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공간의 환영

by 수차미


81558_1000.jpg?type=w966 영화 <가버나움>의 작품 포스터 ⓒ 그린나래미디어



열린 공간의 환영


영화를 보면서 줄곧 고민하게 되는 것 중 하나는 이곳이 환영임을 인정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영화가 다루는 게 재미를 위한 것에 불과하다면 그저 환영일 뿐이라며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있겠으나, 영화가 다루는 게 현실의 어떤 고통이라면 그것은 그저 환영에 불과하지 않게 된다. 그 스크린의 아른거림은 빛의 환영인 동시에 현실의 그림자이고, 이때 우리는 동굴 속의 죄수가 되어 영화관 밖의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요컨대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들은 우리가 사는 현실의 이면에 담긴 ‘이데아’가 아닐까 하고 우리는 의심해보게 된다.


우리는 동굴 속의 죄수들처럼 그 거짓된 상만을 바라보게 된다. 저곳이 실재하는 세계라 하여도,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허탈하게 사라지는 그 빛의 환영을 보면 마음속에 잠긴 우울만이 수면 위로 올라올 뿐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 영화를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에 잠기게 된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두 가지 의문점을 받아들게 된다. 저곳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는 것만으로 이 영화관람 행위는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그 인지를 통해 무언가 행동을 해야만 진정한 의미의 선순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가버나움>이 말하려는 것도 그런 현실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레바논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어느 남자아이의 모습을 통해 난민을 비롯한 여러 문제를 통틀어 건드리는 이 영화의 주제의식은 사실, 우리가 평소에 보던 뉴스에서도 흘러나오던 것들이다. 그러니까 의미적인 맥락에서는 새로울 게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그 뉴스의 보도화면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오는데, 아무래도 이것은 영화관이라는 어두컴컴한 장소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동굴에 가깝기 때문일 테다. 집에서 티브이를 보는 우리에게 그 화면은 언제든지 컨트롤할 수 있는 스마트폰 액정의 촉각적 경험이지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그 화면은 허구와 진실의 사이 어딘가에 진실이 있으리라고 믿는 그러나 그것으로의 접촉은 제한된 감금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마지막 엔딩 크레딧에 이 영화의 배우들이 실제 난민이었음을 밝히면서 자신이 보여주려는 게 허구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야기는 허구이지만 배우들이 실재이기에 이것은 허구 위에 세워진 실재, 즉 스크린이라는 허구 위에 설립된 인간의 삶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면에서 가상 공간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의 모습으로도 보일 수 있고, 이 경우 그들의 삶은 ‘거짓된’ 것이 되어버린다. 장소가 어디든 간에 주체가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주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그동안 있었으나, 이것은 가상현실처럼 주체가 허구적 배경 속에 뛰어드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현실에서 흘러온 인물과 시나리오에 설립된 레바논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우리는 그 두 가지 층위를 구분할 수 있을까? 그 인물이 연기자가 아니라 당사자라면 영화 속의 풍경들은 그저 스크린의 환영에 불과한 것일까?




81558162809_727.jpg?type=w966 영화 <가버나움>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사방이 열린 무방비 도시(Open city)


