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도 카메라를 본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여정 내내 함께하던 호랑이가 영화의 결말에서 표피를 벗고 이미지의 산물이 될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이안 감독은 그 영화를 3D 화하면서 이미지와 개념을 분리해냈다. 말하자면 입체 속에 평면이 있는 셈이다. 우리가 입체의 환영에서 벗어나는 건 3D 안경을 벗고 스크린의 평평함을 직면할 때다. 고다르는 이안보다 조금 더 늦게 그 개념에 도달했다. 그러나 방향은 반대였다. 고다르는 <언어와의 작별>을 위해 이미지의 개념을 버릴 것을 요구한다. 시네마의 환영은 스크린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며 불교적 관점을 내세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미지 안의 언어는 우리가 추상화할 수 있는 개념인 게 분명하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수만자의 코드로 이루어진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것이 메츠가 말하는 영화의 언어는 아니다. 오히려 이 언어는 별개의 이미지에 하나의 자아가 투영된다는 이마고에 가깝다.
이른바 이마고(Image+Ego)라 불리는 이것은 시가 말하는 언어적 심상이나 문학이 말하는 시점의 상상력이 아니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게 아니라, 카메라가 포착당한다는 역투사(Reverse Projection)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카메라를 볼 때 카메라도 우리를 보듯이, 카메라가 세계를 볼 때 세계도 카메라를 본다. 말로 하면 쉬워 보이는데 막상 떠올리기에는 어려운 개념이다. 우리는 그동안 카메라가 현실의 포착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를테면 로버트 플라어티와 존 그리어슨이라는 두 가지 포착의 갈래가 있었고, 이것이 60년대의 이탈리아와 미국에 가서 또 다른 방식으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금 뿌리를 내려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그런 계보 속에서도 카메라가 세계를 들여다본다는, 우리 세계가 오히려 카메라를 찍을 수 있다는 생각은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영화 작가 이론과 카메라 만년필 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화란 오로지 카메라의 예술, 혹은 편집의 예술이라고만 여겨졌었다.
그러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에서 영화의 프로그램은 다시 쓰인다. 1부와 2부가 있고 그 둘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다. 덧붙여서 2부의 결말은 호랑이와의 눈 맞춤이다. 이 짧은 한 줄로 영화의 결말은 설명된다. 하지만 이것으로 영화의 느낌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다시 말해서 언어가 이미지를 따라가지 못한다. 이때 당신은 원래 영화란 이미지의 산물이기에 내러티브가 아니라 카메라의 언어를 말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는 영화를 찍는 게 아니라 영화에 쫒겨 다닌다. 마치 CCTV를 피해 도망 다니는 도둑처럼 보인다. 쇼트가 많은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닌데 몹시 다급해 보인다. 어쩌면 그가 태어난 곳이 영화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그는 타르코프스키처럼 제약된 환경에서 영화를 찍었다. 타르코프스키의 소련과 아피찻퐁의 태국은 검열과 검열의 연속이다. 이 혹한의 환경 속에서 시네아스트의 자아는 위축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에는 불안에 떠는 타르코프스키의 모습이 담겨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소련 영화 위원회와의 대립을 보면, 필름은 길게 늘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그의 불안감이 필름에 투영되어 유달리 길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불안한 이미지의 파편이 그들의 영화 속을 떠돌고 있다. 아피찻퐁의 영화에 군인이 자주 등장하는 게 그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감독 본인이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태국이 오래된 군부 체제로 굴러간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는 군부의 검열이 심해서 태국을 떠난다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군부와 영화 속 이마고와의 상관관계는 결코 추측에만 불과하지 않을 테다. 이를테면 <열대병>에서 오래된 악령을 퇴치하려 드는 군인의 모습은 악령에게 삼켜지는 것으로 치환된다. 카메라가 영화를 볼 때, 영화도 카메라를 본다는 그의 이념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필름에서 군인은 신화 속의 악령을 퇴치하러 가는 인물이자, 우리의 시야가 이입되는 대상이기도 한데, 군인과 카메라의 시점이 번갈아 제시될 때 영혼은 교환된다. 아피찻퐁은 스크린 위에 문구를 띄우면서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너도 그를 느낄 수 있고, 그도 너를 느낄 수 있다.”라고. 이것뿐만이 아니다. 태국의 정글에 거주하던 원숭이는 동물의 언어로 군인에게 경고해준다. 군인이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령을 만나면 죽여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의 세계로 너는 끌려가고 말거야.” 어쩌면 이 원숭이의 언어는 영화 속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관객인 우리에게 자신의 말을 전하기 위한 장치일지도 모르겠다. 시네마의 환영을 인지하면 그곳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영화의 환영에 사로잡히고 만다고. 다시 말해서, 아피찻퐁의 시선으로 보면 영화에 집어삼켜지는 카메라를 죽여야 하는 셈이다.
