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며 도발을 거는 한 영화가 있다. 소설가 김중혁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가 끝나고 나서 지금까지 본 게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제목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고대 그리스의 에우리디케 설화를 모티브로 한 연극을 상연하며, 그 슬픈 결말에는 새까만 어둠이 있으므로 우리는 눈앞에서 망자를 떠나보낸 이의 마음을 체험하게 된다. 쉽게 말해, 이렇게 다시 헤어질 것이라면 굳이 힘들게 저승까지 올 필요가 있었느냐는 한탄이다.
죽은 이를 다시금 불러온다는 것과 그것이 다시금 취소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가히 영화에 관한 영화라고 부를 법하다. ‘굳이 힘들게’ 저승까지 망자를 보러 왔다는 문장에서 저승을 영화관으로 영화를 망자로 치환한다면 그렇다. 그러니까 영화라는 것을 ‘영화관이라는 저승’에 사는 망자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망자를 알현하려고 영화관에 ‘굳이 힘들게’ 방문하는 것이 된다. 이것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가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사랑하는 이를 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기억하자. (영화를 사랑한다면야 더욱 그럴 테다. 이 경우에는 직접적인 동일시다)
영화관을 간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유흥거리가 된 멀티플렉스 시대는 마치, 연인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연애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그 부분은 넘어가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 이것이 영화관이라는 특정 공간이 주는 경험인지 혹은 영화 자체에서 우러나는 경험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영화관에서 보았던 영화가 영화관 밖에서는 감흥이 떨어질 때가 있고, 반대로 감흥 없던 영화가 영화관에서는 감칠맛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우리가 세울 수 있는 하나의 가설은 영화관이라는 장소에서 영화는 특정한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 영혼이 있다는 일련의 가설들, 이를테면 자크 오몽의 『영화 속의 얼굴』을 참조한다면 영화는 얼굴이요, 그 얼굴은 저승에서 힘을 갖게 된다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저승을 떠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하데스가 다스리는 저승은 망자들이 한데 어울리는 곳인데, 묘사에 따르면 그 망자들에겐 육체가 없고 얼굴만이 있다고 전해진다. 비유하자면 <해리포터> 시리즈의 디멘터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의 가오나시 캐릭터를 떠올릴 수 있을 테다. (사실은 후자가 전자를 따라간 것이겠지만) 그리고 이 얼굴만이 있는 존재는 얼굴을 통해 타인과 소통하게 된다는 점이 특징이고, 그 소통은 언제나 특정한 세계 속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센과 치히로>의 온천장에 떠돌던 가오나시와 <해리포터>의 어두운 숲에 머물던 디멘터들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그들이 그곳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이름이 붙여지고(언칭) 이름이 불리운다(호명)는 점을 떠올려 보자. 해리가 디멘터의 이름을 외칠 때 그들은 물러가고, 센이 가오나시의 이름을 부를 때 그는 친구가 된다. 그러니까 얼굴만이 있는 존재에게 얼굴이란 그 자체로 자신을 대변하는 ‘얼굴’로서, 세상을 마주하는 얼굴로서 기능하고 있지 않다. 그들에게 얼굴이란 그저 자아의 중심부를 이루는 결정 같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얼굴을 안쪽으로 파고드는 것에서 바깥으로 향하게 하려면, 얼굴을 끄집어 당길 닻이 필요하다. 그게 이름이다.
얼굴을 확인하고 싶다/이름을 부르고 싶다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에서 펼쳐지는 꿈의 이야기는 두 남녀(타키&미츠하)의 마음을 바꾸는 장치로 사용되었는데, 중요한 건 그 꿈이 단지 도구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무슨 도구인가? 마음을 바꾸기 위한 도구다. 사춘기에서 모티브를 따온 몸과 마음의 변화의 테마는 그 성적 호기심(프로이트적인)을 통해 서로의 자아를 확인하고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각인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증거로 이 영화에서 몸이 바뀐 남녀가 가장 처음으로 하는 행동은 스마트폰/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상대방을 자신으로 치환하고, 그래서 그 자아가 응축되는 것은 곧 서로에 대한 각인이 된다. 이때 그 응축된 자아를 꿈의 세계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은 황혼 속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였다.
