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진다고 믿는 이들의 이야기

by 수차미


영화가 시간을 필름에 기록한다는 뤼미에르의 발제 이후로 많은 영화감독들이 그 시간을 필름이라는 질료에 담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해왔다. 그러니까 이 발제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었는데, 자연스럽게 그 가이드라인을 지키지 않거나 반대하는 이들도 등장해왔다. 대표적인 사람이 장 뤽 고다르다. 일반적인 감독들이 그 가이드라인 아래에서 여러 촬영기법과 구도와 편집을 실험하는 반면에, 장 뤽 고다르는 그것을 구성하는 영화 언어 자체를 새로이 개발해냈다. 요컨대 그는 영화의 시간이 아니라 영화의 시분초를 새로이 썼다. 하지만 장 뤽 고다르를 위대하다고 지칭하는 것은 그런 독자규격이 항상 영화계 전반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독자규격이라는 것은 성공할 때만 대박을 치는 법인데, 그에게는 대박만이 있고 쪽박이 없었다. 못해도 중간은 간다는 점이 무섭고, 그래서 위대한 사람이 장 뤽 고다르인 셈이다. (널리 퍼진 이상 더는 독자가 아니기도 하다)


장 뤽 고다르의 뒤를 따르는 무리가 누벨바그였다면, 그 누벨바그 분파 중에서도 제 갈 길을 가는 한 사람이 있었다. 무협지로 치면 정파도 사파도 아닌 제3의 무리, 고대에 있었는데 현재에는 멸족되었다고 여겨졌던 기술을 익혀온 이가 바로 알랭 레네다. 장 뤽 고다르를 필두로 한 이들이 가이드라인 아래에서 혁신을 내보이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면, 알랭 레네는 그런 가이드라인이 처음부터 없었다고 말한다. 사실, 없었다고 말하기보단 그의 세계에는 애초에 가이드라인이 포함되어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히로시마 내 사랑>은 그가 만든 첫 번째 장편 영화이고, 말하자면 시간 이미지라는 알랭 레네 특유의 테마는 차분히 발전해온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있던 셈이므로 말이다.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의 한 장면 ⓒ 동숭아트센터




이것이 교차하는 곳이 바로 현재


<히로시마 내 사랑>의 첫 장면은 모래가 쌓인 신체를 껴안고 뒹구는 두 사람의 신체이다. 그다음 장면에는 모래가 뒤덮이지 않은 맨 신체가 드러나 있고, 이때부터 공간은 두 갈래로 분할되어 인간의 맨살과 히로시마의 맨살로 나아간다. 두 공간 모두 누구의 시선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두 공간은 영화적 편집으로 교차하게 되는데, 그 위에는 나레이터의 목소리가 한 줄기로 흐르고, 요컨대 필름을 구성하는 영상과 음성의 질료는 스크린 위에서 두 가지로 분리된다. 그렇다면 이때 그 두 가지 공간, 두 가지 영상을 한데 모으는 것이 음성이라 할 수 있겠으며, 이 음성은 영화 내부(Diegesis)가 아니라 외부에서 들려온다는 점에서 외부가 내부를 껴안는 형태가 된다.


이때 우리는 외부가 내부를 껴안는 이유와 그 형태에 대해서 따져 묻게 된다. 이 영의 첫 장면인 모래가 쌓인 신체가 맨살이 드러난 신체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히로시마의 이미지가 개입하게 되는데, 그 원폭의 이미지가 개입될 때 모래에 쌓인 신체는 히로시마의 그것이 된다. 요컨대 이 이미지는 고대 폼페이의 시민들이 오랜 세월이 흘러 발굴되었을 때 반짝이는 석화 알갱이가 된 것처럼, 히로시마의 폭탄에 피폭된 이들에게 주어진 딱딱한 피부 껍질을 의미한다. 고 우리는 생각하게 되므로 이들의 신체는 자연스럽게 히로시마에 놓이게 되고, 반대로 멀쩡한 신체는 히로시마가 아닌 곳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이때 히로시마가 아닌 곳, 이른바 ‘비(非)히로시마’라는 장소는 특정성을 지니지 않기에 우리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영화는 히로시마의 폭탄이 터진 후에 남겨진 이들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이미지로 보여주는데, 그 앞뒤에는 현재의 히로시마 박물관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이들의 모습이 담겨있고, 따라서 영화의 편집은 히로시마의 과거를 히로시마의 현재가 감싸 안은 모습이 되는데, 이 부분이 내부를 감싸 안는 외부의 목소리 (Narration)와 연계되면서 그 목소리는 히로시마의 현재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히로시마의 폭탄이 터진 직후는 그 시공간적인 특정성이 있는 반면, 히로시마의 현재에는 특정한 시공간이 지정되어있지 않으므로 이 목소리는 영화 내부의 시점인지 혹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점인지 혼동을 겪게 된다.


