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이 이어놓는 안팎의 풍경

<쉰들러 리스트>(1993)

by 수차미



<쉰들러 리스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좋은’ 영화라는 것이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걸 잘 안다. 나치 속의 희생자에 대해 말하는 이 영화에는 실제 역사에서 벌어진 여러 비극의 소용돌이가 에너지원으로 작용하고 있으므로,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특정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거의 필연에 가깝다. 그러니까 2차 세계대전 속의 비극적인 역사를 다루는 영화는 매번 하나의 방향성만을 지니게 되고, 그 속의 운전 기법에 따라 작품의 외양이 달라진다. 요컨대 우리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를 품에 안게 되는 셈이다.


비극 혹은 참사, 민감한 화두를 말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상처의 화끈거림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문제의 핵심으로 쉬이 접근할 수가 없고, 상처의 화끈거림을 외면하면 상처를 외면하는 것과도 같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진퇴양난(進退兩難), 실화 중에서도 비극을 다루는 영화가 직면하는 문제는 바로 그곳에 있다. 하나의 사건을 둘러싸고 오가는 여러 일화에는 이 사건의 본질이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을 주며, 실제로 사건이 부각될수록 본질은 사라진다. 사건 자체가 없던 일이라는 게 아니라, 사람마다 사건에 대해 말하는 화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사건을 말하는 법이 다르다면, 풍성한 말뭉치에 가려진 진실은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고 생각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된다. 이야기가 많아질수록 허황이 섞일 가능성도 크고, 그 허황을 피하며 진실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에 제동이 걸리게 된다. 눈으로 본 것은 분명 진실이나, 눈으로 본 것에 의심이 들게 하는 것은 옆에서 들려오는 소문이다. 요컨대 이것은 필름에서 사운드를 기록한 부분이 가장자리에 자리한 것과 유사하다. 필름에서 영상이 차지하는 게 70퍼센트라면 나머지 30프로는 사운드다. 다르게 말하면 영상 위에 덮쳐오는 게 사운드다. 화면은 늘 스크린 안에 있지만 그 밖에서 들려오는 게 (Digesis) 사운드다. 결국 시각에 후행하면서도 시각을 압도하는 것은 청각인 셈이다.


우리는 여러 영화에서 쇼트를 응집하는 사운드의 역할을 목격하고는 한다. 중구난방인 편집이라도 사운드의 연속성이 그것을 잇는 경우는 많다. 이를테면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들, 혹은 <지옥의 묵시룩>에서 발키리 행진곡이 유쾌하게 흘러나올 때, 아니면 이상일의 <분노>에서 바깥으로 던져지는 캐리어 소리 이전에 편집을 통한 공간의 이동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상기해볼 수 있겠다. 논점을 선회하면 임권택의 <서편제>에서 카메라가 왼쪽으로 고래를 돌릴 때도, 줄곧 진행되는 판소리 마당의 한 부분에는 소리가 담아내지 못한 그들 삶의 어떤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대목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영화에서의 청각이 압도하는 것은 영화 안의 시각뿐만이 아닌 영화 밖의 시각도 마찬가지라는 점일 테다.





a0012333_15141794.jpg?type=w966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한 장면 © 유니버설 스튜디오




도피와 환상으로서의 오즈랜드


이처럼 우리는 어떤 영화에서 청각이 안팎의 풍경을 이어놓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역사를 말하는 영화에서 청각의 그런 역할은 무척 중요하다. 그것은 영화의 쇼트를 잇는 게 아닌, 안팎의 역사를 잇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흑백이던 영화에 칼라가 찾아오면서, 말하자면 ‘광명(光明)’이 찾아오면서 그곳은 오즈랜드가 아니게 된다. 나는 지금 오탈자를 낸 게 아니다. 1939년 할리우드에서 개봉한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가 내딛는 칼라가 도피와 환상의 나라 ‘오즈랜드’였다면, 1994년의 할리우드에서 개봉한 <쉰들러 리스트>에서 유대인 생존자들이 내딛는 칼라는 도피와 환상의 나라 ‘오즈랜드’다. 같은 도피와 환상이지만 그 오즈랜드는 환상 속의 나라이고 이 오즈랜드는 환상을 피해 도달한 곳이다. 나치라는 환상, 여기서 방점은 ‘환해서’가 아니라 ‘환각적’이라는 점에 찍힌다. 나치라는 단체 환각을 보고 있는 이들이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유럽에 있었고, 이때의 오즈랜드는 망상에 사로잡힌 사기꾼 ‘오즈’의 에메랄드 성이 된다. 패전 독일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오즈의 현혹이 만들어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기존에 도시를 지칭하는 것과 같은 ‘환상의 나라’였던 셈이다.