영화를 죽여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아피찻퐁의 영화 속의 풍경이 종교적인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는 종교살해처럼 느껴지는 면도 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를 텐데, 그보다는 종교라는 면이 더 맞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영화에서 별개의 쇼트에는 별개의 자아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 한 편이 하나의 생명체로 기능하는 여타 영화와는 다르다. 아피찻퐁은 영화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로 기능한다는 것은 일종의 전체주의와 같다고 비판한다. 여러 쇼트의 모음이 하나의 영화가 된다는 말은 개인의 집합이 하나의 국가라는 말과도 같고, 그렇다면 이때 쇼트의 자아를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영화의 개념은 거부되어야 마땅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영화에서 스크린으로 들어가는 제1의 도구인 카메라의 역할을 부정하고, 오히려 영화가 카메라를 바라보는 쪽을 택했다. 쉽게 말해, 아피찻퐁의 영화는 찍히는 게 아니라 찍히려고 노력한다. 결혼식장에서 사진을 찍을 때 공간이 비좁아 다들 중앙으로 뭉치듯이, 한 편의 영화에 담기기 위해서는 그들의 자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탈곡기 안의 볏단처럼
호랑이가 우리를 본다. 우리도 호랑이를 본다. 이때 우리의 눈은 인물의 그것이다. 영화의 2부에는 군인 한 명이 나오고 그렇기에 그가 우리의 이입 대상이다. 이 절차는 너무나도 당연해서 딱히 설명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 절차를 깨부수기 위해 다분히 노력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고다르다. 물론 고다르는 절차의 난봉꾼이었지 카메라의 역할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어쨌거나 카메라는 존재한다면서 관객에게 카메라를 대놓고 보여주었다. 반면 아피찻퐁은 그 카메라는 물질이 아니라 개념적인 존재라면서 카메라 만년필 설에서 탈피할 것을 요구한다. 요컨대 카메라는 영화의 쇼트를 써내려가는 게 아니라 관객의 자아를 조각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조각을 자연의 형상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보았듯이, 그는 카메라가 관객이 갖고 있던 것을 드러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피찻퐁의 영화는 관객 참여적인 성격이 강하며, 이것이 바로 그의 영화가 주술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이때 주술적이라는 표현은 그의 의사를 존중한 것이다. <열대병>에서 호랑이의 몸에 갇힌 것은 오래된 주술사의 영혼이다. 즉, 이 호랑이는 우리에게 주술을 걸고 있다. 자, 당신은 아피찻퐁의 정글에 들어올 준비가 되었는가.
아피찻퐁의 정글에는 태국의 기후가 있고, 군인이 있고, 강물이 있다. 분명 아피찻퐁의 영화에서 태국의 고유한 감정을 제외해서는 안 된다. 아피찻퐁은 자국의 이데올로기를 담아낸다는 점에 더욱 위대한 시네아스트다. 한국의 임권택이나 중국의 지아장커가 추앙받는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다. 다만 그의 영화가 태국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해서 오리엔탈리즘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도 동아시아 국가에 사는데 그의 영화를 동양적으로 본다는 건 정말로 웃긴 일이다. 그러니까 아시아라는 지역을 공유하는 우리가 아피찻퐁의 영화를 타자로 인식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이를테면 <열대병>의 중간에 불현듯 지나가는 전생이라는 단어는 일차적으로 1부의 두 남자에게 투영된다. 두 남자는 연인인데, 전생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그들은 전생에 이루지 못했던 어떤 관계가 된다. 즉, 남자라는 성별의 두 사람은 여자와 여자였을 수도 있고 남자와 여자였을 수도 있다. 이것은 현생과 전생이라는 불교적인 순리, 몸과 영혼이 다를 수 있다는 자아와 타자의 관계이다. 어떤 면에서 현대의 퀴어 이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영화와 카메라의 관계를 떠올린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영화는 정말로 이게 전부일까? 어쩌면 이 영화의 전생에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지는 않을까? <열대병>의 1부와 2부가 전혀 다르지만 묘하게 같아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이 둘의 관계는 전혀 다르지만 서로 이어진 것처럼 보인다. 더 상위의 개념으로 보면 그런 생각을 가능케 하는 주술적인 관념이 바로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이다.
