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을 보면 사람들이 도플갱어를 믿는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지구 상 어딘가에는 또 다른 내가 있고 그는 나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때 분열된 자아의 주체를 무엇으로 삼느냐에 따라 그 가정이 달라진다. 첫 번째로, 그는 나보다 잘살기에 나는 그가 되기를 바란다는 가정이 있다. 이것은 이른바 입양의 판타지이다. 내가 사실은 어느 재벌가의 숨겨진 자식이고 언젠가 데리러 오지 않을까 하는 상상이다. 두 번째로, 타자로서의 자신에 맞서 그를 확인하고 위협적이면 제거하고 친화적이면 친해지려는 전략이 있다. 이것은 또 다른 자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즉, 나는 나 자신을 잘 모르기에 나를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이 목소리는 나르시시즘의 증언이기도 하다. 저는 저를 사랑하기에 당신을 쫓을 수밖에 없었어요. 찢어진 영혼은 본체로 돌아가기를 갈구하게 된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라는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인용해본다. 윤동주는 이 시에서 타자로서의 자신을 가정한다. 시대처럼 올 아침이란 맑고 투명한 그릇을 뜻하고, 그것은 곧 시대에 저항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비관이다. 그는 저항시인이었지만 시인이었기에 한없이 가녀렸다. 그는 총과 칼을 들지 않았고 펜과 풀을 들었다. 말하자면 그는 또 다른 자신이 있으리라고 믿었다. 어딘가에 존재할 그는 단지 등불 만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윤동주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 생각이 최후의 나라는 문구를 통해 표현될 때, 그것은 삶의 끝자락에 자리 잡는다. 이것은 최후이고 인간에게는 죽음이다. 말하자면 내가 원하는 그는 도플갱어요, 그와 마주친 순간 우리는 주체성을 잃게 된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합당한 정권 교체의 순간일 수도 있다. 여태까지 내가 잘하지 못했으니 당신은 내 의지를 이어주시오. 이른바 자아의 교환, 그러나 껍데기는 동일, 나의 이념은 나의 힘으로 완성된다. 이것이 도플갱어가 갖는 나르시시즘의 힘이다.
공간이 풍기는 향취에서
이준익의 <동주>에서 윤동주와 송몽규는 한 몸처럼 나온다. 그들은 형 동생 사이임에도 허울 없는 친구로 지낸다. 요컨대 그들은 도플갱어다. 총으로 저항하는 어둠과 펜으로 저항하는 빛의 사나이다. 이런 생각이 윤동주의 시에 나오는 황혼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며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를 떠올리게 된 건 신기한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도플갱어의 모티브는 얼굴과 행동이 똑같다는 간단한 말로 설명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도플갱어란 외모가 같다는 것으로만 표현되지 않는다. 도플갱어인 그들은 다음과 같이 묻게 된다. “우리는 닮았어요. 습관이나 행동까지도.” 말하자면 자신의 이상을 상대에게서 찾는 것이 바로 도플갱어다. 이것은 아주 로맨틱하고 마음에 안정을 주기도 한다. 우리가 부모님을 닮은 이성에 본능적으로 끌리듯, 나를 닮은 하지만 다른 주체적 타자에게 끌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결국 이런 끌림이 사랑으로 이어지는 건 몹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이런 끌림에 대한 이유를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을 알지 못하기에 늘 타자의 이름을 빌려 자신을 설명하게 된다. 즉, 우리는 타자의 힘 그 이름으로 지칭된다. 우리는 늘 타자로부터 이름을 불리고,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심지어 혼자 있는 방안에서도 타자의 감시를 받고는 한다. 말하자면 외부세계의 시선을 우리의 내면으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도플갱어가 되어 우리의 마음속에 공존하게 된다. 이게 공포로 변형되는 건 쉬운 일이다. 도플갱어에 관한 구전 중에, 사람을 죽이고 나서 그의 생각을 복제해 죽음 사람을 대체한다는 설화가 그것을 증명한다. 일종의 자기살해에 해당하는 이 설화는 주체를 도플갱어에게 빼앗겨 버린다는 점에서 몹시 두렵다. 자기살해를 했으면 새로운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데, 살해되는 대상이 타자 아닌 주체이기에 그것은 거부의 대상이 된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이러한 공포를 애도로 바꾼다. 이것은 공포도 사랑도 아니고 애도에 불과하다고 그는 말한다. 어쩌면 진정한 인연이란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폴란드의 베로니카(이렌느 야곱)와 프랑스의 베로니크(동일 배우)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만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영화에서도 스쳐 지나가 버린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도플갱어는 서로 인지되지 말아야 한다. 