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먹고 마시는 삶 ​

by 수차미


영화 <일일시호일>의 작품 포스터 ⓒ 씨네큐브



차를 먹고 마시는 삶


이 영화에 대해 글을 쓰게 된다면 이 제목이 적당할 것 같다. <일일시호일>은 하루하루가 즐거운 나날이라는 뜻이고 이것은 다도를 하는 주인공의 삶과 연결된다. 노리코(쿠로키 하루)의 스무 살에서 시작해 24년의 세월을 찻잎과 함께 흘리는 이 영화에는 먹고 마시는 삶이 담겨 있다. 덜렁대는 성격을 지닌 그녀가 사촌을 따라 마지못해 따라간 그곳에서 덜렁대는 성격으로 차분한 다도를 잘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으나, 어느덧 시간을 흘러 그녀의 나이는 44살이 된다. 그 24년의 세월 동안 한 띠의 로테이션이 두 번이나 돌아갔고, 매년 초마다 그해의 띠에 맞추어 사용하는 다도를 두 번이나 사용하게 된다. 그녀의 말대로 12년마다 한 번이니 일생에 수 번 쓸까 말까 한 그 도구를 무려 두 번이나 사용하게 된 것이다.


다도의 핵심은 항아리에서 국자로 끓는 물을 퍼 올려 찻잔의 중심에 조심스레 떠내는 것인데, 그 찻잔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뿌연 연기에 눈앞이 흐려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에서 사용되는 주요한 연출은 디졸브이다. 쇼트와 쇼트 간의 편집이 뿌옇게 변하는데 그사이의 이음새가 매끄러우므로 우리는 어느덧 다음 쇼트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마치 우리네 삶처럼 느껴진다. 노리코의 삶도 그렇게 흘러만 간다. 일일시호일, 하루하루가 즐거운 삶이다. 그녀의 삶에는 결코 풍족하지도 않고 늘 행복하지만도 않지만, 그럼에도 차 한잔에 하루의 노곤함이 싹 풀리는 모습을 보면 보는 우리도 행복해진다.


이 행복감은 그 뿌연 연기처럼 일상 속에 스며드는 은밀한 향취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24년의 세월이지만 그 세월 동안에 벌어지는 만남과 이별은 물 흐르듯 떠나가버린다. 그러므로 차에서 피어나는 뿌연 연기에서 온천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 아닐 테다.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가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은 아마도 노천탕의 신선에게 적용되는 말일 테다. 그리고 그 노천탕은 몸을 담구는 게 아니라, 뜨거운 차의 향기에 몸을 담구는 것이라고 다케타 스승(키키 키린)은 말한다.


이 뿌연 모습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눈물을 떠올릴 수도 있고, 겨울의 하얀 풍경을 떠올릴 수도 있다. 겨울의 뿌연 풍경은 버스 창가에 서리는 하얀 연기, 그리고 안경에 서리는 김을 떠오르게 한다. 투명한 유리에 서린 김을 손으로 살짝 지우고 나면 바깥에는 흘러가는 삶이 있다. 우리가 한겨울의 이동수단 안에서 창을 바라보는 것은 그런 삶을 떠나보낸다는 의미이다. 얼마 전 새해를 맞이한 우리가 이 겨울에 지난해를 떠나보낸다는 마음을 담았듯이, 그 뿌연 눈물을 지난해로 훔쳐버리는 게 새해의 미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그 뿌연 이미지이다. 영화가 극복하는 것은 힘든 청춘의 삶이다. 청춘의 삶이라는 것은 최근에 국내에 개봉했던 <리틀 포레스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요즘 시대에 위안받고 치유 받아야 할 주제이고, 이 영화도 우리를 위로하는 것 중 하나다. 하지만 그 청춘은 늙어간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단지 젊은 노리코의 삶뿐만이 아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녀의 일생에는 아버지의 죽음과 같은 변화가 찾아오고 약혼자의 배신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안아 들만 한 시간이 그녀에게 주어진다. 요컨대 상처는 극복하는 게 아니라 치유되는 것이라고 그들의 시간이 말한다. 그래서 그녀는 영화가 끝날 때 44살의 2018년에 도착한다.


일일시호일이라는 한자를 그대로 읽으면 어딘가 딱딱하고 예스러운 느낌이 나지만, 욜로(YOLO)라는 이름의 오늘을 즐기는 행동으로 본다면 그 느낌은 달라진다. 결국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 느낌을 주는 그 독해법에는 같은 차라도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다도의 철학이 담겨있다. 여름과 겨울의 다도법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을 보고 놀라는 노리코를 향해 스승은 이렇게 말한다. “다 잊어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소리다. 그녀는 다 잊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는 오히려 다 잊어야만 새로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자연스레 체화되도록 노력하라고 조언한다. 요컨대 잊는다는 건 잊어야 한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공기 중에 뿌옇게 흩어지는 것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노리코는 스승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반면 노리코는 정말로 많이 운다. 그래서 노리코는 스승이 언제 울었는지 궁금해한다. 이때 그녀의 친척이 스승에게 나지막이 말해주는 사실, 그녀의 스승님이 돌아가셨을 때 정말로 많이 울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스승의 죽음 이후로 울음을 멈추었다. 어쩌면 그 눈물은 다도에서 흩어지는 뿌연 연기로 대체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스승의 죽음이 그녀의 향취를 더 깊게 해준 게 아닐까. 말하자면 뿌연 것에는 무언가를 극복하면서 벌어지는 힘이 깃들어 있다. 그 뿌연 것은 창가에 앉아 바깥의 풍경을 뒤로 보내기도 하고,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슬픔을 떠나보내기도 한다. 심지어 라면을 먹을 때는 배고픔을 사라지게 한다. 카메라도 마찬가지다. 쇼트 간의 편집이 디졸브로 뿌옇게 처리될 때, 영화는 매 순간의 쇼트를 극복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쇼트 바이 쇼트의 즐거움, 일일시호일이다.


