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티브이, 미디어테크

by 수차미


80935_1000.jpg?type=w966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작품 포스터 © 디오시네마




영화, 티브이, 미디어테크


영화를 찍는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내가 떠올린 건 롱테이크라는 단어였다. 아마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자 정말로 33여 분의 롱테이크가 시작되었다. 이게 뭔가 싶어 낄낄대며 영화를 보다가, 꺼질 것 같지 않던 카메라가 꺼지고 새 국면이 시작되었다. 화면 위에 시간을 되돌리는 문구가 새겨졌고 영화의 시간은 되돌아간다. 흥미롭게도 영화의 방점은 그 뒷부분에 찍혀 있었다.


롱테이크를 사용한 영화에서는 카메라가 현실에서 눈을 돌리면 안 된다는 강박이 느껴진다. 바쟁이 말했듯 현실의 고통스러움에서 눈을 돌리면 안 된다는 건데, 이 영화도 그랬다. 영화 초반에 제시된 33분여의 롱테이크는 방송국의 하청에 거역하지 않으려는 한 감독의 투지 때문이었다. 방송국이 제시한 기획안은 너무나도 황당해 제안을 받았던 감독들이 모조리 거절했고, 그 덕에 이 보잘것없는 하류 감독에게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것이다.


싸고 적당하게. 이 하류 감독이 내건 신조다. 아마도 그는 영화에는 손대지 않는 듯하다. 티브이 프로그램에 들어갈 재현 영상을 찍는 걸 보면 티브이 쪽에만 적당히 손을 대는 것 같다. 그런데 이 감독에게 들어온 제안은 영화를 찍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을 알고서 맹렬히 거절하려 한다. 그러나 무슨 사정인지 이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딸도 곧 졸업한다는데 왜 이런 돈이 필요한지는 모르겠다만, 어쩌면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 영화감독의 꿈을 묻어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아내와 딸도 자신의 꿈을 실현하게 된다.


생방송에 들어가자 감독은 자신이 하지 못했던 말을 한다. 주가가 높아 까다롭게 구는 남자배우에게 이러쿵저러쿵 토 달지 말라며 화를 내고, 아이돌이기에 활동에 제약이 많은 여자배우에게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라며 화를 낸다. 요컨대 그는 현실의 전송이 아니라 영화라는 조작된 현실을 전송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본심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현실은 중첩되어 있다. 마치, 영화가 말하는 티브이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그 증거로, 영화를 찍는 티브이를 보여주는 영화를 보는 우리가 있다. 여기에 더 나아가서 이 영화는 ‘영화를 찍는 티브이를 보여주는 영화를 찍는 영화’를 표방한다.



%EB%8B%A4%EC%9A%B4%EB%A1%9C%EB%93%9C.jpg?type=w966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한 장면 © 디오시네마




다섯 번째 공간


영화, 티브이, 미디어테크. 이것은 에릭 로메르가 찍은 논픽션 다큐멘터리 영화의 제목을 살짝 변형한 것이다. 에릭 로메르가 이 영화에 호명될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제목의 리듬감이 좋아서 가져왔다. 에릭 로메르는 이 영화에서 공간의 정치학을 말하는데, 어떻게 보면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또한 ‘미디어테크’적이기도 하다. 정확하게는 현실의 공간이 아니라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공간이 다양해진다는 점이 그렇다.


미디어테크(mediatheque)란 극장, 도서관, 갤러리, 영화관을 한곳에 모은 복합문화시설을 뜻한다. 요컨대 이것은 여러 미디어를 한 공간에서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말하자면 공간의 공간이며, 티브이와 영화 사이를 횡단하는 이 영화도 여러 공간이 중첩된다. 첫 번째로 롱테이크 영화가 상영되며, 두 번째로 그 영화를 찍기 전의 모습을 보여주며, 세 번째로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생방송에 투입된 모습을 통해 영화가 영화에 중첩되는 걸 보여준다. 그리고 네 번째로 이 모든 걸 찍은 이 영화의 제작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때, 네 번째 공간에서의 제작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즉, 이 영화의 출구는 네 번째 공간이다.


여기에 다섯 번째 공간의 개념이 등장한다. 이 영화를 보는 우리가 이 영화에 몰입하고 그만한 창조력을 투입하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어떤 매체를 통해서 이 영화를 보고 있을까. 극장이거나 스마트폰이거나 모니터 안일 텐데, 이 영화가 내세우는 롱테이크가 우리를 현실에 가깝게 할 수 있을까. 미디어 시대의 영화 관람은 결코 선형적이지가 않다. 이 영화의 전반부에 등장한 롱테이크 영화가 녹화 본이었다는 사실이 후에 가서 알려지는 것처럼, 생방송은 녹화되어서 언제든지 돌려볼 수 있다. 그렇기에 방송국 관계자는 생방송이 진행 중임에도 스마트폰을 보는 등 딴청을 부릴 수 있다. 이것은 생방송이지만 생방송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리얼리티는 녹화되었다는 사실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걸까. 오직 지금-이곳에서 모두와 함께 보고 있다는 사실만이 리얼리티를 증명할 수 있는 걸까. 매체에 관한 정보를 차단하고 조작된 영상을 보는 것 또한 리얼리즘의 일종이고(<블레어 위치>), 이것은 이 영화를 추천하는 이들이 “이 영화를 볼 땐 예고편을 보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즉 이 영화를 재밌게 보려면 이것이 정말로 롱테이크라고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를 재밌게 보는 방법은 이것이 지금-이곳에만 존재하는 B급 호러 무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다섯 번째 공간에서 말이다.



