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영혼을 잠식하다. 영화를 잠식하다

<달빛천사>, <보헤미안 랩소디>, <레토>

by 수차미


이용신 성우의 사실상 데뷔작인 <달빛천사>를 최근에 다시 보면서 느끼게 된 것은 이 만화에서 <레토>가 겹쳐 보인다는 점이었다. 솔직하게 말해 이 두 작품 간의 연관성은 내가 최근에 보았다는, 순전히 주관적인 인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두 가지 작품의 인상에 대해서 내가 무언가를 느꼈다면, 그거대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 두 가지 인상에 대해 내가 받았던 인상을 나만의 방식으로 논증해보려고 한다.



IE002331924_PHT.jpg?type=w966 영화 <레토>의 공식 포스터 © 엣나인필름




집단 무의식 : 마지막에 자리한 하이라이트


한국의 관객들이 <레토>에서 원하는 것은 음악이었던 것 같다. 작품의 포스터에서도 그렇고, 이 영화가 빅토르 최의 전기영화라고 홍보되었음에도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를 <보헤미안 랩소디>와 비교해보고 싶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경우 그룹 ‘Queen’의 전기영화로 홍보되었는데, 오히려 작품성이 떨어지고 음악성은 높았다. 하지만 그래서 성공했다. 쉽게 말해 음악성이 작품성을 압도하는 일이 벌어졌다. 물론 이 음악성을 견인하는 주된 서사가 영화의 하이라이트, 그 마지막 공연에 배치되었다는 절묘함 덕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보헤미안 랩소디>의 성공공식이 꽤 복잡하다는 점을 알고 있으므로, 여기서 그 음악성의 기원을 파헤쳐보려 한다.


우리는 이 이상한 현상에 대하여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소위 말하는 음악영화에서, 음악성이 작품성에 우선한다는 이 공식이 일반화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것이 성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 모습이 일종의 신기루일 수도 있다만, 그런 신기루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음악성에 대해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생각을 계속 이어나가면,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레토>의 음악성이 한국의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어필하지 못했다는 점일 테다. 그렇다면 <레토>의 음악성이란 무엇인가. 인디밴드(언더그라운드)? 러시아(구소련)? <보헤미안 랩소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음악성이 우리 모두의 추억 속에서 끌어올려진 것이라면, <레토>가 국내에서 흥행하지 못했던 건 당연해진다. <레토>의 러시아는 우리에게 너무나 생소한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생소한 시공간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점이 있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시공간은 우리와 전혀 동떨어져 있음에도 별 무리 없이 납득되었으므로 말이다.


그러나 <보헤미안 랩소디>의 마지막에 자리한 하이라이트가 무대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이 무대가 직시하는 것은 우리가 ‘Queen’을 경험했던 시공간에 그 무대를 세운다는 것일 테다. 그러니까 나는 카를 융의 말을 빌려서 그 무대가 바로 ‘집단 무의식’이라 말하고 싶다. 의식은 경험에 의한 산물이며, 모든 인간은 삶을 살아가며 그것을 자연스럽게 습득한다는 카를 융의 발언은 정신분석보다는 철학에 가깝지만, 우리는 그가 정신분석학자가 아닌 ‘정신철학자’에 가깝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집단 무의식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문화의 산물이고, 만약 그것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겪었던 어떤 추억이라면, 그중에 하나는 음악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나는 지지한다. 즉, 나는 <보헤미안 랩소디>의 영국이 그 시절을 겪지 않은 20대 30대에게도 어필한 이유는 동시대를 겪었던 40대 50대가 그들에게 물려준 집단 무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결과로부터 이유를 추론하려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집단 무의식이라는 단어에 어떠한 논리체계를 구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이때 나는 ‘존재’라는 단어에 의문을 품는 순간 또한 존재의 존재개념을 견고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집단 무의식이 있다는 사실은 긍정하되, 그게 왜 일어나는지를 따져 보는 게 더 낫다. 과학자들이 블랙홀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면서도 증명되지 않음에 고민하다가 끝내 그 존재원리를 규명해냈듯이, 우리의 가정은 집단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왜 그런 논리가 작동할 수 있는지로 향할 것이다.




