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들여다볼수록 눈은 튀어나온다
<알리타 : 배틀 엔젤>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단언컨대 주인공 알리타(로사 살라자르)의 큰 눈이다. 흡사 일본 애니메이션의 그것을 보는 듯한 그 눈에 대해 제작자 제임스 카메론은 감독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눈이 세상을 보는 창이라면, 알리타는 그만큼 넓은 세계를 보는 것이라고. 결과물이야 어떻든 간에 원작을 존중했다는 점에서 이 연출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실제로 그 큰 눈의 이질감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는 게 평단의 주된 평가다. (“생각보다”) 이는 어쩌면 제작자와 감독이 CG에 워낙 능숙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 애초에 그 큰 눈을 정체성으로 내세웠으므로 관객이 그다지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따져 물을 수 있는 지점은 그 큰 눈이 어디에서 왔고 여기에 잘 적응했느냐는 것일 테다. 왜냐하면 이 큰 눈은 여태까지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된 작품 중에 그것을 잘 활용한, 유일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눈이 없어도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과거 회상 장면을 보면 알리타의 동료들 눈은 그저 평범하므로 이 큰 눈은 그녀만의 정체성일 테다. 다르게 말하면 그 큰 눈이 딱히 필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을 뜻한다. 이런 부분에서 우리는 그 큰 눈이 왜 필요한지 정말로 궁금해진다. 있을 이유도 확실하고 없을 이유도 확실하다면 그것을 밀어붙인 이유만이 남을 테니까.
그리고 우리는 이 작품이 본래 만화였다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만화에서 큰 눈은 그다지 이상할 게 없는데 (<세일러문> 시리즈라던가), 그것이 3D라는 심도를 갖는 순간 이상한 것이 되어버린다. 요컨대 그 큰 눈은 본래 이상하지 않았고, 그게 이상해 보이는 이유는 그 눈이 존재하는 장소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수학에서 0차원은 점의 세계인데, 그 점은 뇌 어딘가에 박혀있는 기억이다. 그리고 1차원은 선의 세계인데, 그것은 음악으로 대표되는 리듬, 청각적 심상으로 표현되곤 한다. 또한 2차원은 면의 세계인데, 그것은 회화로 대표되는 풍경, 시각적 심상으로 표현되곤 한다. 마침내 3차원은 깊이의 세계인데, 그것은 카메라로 대표되는 공간, 공간적 심상으로 표현되곤 한다.
요컨대 영화라는 것이 3차원의 예술인 것은 카메라의 깊이에 리듬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시민 케인>에서 전반의 어머니와 후반의 케인을 관통하는 그 카메라에는 사진의 원근법에서 더 나아간 깊이감 (Deep Focus)이 있었다. 또한 그 리듬, <재즈 싱어>의 알 존슨이 우리에게 말을 건넸을 때 유성 영화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할리우드의 부흥기에 잠깐 등장했던 3D 영화가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를 통해 다시금 현대에 등장하기까지는 반세기가 넘게 걸렸다. 말하자면 그 3D는 영화가 나아가야 할 다음 장소임에도 아직은 나아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2D)도 충분한데 굳이 자본을 들여서까지 무리하게 나아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더 자세하게 따져보면 카메라를 통해 2D에서 3D를 구현해낼 수 있는데, 왜 굳이 ‘진짜’ 3D로 넘어가야 하느냐는 비판이 있었다. 그 카메라는 회화에서 원근법이라고 부르는 그 깊이감을 동적인 사진으로 끌어왔고, 관객들은 그것으로도 만족해서 화면 자체가 튀어나오는 3D 시네마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쉽게 말해 관객들은 그 3D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2D로 상영되는 그 전통적인 영화가 현실의 재현, 현실 이미지의 포착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 이미지는 어찌 됐든 현실 위에 존재하는 유물론적인 사고를 지니게 될 수밖에 없을 테다. 반면, 그 3D는 2D인 것을 관객의 뇌에서 자체적으로 깊이감을 불어넣는 수용자 중심의 시각 편성, 요컨대 3D 시네마를 즐기려면 ‘안경’을 껴야 하는 것과 같은 부가적인 요청이 있고, 그런 피로감은 영화의 환영이 환영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환영에 개입한다는’ 배신감을 주었을 테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그게 거짓인 줄 알면서도 진실처럼 믿고 싶은 욕구 때문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던 영화는 가짜 3D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그 심도는 기술적인 한계가 아니라 기술적인 만족에 가까운 것이다. 심지어 주변을 둘러볼 수 있다는 VR 기술도 근본적으로는 액정 패널에 근본하므로 진정한 3D는 아니다. 말하자면 그 3D는 오로지 인간의 생각 속에서만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그 3D가 요구하는 깊이감이란 것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정도, 단편적인 이해가 ‘사진’에 비유된다면 그곳에 ‘깊은 생각’을 불어넣어 세계의 확장을 이끄는 인간의 고등적인 사고, 그것이 카메라다. 단편적인 세계에서 시간이라는 엔진을 달아 세계 속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는 게 영화라는 예술인 셈이다.