0_2P2WAl_UhxHx_y26.jpg?type=w966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한 장면 © 디오시네마



디지털 시대의 리얼리즘


현실로 나아가려는 영화들이 롱테이크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것은 티브이다. 그것도 티브이에서 생방송으로 방영되는 영화이다. 이것은 마치, 1960년대에 티브이가 처음 등장했을 때 모든 방송이 생방송이었던 점을 떠오르게 한다. 티브이 연기자가 영화 연기자이기도 했던 이 시절에는 유독 NG가 많지 않았다. 그들에게 연기란 생방송이었고 영화로는 롱테이크였다. 말하자면 이 시절의 티브이는 영화가 말하던 리얼리즘의 본질에 보다 더 나아간 매체였다.


이것은 생방송이다. 생방송이야말로 티브이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프로듀서들이 많다.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말하는 주관적 시점도 아니고, 롱테이크가 말하는 시간의 집합도 아니다. 말 그대로, 시간을 그대로 우리 곁에 전송하는 행위이다. 시간의 통로가 저곳에서 이곳으로 생겨난다. 이라크의 폭격이, 무역센터의 붕괴가, 가라앉은 배가 우리 눈앞에 곧바로 도달한다. 어떠한 조작도 거치지 않았고 어떠한 의도도 담기지 않았다. 그건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는 현실과 완벽하게 동일하다.


그런 맥락에서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영화와 티브이가 온라인 미디어를 통해 지속성을 유지하는 콘티뉴이티 사회의 담론이다.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일련의 준비과정들은 마치 1960년대의 티브이를 우리 곁에 데려다 놓는 듯 보인다. 하지만 차이점이라면 그때는 기록이 없었다는 점이고 공간은 하나뿐이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티브이의 공간인 집과 영화의 공간인 극장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영화를 볼 방법은 많아졌고, 여기서 더 나아가 영화는 비디오나 디브이디와 같은 현실의 매체를 잃어버리고 낸드 메모리의 통로를 거닐고 있다. 그 낸드 메모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에 박혀 있으며 현대의 미디어는 영화도 드라마도 아니게 되었다.


만약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영화가 있다면 그 리얼리즘이 현실의 우리에게 도달할 수 있는지가 주요한 문제일 것이다. 리얼리즘은 현실이 있어야만 하고, 현실이 없다면 만들어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디지털 시대에 리얼리즘이란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관해 생각해 본다면, 리얼리즘 없이도 리얼리즘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남겨진다. 이른바 시뮬라크르(simulacre). 생방송을 녹화한 영상을 생방송으로 튼다면 그것은 생방송일까. 어찌 됐든 그건 편집이 없으므로 현실의 시간과 동일하게 흘러가고 있다. 단지 그곳과 이곳을 잇는 시간의 통로만이 사라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때 시간은 출구를 잃었으니 매체 속에서만 머물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직감하게 되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10_42_41__5b7b6e116f77e.jpg?type=w966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한 장면 © 디오시네마



원리원칙이 깨어져서는 안 돼!


우리가 리얼리즘 영화에서 깨닫게 되는 사실은 영화 속의 카메라가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 속의 그는 마치 ‘그’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감독의 분신이다. 그러니까 리얼리즘이란 건 영화 속의 세계를 규정하는 것이지 인물에 이입하는 행위가 아니다. 요컨대 관객은 영화 속에서 시대를 둘러보게 된다. 에릭 로메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화에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 현실의 환영과 환영의 현실. 전자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이탈리아고, 후자는 히치콕이 만들어낸 할리우드다. 할리우드의 오프닝에 “이 영화는 모두 허구입니다.”라고 쓰였던 것은 이것이 환영임을 공건히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 이 두 가지 길은 자신이 있을 자리를 잃어버린 것만 같다. 현실이든 환영이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이곳에 우리와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편리함이다. 과거의 우리는 티브이 앞에 앉았는데 지금은 우리가 티브이가 되었다. 과거의 우리는 극장에 갔는데 지금은 불을 끄면 극장이다. 극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태초의 경험이 있다는 말에는 그러한 편리함이 간과되어 있다. 분명 극장이 주는 경험은 극장만의 고유한 경험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대의 영화는 단지 극장에서 집으로 옮겨온 홈 씨네마(home cinema)에 불과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일종의 미디어테크, 이곳에도 저곳에도 모두 실시간으로 영화를 영접할 수 있다는 동시다발적이고 비동기화적인 시간의 경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대의 리얼리즘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주체를 가정하는지에 대하여 물을 필요가 있다. 과거의 리얼리즘이 롱테이크가 품은 미쟝센 즉 그 공간의 경험을 극장 안으로 흩뿌리는 것이었다면, 극장이 해체되어 미디어테크 안으로 들어온 이 시대에는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하는 경험을 도서관의 중앙에서 손짓 한 번으로 도서를 불러오는 행동에 비유하는 것처럼, 이 리얼리즘의 환영은 주체가 스스로 불러오는 것이자 무한대로 중첩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가 영화인 이유가 극장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런 현실이 영화가 말하는 화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그런 풍속도에 저항하는 것 중 하나이다. 여기서 전자는 칸 영화제이고 후자는 베니스 영화제다. 칸 영화제는 넷플릭스에 걸린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며 영화제에 내거는 것을 거부했는데, 그들이 거부한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로 가서 온갖 상을 쓸어 담았다. 다시 말해서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은 영화의 질적 완성도와 관계가 없다. 단지 그들은 영화가 주는 경험 혹은 원리원칙이 깨어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아마도 칸 영화제는 지금-이곳의 가치를 오인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IE002379257_STD.jpg?type=w966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한 장면 © 디오시네마