<달빛천사> 한국어 번역판 © 학산문화사




음악의 종말 : 노래를 통해 무엇을 전하고 싶은가


<달빛천사>는 죽음을 앞둔 소녀에게 저승사자(의 탈을 쓴 천사)가 다가와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이야기의 만화다. 물론 이 문장은 그 내용을 간단히 축약한 것이다. 이때 이 만화의 주제의식을 논하자면 다음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노래를 통해 무엇을 전하고 싶은가?”


노래를 통해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의 문제는 보통 두 갈래로 나뉘게 되는데, 하나는 인물이 노래하는 이유이고 둘은 영화가 노래하는 이유이다. 전자는 음악영화이고 후자는 뮤지컬 영화에 해당한다. 범주를 더 넓히자면 후자의 경우, 영화에서 음악이 나오는 순간, 리듬, 편집의 이유를 따져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노래의 행위자보다는 노래 자체에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노래 자체의 이유를 묻는 것이 위에서 말한 음악성의 기원을 파헤치는 것과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왜 노래하게 되는가? 그 인물, 혹은 그 ‘영화’는 왜 노래하게 되는가? 기본적으로 영화가 하나의 인격체에 해당한다는 가정하에서, 그 인물이나 영화는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고, 영화의 어떤 순간에 흘러나오는 오묘한 음악에서 우리는 그 영화의 의식을 읽어낼 수 있을 테다. 요컨대 우리는 그 영화가 흘려보내는 음악이 끝나는 그 순간에 음악의 의식을 떠나보내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그 의식이 떠나가는 순간에 우리는 어떤 이를 떠나보내는 것과도 같다. 음악 하나가 끝나면서 느껴지는 여운이 영화가 끝나는 순간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영화라는 이의 죽음(결말)은 음악 하나가 끝나는 것, 이른바 죽음의 총아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방금 사용한 죽음이라는 표현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조언하고 싶다. 이 죽음은 생명체의 죽음과는 달리, 언제든지 되돌아볼 수 있는 비선형적인 죽음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게임적 리얼리즘의 논의를 경유하는 이 죽음에는 카세트테이프, 비디오, 필름과 같은 저장장치의 발달에 크게 의존한다. 그러니까 매 순간의 감상이 다다르는 마지막 장면에는 새까만 화면, 하얀 잡음이 있지만, 언제든지 되돌아갈 수 있는 게 비선형적인 죽음이자, 그것이 선사하는 경험이다. 요컨대 나는 영화에서 어떤 쇼트와 시퀀스를 감명 깊게 보았다면, 혹은 그리 감명 깊지 않았던 영화를 다시 한 번 관람할 때 느껴지곤 하는 어떤 감정들이 그것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우리는 마주하고 있다. 그 죽음은 영화의 엔딩 크레딧, 예정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극복 가능한 것. 그렇다면 이때 우리는 그 죽음을 슬퍼해야 하는 걸까? 아닐 테다. 오히려, 알면서도 속아주는 유희로서의 죽음은 영화의 세부에 천착할수록 증폭된다. 