즉 영화를 보는 행위는 우리가 생각을 스크린에 꽂아 넣는 것이고, 그래서 눈은 중요하다. 눈은 세계를 뇌로 인도하는 시각장치가 아니라, 뇌가 세계에 접속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다. <블레이드 러너>의 그 유명한 오프닝 장면을 떠올려보자, 또는 <싸이코>의 그 유명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그 장면들이 눈을 클로즈업한 것은 지금부터 어느 세계로 접속하겠다는 출발신호와도 같았다. 우리는 그 눈을 보며 레플리칸트의 세계와 주인공이 살해되고 남은 살인자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다. 이때 만약 눈이 세계를 뇌로 인도하는 장치였다면 시각에 이상이 있는 사람들에게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을 테다. 다시 말해서 그 시각을 제공하는 카메라가 스크린을 만들어주지 않았을 때, 영화 속 그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눈과 카메라의 눈이 무언가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시각장치’라는 공통점을 지니게 된다면, 그 두 가지 차이점은 단지 인간과 기계라는 차이일 뿐이다. 영화가 제시한 것은 그것 또한 ‘깊이’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화와는 다르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있다. 그건 바로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불이 켜지고 스크린이 올라가면 영화가 제시하는 세계는 사라져버리는 것에 반해, 우리가 눈으로 보았지만 지금은 눈앞에 없는 그 세계를 우리는 여전히 볼 수 있다. 요컨대 눈이라는 것은 세계를 본다는 것에 있어 불필요하기까지 하다고 여러 미디어는 말해왔다. 이를테면 눈을 가리고 득도한 무협지의 여러 영웅들, 또는 시각 장애를 딛고 일어난 현실의 여러 사람들, 이런 것을 보면 분명 인간은 눈이 없어도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알리타가 큰 눈을 지닌 것은 우리에게 3D라는 심도를 말하기 위해, 눈이 앞으로 튀어나온다는 의미의 팽창이 아니었을까? 『총몽』이라는 만화가 스크린 위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3D를 통해 우리 눈앞으로 튀어나와야만 했던 이유는, 단지 스크린이라는 2D 세계에서 멈추어서는 안 되었던 게 아닐까? 요컨대 이 3D는 우리가 아니라 알리타 본인에게 필요했던 게 아닐까? 우리는 자아를 잃은 것들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 스크린 밖으로의 내지름 (<슈퍼맨> 시리즈는 늘 슈퍼맨의 정권이 뒤따른다), 즉 그 깊이감을 강조하는 형식이 개입하는 것을 자주 보아오곤 했는데, 어쩌면 이 영화에서의 내지름(알리타의 정권지르기!)은 2D 갈리(알리타)가 3D (알리타)화 되는 데 필요했던 과정이 아닐까?
‘거짓말 같은 게’ 아니라 ‘거짓말’
알리타를 보면서 그녀가 거짓말 같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은 그녀가 거짓말이라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거짓말 같은 게’ 아니라 ‘거짓말’이다. 문제는 그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게 자렘과 고철마을이라는 세계이며, 이 세계는 애초에 허구의 세계이지만 영화라는 이름의 실사이기도 한데, 그럼에도 그 실사를 거부하고 거짓말을 표방하는 그 큰 눈에 대해서 우리는 의문을 품게 된다. 어쩌면 그녀는 진실된 세계에서 홀로 거짓으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요컨대 그녀는 영화 속에서 정말로 살아있는 걸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등장인물들은 그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이안 감독의 <라이프 오브 파이>가 3D 효과를 잘 활용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 효과가 작품 속의 이야기에 깊숙하게 연계되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를 테면 그 호랑이는 정말로 있었을까? 라고 우리는 생각해보게 되는데, 즉 <라이프 오브 파이>가 던지는 물음은 영화 내부에만 그치지 않고 3D 시네마라는 물리적인 효과를 통해서 작품 밖의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요컨대 그런 것이 이 영화에도 유사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가정을 해본다면, 이 영화에서 알리타의 큰 눈은 그녀가 만화에 기반을 두어 영화로 터전을 옮겨왔음을 말하는 증거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이이 영화는 원작과 현실이라는 양 갈래 사이에 ‘영화’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알리타는 갈리로서 갈리는 알리타로서 이름만 바꾼 채로 두 세계를 오가는 것이다. 이른바 깊이, 2D와 3D를 오고 가는 그 모습은 단지 우리에게 ‘스크린과 지면이라는 이름의 2D로만’ 관찰된다. 말하자면 그 네모난 창에 고개를 들이미는 순간, ‘깊이’가 개입된 ‘진짜 세계(자렘)’를 그녀는 목격하게 된다.
