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임권택만큼 영화를 오래 만들어온 감독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동년배의 다른 감독들은 벌써 죽었거나, 또는 임권택만큼 영화를 많이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정창화와 같은) 물론 나는 위의 발언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또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임권택이 영화를 오래 만들어왔다는 지적은 그가 한국 영화의 역사를 달려왔다는 사실과 무관하지가 않다. 이른바 역사의 산증인, 1936년에 태어나 지금까지 100여 편이 조금 넘는 편수를 찍은 임권택은 한국 영화에서 명실상부한 거장 감독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일제강점기의 한국 영화인들을 만났고, 군사정권 아래에서 군사정권의 영화인을 만났고, 현대에 들어서는 젊은이들에게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한국 영화의 소실된 부분을 알고 있는 사람이며, 군사정권의 명암을 몸으로 받은 사람이다. 하지만 이때 현명한 독자라면 다음처럼 물어야 한다. “임권택이 왜 거장인데?” 요컨대 오랜 경력을 지녔다는 것 하나로 그를 거장으로 추앙한다면 그것만큼 웃긴 일도 없을 것이다. 단지 영화를 많이 찍었고 오래 찍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추앙한다면, 전관예우처럼 실력이 아닌 경력으로 승부하는 모습일 테고, 경력보다는 실력 위주의 사회가 된 요즘에 들어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 테니까.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임권택이야말로 노력하는 거장 중 하나라는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앞의 문장은 앞뒤를 바꾸어야 어귀가 맞다. 임권택은 그 누구보다 노력하는 모습이 빛나는 사람이다. 임권택은 군사정권 시절에 만든 여러 영화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 발언은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분명 그가 군사정권 아래에서 국책영화를 만들었던 건 사실이고, 어쩔 수 없이 하였다 하더라도 그 행동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경우는 다르지만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국책영화를 만들었던 이들에게도 친일 행위 여부에 대해서 논란이 오가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두 가지를 비교하려는 게 아니다. 또한 행위의 당위성에 대해 논박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임권택이 자신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부끄러움을 발판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요컨대 나는 그가 시간을 내딛는 방식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영화에는 그런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그래서 나는 임권택을 지지한다. 영화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그 무엇보다 영화를 만드는 게 수십 명의 사람 그리고 단 한 명의 감독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임권택이라는 사람과 그의 영화에는 부끄러운 시간을 내딛는 힘찬 발걸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가 임권택의 발자취를 영화에서 끄집어내는 게 옳은 일일까? 어떤 영화는 논리이지만, 어떤 영화는 생리(生理)이기도 하다. 우리가 보는 많은 영화 중에 어떤 영화는 그 자신이 삶이 되어 살아가곤 한다. 한국에서는 이창동의 영화가 그렇다. 정교하면서도 불쾌함을 지닌 이창동의 영화 속 세상은 그 설계 덕분에 스스로 살아간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창동의 영화에서 보는 것은 영화의 결말이 아니라, 창문에 블라인드를 치는 것과 같은 단절이다. 보여줄 것은 보여주었으니 그 뒤는 알아서 유추하라는 출구 없는 지하철, 그 기차는 어디로 빠져나가게 될까? <박하사탕>에서 역행하는 선로 위의 남자에게서 우리가 찾는 것이 바로 그런 출구이다. 이때 비판하는 진영의 이야기는 기차의 출발지점에 있다. 그 기차를 출발시킨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비판은 세계의 축조 원리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 축조는 부도덕하다거나 양심이 없다고 여겨진다. 다만 이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축조는 부도덕이라거나 양심이라든가의 문제가 아닌, 여전한 생리의 문제라는 점이다. 그것 또한 하나의 삶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다른 열차에서 같은 플랫폼을 향해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믿음은 사람을 맹신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믿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인셉션>이 보여주는 삶의 여러 층위 중, 바닥에 자리한 림보를 본다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그 림보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자신의 무의식에서는 자신이 신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고,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 즉 자신이 세계의 존재원리인 셈이다. 그러니까 이때 자신의 세계를 굳게 맹신한다면 타인의 접근을 허용치 못하게 되고,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타인을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영화라는 세계가 감독의 자의식이라면 그 세계의 존재원리를 주장하기보단, 어느 정도 자신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하면 관객이 개입할 구석은 없어진다. 또한, 관객이 들어오지 못하는 영화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행위가 호기심을 자극할 수는 있어도, 그 어려움을 해독하는 행위가 일종의 문화가 될지언정, 출구 없는 감정은 해만 될 뿐이다. 