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을 수 없는 이들을 웃겨주세요 ​

by 수차미


대부분 사람이 <극한직업>이라는 제목을 한 이 영화를 보면서 동명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EBS의 그것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큐멘터리와 이 영화는 완전 딴판이다. EBS의 다큐멘터리는 ‘극한’ 분야에서 일하는 분들을 찾아가 목소리를 듣고 경험을 나누는 데, 이 영화는 수사를 위해 치킨을 팔게 된 어느 형사들을 다룬 코미디 장르이다. 말하자면 동명의 두 작품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EBS의 다큐멘터리는 ‘웃을 수 없는 이들’을 보며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한다.

코미디 장르의 이 영화는 ‘웃을 수 없는 이들’을 보며 ‘웃겨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한다.


즉 두 장르는 피어나는 웃음이 어디로 향하는지가 다르다. 그들의 삶에서 피어나는 웃음이 스크린 속에 환원될 때, 그것은 이해와 동정을 요구하는 다큐멘터리가 된다. 반면 그들의 삶에서 피어나는 웃음이 스크린 밖으로 환원될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동정할 수 있도록 돕는 코미디 영화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눈여겨볼 부분은 무엇일까.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동정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일까? 아닐 테다. EBS의 다큐멘터리는 그 일이 위험한 걸 알면서도 일해야만 하는 이들의 모습을 담았다. 반면 <극한직업>은 그 일이 위험하다는 걸 아는 이들, 배에 12번 칼을 맞고도 살아남은 고상기(류승룡) 반장이 대표적인데, 그들의 행동에는 자신들이 처한 위험이나 위험도가 드러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영화 중간에 악당들에게 납치된 마봉팔 형사(진선규)를 보면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혼자서 다 때려눕히리라는 확신이 들 정도다. 즉 이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는 듯하면서도 사실은 현실감이 전혀 없다.


그리고 늘 그렇듯, 현실을 반영하는 듯하지만 현실감이 없다는 점은 그것을 방패 삼아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돌려서 하는 도구가 되어왔다. 겉보기에 현실의 무엇처럼 보이지만, 전혀 현실성이 없기에 그저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코미디 영화를 볼 때는 그 현실성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치장되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 비현실성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이때 이 물음에 추가로 물음을 얹어본다면, 이 비현실성은 그 장소가 아니라 ‘현실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그들로 하여금 현실을 부정하게 한 이유를 물어야 할 것이다.



02.jpg?type=w966 영화 <극한직업>의 작품 포스터 © CJ 엔터테인먼트



웃을 수 없는 현실


웃을 수 없는 이들은 웃을 수 없는 현실에 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웃겨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 웃을 수 없는 현실을 포기한다. 현실을 바꾸는 게 아니라, 현실이기를 포기하면 그건 붕 떠버려서 그저 맘 놓고 웃을 수 있게 된다. 어떤 망상으로의 도피는 바로 이때 벌어진다. 요컨대 작년에 개봉했던 <염력>이 어이없는 상상임에도 나름의 의의가 있었던 것은, 그 이야기의 불균형이나 개연성 부족에서 시선을 거두고 나면 보이는 ‘현실이기를 포기한’ 이야기 덕분이었다.


현실에 있지 않으면서 현실을 헤쳐나간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현실이기를 포기한 이들이 허공을 허우적댐에서 오는 시각적인 유머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 헤매는 과정이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물에 빠졌을 때 살기 위해 허우적대는 모습이 지나가던 누군가에게는 우스꽝스러운 맥주병처럼 보일 수 있듯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겪는 시행착오가 지나가던 누군가에게는 근시안적이거나 덜렁대는 아둔함으로 보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우스꽝스러움을 보면서 웃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 일의 당사자가 아니라 관찰자라는 점에 있다. 영화를 본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우스꽝스러움은 우리 삶에 존재하는 어떤 일의 가능성이고, 그것이 타인에게 벌어졌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자신의 옛 경험을 이입하며 함께 슬퍼하거나 혹은 남일이라면서 그저 웃기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에 있지 않다고 상상하는 이들이 현실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담은 것이 코미디 영화라면, 그 웃을 수 없는 상황을 보며 웃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 또한 그들과 같은 상황에 부닥친 것일 테다. 왜냐하면 영화관에 있는 우리도 이곳이 현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영화관은 현실이 아니고, 영화 속 인물들도 자기들이 현실을 산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코미디 영화의 안팎은 일치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이야기 같은 남 이야기를 코미디 영화에서 보고 있는 셈이다. 그들의 모습이 현실을 사는 것 같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영화관 속의 우리도 현실이 아닌 장소에서 현실을 보고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영화 속에서 실수하거나 발길질 당하는 이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은, 그 모습이 사실은 우리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거나 모른 체했기 때문이고, 그것을 알게 하지 못하는 게 코미디 영화의 주된 역할이라 할 수 있다.