그들이 겪은 황혼은 백록담과 같은 구덩이 위를 배경으로 했다. 이 과정에서 남학생 타키는 지금은 사라져버린 미츠하를 만나려고 신비한 곳을 지나가게 된다. 이 행위는 어느 신화에서도 그러하듯 특수한 장소로의 진입을 보여준다. 안개에 쌓인 어느 장소를 거치고 나면 여학생 미츠하와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나고, 그 공간에서 황혼이라는 시간이 닥쳐오는 순간 그들의 시간은 접합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두 남녀의 말도 안 되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특정한 공간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동안 교환되었던 자아를 다시금 돌려받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왜 그 공간이 아니면 안 되는 걸까? (왜 영화관이 아니면 안 되는 걸까?) 이 물음에 선행하는 것은 미츠하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이고 따라서 그녀를 구하려고 신화화된 통로를 지나는 타키의 모습이 마치 에우리디케 설화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다른 점이라면 에우리디케는 다시금 저승으로 돌아갔는데 미츠하는 살아남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살아남음은 영화의 마지막에 타키와 미츠하가 얼굴을 마주하는 장면으로 확실시된다. 에우리디케쪽으로 보면 미묘한 지점인데, 신카이 마코토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가 있다. (반쯤 농담으로) 이전까지의 작품에서는 헤어진 남녀가 늘 만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그들을 만나게 함으로써 팬들을 달래주고 싶었다. 고 말이다.
나는 그 농담을 진담으로 받을 예정이다. 다만 다른 형태로 받을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에우리디케 설화는 마치 우리가 영화관에서 사라진 그/그녀를 만나러 가는 것, 영화를 본다는 행위 자체가 마치 신화화된 통로(관객석)를 거치게 되는 것, 타키처럼 과거의 미츠하를 살려낼 가능성, 과거의 필름/미츠하/시간을 살려내고 싶은 우리의 마음이 영화관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너의 이름은>은 우연한 기회에 영화와 몸이 바뀐 관객이 영화의 죽음을 예지하고는 그것을 막으려고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가 죽어가고 있다면서 글이든 대화든 어떤 형태의 경고를 통해서라도 영화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는 평론이 죽었다고 혹은 넷플릭스가 대세라면서 영화관/영화의 종말을 선언하고 있는데, 나는 그가 죽은 게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졌다고 말하고 싶다. 니체가 말했던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신이라는 게 필요 없어진 현대인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그 신이 필요 없어진 것은 이미 다 아는 이야기라서 즉 ‘체화’되었기 때문이라면, “영화는 죽었다”라는 말은 영화라는 게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에우리디케 설화를 현대에 불러오는 과정에 그런 함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영화/그녀가 정말로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곁에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체화된 것을 눈으로 목격하기 위한 모험담에 가깝다.