꼼짝마! 움직이면 쏜다! 라는 경찰의 경고선언이 여기에 있다. 군인이 호랑이를 잡으러 갔을 때만 해도 그는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호랑이를 마주하자 영혼이라도 뺏긴 듯 부르르 몸을 떨기만 한다. 오히려 그는 호랑이에게 경고선언을 당해버렸다. 호랑이는 움직이면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것만 같다. 그래서 그의 몸은 굳어버린다. 동시에 우리의 뇌도 정지한다. 이 장면은 그 자체로 별개의 자아를 지니고 우리의 머리에 침투한다. 그것은 일종의 에포케(epoche)이다. 이 알 수 없는 영화의 내러티브를 파악하려던 우리는 호랑이를 마주함과 함께 사고의 정지를 경험한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애초에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이것은 주술적인 영화이다. 별개의 쇼트가 하나의 자아로 숨쉬고 있고, 그 쇼트들에도 별개의 전생이 공존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모든 쇼트가 만인의 자아로 기능한다. 어느 쇼트에서도 어느 자아가 소환될 수 있다. 그 중에는 영화의 장면을 불러오는 시간적 회고의 기능도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회고 중에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마지막 장면에서 수풀로 사라진 호랑이가 8년 뒤의 과거로 돌아가 <열대병>의 우림에 도착했으리라는 상상도 있다.
이것은 찌르는 이미지이다. 푼크툼(punctum)이라는 바르트의 말이 우리의 뇌간에 통로를 낸다. 이안의 호랑이가 아피찻퐁의 열대우림에 도착하는 순간 언어는 승화하고 개념은 잔존한다. 그러나 찌르는 순간의 파동으로 잔존하는 개념조차 영화 속에 흩어져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이미지의 파편을 다시금 찾아 떠나게 된다. 말하자면 이마고가 흩뿌려진다. 마치 탈곡기 안의 볏단처럼, 우리는 여태까지 모아온 영화 해석의 실마리가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본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좋은 현상이다. 이 해석의 실마리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우리를 홀렸던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정글의 멜로디에서 벗어나 이마고와 카메라 사이의 뇌간을 여행하기 시작한다. 요컨대 이것은 우리가 영화에서 자아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영화가 포착이 아니라 생명체라는 점을 깨닫는 순간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에포케를 통해 아피찻퐁의 영화가 생각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완성된 생각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생각하는 자아였다.
그 호랑이는 정말로 호랑이였습니까 라고 묻는 이안 감독이 있다. 마찬가지로 아피찻퐁 또한 그렇게 묻는다. 그러나 두 영화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호랑이가 향하는 곳이다. 이안의 호랑이는 떠나야만 하고 아피찻퐁의 호랑이는 영화의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즉 이안의 그것은 노에마(Noema)이고 아피찻퐁의 그것은 노에시스(Noesis)다. 우리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호랑이를 통해 인물의 이야기를 부정하거나 혹은 그대로 믿어버린다. 반면 <열대병>의 호랑이는 부정할 대상도 없고 그대로 믿을 수도 없다. 아피찻퐁은 그것을 전설 속의 존재로 설정하면서 생각의 여지를 없애 버렸다. 즉 이 영화에서 노에마는 전면적으로 부정된다. 노에마가 부정되기에 우리의 생각은 하나로 뭉쳐지지 않는다. 오히려 낡은 목조 건물안의 먼지처럼 분주하게 움직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브라운 운동처럼 멈출 수가 없다.
클라인의 병
엄밀하게 말해 아피찻퐁의 영화가 개념적으로 새로운 지점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어떤 순간에 푹 찌르는 이미지가 개입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푹 찌르는 이미지를 통해 관객은 영화의 밖으로 내쳐져 관찰자가 된다. 관객은 자신의 개입 없이도 영화가 진행됨을 인식하고 그를 하나의 흘러가는 시간으로 인정하게 된다. 이 시간은 필연적으로 흘러가야만 하기에 내버려 두어야 하고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는 시간에 대항한다. 하지만 그 대항의 방식이 이상하다. 그의 영화에서 흘러가는 시간은 현실의 기준이 아니라 그만의 독자적인 기준을 따르는 것 같다. 요컨대 우리의 시간이 십진법이라면 그의 시간은 오진법이다. 사실 무슨 진법을 쓰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기존의 방식으로 그의 영화를 정의하면 오류가 생긴다는 점이다.