서로 마주하며 주체에 대한 의문이 싹트는 순간 베로니카는 사망하고야 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베로니카가 사망한 이유는 사진을 찍혔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건 사진이 영혼을 뺏어 간다는 사진기의 공포일 것이다. 수잔 손택의 말처럼 사진을 찍는 (Shot)행위가 총을 쏘는 (Shot)행위에 비견될 수 있다면, 베로니크의 발포로 베로니카가 사망한 게 된다. 요컨대 이 영화에서의 도플갱어는 유령과도 같지만, 명백하게 물질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그는 총을 맞았고 이 총은 현실에 존재한다.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는 두 여인의 모습에 다음과 같이 첨언한다. 사진적 시선과 기억의 시선은 다르다고. 사진적 시선은 수잔 손택이 말하는 무차별적인 발포의 순간이고 감정 없는 공간만이 남게 된다. 반면 기억의 시선은 공간이 풍기는 향취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답한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태어난 그들의 운명이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은 아마도 황혼일 것이다. 이것은 신카이 마코토가 말하는 통일된 시간이다. 이 황혼은 빛과 어둠의 결합이고 시간의 구분이 없다. 하지만 일식이 찰나이듯 이것 또한 순간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가 할 수 있는 건 조명을 통해 빛과 어둠을 순간으로 변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빛과 어둠이라는 도플갱어가 서로의 다름을 마주하는 순간에 벌어지는 환영을 보여주는 셈이다.
눈으로도 관측되고 우주에 공존한다
이와이 슌지가 과다노출을 통해 과도한 행복에 인물을 잠식한다면 이 영화의 조명은 따스한 접착제 같다. 두 사람이 간간이 연결되는 순간 추억은 파편적으로 공유된다. 이건 사진의 이미지와도 같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끌림은 사진을 찍는 (Shot) 행위여서 해당 순간을 파편화하게 된다. 즉, 불안한 영혼은 파편화되고 그걸 붙여보려는 게 조명이다. 이를테면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노란색 녹색 계열의 색상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도 <마지막 황제>의 도입부에서는 그런 색상을 썼다. 말하자면 이들의 색채는 계속해서 자아를 응축하고 행복하게 만든다. 그 폐쇄된 세계는 내면으로의 도피이며 자아로의 감금이다. 요컨대 <마지막 황제>의 푸이가 세상에 나올 때 노란빛이 사라지는 것은 궁궐의 벽이 푸이의 마음을 가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노란빛이 사라지지 않는다. 즉 그녀는 애초에 혼자였다. 이런 부분은 감독이 도플갱어라는 것을 애초에 만날 수도 없고 인지될 수도 없는 고정관념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또한 그녀의 세계는 언제나 하나임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러니까 도플갱어라는 것은 태양계 너머의 다른 은하이다. 눈으로도 관측되고 우주에 공존한다는 걸 느끼지만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감독은 말한다.
이에 대한 카메라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두 인물이 대화하는 장면에서 타자가 주체를 바라볼 때는 간격을 좁히는데, 주체가 타자를 바라볼 때는 간격이 넓어지는 것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같은 공간에서도 다른 왜곡의 정도를 보여주는 우주의 모습인 것 같다. 중력이 큰 행성 주위에서 공간은 왜곡되기 마련이다. 이것을 프로이트의 언어로 번역하면 초자아는 자아를 압박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그녀의 초자아는 중력이고 자아는 행성이다. 이때 타자는 그녀의 세계에 진입하고 싶어하는데, 그녀는 아니다. 연인 관계든 뭐든 간에 그녀는 늘 혼자 있고 싶어한다. 이 아이러니함은 같이 있으면서도 소외감을 느끼는 집단 속의 고독에서 비롯된다. 즉, 초자아 속의 자아는 소외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자아라는 행성을 유지하는 초자아라는 중력이 그 주위로 접근을 불허기에, 그런 면에서는 인간은 혼자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맥락은 나라는 주체와 나라는 타자가 대립하는 현 상황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황혼의 순간에 주체와 타자가 교환된다는 윤동주의 시가 있고,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이 영화에서 분열된 자아의 순간을 확인한다면 그 공간의 파편을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밝은 외부에서 어두운 내부로 들어오는 그 순간, 시간과 공간이 맞닿을 때 황혼은 태어난다. 이 황혼의 순간에는 주체와 타자가 교차하는 모습이 포착된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어디론가 진입한다는 건 분열의 순간이다.