요컨대 얼굴을 확인하고 싶다는 게 바로 스크린을 눈으로 봐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눈 그리고 시각문화라는 이름의 영상시대. 영화가 대중문화의 일부라는 점에서 영화의 욕망은 곧 대중의 욕망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그 욕망은 서로의 마음에서 쉽게 교차하고는 한다. 영화의 욕망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거나, 우리가 영화에게 영향을 끼치거나 하는 문제는 굳이 순서를 따져 물을 게 아니라 어찌 됐든 두 공간/시간이 소통하고 있다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할 문제다. 한국에서는 천만 영화라는 이름의 이 담론을 이해하려는 시도의 실마리가 바로 <너의 이름은>에 있다는 사실은 그 에우리디케 설화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었고, 알랭 레네 또한 비슷한 이야기를 에우리디케 연극을 통해 말하고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편집이 끊긴다고 ‘느낀다면’
영화라는 이름의 그녀를 구하려고 저승이라는 이름의 영화관으로 향하는 것은 영화/그녀에 대한 사랑이 그만큼 깊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 부분에서 알랭 레네의 영화관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흔히 알랭 레네를 시간의 마술사라고 칭하는데, 그 시간의 마술사라는 칭호는 영화의 언어가 아닌 인물의 이름 위에 붙어야 마땅하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의 마술사라는 칭호가 영화의 언어에 적용된다면 단순히 연출과 편집을 잘하는 감독으로만 인식될 여지가 크다. 그렇다면 같은 칭호를 공유하고 있는 크리스토퍼 놀란은 알랭 레네와 비슷한 영화를 만드는가? 아니다. 두 사람의 영화는 분명 다르고, 그럼에도 같은 칭호를 공유하고 있다면 알랭 레네의 영화는 질료가 아니라 보다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고밖에는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놀란을 비하하는 게 ‘절대’ 아니다, 알랭 레네가 너무 쎈거다)
알랭 레네의 영화가 우리에게 기억되는 것은 주로 시간인데, 그 시간이 인물의 주변을 머문다는 점을 상기해보아야 한다. 영화의 언어로써 시간에 천착하는 이들은 많았고, 반면에 알랭 레네처럼 인물의 시간에 천착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때 알랭 레네의 부류에 속하는 것은 오즈 야스지로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처럼 영화라는 이의 생(生)을 이해하고 싶어하는 몇몇 시네아스트였다. 그들은 영화를 ‘찍는다’라기 보다는 영화를 ‘쫓는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사람들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에서 어린 소년 양양이 든 카메라가 영화 밖의 우리를 마주할 때, 그 느낌은 시선의 응시가 아닌 우리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영화를 하나의 삶으로 가정할 때, 그 삶을 지닌 어떤 인물들의 앞뒤 시간을 좇는 것이 바로 그들의 카메라였다. (그 유명한 오즈 야스지로의 통로 쇼트, 그 유명한 타르코프스키의 롱테이크)
오즈 야스지로의 카메라는 눈을 마주치고, 응시하고, 대화한다. 나는 그 어떤 이론도 이 마주침을 설명하는 것에 할애하고 싶지 않다. 그럴 능력도 없지만, 삶을 설명하는 것에 이론이 필요하다면 그거대로 너무 딱딱할 일일 테다. 그리고 이 마주침을 일종의 통로, 영화의 안팎을 잇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에우리디케 설화를 다음처럼 독해할 수 있다. 세상에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타인의 삶에 다가가려는 시도가 영화관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 타인은 바로 영화이고, 그를 구하러 가는 우리는 시선을 타고 그 속을 들여다보려 한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영화의 러닝타임이 끝나는 순간, 다시 말해서 우리가 스크린에서 눈을 돌리는 순간 그 영화는 다시금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요컨대 그 빨려 들어감은 애초에 예정되어있었던 셈이고, 영화와 우리 삶에 근본적인 장벽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알랭 레네의 영화가 그 두 명의 시네아스트와도 다른 점이 있는데, 인물 개인의 어깨를 다독여준다는 점이다. 즉 알랭 레네는 영화를 영화 자체로만 보지 않고, 그 인격이 여러 개의 집합이라고 보았다.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도 알 수 있듯, 그 영화는 히로시마가 주인공이 아니라, 두 사람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이고, 따라서 그 히로시마는 두 사람이 일시적으로 모이는 장소이지 직접적으로 호명되는 영화의 질료 선상에 있지 않다. 오히려 프랑스와 일본이라는 두 갈래의 길과 그 위에 놓인 현재의 히로시마와 과거의 히로시마라는 것에 중점을 둔다면, 두 남녀의 몸과 마음이 각자 어디에 머물고 있고 또 왜 교차하게 되는지를 따져 물을 수가 있다면, 알랭 레네의 영화를 독해하는 것은 정말로 쉬워진다.
결국 알랭 레네의 영화에서 묘하게 편집이 끊긴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삶이 끊기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그런 끊김이야말로 영화의 환상을 지우고 인물의 환상으로 들어가는 본격적인 계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처럼 숱한 인물이 나온다고 하여 그것이 숱한 편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편집이 아니라 그냥 곧이 보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이것이 영화가 아니라 인물의 삶임을 직감할 필요가 있다. 정확하게는 그것을 요구받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인데, 알랭 레네가 던지는 화두는 시공간이 아니라 그 시공간에 자리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알랭 레네가 다루는 것은 영화의 시공간이 아니라 영화의 존재론이다.