스마트폰 액정 위에 재생되는 영상에 비하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촉각적인 체험은 그리 크지가 않다. 영화라는 매체는 촉각이 아니라 시각의 영역에서 출발했고, 그래서 그것은 버츄얼(Virtual)이라는 경험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요컨대 영화라는 매체가 나아간 것은 가상의 것을 눈앞에 재현하는 것, 플라톤의 이데아를 영화관에 재현하는 것이었다. 이때 그 버츄얼함이 갖는 특징 중에 하나는 그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거짓된 것’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객석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던 관객이 객석의 경험을 잊게 될 경우, 객석으로부터의 평가를 요구하는 스크린의 존재의미는 사라지고 그곳은 영화가 아닌 현실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한 영화가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가는 영화의 개념이 등장하게 된 것은 뭔 훗날의 이야기이고, 우리가 주목할 것은 관객이 없다면 영화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영화는 관객을 스크린으로 현혹하면서도 반대로 밀쳐내야만 하는 모순된 숙명을 품고 있다. 요컨대 그런 모순이 이 영화의 현실성과 비현실성이 동시에 발현되어야만 했던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관객이 없다면 영화가 성립할 수 없다는 말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영화를 보러오는 부유한 현실이 있다면 영화의 대상이 되는 가난한 현실도 있다”고. 다시 말해서 그곳은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거짓된 게 아니라, 거짓된 것처럼 보이는데 정말로 현실이다. 이것은 끔찍한 일이며 당신은 그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아마도 당신은 왜 자기도 아는 이야기를 굳이 길게 늘어놓았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우리의 답변은 그 문제는 얼마를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난민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는 최근 국제 사회의 경향을 되새기는 이 영화에는 단지 국적의 난민뿐만 아니라 ‘버츄얼함’에 터전을 잃은 우리들의 모습 또한 담겨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주된 배경인 레바논이 그렇게 부유한 나라도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다시금 부와 빈이 갈리는 이 현실에는 도시 전체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신의 시점, 익스트림 하이 앵글 쇼트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도심의 풍경은 마치 ‘무방비 도시’처럼 보인다. 영어로 ‘Open city’라고 쓰는 무방비 도시의 문맥에는 그 ‘열림’이 모두에게 ‘열리지 않았다는’ 아이러니함이 담겨 있고, 그 열림이 인터넷 시대의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무방비’ 인터넷에 살고 있음을 말해주는 표지일 테다. 말하자면 우리가 인터넷상에서 자유롭다고 느끼는 사실에는 반대로 그것이 ‘길을 잃었다거나’ 혹은 ‘집이 없다는’ 등의 ‘무방비함’이 내재되어있다.


어린 꼬마 자인(제인 알 라피아)이 살인미수로 갇힌 곳은 교도소인데, 바깥보다 훨씬 나은 삶의 여건을 제공한다. 먼지가 풀풀 날리면서 길 잃은 하이에나들이 어슬렁거리는 슬럼가의 한복판보다는, 배식을 받고 티브이를 보고 학대하는 부모가 없는 철창 안의 환경이 더 낫다. 말하자면 그 도시는 열려있음에도 ‘무방비’하고 그 교도소는 닫혀 있음에도 ‘안전’하다. 그렇다면 이때 구속되기 전에 자인이 내다보던 창밖의 풍경은 열린 공간일까 닫힌 공간일까? 자인은 거지 같은 현실이 아니라면 창밖의 죽음만이 있을 뿐이라고 항변한다. 그런데 그 아래에는 자살이라는 죽음의 풍경이 있고, 그런 면에서 우리는 그 창의 안팎이 어떤 공간인지를 묻게 된다.