환상의 나라에서 환상의 나라로. 어쩌면 이것은 유대인들이 건설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성서에서 말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환상의 나라를 건설했던 것에 비견될 수도 있다. 이 연결은 꽤 긴밀하지 않아서 논점을 벗어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의 말미에 쉰들러가 예루살렘의 기독교 묘지에 안장되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우리는 환상의 나라라는 카테고리를 포기할 수 없게 된다. 환상의 나라는 실존한다. 바로 그곳에 환상이 있다. 눈앞에 아른거리던 그 환상은 실재했다. 이 시점에서 되돌아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소련군 하나가 와서 공장 앞에 모인 천 명의 노동자들에게 말한다. 여러분은 이제 안전합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그러나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안전이 아니다. 그들은 소련군에게 되묻는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때 우리의 머릿속을 강타하는 단 하나의 사실. 유대인에게는 집이 없다는 점. 이제 우리는 다음처럼 묻는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공장 앞에 모인 천 명의 노동자들은 뤼미에르가 만든 최초의 영화 <공장에서 나오는 노동자들>로부터 기원한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할까. 나치로부터 왔고, 나치를 피해 간다. 이 두 개의 영화는 멍하니 앉아 그들을 바라만 본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 태블릿 쇼트가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 영화가 아닌 현실이라는 것, 공장에서 나오는 노동자들이라는 점이었다. 마찬가지로 <쉰들러 리스트>의 결말 부분에 자리한 그 쇼트는 오즈랜드를 떠나온 이들이 현실에 내쳐졌음을 보여주는 것일 테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논할 때 영화의 안팎에 양립하는 두 가지 환상의 나라에 대한 것을 피해갈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치라는 환상, 이스라엘이라는 환상, 둘 다 실제로 있었던 나라이지만 전자는 붕괴했고 후자는 일어섰다. 엄밀하게 말하면 나치라는 환상은 붕괴했다가 한번 일어섰던 나라이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두 번의 전쟁 동안 독일이 겪은 것은 붕괴 그리고 복구라는 꿈의 높낮이였다. 이때 나치가 생겨난 건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중간인 붕괴의 최저점, 인생의 골짜기에서 피어난 전쟁의 업화가 전후 독일에 닥쳐오는 순간, 표현주의는 오즈랜드에서 벗어나 세계를 뒤덮게 된다. 현실은 ‘사라지게 되었다’.





5b87406e2000002d0034b840.jpeg?type=w966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한 장면 © 유니버설 스튜디오




독일 표현주의 환영, 그런 어둠


독일 표현주의 환영은 영화를 포함하여 예술계 전반에 퍼져있던 풍조이나, 그 분위기만큼은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건 아마도 ‘어둠’일 텐데, 영화로 치면 키아로스쿠로와 같은 명암의 대비일 것이다. 나는 이때 그런 어둠이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에 자리한다고 생각한다. 표현주의라는 극단적인 어둠이 인생의 골짜기에 숨어있을 때, 이것을 축소하자면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 속 참호에 비견될 수 있을 테고, 이 대목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수많은 전쟁영화들이 자연스레 오즈랜드의 기반으로 자리 잡는다. 예를 들면 스탠리 큐브릭의 <영광의 길>속 카메라가 장교가 걷는 참호 속을 일직선으로 따라붙을 때, 그 끝의 쇼트는 거기서 단절되지만 적어도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다른 전쟁 영화로 빠져나가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예상하건대 이 부분에서 당신이 나에게 물어올 질문은 생뚱맞게 독일 표현주의를 왜 언급하느냐는 것일 테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1939년의 <오즈의 마법사>의 색을 음영으로 반전해보면 독일 표현주의 그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일렁이는 건물, 일렁이는 신기루, 그럼에도 현실이라 말하는 것은 아이의 순수함 때문일까 아니면 영화적 허용일까. 이때 내가 언급할 것은 영화적 허용이 영화를 허용하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영화에서는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영화는 관람하기가 거북할 수도 있다. <돌이킬 수 없는> 또는 <살인마 잭의 집>은 그런 영화 중 하나이다. 또는 윤리적으로 문제시되어 허용되지 않을 영화도 있다. 이를테면 군사정권 아래에서의 검열, 혹은 <살로소돔의 120일>과 같은 역겨움, 이런 판단이 자의적이든 사회적인든 간에 중요한 것은 영화적 허용과 영화의 허용은 다르다는 것이고 나는 이것을 허용되는 어둠과 어둠의 허용에 관한 이야기로 바꾸어 말해보려 한다.


