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는 교사인 남자가 휴가를 내어 사막에 곤충 채집을 하러 왔다가, 사막화가 진행 중인 어느 마을에 노예로 잡혀 사다리 없는 구덩이 안에서 한 여자와 살림을 차려 마을을 위해 모래를 퍼내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끝이 남자의 탈출일까? 아니다. 그는 구덩이에 남는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물을 창조해내는 과학적 원리의 응용을 마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하여, 그가 스스로 강조했던 ‘과학적’인 방법을 전파하려고 남는다.
아베 코보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아마도 성공한 영화화 중 하나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 작품을 만든 데시가하라 히로시 감독이 거의 예외적으로 찍은 ‘영화’라는 점에서도 이 작품은 특별하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다큐멘터리 혹은 다큐멘터리적 영화로 가득 차 있으며 그중에서도 이 작품을 포함한 단 두 작품만이 ‘영화’라고 부를 만하다. 하지만 이때 ‘영화’라는 표현이 이 작품의 재미를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영상에 관해서는 영화라고 부를 수 있으며, 바로 그 영상에 평소의 다큐멘터리적 성향이 드러나 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변화하는 레이어와 인간의 형체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 뜨거운 모래가 넘실대는 이 영화의 주요한 이미지를 보면 이것이 영화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그 위에서 허둥대는 어느 남자의 모습이 화면 위에 올라올 때, 우리는 비로소 이것이 허구의 세상에서 진행되는 허구의 인물임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배경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서 이곳이 현실이라고 믿게 되는데 정작 그 위의 인물들에게는 허구의 표지가 부여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상을 마치 사진 위에 투영되는 영사기의 그것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즉 배경과 인물이 따로 논다는 소리다.
위의 비유를 컴퓨터 그래픽의 세계에 들여놓으면 그것은 마치 연극의 모습처럼 보이게 된다. 연극 무대에서 배경은 늘 변화하는데 인물들은 같은 자리에서 연기한다는 점이 컴퓨터 그래픽의 그것에 상응한다. 컴퓨터 그래픽이란 초록색 배경의 세트에서 인물의 연기만을 촬영한 후에 그 배경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렇다면 우리는 연극에서 배경과 인물 사이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연극 무대에는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는 배경의 층위와 인물이 연기하는 공간인 연기의 층위가 있다. 이 2개의 층위를 컴퓨터 그래픽에서는 레이어(layer)라고 부르는데, 연극과는 다르게 무한정 뻗어 나갈 수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포토샵과 같은 사진&그림 프로그램을 다루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 레이어의 끝없는 분할을 통해 하나의 개체를 쪼개어 놓을 수가 있고, 이 편리함이야말로 연극 무대와 컴퓨터 그래픽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이는 곧 하나의 개체가 여러 개의 층위(level)로 분리될 수 있다는 점을 뜻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여기에서 파생된 하나의 질문을 받게 된다. 연극의 층위는 단 두 개인데 컴퓨터 그래픽의 층위가 무한정 뻗어나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가장 쉬운 답변은 그것이 컴퓨터라는 가상 공간이라는 것일 테다. 가상 공간에서는 끝없는 복제가 가능하다. 하지만 매체 철학의 관점으로 볼 때 그 두 가지 매체의 차이점은 층위를 이루는 하나의 중심축이 있느냐는 것이다. 연극에서 배우들이 여러 역할을 맡더라도 그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지 않는 것은 ‘나’라는 중심축이 확실하기 때문이고, 컴퓨터 그래픽의 경우에는 그 반대이다. 쉽게 말해 이것은 자아를 가진 것과 자아를 갖지 않은 것의 차이이다.