육체를 잇고 마음을 훔치는 행위
주체가 타자와 결합하여 그 구분이 사라지는 순간은 오르가즘이다. 나는 너고 너는 나라는 황홀경이란 섹스이다. 삽입하는 쪽과 삽입 당하는 쪽의 모습은 있어도 쾌락의 감정은 이어져 있다는 느낌에서 비롯된다. 섹스가 육체가 아닌 감정의 교류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통일된 시간 혹은 공간에서 섹스하던 베로니카는 누군가가 사망했음을 느낀다. 즉, 빛과 어둠이라는 섹스 그 결합의 순간인 황혼 혹은 황홀경에서 자신과 이어져 있는 누군가의 사망을 느낀다. 다시 말해서 황혼은 섹스이며 이것은 눈앞의 상대가 아니라 세계와 이어지는 순간이다. 말하자면 포착의 순간은 섹스이다. 사진을 쏘는 (Shot) 행위가 총구를 발사하는 것과 같다면, 그 발사 행위는 사정의 순간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육신이 아니라 감정의 발포이다. 누군가와 이어진다는 것은 절벽 위에 로프를 던지는 것이며 그러나 이 로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어지는 순간에 대지는 흔들리고야 만다. 결국 그 공간은 결코 이어질 수가 없다. 그 감정도 결코 이어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진적 시선은 공간의 통일성을 근거로 그 속의 대상을 깨부수기 때문이다.
베로니크가 베로니카를 촬영한 것은 일방적인 총격이면서도 무의식적인 행위였다. 그녀는 그저 풍경을 촬영했을 뿐인데 그 속에 베로니카가 들어 있었다. 이 사실은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 밝혀진다. 이 사실이 밝혀지고 나면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가슴 어린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요컨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와 교접했다. 즉 그녀라는 주체는 그녀라는 타자와 교접했다. 그러므로 사진적 시선이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바르트의 말처럼 그것은 시간의 편린이 아니라 시공간의 대상화라는 점이다. 베로니카의 시간이 베로니크에게 포착될 때 그것은 섹스가 아니라 자위가 된다. 베로니크는 베로니카를 일방적으로 포착하며 그녀의 시간을 대상화했다. 같은 공간에 있었기에 공간은 제외되었고 말하자면 그래서 자위이다. 시간이 마음이고 공간이 육체라면, 육체를 잇고 마음을 훔치는 행위는 폭력에 가까울 테다. 즉 사진의 포착은 일방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에 대한 자위행위다. 또한 그것은 자기학대이다.
