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개들의 영혼
짐 자무시의 영화에는 스크린을 떠도는 무언가가 있다. 유령이라는 시적인 표현도 좋지만 그보다 더 나은 말이 있다. 떠도는 그는 바로 짐 자무시이다. 자무시의 강한 자의식이 영화 속에 반영되어있음을 우리는 느낀다. 하지만 이 느낌은 영화 내에서 흘러나오는 게 아니다. 자무시의 인물들이 늘 어딘가를 떠도는 것은 맞다만, 이런 느낌을 그가 인식하고 만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가 의식하지 않았기에 그를 닮은 영화가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짐 자무시의 영화는 현실에 드러난 무의식이다. 말하자면 짐 자무시의 영화는 현상계에 등장한 이마고(Imago)이다.
짐 자무시는 자신이 아웃사이더라고 말한다. 사회의 주변부를 겉도는 타자라고 말이다. 이게 바로 그의 영화에서 온갖 종류의 타자들이 나오는 이유다. 물론 이 두 가지 문장이 서로를 보조한다는 증거는 없다. 단어는 몰라도 개념적으로 볼 때 두 문장이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아웃사이더가 꼭 주변부를 돌아야 할 이유는 없다. 요컨대 아웃사이더가 정중앙에 있을 수도 있다. 티브이 속의 연예인들이 지독한 고독을 느끼는 것처럼, 타자의 개념은 관계의 범주를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말하자면 아웃사이더로서의 자무시와 영화에서의 타자를 분리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이 두 가지를 동일시하게 된다면 그의 영화는 그저 한없이 방랑하는 로드무비에 불과하게 된다. 사람들이 영화에서 작가를 오인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에서 작가란 주체와 타자라는 두 가지 시선으로 분할된다. 영화 한 편을 작가의 사상 전체로 여기는 건 약간의 오류가 있다. 만약 영화를 이끌어가는 사상을 작가의 것으로 여긴다면 작품 내에서 이끌어지지 않는 것들을 설명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짐 자무시의 영화에서는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의 형태가 대립한다. <고스트독>에서 현대에 놓인 고대인의 기행은 누군가를 위해 산다는 게 죽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너를 위해 사는 건 죽음으로의 여정이다. 요컨대 <패터슨>에서 길 위를 다니는 버스 속의 창가에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있듯이, 앞으로 가면 뒤로 가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짐 자무시의 영화에는 선택지가 없다. 물리적인 형태의 선택지는 있는데, 그 양쪽에 모두 발을 걸치므로 사실상 선택지가 없게 된다.
이것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단테의 세계도 아니요, 오히려 카프카와 까뮈의 세계에 가깝다. 그곳은 눈으로 관찰되는 동시에 마음을 데려간다. 눈을 마주치면 영혼을 빼앗긴다는 점에서는 볼드모트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스크린의 응시가 이입으로 이어지는 영화 관람 행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요컨대 실패한 동일시라고 말할 수도 있는 셈이다. 이 거울은 건물 너머에서 우리에게 빛을 들이대고 있다. 이처럼 짐 자무시의 영화에는 영화의 표층위와 분리된 시선이 아주 또렷하다.
이 시선은 그의 것으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늘 회의감을 품고 살아간다. 예를 들어, <다운 바이 로>는 삶의 회의로 감옥에 갇힌 이들이 내면의 희망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유쾌하지만 유쾌하지 않은 영화다. 어쩌면 그들은 탈옥하지 않은 게 더 나았을 수도 있다고 그는 말한다. 동시에 그들은 이미 탈옥하여 야생에 내쳐진 상태다. 이것은 사회로의 귀환이기에 자유이자 불안이다. 그들을 내쫓은 게 사회였으므로, 이 사회로 돌아간다는 건 자유를 위해 불안을 감수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이들의 모습에는 양가성이 역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이 왜 특정한 지향점을 갖고 살아가는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들은 왜 그쪽 방향으로 가야만 할까. 혹은, 왜 그쪽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일까.