현실보다 나은 게 죽음이라는 말은 자유보다 구속이 낫다는 자인의 말과 상응한다. 즉 현실이 도시라면 교도소는 죽음이다. 이 죽음은 극단적인 경우 사형이고 그게 아니라면 도덕적 사회적인 죽음(매장)이다. 다시 말해서 열린 공간은 닫힌 공간보다 못하다. 다시 말해서, 의식이 열려있는 현실보다 의식이 닫혀있는 죽음이 더 낫다고 자인은 말하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버츄얼’ 시대의 담론을 끌어올 수가 있다. 가상현실이라는 것은 의식이 열려있는 현실에서 도피해 가상공간에 의식을 밀어 넣는 행위인데, 말하자면 그것은 열린 현실에서 닫힌 죽음으로 이주하는 것이고, 따지고 보면 가상공간의 열림은 ‘무한’하므로 그곳에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딱히 나쁜 선택도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가상현실이 누군가에게는 도피처, 즉 ‘열린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위해서 말한 두 가지 공간의 이분법은 우리가 어디에 속해있느냐는 주체의식에 따라서 언제든지 위치가 바뀔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가상현실이 ‘열린 곳’일 테고, 그렇다면 그에게는 오히려 현실이 ‘교도소’와 같은 닫힌 공간일 테다. 요컨대 <가버나움>에서 자인이 열림에서 닫힘으로 향하게 된 것은 오히려 우리의 시선에서일 뿐, 그에게는 닫힘에서 열림으로 향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화면의 위에서 아래로 늘어서는 쇠 철창 살의 이미지인데,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어딘가 모르게 자유로움이 담겨있는 듯 보인다. 그 표정에서 우리는 관찰하는 자와 관찰되는 자라는 두 가지 테마, 관객이 있어야만 영화는 시작된다는 영화의 버츄얼함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철창 속의 그들이 우리를 향해 호소하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이 영화는 그들이 관객이고 우리가 영화 속 인물이 되는 경험을 선사한다. 요컨대 관객이 영화 앞에서 편해질 수 있는 위치 즉 열린 공간일 때, 오히려 그들의 세계에 이입하지 못하고 타자로 떠도는 것은 닫힌 공간으로서의 우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분명 도시가 있다면 도시의 이면도 있을 테다. 동전에는 한쪽 면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삶이 있다면 죽음이 있고 열림이 있다면 닫힘이 있다. 그래서 이것은 문이기도 하다. 문을 밀든 당기던 간에 그것은 열림과 닫힘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이 수행의 척도는 단지 관찰자의 ‘처지’에서만 겨루어진다. 들어가는 사람에게 그 문은 열리는 것이고 나오는 사람에게 그 문은 닫히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이 영화를 보는 우리의 모습에 대해 그렇게 물어야만 할 것 같다. 우리는 이 영화를 어떤 처지에서 보고 있는가? 이 영화의 안은 열린 공간일까 닫힌 공간일까. 다시 말해서 이것은 무방비하게 포착당하는 카메라의 포착, 현실의 환영인 걸까.




81558162811_727.jpg?type=w966 영화 <가버나움>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사회의 병폐를 ‘찌르는’ 것


그 무방비 도시에는 여러 위협이 몰려들고 있다. 이곳은 사방이 ‘열려있기’ 때문에 어떠한 종류의 자유 또한 위협도 다가온다. 그들에게는 한쪽 전선만을 유지하기에도 벅차서 다른 세 면을 방어할 병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이곳은 자본이 점령한 자본주의의 식민지이다. 카메라가 허공으로 붕 떠서 도시 전체를 조망할 때, 건물 옥상의 타이어가 피자 위에 올려진 올리브의 절단면처럼 보일 때, 그 피자는 심지어 새까만 옥상의 모습에 겹쳐져 ‘썩은’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 썩은 피자조차 먹을 수 없다는 것이며, 이 썩은 피자가 아이들이 줄곧 피워대는 담배 연기에 대입될 때 영화는 점점 열린 공간의 구차함에 우리를 몰두하게 한다.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검은 연기의 근원을 알 수 없기에 그것을 피해 닫힌 공간으로 도주하는 자인의 모습에는 패닉룸의 공포가 있는 게 아니냐고 말이다. 집안에 강도가 들어 패닉룸으로 도주하고 그곳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패닉룸>이라는 영화에서 강도들은 패닉룸 안의 주인공을 꺼내려고 그곳에 가스를 불어넣는데, 주인공은 통쾌하게도 그 가스에 불을 붙여 가스를 투입하는 범인들에게 역으로 공격을 가한다. 요컨대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가능성이야말로 영화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쾌감 중 하나인 셈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그런 쾌감이 있던가? 지긋한 가난에도 피임 없이 임신을 반복하는 자인 어머니의 자궁이 닫힌 공간이라면, 그곳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어린아이의 운명은 아늑한 닫힌 공간에서 퀴퀴한 열린 공간으로 나오게 되는 불행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탄생은 축복받아 마땅한 것일까 아니면 저주받은 삶의 시작일까? 다시 말해서 자인이 교도소에서 행복해지는 것은 원치 않은 탄생을 다시금 태초로 돌려보내려는 시도, 그의 대사를 빌리자면 “이럴 것이면 나를 왜 낳았느냐고” 항변하는 행위가 아닐까?