아니, 어쩌면 오류가 아니라 그저 다른 관점일지도 모른다. 그의 영화를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동안의 시네마에서 푹 찌르는 이미지는 영화 전체가 한 편의 노에시스라고 가정할 때, 노에마를 관객에게 찌르면서 노에시스의 전반적인 체계를 재구축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 때의 노에마는 코페르쿠니스적 가치관이었다.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였고, 그것이 어떻게 알려졌느냐면 달이 태양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즉 카메라가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영화가 카메라를 본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세계가 카메라에 가려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우리는 <열대병>의 이야기를 내부에서 외부로 보게 된다. 그것도 카메라가 아니라 우리의 두 눈을 통해서 말이다.
이 이상한 관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마 클라인의 병이 가장 유사할 것 같다. 클라인의 병은 외부와 내부가 이어져 있다. 어떤 관점에서는 음식물이 우리의 내부를 지나가지 않는다고들 하는데, 그건 입에서 항문까지가 신체와 닿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통로이다. 하지만 그것을 한번 꼬아 외부의 통로에 연결할 때 두 개의 표면은 닿게 된다. 이때도 통로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안과 밖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세계는 전체 표면이 된다. 다시 말해서 아피찻퐁의 <열대병>은 1부와 2부라는, 전혀 다른 표면이 서로 닿아있는 이상한 영화이다. 우리는 이 이상한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그동안 알던 시네마의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영화에는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구분이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포착당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는 생각하는 자와 생각되는 지점의 구분이 없다. 모든 것이 자아이며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의 마지막에 도달한 호랑이가 생각의 집합체가 아니라 우리를 포착하는 대상임을 깨우쳐야 한다. 그는 살아있는 카메라이며, 어떤 전생을 지닌 필름이다. 그 필름에는 온갖 기억이 덮일 것이며, 그럼에도 수백 년은 기억할 테다.
아피찻퐁은 그렇게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형태로 나타나 군인을 밀어버린 존재가 아니라 그저 호랑이일 뿐이라고. 이 호랑이는 수백 년을 살았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군인도 그렇다. 그렇다면 이들의 마주침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예견되었을 수도 있다. 여기에, 군인에게 조언했던 원숭이의 모습도 사실은 원숭이 울음소리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그 울음소리의 해석은 단지 자막을 통해 제시될 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서사를 잇는다면 온전히 관객의 의지이다. 만약 모든 것에 전생이 있다면 이 원숭이조차 조력자의 관계에 들어서고, 1부는 2부의 전생이거나 2부는 1부의 전생일 테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점점 더 미궁에 빠지게 된다. 과연 두 영화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걸까? 두 개의 우주는 평행 선상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세계인가. 영화의 언어로 말하자면 편집인가 옴니버스인가.
이 영화의 세계는 카메라를 맹렬하게 집어삼키고 있으므로 우리의 의지는 그것에 휩쓸리게 된다. 즉, 카메라에 동일시되었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영화의 노에시스 과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카메라 없이 촬영되는 영화, 관객 없이 구축되는 서사, 노에마 없는 노에시스. 이 과정은 1부와 2부의 분절을 뭉뚱그려버린다. 말하자면 이 영화를 보며 우리가 얻는 것은 영화 속에 세계가 있는지에 대한 영화 체계의 근본적인 역설이다. 과연 언제까지 영화가 카메라의 통치 아래에 놓여있어야 하느냐고 그는 묻는다. 세계 속에 영화가 있을 수도 있다고 그는 말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자신을 압박하는 세상에 대한 영화만의 복수이다. 오히려 당신들이야말로 스크린 속에서 탄압받고 있노라고 그는 말한다. 데이비드 린치가 카메라 포착의 개념을 동공 확대의 개념으로 바꾸었다면 그는 우리의 이마고를 스크린 내부로 치환해버린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오히려 우리의 삶이 더 영화적이고 작위적일 수도 있다는 역설적인 관계가 있다. 카메라가 포착당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포착당하는 것이다. 정치적이라면 정치적일 테고 평범하다면 평범한 이 영화는 앞으로 어떤 영화에도 전생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우리가 이미 멀홀랜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