영화라는 이가 살아가는 방식
유현목은 <오발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자.” 썩은 이를 품은 집안의 한편에서, 정신없는 어머니가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아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른다. 요컨대 이것은 영화가 개인의 삶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삶의 추진력은 희망이나 열의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고 영화라는 매체가 말한다. 그것은 시간이다. 그것은 떠밀림이다. 나이를 먹기 싫은데 나이는 먹게 된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끝이 나게 되어있다. 이때 영화 중간에 퇴장하는 것은 굉장한 무례로 취급된다. 자살도 마찬가지다. 삶의 중간에서 퇴장하는 것이 개인의 권리라고 주장한다면, 삶을 만든 이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게 아닐까 하고 넌지시 물어본다. 이것은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다. 남겨진 필름 조각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이다.
짐 자무시는 빔 밴더스가 영화를 찍고 남은 필름 조각으로 <천국보다 낯선>의 단편을 찍었다. 대략 이와 비슷한 일이 반복되어 현재의 천국이 있었다. 말하자면 천국은 여러 갈래의 삶이 다양한 우주에서 흘러들어온 결과이다. 이 영화에서도 세 명의 인물은 어딘가로 떠난다. 왜라는 물음은 잠시 접어두고 일단 떠나게 된다. 그러나 그곳은 천국이 아니라 천국보다 낯선 어디였다. 아마 짐 자무시는 천국이 아니라 천국보다 낯선 곳만이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건 명료한 형태일 뿐 그 너머의 흔적까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나이를 먹기 싫었는데 왜 나이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이때 이 질문을 들은 당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미쳤느냐고 물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른은 어른의 형태로 지금-이곳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마치, 매미의 울음만을 우리가 듣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서, 질질 끌린 삶의 흔적의 앞에 보이는 건 지금-이곳의 현상이다. 그래서 이곳은 현상계이다. 요컨대 시네마의 환영도 그런 것 중 하나다. 그리고 짐 자무시의 영화는 지금-이곳과 그 뒤의 흔적이 신비롭게 공존한다. 이런 풍경이 아주 신비롭다. 이 신비로운 풍경이 영화의 무언가와 어긋날 수는 있어도 짐 자무시라는 이가 살아가는 방식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화라는 이가 살아가는 방식, 지나온 시간이 지금의 시간에 겹쳐 떠오른다는 것, 이것은 영화가 수십 수백 수천 개의 자아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매 순간의 쇼트가 하나의 자아라면 그런 것들을 보아온 우리의 생각이 지금-이곳의 쇼트에 떠오를 때, 그 쇼트는 단순히 별개의 것에 불과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다중인격이 아니라 다중우주이다. 그것은 순간이 아니라 순간의 집합이다. 말하자면 영화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관계가 충돌하는 게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 마치 오랜 세월을 묵은 감정이 한순간에 터져 나오듯 시간이 흘러나온다. <영원한 휴가>에서 우리가 본 게 이에 해당한다.
작가의 세계를 반영하는 것과 현실의 세계를 반영하는 두 가지 종류의 영화가 있다면, 그 둘 사이에도 무언가가 있어야 할 테다. 짐 자무시의 영화가 바로 그 중간이다. 무언가를 앞질러 가면서도 동시에 품는 듯한 그의 영화에는 늘 시간이 흐르고, 늘 시간이 멈추어 있다. <패터슨>의 시간이 매순간의 변주를 하나의 필름에 품는 것이라면 그것 또한 흐름과 정지의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생각하는 삶의 변주이다. 같으면서도 다른, 비슷한 순간이 우리에게 놓일 때 그것은 기시감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된다. 어쩌면 변주, 아름답게 말하면 “삶은 계속된다.”, 불편한 말로는 “죽지 못해 산다.”, 영화의 언어로는 엔딩 크레딧을 향해 간다는 것. 이것이 짐 자무시의 인물들이 마치 결말을 다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유다.