감정에 출구가 없다면 영화에 고인 울분을 관객이 고스란히 받게 된다. 즉 그 관객에게 남는 것은 극한의 감정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설계로 울분을 유도하는 작품도 분명 있다. 하지만 내가 임권택에게서 발견한 것은 인물의 감정과 그의 삶이 스크린 안의 어딘가로 늘 빠져나간다는 점이었다. 요컨대 <취화선>의 마지막 장면에서 토굴 안으로 사라져버린 장승업(최민식)의 모습은 화장이라는 장례 행위와 연결된다. 또는 불교에서 다비(茶毘)라고 부르는 행위와도 연결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토굴에 들어간 장승업이 도자기의 일부로 나올지 토굴 위의 연기로 나올지를 고려해볼 수 있다. 이때 전자는 세라믹이라는 질료로 남는 것이고, 후자는 연기라는 형태로 남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어찌 됐든 본래의 형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고 그럼에도 믿어야만 한다. 그게 장승업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고, 단지 우리의 믿음만이 그 논리를 구축하는 접착제가 된다. 결국 <인셉션>의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사이토(와타나베 켄)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사이토가 코브를 믿었듯이 우리에게는 영화의 생리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임권택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영화의 생리가 믿음과 맞물려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임권택이 영화를 믿는다는 게 아니라, 그의 영화에서는 늘 무언가를 믿는 인물이 나온다. 이때 그 믿음은 구체적으로 의견을 특정하는 게 아니라, 알 수 없는 끌림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사랑, 어쩌면 종교, 그 믿음의 근원이 영화 내에서 암시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임권택이 그들을 그렇게 찍기 때문이다. 요컨대 <길소뜸>에 나오는 이상한 두 남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 남녀가 영화에 속해 있다는 점 때문일 테다. 나는 전쟁 통에 헤어진 두 사람이 세월이 지나 이산가족 찾기 이벤트를 통해 다시 상봉한다는 이 설정이 있을 법하다고 생각은 해도 영화의 서사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산가족상봉은 한국의 유교적 풍토와 결합하여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것이므로 가족의 회복이라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임권택은 이 영화에서 가족이 되기 전의 타인을 찾아 나선다. 이 이야기를 간략화하면 거의 외도에 가깝다. 결혼하기도 전의 첫사랑을 때가 되어 다시금 찾아 나선다는 것은 당시의 한국사회에서 외면받을만한 풍경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지지를 받는다면 가족 대신 첫사랑이라도 찾아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른바 ‘절단된 감정의 대체재’를 찾는 이들의 모습이 무척 처량하게 다가왔기 때문일 테다. 요컨대 이 영화에는 집 나간 감정이 돌아오리라는 강한 믿음과 암시가 있다. 이것은 <국제시장>처럼 구태여 살던 집을 지키려는, 그곳에 누군가가 돌아오리라는 기다림의 모습이 아니다. 영화관에 있는 관객에게 유희를 ‘제공’하는 게 관객이지만, 누구든지 다가오는 이별보다는 찾아가는 이별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서 관객은 결말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결말로 가는 돌다리를 스스로 건너는 걸 선호한다. 영화의 마지막이 검은 화면이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그 이별은 관객이 서사를 추리하고 아귀를 맞춰가는 과정의 마지막에 자리하는데, 분명 예정된 절차일 테다. 이때 누군가는 죽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에 반대하여 믿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다. 죽음에 대한 강한 믿음이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것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에 사람은 절망에 빠진다. 반대로 말하면 확신으로 변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강한 믿음이 줄곧 유지되기 마련이다. 임권택의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그런 믿음이다. 임권택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영화가 끝나기 직전에도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길소뜸>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는 그 나레이션을 복기해본다면 그 사실은 분명해진다. “재회해도 모른 척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그럼에도 우리 민족은 하나의 핏줄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나레이션은 뚝 끊기며 말을 이어나가지 않는다. 말하자면, 핏줄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뒤에는 무슨 말이 던져져야 할까? 사실상 임권택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는 그 나레이션은 친족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면서도 민족에 대한 믿음은 긍정하고 있는 것이고, 임권택은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친족의 시대를 맺음하면서 영화 밖의 민족에게 믿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조금 생각을 달리하면 이것이 우리가 가족을 믿는 또 다른 방식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구시대와의 이별이 아니다. 오히려 구시대를 부정하면서 긍정하는 방법이다.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떠나가는 것이며 따라서 무기력할 따름이다. 그러니까 임권택 영화에서 핵심은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이들의 무기력함이다. 