두 가지 어둠이 있다고 나는 말했었다. 그것은 도망쳐온 곳과 도망칠 곳이다. 한쪽은 과거이고 한쪽은 미래이다. 말하자면 영화 속의 유대인들은 그 중간에 머무르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중간지대이다. 공장에서 나온 노동자들은 태블릿 쇼트 안에 갇혀서 어디로도 갈 수가 없다. 동쪽은 위험해요. 하지만 나라면 서쪽으로도 가지 않겠어요. 라고 말하는 소련군 병사의 말에는 이곳이야말로 중립지대이며 동시에 그들은 이곳을 떠날 수가 없다는 지박령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요컨대, 나라 잃은 민족은 나라를 잃은 채로 정박될 수밖에 없다고 나치의 잔상이 말한다. 나치는 사라졌지만 나치가 남긴 어둠은 여전히 유럽을 잠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영화의 말머리에 제시될 때, 이 영화는 결코 끝나지 않았음을 우리는 잘 알게 된다.





img_20130115070448_9a9811da.jpg?type=w966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한 장면 © 유니버설 스튜디오




붉은 현실의 붉은 속살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오즈랜드로의 출구는 무엇이고 입구는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이 영화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이미지인 붉은 코트를 입은 소녀라고 생각한다. 영화 포스터에도 그려진 이 소녀는 흑백인 이 영화에서 갑작스레 등장한 칼라인데, 흑백으로 표시된 군중 사이에 붉은 소녀가 포착되는 장면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깝다. 그야말로 시선 강탈, 이 신묘한 존재는 실화를 다룬 이 영화가 갑작스럽게 허구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물론 영화는 허구의 물질이다 그러나 다루는 소재는 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의 진실성에 대해 자꾸만 되묻게 된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에 대한 물음은 이것이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고 가정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말하자면 처음부터 허구임을 표방하는 일반적인 영화의 경우에는 아무리 현실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허구라는 인식이 관객의 머릿속에 박혀있다. 그러므로 흑백처리를 통해 과거의 사실에 대한 슬픔을 경감하는 동시에 이곳이 과거의 ‘현실’이라는 점을 말해주는 이 영화에서 갑작스럽게 침투해온 칼라의 존재란 갈라진 현실 속에 드러나 보인 슬픈 꿈, 비극 속에 담긴 작은 희망처럼 보인다.


우리는 영화가 가면을 쓴 존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명백하게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가면을 쓴 존재 즉 현실의 배면에 달라붙은 기생적 존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현실을 직시하는 게 아니라 거짓된 삶을 연기하는 인조 생명체가 되어버린다. 정리하자면 나는 이 영화에서 갑작스레 침투한 소녀의 모습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응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붉은 코트를 입은 소녀는 건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남성의 시선을 따라 관객에게로 주입되는데,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기에 그 시선은 끊김 없이 지속된다. 요컨대 이 카메라의 구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이 남성이 아래쪽에 있었다면 그 소녀는 우리의 눈에 들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일 테다. 즉 그곳에 동화되었기에 보이지 않던 풍경은 오히려 그들보다 상위의 존재 혹은 별도의 장소에 있는 자에게만 열리게 된다. 이런 고저차가 개인의 선악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시점의 문제만큼은 말해줄 수 있을 테다.


현실의 배면에 거짓된 삶이 있는 게 아니라, 현실 속에 환상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오즈랜드가 캔자스의 반대항으로 설립된 게 아니라 도로시가 만들어낸 균열된 삶 속 환상이라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어둠의 반대는 빛이 아니라 어둠 속에 빛이 있다는 점이 밝혀지는 것은 영화의 막바지에서 유대인 랍비가 간결히 기도하는 장면에서다. 흑백 속에 칼라가 침투하는 장면들이라는 점에서는 칼라로 시작해 칼라로 끝나는 이 영화의 형식에 대해 물음을 던져볼 수 있을 테다. 칼라에서 흑백으로의 전환이 현재에서 과거로 들어가는 절단선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완벽하게 분리된 세계일까? 이런 식의 해석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이 영화가 현재가 품은 과거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현실의 속살이자 핏물이다.





