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하지 못한 남자들

by 수차미


1556_1951_3054.jpg?type=w966 영화 <풀잎들>의 작품 포스터 © 전원사



홍상수의 수필


홍상수는 여태까지 네 편의 영화를 흑백으로 찍었는데, <오! 수정>, <북촌방향>, <그 후>, <풀잎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네 편의 영화들이 홍상수의 필모그래피 전반을 관통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홍상수의 흑백영화들은 어떠한 특정 경향을 품고 있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들었던 생각을 촬영한 것일 테다. 하지만 그럼에도 홍상수의 흑백영화는 어딘가 모르게 그의 칼라영화 뿐만 아니라 여타 다른 흑백영화와도 다른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이것은 홍상수라는 사람이 발전해온 영화적 관점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홍상수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요구한다. 이때 우리는 재미있는 생각을 하나 떠올린다. 이것은 어쩌면, 카메라가 만년필이라는 알렉산더 아스트뤽(Alexander Astruc)의 그 유명한 말에 따라서 홍상수의 수필은 흑백 잉크로 쓰인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홍상수의 영화를 구조와 형식의 실험을 통해 이루어지는 영화 미학의 실험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홍상수가 김민희를 만나고 만들어진 작품들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홍상수는 <밤의 해변>에서부터 자신의 영화관을 서서히 깨부수는 듯하더니 <그 후>에서는 김민희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마치 홍상수가 김민희의 얼굴에 매몰되어 자신의 영화관을 방관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말하자면 그들은 홍상수에게 다음과 같은 불만을 품었다. 여자에게 빠져서 자신이 작가임을 망각한 사람이라고. 더욱이 그들에게는 장 뤽 고다르와 같은 사랑의 방랑자들이 남긴 좋은 선례가 있기에 홍상수의 스탠스를 이해할 수가 없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홍상수에게 어울리는 것은 칼라가 아니라 흑백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홍상수의 흑백영화 중에서 두 편의 영화가 김민희와 함께 작업했고 그 두 편의 영화는 홍상수라는 사람이 김민희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보인다. 그 누구라도 두 영화에서 김민희의 모습이 여태까지 그가 다루던 여자들의 모습과 지극히 차별화된다는 점을 알 수 있을 테다. 또한 그런 면에서 이것은 <자유의 언덕>에서 흩어진 편지들이 홍상수의 검은 만년필을 통해서 김민희에게 도달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것은 홍상수가 김민희를 위한 영화를 찍는 것이면서도 자신의 영화에 보다 솔직해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즉 <풀잎들>은 홍상수가 자신의 세계가 아닌 자신의 세계를 촬영한 작품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 무엇보다 홍상수를 이해하는 것에 있어 중요하며, 홍상수라는 사람이 연애편지가 아니라 수필을 쓴다는 점을 알려주고, 영화가 아니라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상수라는 사람이 무언가를 의도하고 영화를 찍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고 나면 그의 영화가 극이 아니라 수필임을 우리는 깨닫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번 홍상수의 일기장을 들고 독해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이것을 이야기라고 잘못 생각하게 된다. 현실에 있을 법하면서도 내 주변에는 없을 것이라는 영화적 거리감이 그것을 만들어 내며,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수필이기에 느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홍상수의 영화는 장률처럼 그가 현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찍은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또 다른 자신을 세워둔 채 나와 너를 두고 사고 실험을 해보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의 자기 복제이며, 그 속에는 반성하는 자신과 비춰지는 자신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홍상수의 흑백영화가 풍기는 남다른 기운은 우리에게 깊은 의문을 남긴다. 홍상수의 구조 혹은 형식이 만들어내는 영화의 서사가 이항대립 혹은 이분법이라고 불릴 수 있다면, 이 흑백 영화들은 제 한 몸을 바쳐 그것을 수행해 낸다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김민희 이전의 홍상수 영화가 거진 그러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런 생각은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하하>에서 나온 흑백의 현실을 기억하고, <오! 수정>에서의 차가운 놀이터를 기억하며, <북촌방향>에서 반복되는 술자리를 기억한다. 말하자면 홍상수의 흑백은 반복되는 차가운 현실이다. 이 차가운 현실 속에는 자기 복제된 홍상수가 홀로 서 있다. 그는 독자들에게 내가 보고 들은 것, 다시 말해 카메라 만년필로 써 내린 무의식의 흐름에 동조할 것을 요구한다.