반면 그 시공간을 벗어나자 상실감은 연기처럼 사라진다. 베로니카는 이런 현상에 의문을 품고 사라진 누군가를 추적하려 한다. 그리고 이때 그녀의 앞으로 어떤 카세트테이프 하나가 도착한다. 이 카세트테이프에는 특정한 공간의 소리가 들어있었고 그것은 그녀를 어느 카페로 초대한다. 이것은 공간의 향취로 만든 초대장이며, 누군가의 기억이 소리에서 비롯될 수 있다고 우리에게 조언해준다. 그러니까, 카세트테이프를 보낸 남자는 사진적 원리로 작동하는 이 세계로부터 그녀를 도피시키려고 했다. 시각으로부터 청각으로 이동하는 과정에는 두 명의 도플갱어가 서로를 포착하기만 했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분명 나를 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영화는 자신을 아는 행위가 자기학대로 이어진다고 말하는 것일까. 우리가 따져볼 만한 건 이 부분이다. 베로니크는 사진을 통해 그녀를 간접적으로 보았기에 사망하지 않았던 걸까, 혹은 같은 공간이 아닌 장소에서 그녀를 포착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시각적 심상 없이 우리는 그려본다
그녀들은 대화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서로를 느꼈고, 그러나 이 느낌은 불면증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녀들은 시각(Visual)이 아니라 영상 문화(Visual)로 이어진 것이다. 그녀들은 눈으로 무언가를 포착하는 사진의 세계가 아니라 그 사진의 주변부를 구성하는 행성계를 공유했다. 말하자면 도플갱어를 잇는 건 연대가 아니라 유대이다. 어깨를 맞대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는 통한다는 강한 확신이 있을 때 그들의 사진적 시선은 포착됨을 피할 수 있다. 혹은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나를 안다는 건 자아에 대한 파편적인 기억일 뿐이라고. 내가 아는 나의 모습은 과거의 내가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그때의 모습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걸 떠올린다는 개념이 시각적 심상과 연관이 있다는 점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시각적 심상 없이 우리는 우리를 그려볼 수 있을까.
이것은 밑도 끝도 없이 퍼져나갈 물음이다. 시각 없이 무언가를 떠올린다는 걸 우리는 상상할 수가 없다. SF영화에서 흔히 말하듯, 특정한 개념이 감각기관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뇌에 인지되는 순간을 우리는 현재 겪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시인들이 그에 가까워 보인다. 오감으로 파편화되어 들어오는 이 세계를 규합하는 것은 뇌인데, 뇌에서 비롯되든 아니든 뇌에 머무는 자아의 존재 또한 그렇게 규합된다. 그런데 인간은 너무 똑똑해서 스스로 자아를 분열시킨다. 그래서 분열된 세계를 규합하는 과정에서 온갖 오류가 생긴다. 그중에 하나가 도플갱어다. 분열된 세계를 규합하는 과정이 하나의 섹스라면, 분열된 세계를 포착하는 게 카메라라면, 이쪽에서 저쪽으로의 이질성을 극복할 방법은 무엇인가. 아마도 키에슬로프스키는 극복이 아니라 그 극복의 과정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영화에서 베로니크는 도플갱어의 존재를 깨닫고, 자아의 죽음이 도플갱어의 죽음이었음을 깨달았으며, 그제야 비로소 섹스의 쾌락에 몸을 맡기게 되고, 이 순간 침실에 빛과 어둠은 공존하며, 오래된 통로를 지나서 발견한 건 대상화된 주체와 대상화된 타자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 부분에서 칸트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 감독의 이야기로 본다면 예술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주체로서의 영화가 있고 타자로서의 영화가 있다. 물론 그건 같은 필름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갈래는 영화상에서 서로를 인식하지 못한다. 오직 영화 밖의 우리만이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영화 밖을 바라보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며 그 반대만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서로를 인식할 수 있을까. 왜 인식해야 하는지는 답변이 명료하다. 주체로서의 자신과 타자로서의 자신이 결합하는 순간 황홀감이 퍼져나오며, 불완전한 자아는 대상화에서 벗어나 본연의 모습을 찾을 수가 있다. 이것은 영화 속의 자아가 서로를 인식하거나, 그럼에도 모른 체하거나, 불완전하게 목격하는 것에 관한 물음이다.
언젠가는 영화 밖의 우리 도움 없이도 그들 스스로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감독은 염원하는 것 같다. 쉽게 말해, 어느 영화와 어느 영화가 연출과 내용상으로 전혀 연관이 없음에도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들이 서로 도플갱어라는 사실에 있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나르시시즘의 증언이다. 저는 저를 사랑하기에 당신을 쫓을 수밖에 없었어요. 찢어진 영혼은 본체로 돌아가기를 갈구하게 된다. 영화 담론은 영화의 계열에만 머무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계열에서 벗어나 찢어진 영혼을 본래의 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사진에서 벗어나 그림으로 향하는 것이다. 우리는 등불을 밝혀 어둠을 내몰고 동굴의 그림자를 몰아내야 한다. 그 빛과 어둠의 맞닿는 장소에 영화의 영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