어떤 방식으로든 저항하라
시간의 편린을 하나로 규합하는 것은 짐 자무시의 의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세계를 선택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중심으로 삶의 궤적이 뭉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처럼, 요컨대 자의식이라 불리는 그것에 의미가 달라붙을 때 방향은 설정되고 추진력은 가속한다. 말하자면 별개로는 의미가 없어 보이는 그 쇼트들이 시간 위에 정렬되면서 현재의 뒤로 숨을 때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 정확하게는 의미를 찾는다. 책상 위에 두서없이 나열된 카드들의 순서를 파악하는 것은 참가자의 몫이다. 즉, 여러 상황의 순간들을 이미지로 정렬하는 것은 짐 자무시의 능력이다. 아마도 그의 영화가 대체로 옴니버스 형식의 선형성을 띄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홍상수가 <자유의 언덕>에서 삶의 순간을 영화의 순간으로 번역했다면, 그는 삶이나 영화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홍상수의 순간이 발견의 순간이라면 그의 순간은 뒤늦은 인식의 순간이다. <생활의 발견>은 즉석에서 발견한 대상에서 자신의 지난 삶을 떠올리는 미술관으로서의 삶이 있고, <고스트 독>에는 이전의 시간에서 자신의 현재를 불러오는 박물관으로서의 삶이 있다. 아마도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전서구는 그런 시간을 관통하는 도구일 테다. 전서구는 훈련받은 장소로만 날아가기 때문에 늘 일방적인 소통이 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그는 늘 과거에서 현재로 온다. 이때 현재에서 과거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짐 자무시는 현재에서 과거의 영혼들을 불러내는 게 가능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일련의 쇼트들에 별개의 자아를 부여하고 그 영혼들을 언제든 불러낼 준비가 되어있다.
<브로큰 플라워>에서 느닷없이 날아온 편지가 그에게 모험을 부여할 때 우리는 이 여정에 동참하게 된다. 그래서 결론은? 그는 그녀를 만나 행복해진다. 그러나 이 행복에는 두 단어 이상의 함의가 있다. 그는 편지를 열어 내면을 들여다본다. 말하자면 “편지는 도달했고 열렸다.” 라깡의 주장은 자무시에게는 거짓이다. 반대로 보면, 라깡은 자무시에게 그 편지가 도달해야 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으므로 거짓이 아니기도 하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기표에서 기의가 태어난다는 게 아니다. 기표의 아래에 기표가 줄곧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중첩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도 포함해야 한다. 이것은 기표의 계보학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겪은 선택의 순간들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느덧 그것들이 하나로 뭉쳐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아마도 모두가 연결되는 느낌, <아마도 악마가> 그랬을 것이라는 로베르 브레송의 답변. 그들은 묻는다. “인류 전체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게 누구지?”, “누가 뒤에서 조종하지?” 마지막으로 실없는 결론을 낸다. “악마일 거야. 확실해.” 요컨대 여기서 인류라는 단어에 영화를 대입하고, 그 근거로 별개의 쇼트마다 자아가 있다고 말한다면, 자아의 모음은 영화이고 인류이다. 그래서 로베르 브레송의 말은 3년 후의 짐 자무시에게 도달하게 된다. 이 영화를 조종하는 것은 어떤 악마인가? 우리 인류를 조종하는 것은 어떤 악마인가? 짐 자무시는 그 악마가 바로 삶의 원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악이 우리를 추동한다. 악이 우리를 망설이게 한다.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말했듯이, 우리가 선택했다고 믿은 게 사실은 잘못된 이성의 결과였다는 회의감이 짐 자무시에게 있다.
문제는 그런 선택을 중재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삶은 계속되니까.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가 정말로 무서워지는 순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꽁치의 맛>에서 아버지가 딸을 떠나보내는 게 필연이듯이, 사랑하는 이의 삶 전체를 지금 이곳에서 떠나보내야 한다는 슬픔이 이들 영화에 있다. 짐 자무시는 그 방향을 반대로 돌렸다. 아마도 그는 부정의 변증법을 생각한 것 같다. 왜 인간은 시대의 제약을 받는지 궁금해하면서 오히려 해답은 우리 삶의 기수를 돌리는 것에 있다며, 그는 자신의 지난 삶을 한 가지 순간에 불러모은다. 이 순간은 응축되어 그동안의 삶을 성찰하게 한다. 어떠한 가능성으로서의 삶이 새로이 열리고, 그러나 돌아갈 수 없다는 시간의 법칙이 우리를 제약한다. 말하자면,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죽어있는 이들은 낡은 디트로이트에 살고 있다. 이들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살아온 뱀파이어다. 그리고 이들을 살아있게 하는 건 사랑이다. 과거의 사랑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들이 사실상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정말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래 살았고 사랑은 고작 3년이 유통기한이다. 그래서 그런 시큰둥함이 이해가 간다. 다만 그런 시큰둥함을 안고도 어떻게 함께 사느냐고 물을 수 있다. 한국식으로는 정으로 산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뱀파이어들은 정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두 뱀파이어가 살아가는 방식은 무엇인가. 이들의 삶은 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과거의 사랑을 중심으로 고대와 현재를 잇는, 그 관통의 구멍에 빨대를 꽂는 추억의 뱀파이어들이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라고 말하는 건, 솔로들이 모두 죽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만난 솔로들을 하나의 추억으로 남겨두고, 그런 순간을 현재의 누군가에게서 떠올리고, 그런 시간의 반복이 인생이라는 것을 뜻한다. 짐 자무시는 현대에서 살아가는 고대의 존재를 그렇게 말했다.