1S5Y5O1WAQ_1.jpg?type=w966 영화 <풀잎들>의 한 장면 © 전원사



사랑의 사고 실험


66여분 동안 골목 구석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이 영화는 김민희가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이 전부다. 그녀는 마치 영화의 제목처럼 길거리에 널린 풀잎들이 되어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듣는다. 그런데 영화에는 그녀에게 다가와 자신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게 아니냐고 묻는 이가 있고, 이것은 영화의 도입부에 결말부에서 카페 앞에 심어진 풀잎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과 연결된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풀잎이라는 존재는 길거리에 흔하지만 흔하게 들여다보기도 하는 셈이다. 그러니까 홍상수는 세상이 자신의 생각을 엿보는 게 아니라 누구든지 자신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어떤 면에서 이것은 보여지는 동시에 보는 대상인 카메라의 성격과도 유사한 것 같다. 이른바 홍상수의 카메라는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이자벨 위페르가 쥐어든 것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이곳이 영화이기에 할 수 있는 사랑의 사고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만약 우리도 그를 따라 일종의 사고 실험을 진행할 수가 있다면, <하나 그리고 둘>에서 어린 소년이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었던 것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른은 안 되고 어린아이는 된다는 점에서 이 카메라 구성은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홍상수가 끌어들인 타자의 성격과도 유사하지만, 분명하게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면죄부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시대나 국가에 대항하는 게 아니라 사랑의 차별에 대하여 반항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 반항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고 싶다. 그의 행동에 대해 우리가 왈가불가할 권한은 없으며, 그러나 어떤 면에서 홍상수는 이러한 태도를 즐기는 것 같다. 말하자면 그는 일종의 쇼호스트가 되어 홍상수라는 이름의 수필을 파는 것만 같다.


<풀잎들>에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홍상수의 리얼리즘은 현실에서 따온 게 아니라 홍상수의 현실에서 따온 것이라는 점이었다. 요컨대 홍상수의 영화는 현실의 그것 같으면서도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늘 명확히 했고, 그것은 곧 이 영화가 홍상수라는 사람의 세계에서 진행되는 사고 실험임을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그래서 홍상수의 영화는 <북촌방향>이라는 실재하는 공간을 만들어내었다. 우리는 <오! 수정>에서 다투어 <북촌방향>의 초대를 받아 <그 후>의 택시를 타고 <풀잎들>의 카페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 풀잎들에는 영화가 현실처럼 칼라인 게 아니라 흑백이기에 더욱 영화처럼 보인다는 점이 스며있었고, 다시 말해서 영화의 리얼리즘이라는 게 오히려 우리의 현실 쪽에 있다고 홍상수는 말하고 있다. 즉 홍상수의 사랑은 영화이며 그것은 현실이다. 반대로, 홍상수의 영화는 그가 되고 싶거나 혹은 그럼에도 될 수 없는 현실의 장벽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결국 우리는 그가 왜 한국에서 등장했는지를 물을 수밖에 없다. 영화가 현실의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이들이 있는데, 그는 현실의 무언가가 현실에만 있다고 말한다.


이창동의 <버닝>이 현실의 모호함을 스크린에 옮겨두려 했다면, 홍상수의 <풀잎들>은 오히려 그런 영화를 보면서 무언가를 떠올리는 이들의 모습을 담았다. 말하자면 이것은 영화에 대한 영화이기 이전에 현실에 대한 현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홍상수라는 사람이 남긴 필체를 쫓게 된다. 그런데 그 필체에는 마치 풀잎과도 같은 유약함이 담겨있다. 이 영화에서 음악은 영화의 밖이 아니라 안에서 줄곧 들려오며, 그러면서도 마치 그는 의도적으로 삽입되었다는 듯이 그들의 대화를 필사적으로 방해하려 든다. 음악이라는 이름의 그는 인물의 대화가 격해질 때면 덩달아 목소리를 높이며, 동시에 머릿속에 낀 잡음도 함께 높아진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를 하나의 거대한 수필로 본다면 이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소음의 존재는 인물들을 바라보는 잡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인간 사이의 관계는 관계 속에서만 잦아진다는 것이고, 그들은 오로지 소리 밖으로 나와 풀잎들을 바라볼 때만 유약해질 수 있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이 영화가 그만큼 직접적으로 말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영화에서 홍상수가 너무 직접 말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반대로 왜 직접적으로 말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테다. 즉 이 영화가 왜 직접 화법을 택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면 홍상수는 이것이 흑백영화라고 답변한다. <동주>가 자신의 몸을 바쳐 시인 윤동주의 밤하늘을 써 내렸듯, 이 영화도 자기 자신을 써 내리는 홍상수의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다. 그리고 홍상수는 이 영화의 인물들을 유목민처럼 보여준다. 그들은 대화할 장소를 찾아 줄곧 헤매고 있으며 사실은 그들의 대화가 이루어질 곳이 본래 제 자리였음을 우리는 후에 깨닫게 된다. 싸우던 이들이 싸우지 않게 되며 자책하던 이들은 자책을 공유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모두 한자리에 앉아 태연히 남들의 이야기를 엿듣던 김민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홍상수는 김민희를 통해서 ‘어쩌면…’이라는 가정을 해본다. 가만히 앉아 모든 것을 듣는 존재에게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들릴 것인가. 어쩌면 이 존재가 하느님이 될 수도 있겠으나 홍상수의 인물들은 신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사는 게 너무나도 고달픈 나머지 신을 믿을 여유조차 없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자체로 신이 되어 살아가고, 이 영화에서는 그런 관찰자의 자리가 거리의 풀잎들에게로 옮겨간다.