이제 위의 질문에 답하자면, 연극에서 배경과 인물 사이에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배우가 배경의 층위를 자신의 축 주변에 두르기 때문이다. 즉 배우는 배경을 망토 삼아 그곳에 동화된다. 어쩌면 우리는 괴도 루팡(연기와 함께 망토를 두르면 어딘가로 사라지는)을 떠올릴 수도 있을 테다. 다시 말해서 그 괴도가 신출귀몰한 것은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층위를 자신의 자아를 통해서 자유롭게 드나드는 덕분이다.
하지만 그 괴도의 능력은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다. 능력의 정도가 아니라 유무로만 볼 때 우리는 모두 괴도다. 예를 들어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층위라는 것은 이 사회가 단순히 하나의 체계가 아닌 여러 체계의 모음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학교를 벗어나 집으로 향하는 학생은 학교와 집이라는 두 개의 층위와 그 상위단계인 사회에 속해 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각 층위에 맞는 역할을 부여받고 그것을 잘 수행하고 있으며, 배우들에게는 그 층위가 단지 ‘허구의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삶을 사는 배우라고도 할 수 있는 셈이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산다는 자각이 없을 때 그것은 컴퓨터 그래픽의 세계처럼 파편화되어버린다. 하나의 개체가 여러 레이어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에서 자아라는 중심축을 제거하고 나면, 그것은 실밥이 풀린 스웨터처럼 술술 풀려나 결국에는 정체성에 파국을 맞이한다. 즉 우리는 층위를 이루는 하나의 중심축이라는 말이 그 여러 층위의 모음이 조합이 아니라 조립이라는 깨닫는다. 조합이라는 단어가 그 층위의 무작위 결합을 뜻하는 것이라면, 조립이라는 단어에는 그 층위들이 어떤 방식으로 결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설계가 담겨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러 층위를 조립한 결과다. 그것들이 무작위로 결합되는 순간, 그 조합의 순간에 자아의 변형은 시작되고 그것은 인간의 형체를 잃는다.
존재의 풍화를 겪는다는 것
<모래의 여자>에서 모래의 이미지가 배경으로 제시되는 순간은 거의 항상이다. 이 영화는 모래의 한복판에서 시작되어 모래의 한복판에서 끝나는데, 그것은 다큐멘터리적 터치를 통해 우리는 이곳이 현실이라고 믿게 된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현실은 모래의 한구석이다. 그런데 이 현실은 하나의 층위에 머물지 않고 실시간으로 분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모래시계에서 가느다랗게 떨어지는 모래의 이미지가 시간의 분화를 표현하듯이, 이 영화에서 모래 구덩이를 밟아가는 남자의 모습에는 현실의 분화를 ‘밟아가는 듯한’ 느낌이 있다.
남자가 구덩이에 발을 내디딘 순간 그의 현실은 구덩이 아래의 가옥이 된다. 처음에 자신의 감금을 부정하며 휴가 기간 내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던 그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가 제시하는 인간 실존의 문제는 아무리 파내어도 끝없이 내려오는 모래 알갱이의 산에 대입되는데, 가옥에 살던 그녀는 이를 두고 “모래를 파기 위해 사는 건지 살기 위해 모래를 파는 건지”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 문제는 ‘태어났기에 사는 건지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인지’라는 존재의 사명과도 연결된다. 우리가 이 땅에 도래한 이유는 삶을 위해서일까 아니면 삶을 부여받았기에 이 땅에 도래한 것일까?
이 모래와 삶의 비유는 둘 다 실존의 문제에 대입되지만 끝이 있고 없다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삶의 끝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모래의 끝은 없다. 요컨대 우리는 죽음을 알면서도 살아가는 모순된 행동을 보이는 셈이고, 반대로 그런 죽음을 피하려고 끝없는 모래를 퍼내는 것이 작품 속 인간이다. 이때 만약 우리가 시간 속에 사는 존재라고 가정한다면, 그 시간은 모두에게 무한히 제시되면서도 개인의 내면에 투사될 때 개인의 시간으로 변화하므로, 시간의 ‘층위’는 분화하는 게 된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퍼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시간의 끝에는 죽음이 있고, 끝없이 밀려오는 모래의 끝에도 죽음이 있고, 그 죽음이 다가오기 전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것의 층위는 분화한다.