반면 비판타지적인 것도 있다. 시간을 초월할 수는 없지만,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고스트 독>에 있다. 답은 쉽다. 책을 읽는 것이다. 독서는 인류가 발명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림에서 발화로, 발화에서 구전으로, 구전에서 야사로, 야사에서 책으로. 빌렘 플루서는 인간이 그림의 폭력을 피해 텍스트로 도피한다고 말했다. 라깡의 언어로 번역하자면 상상계의 혼란을 피해 상징계로 도피한다. 그러나 이때 그 두 가지 세계를 잇는 것은 실재계이다. 다시 말해서 이 실재계는 시간의 층위이다. 우리의 언어로 말하면 이것은 쇼트의 모음집이다. 영화의 계보로 말하면 이것은 너무 오래되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과 루돌프 아른하임의 모습이다.
에이젠슈타인은 말한다. 쇼트와 쇼트 사이에 창조의 정수가 있다. 우리는 번역한다. 삶과 삶의 사이에는 창조의 시간이 있다. 루돌프 아른하임은 말한다. 영화는 시네아스트의 예술이다. 그리고 들뢰즈는 시네아스트의 역할을 필름 속 세계가 아니라 필름 밖의 세계로 넓혀주었다. 요컨대 영화의 행위자는 단지 배우나 감독뿐만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우리도 그렇다. 다시 말해서, 영화라는 자아의 모음집에 우리의 시간이 살짝 첨언될 여지가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영화가 인터렉티브하지 않다는 비판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다. 영화는 분명 소통하고 있다. 감독의 의지가 영화 속을 관통하고 있다면 그 주변의 쇼트를 에워싸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그리고 짐 자무시의 영화에는 자무시의 자리와 관객의 자리가 동시에 마련되어 있다. 이 자리가 동시에 마련되어있는 것은 흡사 GV 토크를 떠오르게 한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삶과 당신의 삶을 영화라는 무대에서 대결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주변부의 타자로서 자신을 소개하는 그는 이 영화를 타자의 영화로 만들고서 그런 장벽 사이의 틈새를 찾아온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나의 삶은 이곳에 있습니다. 당신은 그 중 어느 삶에 자신의 순간을 느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대조의 순간이 어떤 결과로 이어졌습니까? 어쩌면 <커피와 담배>의 여러 커피와 담배 중 하나가 우리가 아는 어떤 순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상의 밤>과 <미스터리 트레인>처럼 사람들의 삶은 언제 어디서나 보편적인 추상과 고통을 갖는다며 악마를 형상화하는지도 모른다. 이때 웨스 앤더슨은 그런 짐 자무시의 물음에 <다즐링 주식회사>로 답했다. 그리고 들뢰즈는 짐 자무시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예술작품이 어떤 방식으로든 저항 행위이기는 하지만, 모든 저항 행위가 예술 작품은 아닙니다. 모든 예술작품이 저항행위는 아니지만, 어떤 방식으로는 예술작품은 저항 행위입니다.” 이 조언을 우리의 언어로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시간에 저항하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모든 저항이 영화가 되지는 않습니다. 모든 시간에 저항할 수는 없지만, 어떤 시간은 예술작품에서 뭉쳐지기도 합니다.” <데드맨>이 그런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