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2017)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 소개되어 연으로만 2년을 늦게 개봉한 이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요즘 한국사회의 상황과 잘 어울리는 듯 보인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영화의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라는 이름은 미세먼지에 뒤덮인 한국의 까만 하늘과 대비되기 때문이다. 도쿄의 하늘을 파란데, 한국의 하늘은 까맣다는 점에서 이 영화에 관심이 가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것 같다. 물론 이 영화는 미세먼지와 별 관련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영화 속의 화장터가 하늘에 흩뿌리는 유골조각이 그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어떤 면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관련이 있기도 하다.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게 그런 연관성이다.
현대 영화 속의 어떤 황무지
미세먼지에 끌려 접하게 된 이 영화에서 의외의 동질성을 발견하게 됨은 우리에게 소소한 기쁨을 준다. 엄밀하게 말해, 이 영화에서 우리가 찾아내는 것은 도시의 동질성이 아니라 삶의 동질성이다. 영화가 다루는 것은 두 사람의 연애 혹은 그들이 원하는 삶의 방식인데, 그들에겐 요즘의 한국사람들이 겪는 사회문제가 동일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계 어디를 가나 비슷한 풍경이 그곳에 있고, 우리 또한 세계의 일부이기에 그 풍경에서 기시감을 겪는다. 노인의 고독사 문제, 연애를 기피하는 젊은이들의 모습, 도시를 노래하는 인디 가수의 목소리까지. 거리를 떠도는 유기견을 두고 안락사가 될 것이라고 윽박지르는 여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거리를 떠도는 그들 스스로가 안락사를 원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발견한다. 요컨대, 젊은이들에게 도시는 그들이 태어난 곳이면서도 떠나가고 싶은 어떤 장소인 셈이다. 왜 떠나야 하는가. 그 유기견처럼 그곳은 사는 게 삶답지 않기 때문이다. 비싼 월세 혹은 밀집된 유동인구 덕분에 쉴 새 없이 어깨를 부딪치는 마천루 속의 전장이기 때문이다.
그 삶의 방식은 도쿄라는 공간 안에 맞추어진 것처럼 보인다. 거시적으로 보면 도쿄라는 특정 지명이 아닌, 도쿄라는 천만 인구의 대도시일 테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라면 느낄 만국 공통의 쓸쓸함이 담겨있다. 태어나는 아이는 적고 늙어가는 사람은 많다. 그렇다면 그사이에 낀 젊은이들에겐 어떤 삶이 주어지는가. 아래로의 부양, 위로의 부양, 디딜 곳도 나아갈 곳도 없는 현대 사회의 어떤 도시 풍경은 한국의 서울, 그 천만 인구가 천만 인구의 도쿄에 대응할 수 있는 주된 원인 중 하나일 테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화를 보며 던질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이게 과연 도쿄에서 벌어지는 일인 걸까? 이에 대한 부산국제영화제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낮에는 간호사, 밤에는 바 매니저인 미카(이시바시 시즈카)와 공사판에서 일하는 신지(이케마츠 소스케)는, 불안해하면서도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도쿄를 배경으로 희망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사랑과 좌절을 감각적으로 담아낸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설명을 이렇게 고쳐 쓴다. “…를 배경으로 희망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 앞의 문장을 이렇게 고쳐 써야 하는 것은 희망 없는 세상을 피해 세계를 떠돌지만, 결국에는 세계 어디를 가나 같은 현상 혹은 풍경을 목격하는 젊은이의 세계 일주가 몹시 흔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건대, 요즘 시대의 젊은이들이 세계 여행을 꿈꾸는 것은 단순히 견문을 넓히기 위함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를 가나 사람 사는 이야기는 똑같다는 점으로 위안을 얻으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들의 세계 일주는 1910년대쯤 태어난 미국의 서부영화 플롯의 현대적 변형이다. 전통적인 서부 영화에서, 주인공 총잡이는 홀연히 마을에 와 문제를 해결하고는 다시금 갈 길을 떠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유 없는 영웅과 이유 없는 악인이라는 이유 없음의 양 극단이지만, 그 영웅의 시야에는 항상 비슷한 문제를 품고 살아가는 대지만이 있을 테다. 예를 들어, 시리즈 물로 나오는 어느 서부영화에서 주인공과 국가는 동일한데 악당은 늘 바뀐다. 그러니까 영웅의 시점으로는 이 나라에는 비슷한 종류의 악인이 늘 있는 것이고, 뿌리가 근절되지 않는 것이고,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서부의 황량한 사막만이 보이는 것일 테다.