2019013016290669612_l.jpg?type=w966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한 장면 © 유니버설 스튜디오




두 가지 오즈랜드


나는 이 영화의 편집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 두 가지 색깔이 명확하게 단절되는 게 현실과 과거의 구분을 지을 수는 있어도 담론의 연속성 혹은 비극의 동시대성을 강조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일렁이는 것처럼 보이는 독일의 표현주의가 욕망의 산물인지 아니면 목마른 이의 신기루인지를 구분 짓는 것은 캔자스의 도로시가 도달한 미국의 속살 ‘오즈랜드’를 논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이 영화에서 오즈랜드로의 진입장치로 설계된 붉은 코트를 입은 소녀는 영화의 3/2 지점에서 사망한 상태로 목격되기 때문이다.


장장 3시간여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소녀는 삶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발견되는데, 쉰들러가 본격적으로 유대인을 위하게 된 것은 소녀의 죽음을 목격하고 난 직후이다. 쉽게 말해 이 영화에서 붉은 소녀의 존재는 영화의 초반과 결말에서 제시되는 칼라라는 절단선과 더불어서 관객에게 서사를 쉽게 이해시키려는 장치에 해당한다. 상업영화로서는 분명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다시 나오는 구조가 아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나오는 것은 이 영화 밖에 자리한 우리인데, 우리의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의 관람 즉 영화관 객석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는 형태이다. 그렇다면 이 위에서 아래로의 시선은 영화에서 노동자를 내려다보는 쉰들러의 시선에 대응하며, 쉰들러의 시선이 그들을 유대인 노동자에서 유대’인()’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나는 영화가 우리로 하여금 유대인을 노동자로 여기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게 틀린 말은 아니다. 적어도 영화의 배경인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그러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과거와의 현재로의 출입구를 모두 만들어놓았다. 그러므로 그 노동자 이미지는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가 영화를 보다 보면 그 노동자는 종전과 함께 해방되어 흑백화면에서 사라지고, 화면이 칼라로 바뀔 때 그 자리에 그대로 배치된다 (페이드인). 요컨대 이 영화는 편집을 통해 흑백을 칼라로 계승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렇다면 영화 초반은 칼라인 것의 과거 즉 ‘속살’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호평하는 지점이 바로 이것으로, 영화 속의 비극은 현실의 반대항이 아닌 현실 속의 어딘가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환상의 나라가 아닌, 현실 속의 환상으로 제시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불그스름한 현실의 잔해라고 <쉰들러 리스트>는 말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두 가지 오즈랜드를 설정한 후에 그 가운데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드러난 독일 표현주의라는 오즈랜드는 스크린 속에 있다. 그런데 이때 다른 한쪽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공장을 나선 노동자들이 향한 곳은 갑자기 점프하여 먼 미래의 칼라 즉 현재로 바뀌게 되는데, 이 현재에는 도로시의 염원으로 탄생한 현실 속의 낙원인 오즈랜드가 ‘존재한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다. 즉 이 영화의 내용에는 유대인 학살이 자리하고 그것이 현실 속의 진실인 것도 맞지만, 그 진실을 지지하는 양쪽 다리는 한쪽은 나치 다른 한쪽은 이스라엘이라는 점은 그리 탐탁지가 않다. 적어도 이스라엘의 현주소가 팔레스타인 문제와 면밀히 연루되어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에 대한 비판이 어떻게 제기되고 있는지를 떠올려 본다면, 자칫하면 그들의 과거와 현재가 엮여버릴 위험이 있다. 무엇보다 과거와 현실을 분리해놓은 듯한 연출은 그런 대비를 더욱 선명하게 한다. 누군가의 목소리는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데, 왜 그에 핍박받는 이들의 목소리는 현재로 전해지지 않는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다. 그들의 과거와 현재는 명백히 분리된 사실이지만 그들의 현재는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차라리 두 가지 오즈랜드, 그 두 가지를 연쇄했다면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의 제목에 맞게 그 덕분에 살아남은 천백 명의 사람들 그리고 그 후손이라는 이미지에 더욱 부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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