2018021700592_0.jpg?type=w966 영화 <풀잎들>의 한 장면 © 전원사



부부는 일심동체


홍상수의 영화가 그 무엇도 아니라는 말에 공감하는 이들이라면 이 영화에서는 더욱 고독해질 것이다. 이 영화에는 성별만 바꾼 것처럼 보이는 홍상수/김민희가 카페 안에 앉아 있으며 그/그녀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엿듣는다는 점에서 거진 초월자처럼 보인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해 이야기를 엿듣고 편협한 판단을 내린다는 점에서 홍상수 자신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회의가 있으며, 우리는 어쩌면 선민의식이 아니냐고 섣부르게 넘겨짚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그/그녀는 중앙을 두고 분할된 두 가지 사건의 하나의 형태를 보지 못했다. 영화 초반에 지인의 죽음을 두고 다투던 이들에게 욕했지만 영화 후반에 화해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영화 초반에 지인의 죽음을 두고 슬퍼하던 이들을 보지 못했으나 영화 후반에 지인의 죽음을 두고 떠들어대는 이들을 욕한다. 말하자면 그녀는 이 양쪽 쌍 중에서 어느 한쪽만을 보았고, 아마도 그것밖에는 볼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우리는 홍상수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이것은 영화의 해석을 인간 하나로 퉁쳐버리는 무책임한 행동이 아니다. 홍상수는 자신의 수필을 들고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말하는 사람이기에 우리는 그의 영화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을 써놓고 우리가 그를 엿보아달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홍상수의 영화는 강한 자의식의 발현이다. 그래서 우리는 홍상수가 여성에게 무지하다고 비판했으며, 김민희의 등장 이후로 홍상수의 여성들이 보다 앞에 나오게 된 것이 홍상수라는 사람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이른바 사랑의 힘. 그의 영화에 따르면, 홍상수는 자신이 김민희를 아직 잘 이해하지 못했거나 또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모습을 김민희에게 투영하고 있으며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김민희이다. 즉, 부부는 일심동체이다. 그래서 그는 그녀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홍상수의 영화는 점점 자서전처럼 되어가고 있다. 물론 자서전도 수필의 일종이다. 하지만 자서전은 자신의 업적을 어느 정도 칭송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무언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면 바로 그 부분을 느낀 것일 테다.


모두들 홍상수가 속 시원하게 말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홍상수의 영화는 늘 어지러워서 대체 무엇을 말하려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태반이었다. 실제로 홍상수는 영화 인터뷰나 개인적인 인터뷰에서나 늘 자신의 영화는 그냥 자신이라고 말해왔으며 그런 의문은 홍상수의 영화가 홍상수 그 자체였음을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그가 보는 세상이 정말로 이런 것인지, 혹은 그가 생각하는 세계가 이런 모양인지에 대한 물음이 줄곧 머릿속에 맴돌았다. 홍상수는 그중에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를 흑백으로 담아냈으며 우리는 그 흑백영화들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홍상수는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흑백영화들이 더 깊숙하게 뇌리에 박힌다. <하하하>에서 현실로 돌아올 때 그들은 흑백이고, 홍상수의 눈도 흑백이다. 그리고 우리는 <풀잎들>의 골목에서 뇌의 주름 사이를 흩는 듯한 느낌을 받고, 그곳에는 홍상수의 가장 직설적인 화법이 있다. 누군가는 이것을 너무 직접적이라고 말할 테지만, 누군가는 이것을 두고 드디어 속 시원히 말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할 테다. 물론 다음번에는 되도록 자제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푸념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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