이 황무지는 마치 유황으로 가득 찬 지옥처럼, 빽빽한 연기에 가득 찬 악인들을 쏟아낸다. 바람을 타고 구르는 것은 사막 위의 회전초뿐만이 아니다. 모래 먼지가 일렁이는 황무지에서 영웅이 목격하는 것은 안갯속의 악인, 이에 대한 현대적 불안의 시초는 테렌스 멜릭의 <황무지>에서 찾을 수 있을 테고, 그 배경이 뿌연 스모그로 가득 찬 도시로 치환된 것처럼 보이는 게 이 영화의 도쿄이다. 스모그가 아니더라도 불안으로 가득 차서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공포는 <미스트>나 <사일런트 힐>과 같은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까 서부영화에서 시작한 할리우드 영화 속에는 서부 영화 속의 어떤 불안이 유전자 형태로 내려오고 있는 셈이고, 그 먼 친척에 해당하는 동아시아의 현대 영화는, 황무지의 황랑함은 그 위에 마천루가 세워졌다 하더라도 아직 가시지 않았다고 말하는 셈이다.
일본의 50년대에 구로사와 아키라가 서부 영화를 본떠 만든 자신만의 플롯이 있었다. <요짐보>라는 영화가 있었고, 이 영화에서 실력 좋은 한 무사는 두 갱단의 싸움으로 겁에 질린 마을을 구원하기 위해 ‘요짐보’를 자청한다. 여기서 요짐보란 돈을 받고 어느 편에도 서는 경호원 개념인데, 그는 자신의 실력에 반한 양쪽 진영을 오가면서 서로를 이간질하고 끝내 파멸시킨다. 중요한 점은 일본에 서부영화 플롯이 들어왔다는 게 아니라,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다. 무신 사회에서 출발한 일본의 근대화가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이어졌던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듯, 갈곳 잃은 총잡이가 세상을 떠도는 서부영화의 플롯은 주군을 잃은 사무라이가 세상을 떠도는 ‘무사영화’로 변형되기에 충분했다.
이 맥락에서 특기할 점은 세상을 떠도는 이와 그에 남겨진 이들이라는 두 가지 구도가 일본 영화에서 충실히 이행되었다는 점이다. 집안에서 가족을 지키는 가족영화의 계보가 있고, 집 밖에서 또 다른 집(주로 공동체)을 지키는 사무라이 영화의 계보가 있었다. 비유하자면 성안과 성밖의 사람들이랄까. 결과적으로, 크고 작은 공동체를 지킨다는 점에서 무사 정신(=신념)은 굳건했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 우드의 <그랜토리노>를 보면 알 수 있듯 영웅이 필요한 시대는 지났고, 오히려 그런 영웅은 과거에 썩어가는 게 요즘 세상이다. 서부 영화 계보의 한 축을 담당하던 클린트 이스트우드 본인이 그런 영화를 찍을 정도라면 여기서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본 사무라이 영화의 계보는 자신이 섬기는 주인에서 자신이 믿는 신념으로 플롯이 변화했고, 그런 신념이 짐 자무시의 <고스트 독>에서 발견된다면, 이제는 신념조차 부질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모든 것이 화장되어 화장터 굴뚝 위의 연기로 무화되어버리는 게 요즘 시대라고 <도쿄의 밤하늘>은 말한다.