이 부분에서 이 영화는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온다. 스크린 안을 살아가던 남자의 이야기는 영화의 끝 그 검은 스크린으로 진입하게 되는데, 이것은 영화 상영의 끝 즉 죽음이다. 요컨대 작품 속에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채로 끝나버린 것은 이 영화의 마지막이 남자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이 영화는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끝없이 밀려오는 것 안에서 정체성의 분화를 겪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테다. 그러므로 남자의 시간인 스크린 안을 벗어나 살아가는 우리는 영화관 안에서 일종의 신이 되는 셈이다. 이런 면에서 이 영화는 원작 소설보다 더 나은 면이 있다.
남자가 모래 사이에 파인 구덩이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에 우리는 현실의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게 된다. 그 구덩이는 마치 공간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보여서 속에 빠지는 이의 존재 또한 분화할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말하자면 이 구덩이는 우주 한복판에 놓인 블랙홀처럼 ‘오류를 품은’ 것이자 ‘모든 것을 삼키는’ 존재다. 여기에 우리가 블랙홀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화이트홀을 제시하고, 그 중간의 통로를 웜홀로 설정한다면, 모래 구덩이에 빠지는 사내의 모습에서 그가 이 통로를 통해 어느 시공간으로 떨어지게 될 것인지에 대한 상상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구덩이는 어떤 중력의 구체를 통해 현실이 왜곡된 결과로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중력이 강한 행성의 주변에 시공간이 휘어진다는 상대성 이론의 결과는 바로 이곳에 구덩이의 형태로 나타나 있다. 말하자면 그 별개의 자아인 모래 알갱이의 흩어진 존재를 하나로 규합하는 자아가 바로 이 가상의 구체이며, 그것은 사막이라는 존재의 체계의 중심부에서 구덩이라는 형태로 재현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상상해본다. 그 사내가 발을 내디딘 이 사막이 수천수만 개의 모래 알갱이로 이루어진 곳이라면, 이때 그 알갱이가 하나의 층위에 해당한다면 그 사막은 끝없는 분화의 장일 것이고 그곳에서 남자의 자아는 올곧게 유지될 수 있을까?
그 자아는 남자가 땅을 내디딜 수 있게 하는 중력이다. 즉 자아란 생존의 필수요소이다. 그것이 없다면 걸어 다니지 못하고 허공에 둥둥 떠다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자아가 땅과 분리되어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장소가 있다. 그곳은 바로 영화관이다. 영화관에서 우리는 이곳에 존재하면서도 저곳에도 존재하는 특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자아를 잊지 않는데, 그러면서도 스크린 안의 주인공에게 이입하게 된다. 요컨대 영화관은 중력의 법칙이 올바르게 적용되지 않는 이공간이고, 그래서 영화관과 구덩이는 이론적으로 일치하게 된다.