쇼트를 분석하는 즐거움, 사물의 배치, 조명의 조도, 카메라의 깊이, 인물의 시선, <인셉션>에서처럼 영화의 구조가 맞물려가는 것을 목격함에서 오는 즐거움, 나는 음악이 영화에서 작동하는 원리가 바로 그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달빛천사>의 담론은 정말로 오묘하다. 영상 매체에서 음악과 죽음의 관계가 공명의 자리에 있다는 점을 증명할 단서 중 하나이다. 주변 인물이 왜 노래를 하고 싶으냐고 루나(이용신)에게 물었을 때 나는 그점을 떠올렸다. 영상에서 음악이 갖는 힘(의미)는 무엇인가. 잘 생각해보면,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만화를 더빙하는 성우들의 모습에 단서가 있다. 영상에 목소리를 입히는 게 성우라는 말은, 세상을 노래하는 게 가수라는 말과도 같다. 그러니까 가수라는 직업은 자신이 보는 세상을 목소리를 통해 보여주는, 시각을 청각으로 변환하는 양측 세계의 중재자인 셈이다. 여기까지는 무척 간단한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음악의 리듬이라는 말이 영화의 리듬, 편집의 리듬에 대응할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렸고, 그러자 영화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순간의 리듬이란 영화라는 가수가 담론을 노래하는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수가 담론을 노래하는 방식은 동시대의 문화를 끌어오는 것이다. <레토>가 전하는 것은 붕괴를 앞둔 구소련의 어느 공간이고, 그 사실을 영화를 보는 현재에서야 인지하게 된 러시아의 관객들에게는 이 영화가 남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단지 러시아 관객뿐만은 아닐 테다. 왜냐하면 소련의 붕괴는 냉전의 붕괴였고, 그 거대한 벽이 무너지는 순간의 체험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유효하기 때문이다. 다른 형태이겠지만, 같은 순간의 에너지가 흘러들어오는 소련 해체가 의미하는 것은 자유세계로의 해방, 요컨대 한국의 관객들이 <레토>에서 목격하는 것은 터널의 마지막에 뛰노는 빅토르 최(유태오)의 모습, 나는 그 이미지가 우리가 아는,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이를 떠올리는 방식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보통 희망을 말할 때 자주 사용하곤 하는 비유가 있는데, 그게 바로 터널이다. 길고 긴 어둠 (터널)을 견뎌내면 그 끝에 하얀 구멍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희망에 빗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맥락에서 그 터널에는 끝이 없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타인과의 관계가 기약 없이 단절되어버린 이들, 저 멀리 북에 가족을 두고 온 실향민이나, 어린 시절에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이거나, 첫사랑을 아쉽게 떠나보낸 사람들, 이 기억에 끝이 있다고 우리가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그 끝이 어떤 형태로든 다가온다면, 하지만 기실 죽음일 확률이 더 큰 상황에서 생존에 희망을 걸어본다는 것, 우리가 잃어버린 실종자라는 이름은 죽음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직 죽지 못한 자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구천을 헤매는 ‘달빛천사’들일 테다. (사실 이건 중대한 스포일러다)