황혼의 언덕이 아니었다면
알랭 레네라는 이름의 영화로 여행을 떠나는 우리는 순례자가 되어 그 통로를 지나가게 된다. 마치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저승을, 천국에서는 베아트리체에게 인도받는 것처럼, 그 저승에는 숱한 망자들이 있고 천국에도 있으며 저승-연옥-천국으로 이어지는 그 세계관에는 일체의 끊김도 없다. 아무리 챕터가 넘어가도 공간의 연속성은 유지되며, 그곳에서 여행하는 이는 단테 알리기에리, 또는 관객인 ‘우리’인 것이다.
그런데 그 천장에는 영화의 종말, 상영 종료가 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알랭 레네는 이 영화에서 그런 물음을 던지고 싶었던 것 같다. 왜 영화는 죽어야 하는가? 왜 영화는 끝이 나는가? 왜 영화 속에 살아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그 스크린의 종말과 함께 끝이 나야 하는가?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는 제목이 그 사후세계를 보지 못한 것은 인류 모두라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단테는 구원을 청하려 순례를 떠난다), 그 생각은 이 영화가 개봉한 후 2년 뒤에 사망한 알랭 레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 테고, 말하자면 알랭 레네가 죽음 앞에서 본 것은 이제 막 영화가 영화관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이 분주해지던 2012년의 영화라는 삶, 생(生), 파편화되는 자아, 그러나 그들을 일일이 챙겨줄 수 없다는 삶의 마지막 자리에서 떠올리는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후행적으로 판단해볼 때, 이 영화가 연극과 영화의 결합인 것은 그 연극이 영화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배우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영화라는 매체를 두고 박제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 표현은 사진에서 빌려온 것이고, 앙드레 바쟁의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은 우리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사진을 이용한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인간이 단지 죽음을 극복하는 존재만은 아니다. 누군가는 죽음을 긍정하기도 한다. 가장 단적인 예는 바로 위의 단테 알리기에리에게서 찾을 수 있다. 단테의 순례길은 천국으로 향하는 것, 그것도 어느 날 갑자기 들어선 숲에서 천국으로 향하는 길을 찾아낸 것, 즉 죽음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진의 후신으로 평가받는 영화가 왜 죽음을 극복하는 존재라고만 생각하는 것일까? 그 영화는 죽음을 긍정하는 누군가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기서 우리가 소환하는 것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마지막에서 정면을 바라보는 이들의 모습이다. <동경의 황혼>에서의 카메라, <동경 이야기>에서 카메라, 이때 그 동경이라는 지명의 일치에서 동경이 일본의 심장, 또는 가족의 심장이라는 주제의식을 읽어낸다면 그 지명이 정말로 ‘동경’이라는 점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의 히로시마는 은유가 아닌 단어에 불과하다는 점을 기억할 것, 이 영화에서 그들의 삶은 에우리디케의 일화를 설명하기 위한 보조가 아닌, 정말로 그들이 살아있었음에 대한 증표라는 것이다.