사람이든 시대이든 재능이든 그 무엇을 떠나보내는 이들의 모습에는 어쩔 수 없다는 한탄이 담겨있고, <취화선>과 같은 영화에서 우리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장승업이 자신의 천한 신분에 한탄하기라도 하던가? 반대로 생각하면, 이 영화에서 장승업이 자신의 천한 신분을 생각하지 않은 때가 있던가? 예를 들어 이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생각은 장승업의 우직한 태도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왕의 부름을 받고서도 바깥으로 나돌아다닐 수 있을까? 자신의 그림에 갖는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물론 이것이 캐릭터성이라는 영화의 축조방식일 수도 있지만, 이 영화에서 장승업은 쉴새 없이 돌아다닌다. 요컨대 영화는 그가 줄곧 돌아다닌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에 대한 가장 정석적인 답변은 “장승업의 천한 신분이 ‘메밀꽃 필 무렵’의 방랑과 유사하다는 점을 말해주기 위함”일 테다. 혹은 저 멀리 이국의 <황무지>나 <파리 텍사스>의 전진과도 유사하다. 그들에게는 알 수 없는 믿음으로 앞을 향해 나아간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니까, 알 수 없는 것을 피해 달아나는 게 아니라 알 수 없는 것을 쫓아가는 것이다. 이건 불나방처럼 불에 달려드는 것도 아니다. 겁쟁이처럼 도망치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에 현혹되는 것에 가깝다. 따라서 그 믿음은 거의 광적이고 헌신적이다. 자발적으로 어둠에 투신하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어둠에서 어둠으로 투신하는 행위이다. 어둠이 어둠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고, 이별이 이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어느 노래 가사 구절을 빌리자면, “멈춘 시간 속에 잠든 너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 멈춘 쇼트, 영화의 시작 이전에 인물에게 부여된 어느 쇼트를 영화상에서 플래시백과 같은 기법으로 보여주지 않으면서, 그 쇼트의 유출을 막고 인물이 품은 힘이 되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우직한 힘, 그렇다면 ‘잠든 너’는 어디에 있는 걸까. 잠은 죽음을 표현하는 시적인 문구이고 잠든 너는 죽음에 든 ‘너’에 가깝다. 말하자면 죽음에 들었지만 죽음 속에서 살아있을 것이라는 이집트 미라의 믿음이 장승업에게 있다.
이 멋진 믿음을 한국인에게 편한 말로 번안하면 다음과 같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취화선>에는 살고자 하는 것과 죽고자 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부위가 있고 그에 따라 나뉘는 양 갈래의 길이 있다. 한쪽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지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삼일천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때 어딘지 모르게 그 말은 다음처럼 느껴진다. “믿으면 죽고, 죽으면 믿는다.” 믿기 때문에 사람이 사는 것이다 라는 인간관계의 신뢰는 <취화선>에서의 장승업에서 시작되어 <길소뜸>의 과거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동학농민운동에서의 인내천 사상과 연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라는 말은 사람이 곧 믿음이라는 말과 같다. 하늘에 비를 내리기 위해 하는 기우제는 하늘에 믿음을 바치는 것이며, 비가 내리지 않아도 여전히 믿음을 바쳐야 한다는 점에서 불공정 거래일 수도 있지만, 그런 믿음은 마치 어머니가 자녀에게 보내는 모성애와도 같은 것이며, 그 모성애가 태초로부터 흘러와 근원을 추정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인내천은 하늘이 높다는 게 아니라 사람의 근본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근원, 다른 말로는 근본,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라는 물음에서 방점은 후자에 찍힌다. 어디에서 왔는지는 지금 여기에 땅을 내딛고 서 있기에 별로 중요하지 않고, 저 하늘의 구름이 어디로 가는지 만이 궁금할 따름이다.
구름의 이동속도는 얼마나 될까? 다시 말해서 구름은 어떤 시간을 살아가는 것일까? 나는 영화의 쇼트가 감독에 의해 이어진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 쇼트의 배열에는 감독의 시간이 어느 정도 녹아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구름이 만들어지고 나면 그 구름에 불어오는 바람은 별개로 관측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구름에는 자체적인 동력원이 없기 때문이고, 따라서 엔진은 바람이요, 그럼에도 지상의 관측자는 구름이 왜 움직이는지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 움직임은 구름이 자동으로 나아간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고, 불어오는 바람은 머리로만 체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바람이 저 위에서도 똑같이 불어올 것이라는 믿음은 확실치 않을 테다. 저 위와 이 아래의 간격은 너무 넓다. 사실상 다른 세상이고, 그럼에도 구름의 이동속도를 측정하게 된다면 속도를 계산하는 공식을 세워야 할 테다. 이 부분에서 내가 떠올린 하나의 사실은 임권택의 영화에는 늘 앞으로 전진하는 인물이 있다는 것이고, 그 전진은 믿음이라는 불투명한 동력원을 소모한다는 점이었다. 믿음이라는 불투명함은 바람이고, 누군가의 바램이고, 저 하늘의 구름처럼 알 수 없을 때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우리가 이 구름에서 굴뚝 위의 뿌연 연기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색하지도 않은 일이다. <취화선>의 마지막 장면에서 장승업이 된 게 구름이었음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꺼먼 불 속으로 들어가 사리를 뿜어내는 모습은 마치 <고하야가야가의 가을>의 전 단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갑작스러운 죽음, 하지만 예정된 죽음, 죽음이 아닌 믿음을 갑작스럽게, 예정하면서 살아간다는 게 임권택의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뿌려진 시간이 이곳에 있고, 유골을 품은 강은 계속해서 흘러가기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