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에 관한 이야기인가, 혹은 숙명에 관한 이야기인가.
이 영화에 대해 글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해본 결과, 써야겠다고 판단했다. 글쓰기를 고민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장애에 관한 이야기가 ‘말하기의 답답함’ 혹은 ‘제약’에 관한 은유로 작동하는 이 영화에서 우리가 한국 사회의 단면을 찾아내기란 무척 쉬운 일일 테다. 높으신 분들과 아래 사람들의 대립이라는 구도는 한국 영화의 전통이라 할 만큼 오래된 구도였고, 이 영화도 딱히 다를 것은 없었다. 영화가 그려내는 것은 뻔하다면 뻔한데 피해갈 수는 없는 이야기이고, 그 민감한 곳을 찌르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럼에도 말해야만 하는 사실도 있을 테지만, 다른 한국 영화에서 이미 다 다루었던 이야기를 굳이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일상을 보내던 중, 이미 다루었던 이야기를 다른 시선으로 접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감한 화두를 논한다는 것이 애초에 나의 일도 아닐뿐더러, 더 잘 아는 사람이 글을 써줄 것이라는 판단 아래에 나는 이 글을 쓴다.
유기적으로 얽매이는 두 끈, 양쪽 지지대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해볼 것은 서사와 담론이 유기적으로 얽매여 있지 않다는 점이다. 완성도를 지적하는 게 아니라, 그 매듭 사이의 간극이 눈에 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영화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주요하게 극을 이끌어가는 것은 양순호 변호사(정우성)와 임지우 학생(김향기)이다. 그 과정에서 다른 인물은 물 흐르듯 흘러가 버린다. 이른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소모적으로 사용된 그 인물들은 영화에서나 우리 삶에서나 쉽게 지나가 버리는 어떤 이들을 떠오르게 한다. 이때 나는 그 흘러감을 시간이 아닌 세계의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다. 토드 헤인즈의 <캐롤> 공식 포스터에서, 두 여인을 제외한 세상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이때 그 세상이 <캐롤>에서 <원더스트럭>의 무성과 흑백의 스크린으로 옮겨간다는 점에서 이 흘러감은 점점 더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그 흘러감의 근원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원더스트럭>은 영화의 속살을 들여다보려 한다.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면 무엇이 있을까. 지구의 중심에는 내핵이 있고 인간의 근원에는 어머니가 있는데, <증인>에서 양순호와 임지우가 사는 세상, 한국 혹은 법정을 무대로 한 ‘말하지 못함’의 근원에는 무엇이 있을까.
유기적으로 얽매이는 두 끈이라 해도 그 중심에는 늘 간극이 있기 마련이다. 매듭이란 것이 아무리 단단하게 옭아도 그 중심에는 바늘 하나가 들어갈 자리가 남아있다. 요컨대 뱀 머리와 꼬리가 맞닿은 우로보로스의 형상에는 거대한 원이 그려진다는 점을 우리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매듭이라는 것을 순환의 상징으로 사용한다면 그 사이에 구멍이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하고, 구멍이 고리처럼 보이는 순간에 그것은 속박 혹은 통로가 된다. 따라서 이것은 보통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된다. 사랑의 고리, 죽음의 고리. 전자는 운명이고 후자는 숙명이다. 전자를 따르는 사랑 영화에서 남녀는 어떤 경우와 경로를 거쳐서라도 결국에는 감정적 혹은 육체적으로 서로에게 도달하게 된다. (<너의 이름은>) 후자를 따르는 서사 영화에서 인물은 어떤 딜레마에 도달하고 끝내 양쪽 모두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다크 나이트>) 이때 양쪽 모두에게서 마음의 공백이 발견된다. 사랑하지만 무언가 허전하고, 노력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그들에게 있다.