연극에서 영화로의 흐름이 우리에게 앗아간 것은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시대의식이다. 다시 한번 반복하자면, 영화가 우리에게 앗아간 것은 통로이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어져 있다는 그 통로가 사라지고 시공간을 뛰어넘는 포탈로 변환되었을 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시간의 선형성이 아니라, 그쪽으로 넘어갈 수 있는 마음의 통로이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가 영화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된 것은 단지 영화의 통로가 단절되었음을 뜻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름이 필요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미츠하와 타키가 서로의 이름을 부른 이유는 그들이 동시대를 살아있다고 착각했는데 사실은 다른 시간이어서가 아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이름을 부른 것은 단지 도구에 불과했고, 그 통로 그 황혼의 언덕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알랭 레네가 사랑한 얼굴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영화가 제시하는 묘한 편집이 아니라 그들의 대부가 살아있었고 다시금 죽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묘한 편집은 알랭 레네의 영화가 언제나 그러했듯이, 서사의 이해를 위해 펼쳐진 게 아니다. 그래서 뚝뚝 끊기는 것이다. 그리고 단지 편집만을 본다면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가 훨씬 유동적일 터, 하지만 알랭 레네가 이 영화에서 보여주려 했던 것은 연극을 통해 하나의 무대에 오르는 여러 개의 삶, 그 중에 주인공은 두 명인데, 인생에도 주인공은 단 하나가 아니라 여러 명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연극이 끝나면 커튼콜이라는 이름의, 영화로 치면 엔딩크레딧으로 불리는 행위가 펼쳐진다. 극에 출연했던 모든 배우가 나와서 인사를 하고 어떨 때는 대화도 하고 그러는데, 이것은 관객과 배우가 얼굴을 정식으로 마주하는 순간이다. 왜냐하면 연극 중에는 배우는 가면을 쓰기에 배우 본인으로써는 관객을 마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은 곧, 배역이 아닌 배우의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 이름이 불리는 것은 무대와 객석을 잇는 통로를 개설하는 행위, 그곳으로 손을 내미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그런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들이 오랜 세월이 지나 자신이 했던 극을 후배들이 되풀이하는 모습을 영화의 형태로 바라본다는 것에 담긴 함의는 자명하다. 그들을 하나로 잇던 한 남자가 사망했을 때, 그의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 전화로 이름을 차근히 부르는 쇼트가 영화의 첫 장면에서 차례로 지나가고 나면, 스크린에서 지나간 시간의 형태로 나타나 자신의 죽음을 후행적으로 알리는 남자의 모습이 나타나고, 이때 그가 배우들에게 선사한 것은 모습은 다르지만 모습이 읽히는 자신들의 과거, 얼굴이 늙었어도 여전히 에우리디케를 상연할 수 있는 젊은 날의 이름들을 서로가 부르는 모습, 그러니까 이 영화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이름으로써 이곳에 불러오려고 시도하는 것이 된다.
그 남자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마지막에 증명하는데, 알랭 레네는 그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면서 다시금 죽여버린다. 그 남자가 이곳에 도래한 이유는 자신의 삶에 등장했던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 커튼콜을 보내기 위함이었으니, 그 커튼콜이 끝난 이상 자신은 다시금 저승에 돌아가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는 영화라는 게 기록의 성격이 있으므로 딱히 살아있는 상태에서 그 기행을 벌일 이유가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살아있어야만 두 눈으로 그들이 자신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그 남자는 자신의 삶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위해 이곳에 등장한 것이다. 그가 리더이기에, 리더가 이끌던 이들의 삶이 이곳에 펼쳐져야 하기에 그는 등장해야만 했다. 무대에 올라야만 했다.
더 나아가면 그 리더는 다름 아닌 영화에서의 감독에 해당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감독 알랭 레네는 감독으로서 이 영화관에 입장한 관객이 영화에 잘 이입할 수 있도록 이끌 의무가 있었다. 그는 영화관이라는 이름의 저승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는 얼굴들을 잘 알고 있었고, 하지만 그들의 이름을 일일히 부를 수는 없으므로 이 영화에서 우리가 이입할 수 있는 이름을 설정하고는, 그 이름으로 우리를 묶어 호명하고자 했던 것일 테다. 관객이 영화에서 이입하는 첫 번째 대상이 바로 배우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그렇다. 즉 그 배우는 이름, 카테고리, 나는 저 분류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라는 자기암시. 우리는 영화를 볼 때 자발적으로 그들에게 이입한다. 마치 혈액형 성격설처럼, 되고 싶은 것과 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두 가지 갈래로 자의적인 해석을 부여한다. 그런데 그 이입은 사실 배우의 이름이 아니라 삶에 적용되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배우가 연기하는 삶과 배우의 삶 그 자체다. 따라서 이름은 배우로 가는 통로일 터, 그 통로를 알랭 레네는 이 영화에서 만들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