요컨대 그 껴안은 신체가 사랑하는 이들의 것이라는 점에서, (나레이션이 대화하는 남녀 목소리이므로 이 인식은 자연스럽다) 그 껴안은 신체와 껴안은 이미지는 성적인 은유를 포함하게 된다. 말하자면 히로시마의 과거라는 안쪽을 히로시마의 현재라는 바깥쪽이 껴안은 상태, 이른바 샌드위치, 하나의 면에 밀어 넣는 두 개의 성기, 하나의 국가에 떨어진 두 개의 폭탄 (팻 맨과 리틀 보이),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이미지가 부도덕하다거나 파괴될 것이라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 두 남녀는 바람을 피우는 것과 같은 부도덕한 사랑을 하는 게 아닐까? 혹은 히로시마의 현재에서 히로시마의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은 부도덕한 게 아닐까? 영화는 이 이미지의 나열을 통해 그들의 사랑과 히로시마를 결합함으로써, 사랑과 역사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을 관객에게 유도하고 있다. (그 모래가 쌓인 폼페이가 히로시마의 피폭된 피부에 대응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폼페이가 신의 형벌을 받아 멸망했다는 점에서 분명 그 이미지는 부정적인 것일 테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서 밝혀지는 사실은 역시나 두 남녀는 바람을 피우는 중이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에 촬영차 방문한 어느 여배우와 잠자리를 하게 된 일본 남성이라는 미묘한 설정, 그런데 그 남자는 일본인임에도 영화상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어를 할 줄 알고, 그 프랑스 여인은 촬영을 위해 일본을 왔으며, 말하자면 그들의 국가와 언어는 지금 이곳에서 교차하게 되는데, 이것이 교차하는 곳이 바로 현재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그전의 이미지와 이 장면을 교묘하게 엮고 있는 셈이다.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의 한 장면 ⓒ 동숭아트센터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진다고 믿는 이들의 이야기


히로시마라는 과거가 담긴 박물관을 둘러본 경험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에는 히로시마를 걱정하는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있고, 히로시마라는 장소가 있는 국가에서 태어난 남자의 모습에는 히로시마가 아닌 프랑스를 동경하는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시공간이 오간다거나 이동한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이 영화의 시공간은 항상 지금-여기였고 그 ‘여기’는 단 한 번이라도 영화 상에서 이탈한 적이 없었다.


알렝 레네는 시대와 역사와 국가, 줄여서 시공간이라는 단어를 관통하는 사랑이라는 말에 대해 이렇게 다시 썼다. 중요한 것은 관통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 이전의 문장인 시공간이다. 시공간을 관통한다는 문장, 하지만 그 시공간은 어디에서 관통되는 걸까?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우리는 이 맥락에서 다시금 위의 문단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하나의 국가에 떨어진 두 개의 폭탄, 그 폭탄은 순서대로 떨어졌지만 그 시대를 양면으로 압박했었다. 라깡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폭탄은 일종의 남근이며, 그 남근이 자신에게로 삽입되기를 고대한 것이 일본이라는 가정하에, 양면으로 닥쳐온 욕망이 하나에 응집하면 그걸로 곧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진다고 믿는 이들의 이야기가 <히로시마 내 사랑>의 두 주인공인 것이다. (욕망은 끝없이 나아가지만, 양방향의 욕망이 부닥칠 때 그것은 중화된다)


하지만 문제는 왜 하필 프랑스와 일본이냐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선 따로 생각해볼 이유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프랑스와 일본은 A와 B라는 단어로도 치환될 수 있는 국적에 불과하고, 중요한 것은 히로시마가 위치한 일본이지 남자의 국적인 일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어쩌면 알랭 레네의 프랑스가 일본이라는 대상에 보내는 시선을 필름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더 나아가서는 남자와 여자라는 두 가지 성별은 이 영화를 이항대립으로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 아니고, 그냥 알랭 레네가 이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생각했고 또한 그만큼의 사랑을 보내고 있다는 일종의 자전적인 목소리일 테다.


