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인가 악령인가
집 안에 자리 잡아 마치 목석처럼 그들을 바라보는 카메라가 있다. 이 카메라는 CCTV나 어느 인물의 시점이라고 보기도 모호하다. 말하자면 이 카메라는 영화의 안이 아니라 밖에 있고, 설사 영화 안에 있다 하더라도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때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이 카메라가 알폰소 쿠아론의 눈이라는 점이다. 감독은 오랜 친우 엠마누엘 루베즈키와의 협업을 이번 작품에서 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가 아니라면 누구도 찍을 수 없다며 차라리 자신이 직접 찍는 것을 택했다. 또한 그는 이 작품에 자신의 옛 풍경을 담아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베리만의 <산딸기>나 타르코프스키의 <희생>과 유사한 성격을 지녔다. 즉, 영화 안에 서 있는 또 다른 인물인 그는 카메라의 시점으로 대변되면서도 카메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알폰소 쿠아론 본인일 수밖에 없다. 그는 정말로 ‘들고 찍은’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결코 자전영화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게 촬영되었다. 요컨대 우리가 쿠아론하면 떠올릴 <칠드런 오브 맨>의 숭고함도 없고, <그래비티>에서 보았던 홀로됨의 공포 또한 없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가 일차적으로 이입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도입부에 집안 구석을 등지고 서 있는 이 카메라는 서서히 패닝하며 인물의 움직임을 잡는데, 결말부에 가서는 먼저 집 안에 들어와 창 밖의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집을 지키다가 집에 도착한 자동차 소리에 부리나케 달려나가는 할머니처럼, 영화 속에서 벌어진 고난과 역경들을 서둘러 마무리한 채 집 안에 먼저 들어와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독주에는 어떤 뜻이 있는 걸까. 이 카메라를 대변하는 유령은 영화의 러닝타임 동안 그들의 여정을 보듬으려 한 것일까.
하지만 단언컨대 이것은 엠마누엘 루베즈키의 촬영도 아니고 알폰소 쿠아론의 시점도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알폰소 쿠아론은 인물의 앞쪽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주는 친절함을 지녔다. 말하자면 그의 영화에서는 항상 인물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종교적인 믿음 또는 신념이 있었고 그것을 드러내는 게 엠마누엘 루베즈키의 손길이었다. 하지만 <로마>는 철저히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어느 순간 동행자의 자리에 올라서는데, 영화 속에서는 그 자리가 미리 지정되어 있지 않았기에 우리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갑작스레 등장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영화 속에서 두 여성의 상대들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그동안 알폰소 쿠아론이라고 확신했던 이 유령의 존재에 물음표를 던지게 된다. 즉, 이 유령의 자리에는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를 임신시키고 도망간 남자친구와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를 버리고 도망간 남편이 있다.
이 카메라는 인물이 향할 장소로 먼저 패닝하는 것도 아니고, 인물의 뒤를 쫓는 것도 아니다. 이 카메라는 정말로 미묘하게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를 유지하고 있기에, 이른바 영화의 전체적인 호흡을 조절하는 페이스 메이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이러한 모습은 마치, 알폰소 쿠아론으로 하여금 엠마누엘 루베즈키의 공백을 채워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말하자면 어떤 면에서 이 카메라는 감독의 전작들에서 우리가 보았던 이미지를 자꾸만 떠올리게 한다. 요컨대 작품 중간에 가두시위가 폭동으로 변하는 장면에서는 <칠드런 오브 맨>에서의 그 유명한 롱테이크를 떠올리게 하며,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조명하는 장면에서는 <그래비티>의 마지막에서 느꼈던 숨소리를 우리의 귓전에 가져다 놓는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의 유령이 단지 알폰소 쿠아론에만 불과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영화를 찍던 두 사람이 부재한 두 개의 장소에서 우리는 그녀들이 상실한 것들을 눈으로 목격한다. 