너구리를 사냥할 때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는 너구리굴에 매연을 흘려 넣는 것이다. 그러면 참다못한 너구리가 알아서 뛰쳐나오게 된다. 위에서 <패닉룸>의 범인들은 그것을 고대하고 가스를 불어넣은 것이었다. 하지만 <가버나움>의 도시에는 사냥꾼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연기만이 존재할 뿐이다. 말하자면 이 도시에는 사냥꾼은 없어도 연기를 수행하는 존재는 있다. 그것이 바로 카메라이다. 카메라가 불어넣는 것은 자욱한 연기이다. 그 연기는 영화관 밖의 영사기에서 시작되어 스크린에 투영되고 다시금 스크린을 위해 존재하는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그들에게로 전달된다. 즉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곳은 열린 공간이고 스크린 안은 닫힌 공간이다.


요컨대 우리가 이 영화에 대해서 물을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굳이 소년을 닫힌 공간으로 밀어 넣었어야 하느냐는 점이다. 그 공간에 소년을 밀어 넣고 카메라의 포착을 흘려 넣으면 참다못한 소년이 밖으로 뛰쳐나올 것이라고 영화는 믿었던 걸까. 그 카메라의 환영은 전통적인 사진의 조영술,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에서 비롯되는 걸까. 카메라 루시다란 눈앞의 상을 바로 아래의 종이 위에 투영하여 그대로 따라 그리기만 하면 되는 사진 이전에 발명된 광학 도구이다. 그리고 롤랑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La Chambre Claire)라는 이름의 책에서 스투디움과 푼크툼의 개념을 논하고 있다. 스투디움은 보편적인 이미지이고 푼크툼은 보는 이의 주관에서 비롯되는 닫힌 이미지인데, 말하자면 스투디움의 위에 푼크툼이 존재한다. 그것은 열린 공간에 세워진 닫힌 공간이며 객관 위에 세워진 주관이다. 이것을 <가버나움>으로 옮겨보면 열린 공간(Open city)에 세워진 교도소는 스투디움 위의 푼크툼이며, 그것은 말 그대로 ‘찌르는 이미지’ 즉 그들 사회의 병폐를 ‘찌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열린 도시에 세워진 닫힌 공간에서는 열린 공간에 밀려오는 검은 연기에서 벗어날 수는 있어도, 반대로 그 연기 한가운데에 갇혀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자궁은 결코 안락하지가 않다. 다시 말해서 현실의 문제를 스크린에 품은 이 영화의 닫힌 공간은 결코 안락하지가 않다.


분명 이것이 해답은 아닐 테다. 하지만 그 어린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사망하게 된 것은 임신 때문이었다. 그 임신은 불합리한 행위였고, 열린 공간이 닫힌 공간을 만들어낸, 그곳에 연기를 불어넣은 폭력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카메라를 통해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도 폭력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자인이 교도소에 갇히는 장면은 몹시 불행하면서도 필수불가결했다고 생각한다. 소년은 언젠가 교도소 밖으로 나올 것이라고 영화는 희망찬 결말을 암시하고 있다. 그곳을 자궁으로 본다면 그는 유산되거나 낙태되지 않을 것이며, 세상에 나와 빛을 볼 수 있을 테다. 요컨대 우리는 그 빛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향하는 게 아니라, 저쪽에서 이쪽을 바라보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우리는 그곳이 허구 위에 설립된 인간의 삶, 열린 공간 위의 닫힌 공간이 아니라,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공간을 향해 ‘반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 반격은 <패닉룸>의 가스폭발처럼 화끈하지만 결코 우리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81558162813_727.jpg?type=w966 영화 <가버나움>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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