9714d663e3244844a5efb63a73a899b2.jpg?type=w966 영화 <극한직업>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DutnvybVYAA67WN.jpg?type=w966 영화 <극한직업>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치유로서의 영화


코미디 장르 연구가 서곡숙은 “코미디 영화의 핵심은 등장인물이 어떤 위기와 위협에 빠지더라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관객에게 주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패트와 매트>나 <톰과 제리>의 등장인물들이 어떤 상황에도 늘 멀쩡하게 살아오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들의 모습과는 별개로 그들이 처한 상황은 ‘정말로’ 위협적이라는 것이다. <톰과 제리>에서 톰은 전기톱을 든 제리에게 쫓기고 <패트와 매트>에서 패트와 매트는 자기들이 뭘 하는지도 모른 채 물건을 수리하고는 한다.


그러나 영화관에 있는 우리는 그 위협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영화 속의 사건들은 영화 속에서만 위협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 반대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영화라는 것이 현실이 아닌 만큼 영화관에 있는 우리는 현실에 있지 않다고 여기게 되는데, 영화 속 이들에게 우리가 이입한다면 우리는 그때 ‘현실을 헤쳐나가는 것’이 된다. 요컨대 영화 속의 위협적인 상황은, 우리가 현실에서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모른 체하는 그런 상황이다. 다시 말해서 코미디 영화의 아이러니는 그 인물들이 우리를 닮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처한 상황도 사실은 우리의 고민이라는 점에 있다.


코미디 영화가 갖는 치유로서의 가능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치유로서의 영화(Cinema Therapy)이다. 예를 들어, 분명 이 영화에서 직장에서 부진한 성적을 내는 이들이 해고 위기에 처하고 얼떨결에 치킨으로 대박을 낸다는 것/업종을 바꾼다는 것은 실업난과 불경기라는 우리 사회의 양면이 담겨 있을 것이다. 즉 이들의 모습에는 위협적인 상황을 흘려 평범한 상황으로 만들고, 그 속에서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은 비범한 인물이 되어 문제를 격파하려는, 현실도피로서의 망상이 깃들어 있다. 어쩌면 이것을 점령당한 현실을 피해 아직은 안전한 현실 밖으로 잠시 도피하고는, 독립군을 모아 현실을 수복하는 것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강조하자면, 이 ‘현실도피’는 부정적인 성격이 아니다. 이것은 어쩌면 비현실로의 망명에 가깝다.


그리고 위에서 했던 말을 암기하자면, 코미디 영화의 핵심은 등장인물이 어떤 위기와 위협에 빠지더라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관객에게 주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서, 코미디와 같은 삶은 어떤 위기와 위협에 빠지더라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코미디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정말로 코미디인가?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헤쳐 나가는 힘겨운 삶을 코미디라고 생각하면서, 그 고통을 내면이 아닌 외부의 비현실로 흘려보내면서, 마치 모르핀처럼 코미디라는 단어를 고통을 잊기 위한 진통제로 남용하는 건 아닐까?



201901301553027438.jpg?type=w966 영화 <극한직업>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DutnucgVYAAxe6v.jpg?type=w966 영화 <극한직업>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모두 우연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우리 자신을 치유하려 한다. 요컨대 그 다큐멘터리가 그들을 치유하려는 우리의 마음이라면, 이 코미디 영화는 우리를 치유하려는 시네마테라피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에게 보내는 웃음이라는 게 치유의 주된 도구인데, 그렇다면 영화 속의 ‘웃을 수 없는 이들’은 왜 웃음이 없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테다. 그들은 웃음을 도둑맞은 걸까? 아니면 애초에 웃을 수 없는 상황인 걸까? 코미디라는 장르의 이상함은 바로 이곳에 있다. 영화라는 것이 관객을 스크린에 몰입하여 감정적인 동화를 끌어내는 치유의 역할을 겸한다면, 그 코미디 속의 상황은 결코 웃을 수가 없는 상황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그 웃을 수 없는 상황에 동질감을 느끼면서 함께 울어야 하지 않을까?