그에 대한 증거로는 이 영화가 두 가지 것을 하나의 장소에 밀어넣는, 양쪽에서 작용하는 힘을 하나로 모아 알력을 보여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알랭 레네가 이 영화를 만들 당시에는 히로시마의 원폭 피해를 기억하려는 이들의 목소리가 현실에 힘을 미치기 시작할 때였고,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를 기리는 평화기념관은 1955년에 문을 열었으며, 그 소식이 지구 반대편에 전해질 무렵에 구상과 작업을 시작한 알랭 레네의 영화는 1959년에 개봉했다. 요컨대 알랭 레네에게는 히로시마와 비히로시마라는 두 개의 세계가 있었고, 이때 그가 몸담은 곳은 히로시마의 원폭이 터진 그곳, 그 시기, 그 시대, 하지만 알랭 레네는 그것을 말하기 위해 히로시마 자체를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은 이미 흘러갔고 따라서 우리가 필름에 구현한다 하더라도 이미 부질없는 가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름에 구현한 현실이 가짜라는 표현에 대해서 벌어진 갑론을박에 대해서는 넘어가도록 하자. 이것은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이 아니라 우리 세계에서 옳고 그름을 두고 벌어지는 믿음과 신뢰의 문제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어떤 개념을 익히고 나면 우리의 세계는 그 개념을 포함한 것으로 재편성된다. 어떤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나자 모든 것이 그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결국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우리 기준으로 세계와 비세계로 나누어져 있으며, 알랭 레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폭탄이 떨어진 곳과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는 두 가지 세계, 피폭(被爆)과 비(非)폭이라는 두 가지 주제, 공교롭게도 폭탄과 폭력을 뜻하는 앞부분의 한자는 우리에게 같은 글자로 발음된다. 폭이라는 것, 이 영화에서 두 남녀는 서로의 몸에 폭 안기면서도 그 몸에 얽힌 폭력을 읽어낸다.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의 한 장면 ⓒ 동숭아트센터




가이드라인은 딱히 없다


서로의 몸에 폭 안기면서도 그 몸에 얽힌 폭력을 읽어낸다는 것은 이 영화가 두 남녀의 사랑을 전력을 다해 보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여배우가 촬영하는 영화가 히로시마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그 이미지를 남녀의 사랑 중간마다 삽입하고 있는데, 이렇게 샌드위치처럼 짜인 편집에서 우리는 그 두 가지 세계의 대립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이 이 세계는 정말로 이항대립으로 짜인 게 아니라, 그들이 히로시마라는 공통의 기억을 사랑이라는 하나의 접점을 통해 규합함으로써 떠오르는 현상, 세계의 규칙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히로시마를 기억하는 여러 사람들의 세계가 마치 대륙의 판게아처럼 부닥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리도 닥쳐오는 불안감은 그 판게아의 충돌에서 지진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하는 것, 그런데 그 지진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발적 감정이라는 점을 우리가 알게 되는 순간, <히로시마 내 사랑>이라는 제목은 의구심이 드는 단어가 된다. 히로시마는 폭력의 상징인데 그게 어째서 사랑이 될 수 있는가? 히로시마는 원폭이 휩쓸고 지나간 장소가 아니던가? 만약 그 두 사람이 만나는 장소이고 히로시마라는 점 때문이 작품의 제목이 그러하다면, 이 영화는 윤리적인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제목을 해석한다면 히로시마라는 단어를 물질이 아닌 추상의 영역에 넣어야 할 텐데, 이때 그 히로시마는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세계가 맞붙는 장소 즉 세계를 관통하는 힘이라고 보는 게 맞을 테다.


세계를 관통하는 게 바로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 같은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 우연에 대해 따져본다면, 이것들을 이루는 여러 쇼트의 결합 또한 우연일 것이고, 역시나 알랭 레네의 영화에는 규칙이 없다는 점을 우리는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장 뤽 고다르가 언제나 세계의 한계를 깨부수려는 사람이었다면, 알랭 레네에게는 늘 자신만의 세계가 있었고 그렇기에 그 세계에서 외부의 규칙 따위는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쉽게 말해 알랭 레네는 시간을 박제한다거나 되돌아갈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고, 개인의 시간이 개인의 방식으로 흐르는 것이 당연시되는 세계에서 외로이 살고 있었다. 바로 그래서 알랭 레네는 누벨바그의 흐름과 영화 세상 전체에서도 홀로 외딴 자리를 꿰찰 수 있던 것이다. 그에게 영화란 영화라는 불가사의가 만들어지는 것에 대한 규명이 아니라 그 불가사의를 포함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물론 이것이 프랑스와 일본이라는 두 남녀가 히로시마에서 만난다는 미묘함을 설명해주지는 못할 테다. 딱히 안 될 것도 없지만 그래도 약간은 부자연스럽다고 느낄 수 있는 그 사랑의 결합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보고는 했다. 일본인 남자는 히로시마에 큰 상처가 없는데, 오히려 프랑스 여자 쪽이 히로시마에 큰 상처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때 히로시마라는 공통분모는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 걸까? 이에 대한 가장 좋은 대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보아야 할 것은 기호가 아니라 신화다. 그 히로시마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단지 맥락만이 담겨있는 그 단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세계의 뒤틀림, 그 뒤틀림에는 세계와 비세계의 부닥침이 배후에 있고, 어쩌면 사랑이라는 감정의 미묘함이 그 부닥침, 원폭에 비견될 수 있노라고 알랭 레네는 말하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그들의 판단이 어떠하든 간에 그것은 그들의 세계이고 따라서 그 세계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아니라 그 세계가 교차하는 방식, 가이드라인은 딱히 없다고 알렝 레네는 말하는 게 아닐까?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의 한 장면 ⓒ 동숭아트센터