만화에서 흔히들 사용하는 것은 네모난 프레임을 깨고 인물들이 다른 컷에 개입하는 것, ‘제4의 벽’을 깨는 행위이다. (최근에 <데드풀>에서도 그것을 실현한 바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행위들은 만화/영화라는 각자의 세계 속에서만 이루어졌다. 요컨대 하나의 콘텐츠가 여러 콘텐츠로 변형 및 재생산되는 요즘의 풍토에서, 여러 세계의 같은 주인공이 그 여러 콘텐츠를 주체의식을 갖고 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니까 그 만화에서 이 영화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음을 그들 스스로가 말하는 것은 안 되는 일일까? 왜 만화는 만화로서만 영화는 영화로서만 별개의 세계로서 존재해야만 할까? 그 만화에서 이 만화에 등장한 어느 인물이 같은 인물, 즉 평행 세계에서도 단 하나의 개체만이 존재한다는 개념은 본래 있었지만 (<트랜스포머> 만화에서의 유니크론처럼), 여러 매체를 관통하면서 하나의 주체가 하나의 ‘생(生)’을 갖고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본 적이 없다.
이것은 마치 그들의 거주지가 본성마저 결정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이를 테면 만화 캐릭터는 심도가 없고, 영화 캐릭터는 심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 한국인은 한국인다워야 하고 미국인은 미국인다워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미국계 한국인은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 두 가지 세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하나의 개체로서 존재할 가능성을 우리가 미리 차단해버렸던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만화와 영화를 오가면서 하나의 개체로서 존재할 가능성을 우리가 미리 차단해버렸던 것은 아닐까? 출신지, 연고 ‘매체’가 인물의 특성을 결정한다는 그 뿌리 깊은 매체 유물론의 사고는 어디에서 근원한 것일까?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만화의 영화화라는 ‘튀어나옴’의 매체 미학을 다시금 짚어볼 필요가 있다. 2D가 3D로 변하는 과정에서 변하는 것은 매체, 그 거주지에 따른 인물의 심리 변화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적인 변화일 뿐이라는 점을 말이다. 그 점을 간과하고 만화의 영화화를 기획한다면 만화 캐릭터가 어설프게 영화의 법칙에 따르려고 애쓰는, 그 애쓰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눈물이 나와야 하는데 처참한 완성도에 웃음이 먼저 나오는, 팬들로서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함에 통탄하게 되는 그 모습을 우리는 수도 없이 보아왔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는 영화화가 아니라 영화로의 이주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캐릭터의 삶을 지지해야 마땅할 텐데, 왜 영화가 만화를 캐스팅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쉽게 말해 만화의 영화화를 지지한다면 그들이 매체를 이동하는 과정에 돌다리를 놓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요컨대 그 돌다리는 2D에 3D를 불어넣는, 그사이에 심도라는 이름의 돌다리를 놓아주는 것, 캐릭터가 영화로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설계와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알리타 : 배틀 엔젤>이 어떤 성공한 영화화의 사례일지에 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오가겠지만, 이것이 만화가 어떻게 영화로 성장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석적인 답변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그 눈이 세상을 바라보는 도구가 아니라, 그 눈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담긴 인물의 세계가 있다는 점을 간과해왔다. 그리고 그 인물의 세계가 세계 전반으로 확장되는 것은 만화의 영화화 작품이 지니는 특징 중의 하나이고, 이런 차이점이 영화라는 단독 콘텐츠와 차별화될 수 있는 부분이다.