그러니까 나는 양순호와 임지우라는 이상한 인연들이 얽매이는 과정에서 무언가 공허한 것을 느꼈다. 어쩌면 이것은 서사의 부조리에서 오는 개연성 오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넘어가도록 하자. 영화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경험은 현실의 왜곡에서 벗어나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업영화라면 더더욱 그렇다. 요컨대 나는 이 영화의 설정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범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 영화에서 주로 목격하는 것은 민변과 로펌이라는 한국 사회의 양극단이다. 이 설정은 어느 관객이라도 볼 수 있도록, 어떠한 각도에서든지 ‘포착’되게 설계되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말하고 싶은 게 확실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고 생각한 대목은 버스에서 내린 양순호의 앞에 여러 신문사 목록이 쓰인 표지판이 잠깐 비추어질 때였다. 이 쇼트에는 한국의 양쪽을 대변하는 신문들이 있고, 그 왼쪽에는 ‘경항신문’이 커다랗게 독립해있다. 이 쇼트를 지적해야 하는 건, 이것이 경향신문이기 때문이 아니라 특정 신문사를 지목하는 것처럼 보이는 우연을 만들어낸 카메라가 관객에게 어떻게 비추어질지에 대해 우리가 고민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분명 그 장면은 우연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의 맥락에 관계없는 카메라의 포착행위가 세상에 불러올 파장에 대해 우리가 논하게 된다면, 베트남전에서 한 남자를 총살하는 사진을 소환해낼 수 있을 테고, 사이공식 처형이라는 이름의 사진이 민간인 학살이라는 함의를 품고 반전 담론으로 회귀했을 때, 이 사진을 찍은 에디 애덤스는 퓰리쳐 상을 받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나는 그 장면에서 영화가 민변과 로펌의 구도에서 이탈하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그 이탈한 버스는 어디로 가는 것이었을까. 혹자는 한국 사회의 정치 안쪽으로 (이말년의 그 유명한 버스만화, “이 버스는 청와대로 간다!”) 향한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어딘지 모르게 웨스 앤더슨의 <개들의 섬>이 떠올랐다. 인간과 개, 일본어와 영어라는 두 가지 세계로 구분된 이 영화에는 명확하게 설정된 대립 구도가 있으면서도, 영화 밖으로는 그 대립구도를 철저하게 유지하려 하는 감독의 의지가 있다. 이때 그 대립 구도는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다. 간극이 생긴 건 단지 웨스 앤더슨 감독이 일본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역으로 조립해보고 싶었다. <증인>에 나오는 양 갈래의 담론 그리고 그 중앙에 있는 간극을 관통하는 것은 무엇인가. 상상계와 상징계라는 양쪽 사이의 완충지대인 실재계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지능은 멀쩡하다고 말하면서 그저 그들 만의 세계가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이 영화가 사건의 해결을 위해 제시하는 것은 자폐 아동을 이해하는 것, 즉 그들의 세계로 직접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양순호가 임지우에게 다가가는 의도는, 처음에는 사건 해결을 위해 증인을 만나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명백하게 이익집산적인 행동이고, 작품은 양순호가 자폐를 이해하고 보듬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때 도움을 받는 건 상대측 검사이다. 변호사가 재판 승리를 위해 검사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설정은 아마도 그사이에 증인을 넣기 위함이었을 테다. 쉽게 말해, 변호사와 검사라는 양쪽의 매듭이 얽히는 그 간극에는 증인 임지우가 있다. 그리고 그 임지우가 포착한 것은 맞은편 집의 살인사건이었으며, 그 살인은 사실 사주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나중에 밝혀진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임지우에게 카메라의 기능, 포착하는 역할을 부여해서 그 아이러니를 법정으로 끌고 간다. 위의 베트남 사진 사례를 들어본다면 이 포착은 어느 방향으로든 해석될 수 있을 것이었고, 그래서 영화는 진실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실로 진실을 만들어내는 변호사의 변론을 보여준다.