그리고 영화 밖의 우리는 여기에 슬픈 사실을 하나 더하게 된다. 이 영화는 키키 키린의 유작이다. 영화를 보면서 눈물이 났던 생각은 그 뿌연 쇼트가 키키 키린의 화장된 유골을 떠나보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저 먼바다에 화장된 유골을 뿌리는 모습은 마치 맑은 찻잔에 찻잎을 뿌리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거기에 일본의 음식 중 하나인 오차즈케가 떠올랐다. 오차즈케는 밥에 차를 말아 간단한 가루를 섞어 먹는 가정식이다. 한국으로 치면 물밥인데, 그 위에 김 가루나 명태 가루를 뿌린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다들 예상하듯 그 물밥에 가루를 뿌리지 않으면 맛이 몹시 밍밍하다. 요컨대 가쓰오부시가 없는 타코야끼와 가쓰오부시가 없는 오차즈케는 무언가 빠져 허전한 맛이 난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키키 키린이 죽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이 영화의 찻잔에서는 어딘가 밍밍한 맛이 났다. 키키 키린의 독설이 만든 짠내가 찻잔에는 없었다. 그녀의 마지막 영화가 그토록 순수한 인물을 연기했던 것은 뿌연 연기에 짠내가 실려 갔기 때문은 아닐까.


적어도 일본에서 오랫동안 그녀를 봐온 사람에 비하면 우리가 키키 키린을 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테다. 그럼에도 키키 키린이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배우의 매력은 만국에서 통하기 때문이었다. 먼 옛날에는 지금 헤어지면 다시 만날 가능성을 타진하지 못했노라고 영화 속의 그녀가 말하는데, 다행히도 우리는 그녀를 영화라는 매체에서 언제든지 두고 볼 수가 있게 되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우리는 잠깐의 단절을 겪지만, 다시 만날 가능성은 인터넷상의 스트리밍 서비스에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는 넷플릭스와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가 몹시 반갑기도 하다. 넷플릭스를 통해 서비스된다면, 그녀는 정신이 아닌 물질세계에서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일 테니까.


그런 맥락에서 일일시호일의 테마는 매일이 즐거운 삶이 아니라 매일을 망각하는 삶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쇼트 위에 쇼트를 겹치는 디졸브의 개념은 이것이 왜 뿌연 것인지를 말해준다. 요컨대 그건 지난 장면을 쌓아올리는 것, 지난 시간을 쌓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 테다. 마치 크레인 타워를 건설하듯 블록 하나를 올리는 방식의 이 축조에는 쇼트를 변화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그 쇼트를 발판삼아 앞으로 나아가라는 삶의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옛날의 어느 구절처럼,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쇼트는 지나갈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순간은 지나갈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순간 위에 순간이 겹쳐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삶의 어떤 순간을 기억하는 방법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어느 회상을 하며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은, 그 장면을 불러오는 과정이 뿌연 디졸브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볼 때만큼은 그녀의 말처럼 생각하지 말고 마음으로 느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요즘 같은 시대에 영화는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다. 그러나. 스마트폰 액정 위를 누르는 촉각적 경험이 영화 시간의 단절과 함께 특정한 순간의 저장고 역할을 하는 게 사실이지만, 그런 저장하고 싶은 순간이 있어도 그저 흘려보내는 게 낫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그 일시 정지의 순간에 다음 장면이 겹쳐 떠오를 때 그것은 뿌연 것이 되고 우리의 기억도 그렇게 흐릿해진다. 인간에게 주어진 망각이 행복의 일종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기쁜 기억도 슬픈 기억도 일단은 지워야만 다음 쇼트로 나아갈 수 있음을 그녀는 말한다. 어차피 우리는 인간이기에 죽지만 누군가는 당신을 기억할 것이고 따라서 그 기억 속에서만큼은 우리는 불멸한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보면서 어느 장면을 놓쳤거나 기억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뇌 어딘가에 저장되지 못하고 시간의 영역으로 흘러가 버린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그 시간/죽음에서 벗어나는 매체이므로 구태여 순간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일일시호일>은 말한다.


나는 키키 키린을 그런 방식으로 기억하고 싶다. 그녀의 연기가 빛나는 순간은 많았지만 오히려 그녀 자체의 삶으로 기억하는 게 더 나을 것으로 생각한다. 괴팍하고 요상하고 하지만 귀엽기도 하고. 그러므로 그녀의 나이는 우리가 그녀를 기억함에 있어 별다른 걸림돌이 되지 못할 것이다.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란 그저 흩뿌려지는 것이고 다만 삶 전체는 고스란히 남을 테니까.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다가온다. 쇼트가 지나가면 쇼트가 다가온다. 힘든 청춘의 순간들이 그러하고, 키키 키린의 죽음이 그러할 것이다. 1943 ~ 2018. 키키 키린을 애도하며.



V1802795s_01.jpg?type=w966 영화 <일일시호일>의 한 장면 ⓒ 씨네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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