작품 중간에 가두시위가 폭동으로 변하는 장면에서 클레오는 도망간 남자친구가 폭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듯한 느낌을 받는데, 정말로 가구점에 남자친구가 들어온다. 그도 놀란 모양인지 자신이 폭력을 행사 중이라는 것도 잊고 놀란 토끼 눈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쩌면 알폰소 쿠아론이 페이스 메이커이기를 포기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는 부재한 대상은 여전히 부재할 뿐이라며 잠깐 동안 그녀 앞에 찾아온 유령을 다시금 화면 밖으로 내쳐버린다. 그리고 그 순간 10개월간의 고된 순례길이 끝이 난다. 진통이 찾아온 것이다.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앞은 또 어떤가. 파도가 일렁이는 순간을 길고 느리게 찍던 카메라는 그 해변에 또 한 명의 유령을 데려다 놓는다. 이것은 마치, 홍상수가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찍을 때 김민희의 옆에 보이지 않는 유령을 데려다 놓은 것과 비슷하다. 이때 홍상수는 유령을 화면 안에 있지만 영화 밖의 관객들에게만 보이도록 촬영했었다. 말하자면 그 유령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다는 차이점은 있으나 화면 밖의 관객들에게만 보이도록 촬영했다는 점에서 이 두 해변은 유사하다. 하지만 사실은 알폰소 쿠아론 또한 해변의 오른쪽으로 서서히 패닝하면서 그 유령의 존재가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준다. 카메라가 고개를 돌리면 거센 바다에 클레오가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다. 그녀는 아이들의 이름을 외치며 카메라의 끝자락을 피해 달아나다가 끝내 그들을 구하고 해변으로 돌아온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소피아의 남편을 피해 달아나다가 아이를 구해 소피아의 품으로 돌아온다.
질문은 계속된다. 이 유령은 유령인가 악령인가. 다시 말해서 그는 착한가 나쁜가. 인물을 살짝 앞질러 가는 페이스 메이킹의 흐름이 실패하기도 성공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하나로 합쳐지지 못하고 분할된다. 클레오가 자신 앞에 도달한 유령을 목격한 순간 진통이 시작되고 병원에 가자 아이는 이미 죽어있다. 이 아이는 언제부터 죽어있던 것일까. 아니, 질문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보자. 이 아이는 언제 죽어버린 것일까. 의사가 심폐소생술을 시도해도 아이는 살아나지 않는다. 클레오는 아이 같은 건 낳고 싶지 않았다며 ‘밤의 해변’에서 ‘홀로’ 눈물을 흘린다. 그러니까 이 아이는 처음부터 없어야 했거나 혹은 중간에 좌초되어 버린 존재다. 그러나 알폰소 쿠아론은 처음부터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아마도 이 물음에 대한 답은 후자일 것이다.
쿠아론의 인물들은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세상에서 아이를 만들어 내거나 반파된 우주선 안에서 타국의 우주선을 훔쳐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등의 불가능을 몸소 수행해 보인다. 말하자면 아이 같은 건 낳고 싶지 않았다는 클레오의 말은 아이를 낳아야만 하는 현실에서 ‘불가능’했던 행위를 성공시킨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이 불가능한 행위는 당연하게도 자신이 손수 생명을 살해하는 낙태나, 개인적인 몸조리에 실패해 아이가 사산했다는 죄책감이 아니다. 도망간 남자친구가 자신에게 전달한 원치 않은 임신의 결과물로서 그런 충격을 준 것이 남자친구이기에 사산의 책임은 그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 또한 이전까지의 작품처럼 불가능에 도전하는 이들의 숭고함에 비견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소피아가 클레오를 여행에 데려가지 않았더라면 그녀들의 아이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구원받지 못했다면 클레오와 소피아는 남편과 아이를 잃은 같은 처지를 공유하게 된다. 그러나 소피아는 클레오의 고용인이기에 아이가 없는 집안에서 클레오의 자리는 제거될 것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카메라가 만들어 내는 페이스 메이킹의 순서는 소피아가 앞에 자리 잡고 클레오가 뒤따르는 형태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카메라는 클레오의 주변을 서성이고 있으므로 주체가 아닌 타자의 카메라일 것이고, 주체의 유령과 타자의 유령이 그들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현상을 우리는 목격한다. 이것은 폴터가이스트다.