CG의 생(生)
점선면, 면이라는 시간의 단편을 쌓아 올리면 그것은 공간이라는 적층이 된다. 시간이 있기에 공간이 있고 따라서 영화는 시간이 있기에 그 속의 세계(공간)이 생겨나는 것이다. 제임스 카메론이 만화에 매료되어 영화로 옮길 때 생각했던 것은 그런 생각이었다. 만화라는 매체 혹은 공간이 아니라, 만화라는 시간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바르트의 말처럼 그 사진 속에서만 존재하는 시공간은 그 시공간 속에 몸담았던 이들에게만 유효한 것인데, 만화 속에서 삶을 보낸 등장인물들의 삶도 그 사진 속에서만 유효한 것일 테고, 하지만 만화를 영화로 만들 때 (거주지를 옮길 때)는 인물들에게 그 삶에 대해 물어볼 수 없으므로, 각색하는 이가 알아서 잘 처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만약 이런 어려움이 영화 속의 사이보그 닥터 이도(크리스토프 왈츠)에게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착각일까? 사이보그로서 사람을 재탄생시킨다는 것은 기본 베이스를 다시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육신을 기계에 맞게 각색하는 것이다. 악기로 치면 음계를 조율하는 행위이고, 자동차로 치면 윤활유를 치는 것이며, 연애에서는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인 셈이다. 그리고 사이보그를 만든다는 것은 선 끝의 점들을 잇고, 그 선들을 꼬아 육체의 면을 이루어내고, 그런 복합적인 과정을 통해 알리타라는 인격이 형성된다. 또는 우리는 자렘이라는 세계와 고철마을을 잇는 것이 거대한 선 여러 개를 꼬아 만든 강철 케이블이라는 점을 떠올릴 수도 있을 테다. 그 케이블은 두 세계를 잇는 것, 그 케이블은 두 ‘세계’를 잇는 선인데, 그 자렘이란 것은 깊이가 개입된 결과였었다. 다시 말해서 작품 속의 세게에서 깊이라는 건 ‘높이’라는 것으로 지칭된다는 점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강철마을과 자렘을 갈라놓는 깊이란 것이 바로 만화와 영화의 근본적인 경계처럼 보이게 된다. 왜 자렘은 고철마을 사람들에게 ‘비행’을 금지했을까? 자렘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이 물음은 이렇게도 쓰일 수 있을 테다. 왜 영화는 만화에게 ‘비행(=n차원도약)’을 금지했을까?
나는 이 영화에서 리얼리즘을 따지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웨타 디지털은 이미 <혹성탈출>과 <반지의 제왕>을 통해서 컴퓨터를 연기하는 인간을 만들어낸 바가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 대한 질문은 매체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캐릭터의 리얼리즘이 되어야 한다. 그 캐릭터는 정말로 살아있는 걸까? 이때 만약 누군가가 그 캐릭터는 단지 콘텐츠의 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답을 돌려주어야 한다. 영화 속 캐릭터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영화 속 세계에서 계속 살아갈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경우가 있다면, 만화 속 캐릭터가 영화에 옮겨와서도 계속 살아갈 수도 있을 테고, 그렇다면 만화에서 영화로 살아가는 과정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이고 어떤 고충이 있을 것인가?
눈을 감으면 새까맣게 변한다는 점에서 영화관과 우리의 시야는 비슷한 면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눈을 감아도 우리의 생각은 멈추지를 않는데, 그렇다면 영화의 스크린이 꺼져도 그 세계는 멈추지 않을 것인데, 만화 책장이 끝나고 그 어둠이 세계에 서릴 때, 그것을 피해 영화로 이주해 온 소녀의 모습은 눈을 감은 뇌 속에서 스크린의 어둠으로 이주한, 아티스트의 창작물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화 초반에 자렘의 쓰레기 배출구에서 떨어진 그녀의 모습을 자렘이라는 면의 세계에서 강철마을이라는 선의 세계로 떨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을 테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영화 초반에 알리타가 떨어지는 모습을 현실의 세계에서 영화의 세계로 진입하는 우리의 의식으로도 볼 수 있을 테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영화를 영화가 되려는 만화의 모습으로 보는 게 맞을 테다. 그리고 그런 노력을 긍정해 준 게 제임스 카메론이다. (<아바타>가 나비족이 되어가는 과정은 알리타를 위해 깔린 노선에 가까워보인다) 결국 이 영화는 만화가 영화로서 살아가는 법, CG의 생(生)에 관한 모습을 보여주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