영화사의 유일한 시간 연구자


그러니까 맥락을 첫 번째 문단으로 돌려보면 알랭 레네의 영화관은 여러 것을 하나의 장소에 불러모으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뭉쳐놓고는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알랭 레네의 영화관은 오즈 야스지로의 그것과 닮으면서도 다른 면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는 인물들이 흘러들지만 그것은 사실 별개의 것이면서도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이른바 열차의 비유, 그리고 그들은 떠나가는 이들과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로 나누어진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한 편에는 난간에 올라 떠나가는 열차의 무리를 지켜보는 이들이 있고, 또는 그 열차에서 내려 작품 속의 세계에 진입하는 이들도 있다. 당연하게도 플랫폼 위에 서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모습도 있다. 결국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마치 열차처럼 늘 같은 장소에서 다른 시간을 마주하는 것인데, 알랭 레네는 다르다. 알랭 레네는 그 다름의 범위를 영화라는 매체 밖으로까지 넓혀서 관객 혹은 필름이라는 질료를 영화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 시점에서 알랭 레네는 필름 안에서 작용했던 오즈 야스지로의 세계관과 차이점을 갖게 된다.


알랭 레네의 영화에서 소리는 영화 밖을 거쳐 다시금 안으로 들어오는 형태를 취한다. 정확하게는 느낌적인 것이고 여전히 영화 안을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리는 일종의 트릭에 해당한다.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 알 수 있듯이, 두 남녀의 목소리가 나레이션으로 흐르는 와중에도 영화의 영상은 과거와 현재라는 이름의 히로시마, 허나 사실은 여자와 남자가 기억하는 각자의 히로시마를 흘려보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과거와 현재가 아니라 히로시마라는 기억이고, 라깡식으로는 욕망이며, 욕망과 욕망이 결합하는 장소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쭉 뻗어 나가는 것과 쭉 뻗어 나가는 것을 한 자리에 모으면 그것이 닿는 부분에서 무엇이 생겨날까? 폭발? 아무것도 없다는 표현이 맞을테고, 아무것도 없다면 무엇이든 채워 넣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그 무(無)의 구체를 피해 가면서 영화의 안팎을 떠돈다고 알랭 레네는 ‘표현한다’. 말하는 게 아니라 표현한다는 ‘표현’을 쓴 것은 그는 장 뤽 고다르처럼 언어를 읽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알랭 레네는 거의 느낌에 의존하는 사람이었고 그 느낌을 물질로 구현한 유일한 감독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은 영화의 마지막에 남자가 여자를 떠나보내는 장면에서 밝혀진다. 여자와 남자는 가까운 거리를 두고 앉아 대화하는데, 옆에 있던 할머니는 일본사람이기에 그들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남자는 자신은 일본 사람이고 저 여자와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한 게 정말로 사랑이었을까?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해 결말에서 묻게 되는데, 사실은 영화 내내 그들이 사랑하는 사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이 물음은 정말로 이상한 것이다. 할머니가 두 사람이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냐고 (우리에게) 묻는 순간, 남자에게 그 관계는 사랑하지 않는 관계가 된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은 남자가 여자를 떠나야 하는 순간이자, 여자가 남자를 떠나야 하는 순간이기에, 요컨대 어느 쪽에서 보아도 그것은 내가 상대를 떠나거나 상대가 나를 떠난다는 모호한 판단을 안고 있다.


이것이 오즈 야스지로가 말하는 열차의 의미이다. 하지만 알랭 레네의 영화에는 그 방향의 끝에 목적지가 있고, 그 목적지는 특정 시공간이 아닌 개인의 욕망에 의존한다는 점이 포인트다. 히로시마라는 욕망이 포함된 곳과 포함되지 않은 곳이 있고, 이것은 영화 상에서 구현되는 히로시마라는 장소의 현재 과거와 무관하다. 다시 말해서 이 시간은 영화의 시간이 아니라 인물의 시간이며, 그 인물이 몸담은 세계의 시간이다. 결국 알랭 레네를 논할 때 시간의 마술사라는 표현은 영화가 아닌 인물에게 적용되어야 하며, 영화가 아닌 사람에게 천착했다는 점에서 그는 영화사의 유일한 시간 연구자일 테다. 생각해보면 영화의 시간을 조르주 멜리어스가 절단한 이래로 그 누구도 영화의 시간을 영화의 시간 개념 밖으로 넓히려는 시도하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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