도피 혹은 디아스포라
원치 않은 임신은 원치 않은 죽음으로 형질이 변화하고, 원치 않은 이혼은 원치 않은 죽음으로 형질이 변화한다. 중간에 좌초되어 버린 존재가 좌초될 수도 있었던 이들을 구원한다. 이것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원하는 것이면서도 그녀들의 안식처가 집안으로 점점 파고든다는 점에서 그다지 좋지만은 않다. 물론 이것이 페미니즘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녀들은 주체가 아닌 타자로서 이 집을 떠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 여성들은 하녀이거나 마담인데 결국에는 남성에게 속박되어 집에 귀속되어 있었고 그래서 영화는 시종일관 집이거나 집 주변을 벗어나지 않는다. 즉 이 영화에서 알폰소 쿠아론의 영혼으로 지칭되는 집의 시점이 곧 관객의 시선인 만큼 주체일 텐데, 그렇다면 이 집을 떠나는 그녀들의 모습은 타자이고 말하자면 이 영화의 결말은 요즘 시대를 생각해 보았을 때 아주 갑갑하기 그지없다. 이들은 이 집에 깃든 두 명의 유령과 결별하려고 이사를 택한다. 일종의 도피이다.
도피 혹은 디아스포라(Diaspora). 어쩌면 영화는 그녀들의 이사를 통해 이 영혼은 세상 곳곳으로 퍼져 나갈 것이라면서 파종을 하는지도 모른다. 도피라는 말은 알폰소 쿠아론에게 사용할 만한 단어가 아니다. 쿠아론의 인물들은 처음에는 평민이었고 그러나 순례길에 오르며 마침내 성자가 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아이를 사산한 클레오의 모습은 애초에 남편 없이 홀로 임신했다는 것, 화면 밖으로 사라진 그 유령의 아이를 밴 동정녀 마리아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그녀가 마지막 월경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며 병원 데스크에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는 점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이러한 클레오의 모습은 맥락상으로 혼란의 표시이겠지만, 유령의 시점으로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클레오와 소피아가 할 만한 것이다. 그녀들에게 벌어진 이 비극이 차라리 처음부터 꿈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마도 그녀들은 갑작스레 다가온 현실에 적지 않게 놀랐을 것이며, 어쩌면 이 놀람은 보이지 않는 위협 또는 유령을 마주했을 때의 느낌일 것이다. 이른바 폴터가이스트. 영화는 자신이 담은 프레임 속에 티브이의 화면을 두 번, 영화관의 화면을 한 번 잡음으로써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고 나지막이 암시해준다. 하지만 이런 귀띔은 당연하게도 영화 속의 그들에게는 전달되지 않고 자욱한 돌비 사운드에 묻혀버린다. 그래서 영화 밖의 우리는 이들의 모습이 현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현실이 아니라면서 그저 영화로만 보고 있게 된다.
아마도 지금쯤 당신은 뒤늦게 어떤 사실을 눈치챘을 것 같다. 클레오의 남자친구는 영화가 끝나기 전에 홀연히 사라졌으며 소피아의 남편은 티브이를 보고 나서 외출을 한 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시 말해 무언가를 본다는 행위가 그들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렇게 카메라의 밖으로 사라진 이들의 모습은 그 후로 유령이 되어 카메라 속에 남아 그녀들의 마음을 괴롭힌다. 어쩌면 그들의 영혼은 이미 프레임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고 희미한 잡음만이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인물을 따라가는 듯하면서도 사실은 카메라 밖의 것에 더 관심이 있다. 영화는 시종일관 여러 소음을 돌비 사운드로 우리 앞에 쏟아 내는데, 그것은 단지 현장의 생동감만을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다. 이 소리는 마치 영화 속의 인물들을 잡아먹을 것처럼 우렁차며 그동안 쿠아론의 인물들이 홀로 서 있으면서도 다수의 위협을 받는 것을 표현하는 맥락에 닿아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소음이 마치 화면 속에 떠도는 유령의 현신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것도 희미한 잡음이 아니라 생생한 돌비 사운드로 말이다.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축음기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미묘한 잡음을 포착한다고 말하면서 그 기능을 라깡의 실재계에 대응시킨다. 