이 영화를 관람하던 도중에, 어느 남자가 우는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의 이야기가 인터넷에 올라와 있었다. 그 슬픈 이야기의 전말은 이렇다. 고상기 반장이 형사를 그만두(었다고 생각하)고 치킨집이나 하고 있다는 사실을 타박하는 부인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겹쳐 떠올린 어느 관객이 울음을 터트렸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그 웃을 수 없는 상황에 동질감이 느끼며 함께 우는 이는 바로 그 남자인 셈이다. 이 남자의 존재로 인해 이 영화가 ‘코미디’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모두가 웃는 그 장면에서 홀로 우는 그 남자의 존재가 비정상적으로 보인다면, 그 울음이 웃음으로 가득 찬 영화관 안에서 예외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웃음이 사실은 비현실로 도피한 우리가 허심탄회하게 내뱉는 현실에 대한 실망감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게 되었고, 그렇다면 어쩌면 그 남자야말로 현실에 남아 그 고통에 홀로 맞서 싸우는 게 아니었을까.


어떤 면에서 이 영화의 존재는 근래의 한국영화 사이에서, 그 현실에 홀로 맞서 싸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치킨집이라는 요소는 한국영화에서 메인은 아니지만 거의 주요한 요소로, 서민이나 서민에 버금가는 ‘눈물 젖은 빵’의 역할을 해왔고, 어떤 방식으로든 여러 영화에서 약방의 감초 역할을 담당해왔다. 요컨대 그 치킨이라는 단어는 더는 유희적인 음식이 아니라, ‘눈물 젖은 빵’ 뒤에 있는 ‘장발장’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눈물 젖은 빵을 훔친 장발장은 『레미제라블』이라는 소설에서 초반부에 잠깐 등장하고 말뿐이다. 다시 말해서 그 소설의 주인공은 장발장이 아닌데, 장발장은 그 비참한 이들과 그들로 이루어진 사회의 구성원 중 하나이고, 이 영화의 주인공은 치킨집을 차린 형사들이 아니라, 그 비참한 이들과 그들로 이루어진 사회의 구성원 중 하나이고,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바로 관객석에 있노라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화법은 근래의 한국영화들이 역사는 선택받은 누군가가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 실행에 대한 의무와 뿌듯함만을 영화 밖의 우리에게 전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쉽게 말해, 이 영화는 미친놈을 이기기 위해 미쳐야 한다는 게 아니라(<베테랑>), 미쳤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상상과 그 세계를 풀어놓는 것처럼 보인다(<염력>). 그 미친 세계가 현실에 맞서 싸우고 있다는 게 영화의 주된 요지이다.


그 미친 세계는 무엇입니까. 이 영화는 어느 형사 영화처럼 부조리한 현실을 코미디의 힘을 빌려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한 후, 그 비현실에서 진행되는 일들은 웹툰 <신암행어사> 등장인물 문수가 말하듯이,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모두 우연이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이런 일은 절대로 바라면서 살지 마!”라고 외치는 것만 같다. 그에 대한 근거로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의 상세한 스펙은 영화의 마지막에 밝혀진다. 여기서 방점은 마지막에 밝혀진다는 게 아니라, 그 밝혀짐의 쾌감이 마지막의 전투장면에서 올라온다는 점이다. 그 밝혀짐의 쾌감은 마치, 이들이 이렇게 잘 싸울 수 있는 이유가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고 그런 이들이 지금까지 활약하고 있지 못했던 것은 단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게 미친 상황이고, 그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은 미친 짓이고, 그 작용을 영화 밖으로 돌리면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은 세상이 미친 탓이요, 즉 우리는 미친 세상에 홀로 맞서 싸우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사실 그들은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 부정된 현실이 현실 세계이고 부정되지 않은 세계는 미친 세상이다.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이 모두 우연이라는 말은 현실 세계에서 미친 세상으로 진입하겠다는 것, 요컨대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어쩔 수 없이 미친 세상에 내팽개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고, 그 미친 세상에서 잠시나마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기적은 영화관이라는 꿈의 스크린, 우리의 상상과 욕망을 보여주는 스크린이라는 거울의 존재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노라고 이 영화는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물음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EBS의 다큐멘터리는 ‘웃을 수 없는 이들’을 보며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한다.

코미디 장르의 이 영화는 ‘웃을 수 없는 이들’을 보며 ‘웃겨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한다.


이 두 가지 장르의 차이는 중요하다. 다만, 우리가 사는 곳이 다큐멘터리이고 그들이 사는 곳은 코미디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 속의 그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웃을 수 없는 우리를 보면서 웃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웃을 수 없는 이들은 웃을 수 없는 현실에 있다. 코미디 영화는 그들이 우리를 통해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 웃을 수 없는 현실을 불러온다. 현실을 바꾸는 게 아니라, 현실을 불러와서 현실이기를 포기하면 그건 붕 떠버려서 그저 맘 놓고 웃을 수 있게 된다. 어떤 망상으로의 도피는 바로 이때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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