떠도는 죽음과 굴뚝 위의 풍경
만약 당신이 이 영화에서 도시를 떠도는 유기견과 그 이미지가 굴뚝 위의 풍경으로 연쇄되는 것을 목격한다면, 유기견은 끌려가서 죽임당할 뿐이라는 미카의 말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에 부응하듯 영화는 현실이 아닌 애니메이션의 힘을 빌려 유기견의 죽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애니메이션의 역할은 아마도 그 유기견이 하늘에 뿌려지기 전 잠시 머무는 죽음의 쉼터일 것인데, 살포시 벗겨지는 살끝을 보고 있노라면 곧이어 하얀 뼈대가 드러나고, 영화는 그 위에 화장터의 굴뚝과 흩뿌리는 재를 보여준다. 이때 그 잿더미는 마치 눈처럼 보인다. 비유하자면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보이는 게 이 쇼트의 모습이다. 다시 말해서 이 쇼트에는 허진호의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우리가 보았던 감정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 혹은 어느 생명의 죽음에서 촉발된 8월의 크리스마스는 이벤트가 아니라 이상 현상에 해당한다. 도심에 찾아온 미세먼지의 폭풍에 가린 마천루처럼, 여름에서 가을 사이의 어딘가인 이 영화에는 눈이 내릴 구석이 없다. 그러니까 사실 이 뼛가루를 이념적으로 생각해본다면 그 도시에는 (그들 말처럼) 죽음이 서려 있는 것이고, 언제 찾아와도 별로 이상하지 않은, 그렇게도 익숙한 현상일 테다. 이것은 어쩌면 죽음이 삶 속에 늘 도사리고 있다는 철학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들 삶에 이미 죽음이 찾아와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이 영화에서의 죽음은 이미 특정한 논점으로 언급될 사항이 아니라, 갑작스레 찾아온 안개나 눈처럼 자연이 선사하는 어떤 풍경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죽음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이 영화에서 표면으로 드러나는 죽음의 이미지는 희망이라는 단어로 치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 관한 단상 첫 번째는 영화가 젊은이들의 사랑을 다루는 듯하면서도 사랑 혹은 섹스를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러나온다. 예를 들어, 두 남녀의 전 애인이 그들에게 찾아오거나, 혹은 남자와 공사판 동료들이 걸즈바 (유흥업의 일종으로, 한국의 옛 다방과 비슷하나 바 형태로 술을 판매한다는 점에서 다르다)에 들르는 모습이 언급되면서도 섹스 장면은 포착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연애담을 다루는 듯 보인다 허나 섹스는 보여주지 않는다. 카메라는 항상 남녀가 동침하는 분위기에서 커트를 도려내어 버린다. 그러니까 서사적으로는 동침했어도 쇼트 상으로는 동침하지 않은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때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서사와 쇼트가 분리되어있다는 점이고, 존재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다는 점에서 남자 주인공 신지의 외눈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신지는 한쪽 눈이 멀었다. 그래서 한쪽으로만 세상을 본다. 영화에서 신지는 그 사실을 숨기지도 않지만 먼저 말하지도 않는다. 타인이 알아차리면 그제서 이야기해주고는 한다. 이때 분명한 사실은 신지에게는 존재하면서도 보지 못하는 세상이 항상 있다는 점이다. 한쪽 눈이 세상을 보는 반면, 다른 한쪽은 세상을 보지 못한다. 요컨대 신지에게는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이 한자리에 공존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숨겨진 세상과 실존하는 세상이 한자리에 모인다. 이런 모습은 마치 카메라와 신지의 공통점이 외눈이라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카메라가 포착하는 것은 한쪽으로 보는 한쪽 세상이고, 나머지 현실은 스크린의 밖에 있다. 마찬가지로 신지의 한쪽 눈이 보는 세상이 있다면, 다른 한쪽 눈은 스크린의 밖에 대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자리에 무언가를 대입하기는 몹시 쉽다. 두 가지 세계가 한 자리에 공존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과거와 현재를 집합하는 눈일 수도 있고, 이것은 카메라의 역할이자 지난 삶을 성찰하는 것이기도 하고, 현재를 있게 한 아버지 세대까지 어우르는 젊은이들의 고뇌 혹은 한탄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 자체로만 의미를 축약하자면 이것은 과거의 사랑과 현재의 사랑을 겹쳐 떠올리는 모노 아이일 것이다. 서부 영화로 보면 떠나간 영웅을 현재에 기리는 모습일 테고, 가족 영화로 보면 떠나간 가족을 기리는 현재의 삶일 테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섹스를 비롯한 연애처럼 본능에 충실한 삶이 있는 반면, 사회로 나가서 성공해야만 하는 삶이 있기도 하다. 본능과 의무라는 두 가지 갈래, 신지의 경우에는 공사판에서 하루 번 돈으로 걸즈바에 가서 화포를 풀면 돈이 모두 사라진다. 반면, 미카의 경우에는 낮에 일하는 간호사 월급으로는 생계를 꾸리기 부족해 밤에는 걸즈바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고는 한다. 그런데 두 사람은 낮과 밤의 서로를 모두 알고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서로 마주할 때 두 가지 세게는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걸즈바 바텐더이자 간호사인 미카와 공사판 인부이자 걸즈바 손님인 신지가 만나고, 두 사람은 서로 과거의 여인에게 연락을 받으면서 현재의 애인이 될 서로에게 연락을 취한다. 전파가 오가고, 사랑이 오가고, 그럼에도 섹스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교접은 일어나지 않는다.