요컨대 우리가 사진을 찍고 나서 사진 속에 우연히 찍힌 피사체를 뒤늦게 발견할 때가 있듯이, 이 축음기에는 우리의 무의식의 소리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키틀러의 논의에 따르면 이 영화의 소음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심코 놓치는 소리인데, 그런 맥락에서 이 소음을 그녀들이 상실한 것과 연관할 수 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결말까지 줄곧 울어대는 풀벌레들의 소음을 우리는 평소에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바닥에 물 청소하는 대걸레 소리나 자동차가 빵빵거리는 소음 또한 생활 속의 소음일 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또한 영화를 보는 우리는 인물의 대사에 중점을 두고 그 외의 소음에는 그보다 덜 집중한다. 그러나 알폰소 쿠아론은 <그래비티>에서도 그러했듯 소음을 제거했을 때 인간의 감각이 가장 잘 살아난다고 보았으며, 그래서 <로마>에서의 소음은 이 영화가 무의식에서 인간이 살아남는 법에 관한 이야기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 무의식이 가득한 영화에서 ‘유령’들이 늘 떠돌고 있음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작은 곳을 비집고 들어가려던 소피아의 자동차는 더 작은 크기의 승용차로 교체된다. 즉 같은 구성으로 몸집만을 줄인다. 그러나 우리는 영화 속의 인물들이 더는 같은 구성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남자친구는 사라지고 아이는 죽는다. 남편은 사라지고 아이는 죽을뻔한다. 생존의 위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넘긴 이들의 가정에는 이사와 같은 물리적 변화와 깊은 이별 이후라는 심리적 변화도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뒤로 갈수록 줄어드는 것은 소음이고 줄어들지 않는 것은 공백이다. 즉, 무의식은 줄어들고 현실은 점점 다가온다는 점에서 그녀들의 상처가 회복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유령이 무의식이 아닌 현실에 존재하고 있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지 그녀들의 삶이 더 나아졌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현실은 차갑다. 오히려 환청과도 같았던 그 소음이 무의식이 아닌 현실에서 들려올 때 더욱 미칠 지경이 될 수도 있다. 생각해 보자. 마르크스의 유령이 책이 아닌 현실에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가 보인 반응을.
요컨대 이 영화는 카메라 속에 유령이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게 아니다. 영화 속의 소음이 영화 내에서 들려오는 디제시스(Diegesis)가 아니라 영화 밖의 스피커에서 들려옴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영화 속의 남성들이 프레임 안으로 사라져 버렸음을 기억하고, 그 프레임 밖에 있던 여인들은 티브이나 영화와 같은 매체가 아니라 ‘창틀’이라는 현실의 프레임 너머를 바라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즉 유령은 매체 안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그 유령은 매체가 송출하는 전파를 넘어 현실의 창틀에서도 발견된다. 클레오가 가구점 너머로 보았던 거리의 폭동에서 목격한 남자친구가 있고, 소피아가 책상 위에 놓인 화목한 가족사진을 들춰 보았을 때 남편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이 카메라 속에 서 있는 유령은 과연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가. 이 유령은 집안에서 그들을 바라보다가 결말에서는 창틀 너머로 그들을 마주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슬퍼해야 한다. 이 유령이 그들을 마주했으니 그들은 창틀 속의 어딘가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영화 속의 남성들이 그러했듯이. 또한 이 영화를 보는 우리가 프레임 안의 그들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듯이. 영화는 그렇게 끝나버린다. 알폰소 쿠아론도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추억을 떠나보냈던 것이다.
정말로 재미있는 일이다. 이 영화가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을 타고 우리 곁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화면 속의 유령을 손쉽게 떠나보내는 법을 알려준다. 극장에서의 영화관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해야 하지만 넷플릭스의 영화관람은 싫증이 나면 쉬었다 보아도 된다. 말하자면 넷플릭스를 통해 <로마>를 관람한다면 우리는 구태여 힘든 현실을 감내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반대로 극장에서 <로마>를 관람한다면 그런 현실이 잊힘에 통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극장이 아니라 넷플릭스를 통해 배급되었다. 결국 방점은 힘겨운 망각이 아니라 즐거운 목격에 있다. 유령을 본다는 것에 대한 즐거움. 영화를 본다는 것. 오늘도 스크린 속의 환영이 우리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