<달빛천사>에서 저승사자는 한 명의 망자를 저승에 성공적으로 인도해야만 견습 딱지를 뗄 수 있다. 그리고 루나의 동행 저승사자 중 한 명인 타토(엄상현)는 식물인간 상태에서 저승사자가 되었다. 이점은 작품 초반에 불완전한 날개라는 것으로 복선이 깔리며, 불완전한 죽음은 다른 이를 죽음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작품의 주제의식이 여기에서 성립한다. 요컨대 나는 그 식물인간 상태를 죽음을 앞두었지만 사실 죽지 않은, 터널의 끝자락에서 밖에 나가지 않고 계속 머무르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니까 이 작품에서의 죽음이란 양 갈래로 나누어져 있는 셈이다. 하나는 일 년 뒤에 죽을 루나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식물인간 상태인 타토이다. 그리고 논외의 인물은 이미 죽음을 맞이한 저승사자이다. 여기서 루나를 ‘죽음이 확정되었지만 그래도 노래하고 싶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영화가 나아가는 시간의 원리를 그곳에서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말해야 하는가? 즉, 왜 노래해야 하는가? 루나의 대답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이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잊혀 가면서도 잊을 수 없는 터널 끝의 실종자, 나는 여기서 <이터널 선샤인>을 불러온다. 그 영화에서, 사라지는 기억 속에서 생존을 위해 저항하는 꿈의 방랑자 조엘 바리쉬(짐 캐리)는 ‘그럼에도’ 같은 사랑을 반복하게 된다. 말하자면 조엘은 반복되는 죽음 속에서도 사랑을 추구하는 인물, 이것을 죽음이 반복되는 영화(결말이 다가오는 영화)에서 같은 사랑을 추구하게 되는 영화 담론의 모습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영화의 음악이라는 게 영화 리듬의 작은 축소판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자체가 반복되는 것과 영화의 음악이 반복되는 것은 그 담론의 리듬을 공유하면서도, 영화보다는 비교적 손쉽게 재생되고 반복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요컨대 그 음악의 반복이 영화의 죽음에 저항하는 행위라면, 그러니까 조엘처럼 기억의 죽음에 저항하는 행위라면, 음악을 노래하는 것은 죽음을 기억하겠다는 선명한 의지의 표명이 아닐까. 음악이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그 끝을 가늠하게 되는데, 이 가늠은 영화보다는 짧은 러닝타임을 지닌 리듬이기에 더 손쉽게 이루어진다. 결국 리듬이 말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게 일상 속을 자연스럽게 부유한다는 점이다. 온 세상 어디에나 죽음이 만개해있다는 것이고, 그래도 다시 만날 수 있으므로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며, 이것을 회피라던가 추억이라던가 하는 말(눈을 감으면 벌어지는 일들, 그 어둠)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그 대신에 나는 이렇게 표현해보고 싶다. 어쩌면 음악은 그것이 작동하는 영화의 원리를 축소해서 보여주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레토>가 노래하는 것은 매 순간의 80년대 소련이며, <보헤미안 랩소디>의 마지막 공연은 프레디 머큐리의 죽음을 추모하는 시간이고, <달빛천사>에서 벌어지는 52번의 시작과 끝 그리고 1화와 52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단 하나의 노래 ‘New Future’는 영화의 이야기가 아닌, 죽음의 측면에서 작동하고 있다. 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음악(을 담은 영상)은 작품성이 아닌 음악성의 측면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이게 너무 낭만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음악성과 작품성의 논의를 거슬러 오르다 보면 무성영화 시대의 음악, 스크린 밖에서 스크린 안으로 침투하는 리듬, 현실에서 스크린으로 이동하는 담론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버스터 키튼 혹은 찰리 채플린의 몸동작이 음악과 만나 절묘한 리듬을 형성할 때, 그런데 사실 그 몸동작은 음악이 없어도 유효하다. 자연스레 그 리듬이 음악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위대한 독재자>의 미용실에는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이 흐르고 있지만, 음악이 없어도 여전히 신명 나는 리듬이 표면 위에 흐르고 있다. 결국 우리는 음악이라는 게 본래 영화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음악이 없는 화면에서 갑자기 음악이 흘러나오거나(<자전거 탄 소년>), 음악이 없는 화면에 음악을 흘려 넣는 전통적인 방식의 어떤 영화들(연주자와 변사가 있던 시절)에는 어느 순간 리듬을 침투시키는 행동, 담론이 있다고 생각한다. 결말(죽음)을 앞둔 이가 현실에 담론을 부여하고 그 가능성을 다시금 확인하는 방법이 리듬이고, 닿지 않는 손을 내미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그것 또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표현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라는 점을 나는 ‘말하고’ 싶다.


<레토>와 <달빛천사>라는 상이한 작품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그런 점이었다. 그해 여름,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지금 이곳에서 재현되고 있다. <레토(여름)>는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존 카니의 <싱스트리트>도 아니요, 데미안 샤젤의 <라라랜드>도 아니다. 노래의 끝에서 시작으로 이동하는 리듬의 물결, 순환하는 계절과 교차하는 영화의 쇼트에서 우리가 찾아낸 소중한 한때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V6IREXKjBwA&index=4&list=RDljX2oPNrg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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