삶의 영역과 생존의 영역
어떻게 보면 일부러 섹스 장면을 피해 가는 영화의 화법은 그 두 가지 세계가 한 자리에 있음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통적인 서양 철학에서 섹스는 곧 죽음과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이었고,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서로의 배면에 있기에 한 사람만 한 자리에 존재할 수 있다. 마치 달처럼, 앞면이 있다면 뒷면을 볼 수 없고 뒷면이 있다면 앞면은 볼 수 없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두 가지를 한 번에 관통하는 행위, 삽입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 삽입은 비단 성적인 것에만 지나지 않고 폭력이라던가 침투라던가 하는 행위, 이를테면 <감각의 제국>처럼 전쟁의 은유일 수도 있고,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처럼 화해와 치유의 메시지일 수도 있다.
요컨대 우리가 해볼 수 있는 상상 혹은 가정은 두 가지 세계는 평행한 것이 아니라 한 자리에 공존하고 있고, 단지 한눈으로만 볼 수 없을 뿐이라는 것이다. 왼쪽 눈의 삶과 오른쪽 눈의 삶이 다르다고 말하는 신지의 모습에서 우리가 찾는 것은 서부 영화에서 그들이 있을 자리, 인디언과 백인의 자리가 확실하다는 것, <수색자>에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소녀의 모습에서 우리가 발견했던 그들의 자리, 두 세계는 정말로 분리된 것일까? 이 맥락에서 우리가 짚어볼 수 있는 건 일본 영화의 어떤 계보는 삶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풍토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초속 5cm>의 1부에서 전차 건널목을 두고 마주한 두 남녀 꼬마는 어린 시절에 헤어진 후 서로의 모습을 품에 안고 살아간다. 그녀가 있는 세계, 그녀가 없는 세계, 이때 남자가 사는 곳은 그녀가 없는 세계이고, 그래서 그녀가 있는 세계는 없는 세계 쪽으로 계속해서 침투해온다. 쉽게 말해, 세상 어디에서나 그녀가 보인다. 어느 노래 구절을 빌리자면, 물컵 속에서도 찻잔 속에서도 그녀는 항상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그 두 가지 세계는 서로 이어지기 전까지 어느 한쪽을 망각할 수 없다는 점이며, 어쩌다 이어진다 하더라도 한쪽 세계에 다른 한쪽이 덧씌워지기만 할 뿐, 완전한 합일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있는 쪽이든 그녀가 없는 쪽이든 결국에는 지옥 같다는 점이다. 젊은이들이 품는 희망이란 게 찬란한 미래에 대한 부푼 마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마 20대와 30대의 주된 관심사인 연애일 테고, 이때 그녀가 없는 세상은 그녀를 만날 수 없기에 지옥이고 그녀가 있는 세상은 그녀를 만날 수 있기에 지옥이다. 연애도 결국 돈이고 시간이고 자원이 소모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것은 거의 진퇴양난 혹은 양자택일에 가깝다. 외로움이라는 본능을 피해 달아나는 것은 고독이라는 질병을 피해, 죽음으로부터 도피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연애를 추구하는 것은 합당하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소모하는 행동보다 돈을 버는 행위에 자원을 투자하는 것도 합리적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행동이고, 그런데도 섹스의 유희에서는 모든 것이 잊힐 수 있으며, 말하자면 섹스란 두 세계의 합일에 해당하고, 안타깝지만 다시금 헤어질 수밖에 없는 게 섹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섹스라는 것은 결국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 삶의 영역과 생존의 영역이라는 두 가지에 걸쳐 논해져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희로서의 섹스가 있고, 처방으로서의 섹스가 있다. 마약의 두가지 얼굴이 쾌락제와 진통제라는 점에서, 섹스라는 것이 무엇일지에 대한 가정은 이 영화에서 몹시 흥미롭게 다가온다. 아마 영화가 그들의 섹스 장면을 부각하지 않은 것은, 육체가 아닌 세계로 눈을 돌려보라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이 도쿄에는 낮과 밤이 있다. 다시 한 번 반복해서, 그 도시에는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다. 이쯤에서 가져오는 달의 은유, 달은 앞과 뒤가 있고 언제나 한쪽으로만 관측된다.