어떻게든 본다


약 다섯 번에 걸쳐 액션을 외치는 영화 속 감독의 모습은 이것이 영화를 찍는 영화라고 말해준다. 이때 첫 번째 액션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시작되었으며, 마지막 액션은 영화가 끝날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면 시간이 되돌아가며 영화를 만들기 위한 메이킹 필름이 나타난다. 생방송이기에 철저하게 동선을 계산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롱테이크 한 편을 찍기 위한 고도의 노력인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 영화의 제작진들도 영화를 찍기 위해 여러 번의 시도를 했다고 한다. 이것은 어쩌면 미조구치, 어쩌면 쿠아론의 길일 테다.


미조구치는 이것이 마치 영화라고 말하는 듯한 롱테이크를 우리에게 선사했다. 그래서 미조구치 영화의 인물들은 그들 자신이 연기한다는 것을 아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반대로 쿠아론의 롱테이크는 영화 속의 인물들은 진짜인데 공간은 가짜인 듯한 느낌을 준다. 즉, 쿠아론의 롱테이크는 공간의 환영을 깨뜨리는 이상한 촬영기법이다. 이것은 롱테이크가 단지 현실에 다가가기만 하는 시도가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 영화의 롱테이크는 그런 시도조차 일종의 시도라고 우리에게 나지막이 암시해준다.


그들은 좀비 영화를 찍고 있다. 감독은 진짜 연기를 보여 달라며 화를 낸다. 그리고 정말로 좀비가 등장한다. 좀비가 등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던 감독이 튀어나와 “액션!”을 외친다. 이때 우리는 현실이 중첩되었음을 느낀다. 이것은 실제상황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런데 영화는 이것이 영화 촬영임을 말하고 있다. 인물들은 자신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단지 감독만이 이것이 연기인 것처럼 태연하다. 요컨대 그들은 카메라로 영화를 찍으면서 카메라로 비추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들은 관음하고 관음된다.


영화를 찍는 티브이를 보여주는 영화를 찍는 영화가 이곳에 있다. 이런 영화를 찍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영화의 문법은 기존의 것과 완벽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을 단지 코미디로만 여긴다면 우리는 실수하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를 구성하는 것은 그들이 지금-이곳에 있다는 현장감이며 그래서 감독의 아내와 딸은 현장에서 즉시 투입될 수 있었고, 중단될 뻔했던 영화 리얼리즘의 현장은 지켜진다. 어떻게 해서든 카메라를 멈추면 안 된다는 말은 아주 필사적이고, 관객의 시각으로 보면 어떻게든 ‘보는 행위’를 중단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기도 하다. 즉, 언제 어디서나 영화는 존재해야 한다.


왜 영화를 극장에서 보아야 하느냐고 그들은 묻는다. 어떻게든 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닌가. 혹은, 본다는 것을 본다는 행위 자체가 시뮬라크르 속에서는 더 의의가 있는 게 아닌가.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어쩔 수 없으니 중단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프로듀서의 말과 그럼에도 이것을 진행하겠다는 필사의 몸부림과 이 모든 것을 밖에 서서 지켜보는 방송국 간부가 있다. 다시 말해서, 티브이와 영화와 넷플릭스의 담론이 이곳에 있다.


그들의 카메라, 지켜본다는 리얼리즘의 환영은 세 갈래로 분할된다. 실수하는 것 또한 현장이라는 프로듀서의 말. 콘티뉴이티가 깨지기에 작품에 해가 된다는 배우의 말. 어찌 됐든 방송되었으니 그만이라는 관계자의 말.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본다는 것이다. 백남준의 개념미술처럼 영화가 아니라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개념이 되어가고 있다. 마르셀 뒤샹의 그 유명한 작품을 떠올려 보자. 소변기에 사인을 해두고 작품이라고 우기는 행위. 그것을 작품으로 만든 건 사인을 한순간의 이데올로기이자, 그것이 미술관에 진입했다는 공간의 신호이다. 이 영화는 그 연장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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