운명에 관한 이야기, 혹은 숙명에 관한 이야기
영화의 특성상 변호사의 반대항으로 설정된 검사는 분량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대신, 변호사가 검사의 역할도 겸하게 된다. 자웅동체 같은 설정인데, 그 자웅동체라는 이름 아래에서 무언가 기형적인 게 탄생할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예측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변호사 양순호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무엇인가 라는 고민을 해본다면 그러하다. 양순호가 민변 소속이었다가 로펌으로 소속을 옮겼다는 점에서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변호사가 그 씨앗을 전한 것일까? 아니면 맞은편에 있는 검사가 자폐증 증상을 보이는 동생이 있기에 이 사건에 배정되었다는 이유 때문일까? 그러니까, 정말로 단순하게 도식화하면 양순호는 여성과 결혼한 것일까 남성과 결혼한 것일까? 그리고 그 결혼의 결과로 나온 게 일련의 심정변화라면 이 변화는 납득될 수 있을까? 나는 그 결과물이 기형적이라는 위의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동성애에 관한 물음이 아니다)
자문자답에 해당하는 이 자웅동체는 제대로 된 담론의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관객으로 하여금 그 결과에 의문을 자아내게 한다. 아마 영화가 의도한 것은 그 교배가 영화의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을 텐데, 유전적 동일성을 피하려면 외부집단으로부터의 수혈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영화 밖으로 소통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영화 내부에서 머무는 것으로만 보였다는 점에서는 안타깝다. 우리가 위에서 말한 매듭이라는 비유는 그 양쪽 끈이 다른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고, 그 끈이 모두 한쪽이라면 단지 고리에만 불과해진다. 그리고 그 고리는 우로보로스라는 이름의 순환, 반대로 말하면 자폐적인 것, 그 세계(고리) 안에 갇힌 이들의 목소리를 누가 알아줄까? 영화는 자폐 아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세계로 먼저 다가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을 영화의 측면으로 보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객이 먼저 다가와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 관객이 외부상황을 대입할 만큼 영화 담론이 잘 짜여있었는가? 아니다. <베테랑>과 <극한직업> 혹은 <내부자들>이라는 영화가 성공의 반열에 오른 건 연일 뉴스에서 나오는 사건들이 그 영화의 내용을 관객에게 납득시켜준 덕분이다. 그러나 나는 타자를 이해하려면 그 속에 발을 내디뎌야 한다는 이 영화의 내용이 영화 밖에 있는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담론과 올바르게 이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내세우는 두 가지 담론, 민변과 로펌 그리고 자폐와 일반인이라는 것은 양쪽으로 갈라지지 못하고 그 중간지대에서 중구난방으로 혼합되기 때문이다.
민변과 로펌 그리고 자폐와 일반인이라는 편리한 이분법은 이 영화에서 제때에 분리되지 못한다. 그 두 가지를 잇는 게 변호사 양순호이기에 그러하다. 양순호를 통해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주고자 한 이 영화에서 관객에 양순호에 이입한다면, 그 이분법은 하나로 혼합될 게 분명하다. 요컨대 말하지 못한다는 성격은 민변으로, 출세가 당연시되는 사회인 로펌은 ‘일반적인 것’으로 분류된다. 이 분류법은 이때부터 불안의 조짐이 보이는데, 민변과 로펌 사이에서 로펌을 택한 양순호가 과거의 민변 동료와 멀어지기 시작할 때 임지우 학생과의 사이도 점점 멀어지게 된다. 그런데 웃기게도 5시마다 하는 퍼즐게임은 계속된다. 이 퍼즐게임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중요한 장치로 사용되는 걸 보면 이때를 위한 설정임이 분명한데, 사이가 틀어지지 않고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남겨놓은 걸 보면, 민변과 로펌 사이에서 갈등하는 양순호에게도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일 테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은 그 두 가지 가능성이 한번에 터져 나오는 법정 장면에서이다.
