대륙은 미개척지가 즐비한, 골드러쉬로서의 탐욕이 만개해 있다. 골드러쉬, 그리고 물질문명. 다시 말해서, 인터넷 속 세상에 빠져든 바넬로피의 모습이 아직 잘 모르는 곳이 많은 서부 시대의 골드러쉬, 슈가러쉬, 혹은 슬로터 레이스라는 점에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이것은 트랜스 휴머니즘이면서도 포스트휴먼은 아니다. 이 영화에 따스한 휴머니즘은 있어도 인간을 초월한 것은 없다. 인간을 초월한 것은 불우한 마을에 와서 여자와 아이를 구하고는 다시금 떠나간다. <자토이치>, <요짐보>, <셰인>. 왜냐하면 그들은 원래부터 노마드(방랑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감정조차 세상을 떠도는 건 아니다. 바넬로피와 랄프는 우정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우정 혹은 신념, 만약 우리가 그들이 인터넷 속 세상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인간 이후 취급을 한다면, <트론>이 우리에게 남긴 잔재마저 산산이 무너뜨리는 게 될 것이다.



81061162110_727.jpg?type=w966 영화 <주먹왕 랄프 2 : 인터넷 속으로>의 한 장면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신체/현존은 떠돈다


물론 영화가 말하려는 건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작품은 이베이에서 슈가러쉬 게임기의 손잡이를 구매하는 게 주요 서사지만, 돈을 모으고 나면 랄프가 결제해서 어떻게 잘 오락실에 도착했다는 것으로 대충 넘어가 버린다. 만약 슈가러쉬의 구원에 관한 서사라면 1편이라는 훌륭한 대안이 있고, 동시에 영화 속에서 그 과정을 생략하지 않았을 테다. 바넬로피의 목걸이가 부서지는 모습과 그것이 반으로 나누어진다는 점은 우정은 한 곳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일 테다. 사실 어른이 보기에 그들의 관계는 친구가 아니라 썸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건 우정이 아니라 사랑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데이트메이트라는 조어가 떠오른다. 이 단어는 사랑하진 않지만 사랑하는 척은 하고 싶은 이들이 만들어냈다. 마치 짐 자무시의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처럼,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관계를 맺어야만 했던 게 아닐까 하는 무시무시한 상상도 해본다. 하지만 상대는 디즈니다. 이것은 그저 망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변형해볼 수는 있다. 그들은 왜 살아남아야 했나. 인터넷 세상에 사는 그들의 모습은 여타 다른 디즈니 영화의 공주처럼 현실의 위협이 아니다. 자신의 집에 처박혀 있다면 사실상의 불멸자다. 그러나 불멸자는 구태여 필멸로 나아간다. 반대로 생각하면 인터넷 세상으로 자아를 넓히는 행위가 죽음에 가까울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포스트 휴먼의 새로운 운용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불멸, 인간이 아니게 되면 인간이 갖는 죽음이라는 정체성을 잃는다고 우리는 생각해왔다. 그러나 사실은 인간의 가치가 죽음만이 아니라고, 또는 죽음만이 과연 정체성을 이루는 것이냐고 그들은 묻고 있다.


너무 갑작스럽지만 주제를 돌리고 싶다. 그러나 기수는 북북서로 동일하다. 우리는 이 영화에 포스트 휴먼이 아니라 포스트 시네마를 소환할 수 있다. 바넬로피와 랄프가 왜 인터넷 세상으로 나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은 넷플릭스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오락실 입구를 보여주는 쇼트에서 시작해서 오락실 입구를 보여주는 쇼트로 끝나는데, 오락실 주인이 말했듯이 그곳은 게임기 한 대가 일 년에 200달러를 채 못 벌어들인다. 한국 돈으로 약 22만 원에 달하는 가격이 제시하는 건 오락실이라는 공간이 수익성이 없다는 것, 즉 사라져야 할 자본주의의 뒷골목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 오락실은 카우보이가 노래하던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에서, 그 공간이 스크린으로 옮겨갔을 때 관객들이 그 시대를 그리워하다가 잠시 쉬어가던 사막 속의 술집에 비견될 수 있다. 미지의 세계로의 탐구, 그러나 구대륙, 말하자면 이것은 지금의 우리도 잘 모르는 오락실, 또는 인터넷 공간이다. CD와 게임 칩을 사용하던 과거의 콘솔 게임기는 현재 와이파이를 통해 게임 데이터를 구매하는 방식을 제공한다. 즉 칩이라는 물리적인 집이 사라지고 낸드 플래쉬 메모리라는 통합저장소가 제공된다. 다시 말해서, 집이 사라지고 모두의 대륙이 생겨난다. 누군가는 토렌트 누군가는 스마트폰 누군가는 USB, 어쩌면 우리는 오직 하나의 목적으로만 제공되었던 구시대를 그리워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과거의 시네마는 특정한 극장에서 특정한 영화를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시기는 다르지만 세계 어디를 가나 그러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것이 여러 영화를 다양한 시간대에 상영하는 방식을 바뀌고, 디지털 시대에 가까워 올 무렵 할리우드에는 멀티플렉스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여러 극장에 필름의 복사본을 보내 동시에 개봉하는 이 전략은 <죠스>와 <쥬라기 공원>을 거쳐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에 도달했다. 디지털이라는 이름으로 배급되는 시네마의 장점은 필름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 단지 필름의 질감이 그리워질 때가 있는 것을 제하면 그렇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영화가 이곳 이 자리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영화는 극장에서 필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네필들이 있다. 반대로 영화를 굳이 극장에서 보아야 하느냐고 묻는 시네필들이 있다. 이것은 마치, 슈가러쉬라는 이름의 오락실과 슬로터 레이스라는 이름의 인터넷과도 같다. 하나의 육신에 갇혀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생산하는 이들의 모습이 있는 반면, 신체를 제하고 남는 건 정신이라며 정신의 아이덴티티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바넬로피의 슈가러쉬가 사실은 <토이 스토리>의 버즈 라이트 이어처럼 자아를 가진 기성품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녀는 기성품이자 주문품이며, 그녀가 미지의 서부를 개척해야만 하는 건 복제된 자신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죽음선고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너 같은 아이들이 참 많다는 말을 우리도 들어왔고 그녀도 깨달았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 지구에서 한 명의 개체일 뿐임을, 이 우주에서 하나의 별일뿐이라고 랄프는 몸소 증명한다. 그것이 바로 랄프의 복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위에 올라간 킹콩, 사랑한다면 그녀가 현재에 있을 수 있도록 놓아주는 게 취약점의 해결법이다. 이윽고 거대한 랄프는 죽고 바넬로피는 치유된다. 즉, 신체에 갇힌 신이었던 길가메쉬가 신체를 보존하려 했던 것과는 반대다. 다시 말해서, 슈가러쉬에 갇힌 신이었던 바넬로피가 슈가러쉬를 보존해야 할 이유는 없다. 신체를 떠나서도 인간은 존속할 수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곳은 카우보이가 떠돌고(<카우보이의 노래>), 기업의 네트가 우주를 달리며(<공각기동대>), 작고 귀여운 바넬로피가 새 삶을 찾아 떠난 여정이다. 아마 디즈니가 프린세스를 놓아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주먹왕 랄프)>, 다른 세계의 스파이디들이 다른 세상에서 다른 모습으로 현재를 지키는 것도 그런 이유일 테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81061_1000.jpg?type=w966 영화 <주먹왕 랄프 2 : 인터넷 속으로>의 작품 포스터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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