영화관이라는 검은 공간에는 영사기를 통해 가느다란 빛줄기만이 외부로부터 스며든다. 즉 이곳은 바깥의 현실과 분리되어 영화의 환영을 보여주는 이공간이다. 마찬가지로 영화 속 이것은 현실의 어느 곳이 붕괴하여 만들어진 구덩이이다. 그곳에 내려온 한 줄기 햇살에 눈부신 남자가 손을 들어 시야를 가리는 순간 이 영화는 스크린 안팎을 관통하는 강력한 자아를 품게 된다. 이곳은 영화가 관객을 매료시키는 그 중력/자아의 힘이 작용하는 특수한 이공간인데, 그곳과 이곳을 잇는 통로가 모래가 흘러내리는 모래시계 모양의 웜홀이라면, 우리 존재의 의미가 이곳으로부터 해방되어 나가는 장소는 그 스크린 안일 테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사기가 스크린에 상을 부여한다는 전통적인 개념을 뒤집어볼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 스크린으로의 침투가 이 가느다란 빛줄기, 그 웜홀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그 반대의 경우는 성립하지 않는 걸까? 어쩌면 영화 속에서 남자가 구덩이에서 퍼올리는 모래가 스크린 안에서 밖으로 던져질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보자. 그 수많은 모래가 각각의 층위에 해당하면서 모래를 밟는 남자의 존재를 계속해서 마찰시키고, 그 마찰로 존재가 풍화되어가는 것이 이 영화의 테마이다. 그렇다면 그 모래가 스크린 밖에 흩뿌려진다는 것은 우리 또한 모래에 마찰된다는 것, 존재의 풍화를 겪는다는 것, 영화와의 점진적인 동화를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이 영화에서 끝없이 밀려오는 모래가 별개의 자아가 부여된 어떤 층위라고 할 경우, 집안의 천장/허공에서 끝없이 침투해오는 모래의 모습이란 집이라는 존재/자아를 위협하는 것일 테다. 다시 말해서 그 모래는 집이라는 존재/자아 속에 침투해오는,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물건이다. 여자는 그 모래가 어느 벌레 때문이라고들 말하지만 남자에게는 그저 출처를 알 수 없는 모래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우리의 내면에 침투해오는 그 이상한 모래가 스크린 속에서 던져졌다는 사실은 인지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에서 남자가 퍼내는 모래란 우리가 그곳에 던지면서도 그들이 다시금 우리에게로 퍼내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이 영화는 상호소통한다.
실존의 문제를 치료해주는 영화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실존에 관한 인간의 고뇌가 아니라 실존의 풍화 앞에 선 어떤 이의 생존기라고 불러야 한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저 모래 알갱이처럼 끝없이 바스러지는 존재를 보여준다고 말하겠지만, 반대로 그 알갱이를 뭉치게 하는 것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자아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마도 남자가 바다를 보려 했던 것은 그 자아가 살아가는 방식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파도가 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인데, 그 섭리를 통해 해변가는 완성된다. 말하자면 그 해변가는 바닷물이 모래와 같은 침전물을 계속해서 운반한 결과이고, 그 모래 알갱이가 별개의 자아/층위라고 생각해보면 이 해변가는 층위의 모음인 하나의 정체성이다.
당신은 이 문장에서 <인셉션>의 림보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림보는 분열된 자아가 아니라, 분열된 자아가 하나로 모이는 장소였다. 그래서 이 영화의 남자도 구덩이 속에 남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구덩이는 분열된 자아를 품는 장소이기에 오히려 치유의 장소에 가깝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그 분열됨을 부정하려다가 마침내 그 분열됨을 통제하게 되는, 그의 말을 빌려 구덩이 안의 물 “창조주”가 되는 과정이다.
이 영화를 보는 우리도, 우리의 자아가 파편화되어 들어가는 곳이 스크린 안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 스크린에서 우리의 분열된 자아가 통합된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 스크린은 구덩이이고 빛의 알갱이가 끝없이 밀려드는 백지장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 그 참신함에 확신을 가진 채 스스로 기뻐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영화가 제시하는 사유의 가능성이고 그래서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서로와 대화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것은 실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아니라 그 실존의 문제를 치료해주는 영화라는 생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영화를 볼 때’가 아니라 그 영화를 본 후 ‘이야기를 나눌 때’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실존은 영화관이라는 구덩이가 아니라, 그 구덩이에서 자아를 통합하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는 것, 대화를 통해 자신의 자아를 타인과 나누는 행위, 그 모래를 삽으로 퍼내어 이리저리 뒤섞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이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 요컨대 이 영화는 치유다. 영화관/구덩이가 죽은 장소가 아니라는 점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그 장소에는 블랙홀과 같은 강력한 어둠이 있지만 그 어둠이 사실은 우리가 갖는 강력한 자아에서 비롯됨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