그러니까 사실 이 장면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전해주어야 할 장면이다. 그럼에도 이 장면이 관객에게 무언가 찜찜함을 남긴다면 임지우 학생의 직설적인 대사가 있기 때문일 텐데, 임지우 학생은 이 장면에서 “사람들을 구해주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라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변호인>의 여러 장면을 떠올릴 수가 있고, ‘아직 사람이 되지 못한 이들’을 구원하고 싶다 혹은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이들’을 대변하고 싶다는 두 가지 갈래로 해석될 수 있을 테다. 이때 전자는 양순호가 마주한 높으신 분들이고, 후자는 자폐 아동과 같이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이들이다. 그런데 영화의 결말에 하나의 고리로 엮인 양순호와 임지우는 그 역할을 동등하게 부여받지 못한다. 임지우는 여전히 임지우일 뿐이고 그는 변하지 않는다. 변한 것이 있다면 양순호 쪽인데, 양순호는 로펌에서 나와 민변 쪽으로 회귀한다. (아마도) 영화가 이 대목에서 관객에게 제시하는 것은 양순호와 동료 민변의 결혼이다. 카메라는 그 둘의 결합을 보여주면서 위로 올라가는데, 도시가 아닌 집을 보여주면서 영화가 끝이 난다. 최근 5년 동안의 한국사회고발 영화의 시작 및 마지막 장면이 도시의 전경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는 점을 떠올려 볼 때, 이 구성은 영화의 담론이 사회고발이 아닌 소시민 쪽에 향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 대목을 사회로 향할 비판을 가정으로 돌린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불편하게 느낄 사람은 많을 것이다. 여러 문제가 돌고 돌아 법정으로 향하다가 다시금 시민의 자리로 돌아오는 이 영화에서, 그 문제의식이 하늘로 승천하지 못하고 땅으로 내려오는 것은 마치, 망자가 이승을 떠나지 못해서 다시금 살아나는 것처럼 보이므로, 그 좀비와도 같은 가능성을 우리는 부정하고 싶어진다. 망자가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한이 남았기 때문이고, 그 망자를 하늘이 아닌 가정에서 발견한 영화의 마지막 카메라는 이 영화 속에 아직 앙금이 남아있음을 암시한다. 왜 암시냐면, 영화가 그대로 끝나버리기에 우리는 찜찜하게 자리에서 일어설 수밖에 없다. 요컨대 이 영화의 카타르시스가 법정 장면이었다면, 그 법정 장면에서 죽어야 할 이들은 두 명 (가정부와 살인을 청부한 아들)이었을 테고, 하지만 그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심을 그대로 안고 가는 이 결말에서 소시민의 한은 여전히 영화 속에 남아 그들 가정에 침투한다. 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렇게 묻고 싶어졌다. 이 이야기는 운명에 관한 이야기인가, 혹은 숙명에 관한 이야기인가.
<변호인>에서 송강호에게 찾아온 것이 운명인지 숙명인지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고리 안에서 나아가는 게 중요하지 고리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이 부분에 빗댈 수 있는 건 자석의 양극이 유발하는 반발력이 물체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자기부상의 원리이다. 쉽게 말해, 그 공허함이 인물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이 감정은 논리적으로 설득될 수 없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 양극에서 우러나는 자기장, 자장 안에 있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양극에서 우러나는 자장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관찰자마다 시각이 다를 테지만, 적어도 영화의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 힘이 필요하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에서 자장이라는 게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장을 성립시키려고 끌어오는 양측의 축 중 하나는 현실에 있고, 그 현실에서 스크린 안으로 당겨오는 참여적인 성격은 <변호인>의 객석에 관객을 앉혀놓는 전략에만 유효하다. 그러니까 어쩌면 한국의 관객은 현실과 스크린이 발을 묶고 함께 나아가는 게 아니라, 스크린 안에서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의 모습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그곳에서의 해결사는 현실에서도 해결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우리이기에 그 전략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