어쩌면 한쪽 눈이 먼 신지에게 세상은 그런 식으로 작용하는 게 아닐까? 그에게는 오른쪽 눈의 삶만이 존재하고, 지나온 과거는 왼쪽 눈과 함께 멀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과거란 이미 돌아올 수 없고, 미련 따위 없을 수 있었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 것은 이 도시에 과거라는 이름의 망령이 줄곧 떠돌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곧 죽을 거야 라고 저주받은 유기견은 조금 지나서 화장터의 잿더미로 변해버리게 된다. 요컨대 이 잿더미가 하늘에 뿌려지는 순간은 그들이 과거에 마주했던 강아지가 죽음의 형태로 하늘에 흩뿌려지는 것일 테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해 죽음을 보는 신지의 왼쪽 눈, 그 과거는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눈은 멀었고, 그러나 눈이 멂과 동시에 그는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원치 않는 시각, 원치 않게 죽음을 본다는 것, 원치 않게 과거를 목격한다는 것에 대한 주술에서 벗어난 신지가 똑똑한 머리로 공사판을 떠돌게 된 건 아마 자신이 살아온 길을 망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떠나온 길을 모르면, 나아갈 길도 알 수 없다는 것이 나의 대답이고, 이 영화에서 과거를 잃은 신지에게 미래를 선사하는 것은 여기서 만난 미카일 테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어느 한쪽씩 없는 거고, 양쪽을 합쳐 하나가 되는 것이고, 그 끝에는 아마 섹스가 있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여러 이름과 추억으로 지칭되는 도시
그에 대한 영화의 마지막 해석은 다음과 같다. 두 남녀가 한 방에 모여 창밖을 바라본다. 이때 창밖에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의 하늘로 관측되는, <도쿄의 밤하늘>이 있고 색상은 늘 푸르다. 그리고 다음 쇼트는 타오르는 촛불과 꺼진 담뱃재떨이를 한 구도에 잡는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7인의 사무라이>에서 사용했듯 이 촛불은 불타오르는 정열, 사랑, 혹은 섹스. 그렇다면 그 안의 담뱃재떨이는 식어버린 사랑, 섹스 뒤의 허탈감일 테다. 그런데 그렇게 시간이 타임랩스 형태로 지나고 새벽이 밝아오면 두 남녀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벽에 기대어 앉아있다. 이때 우리가 해볼 수 있는 아주 단순한 추측은 두 사람이 섹스했을지 하지 않았을지라는 번식 행위에 관한 것일 테고, 사랑 영화의 끝자락에 겨우 마음이 닿은 두 남녀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기에, 이 추론은 합당하다. 하지만 영화가 제시하는 것은 그 섹스 이외의 무언가인 것 같다. 이 영화의 결말에서 두 남녀가 새벽을 지새우고 나면, 카메라의 구도가 살짝 틀어져서 재떨이와 촛불 옆에 있던 화분을 지긋이 바라보게 된다. 이때 그 화분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에 대한 대답은 주관적이겠지만, 적어도 촛불과 재떨이 이외의 무언가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니까, 양쪽 눈의 두 세계가 하나로 합쳐졌다는 것, 또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이제는 하나의 삶이 되었다는 것, 미카의 말대로 그들은 누군가의 전 여자친구이자 전 남자친구였지만 어찌 됐든 지금 이 순간에는 서로의 연인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결국 이 삶의 형태를 그들이 사는 공간에 대입하면 여러 이름과 추억으로 지칭되는 이 도시에는 특정한 죽음이나 사랑과 같은 형태가 지정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영화의 제목이 내용과 반대된다는 점이다. 도쿄의 밤하늘이 항상 파랗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때,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빨갛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게 곧 사람의 삶이라면 내 삶은 항상 이럴 뿐이라고 말하는 단정법으로서의 슬픈 삶일 테다. 그래서 그들은 거리의 인디가수를 보며 절대 성공하지 못할 것 같다고 단정한다. 그런데 그 가수는 영화의 말미에 갑작스레 성공해버린다. 그 모습은 자동차 겉면의 홍보플랜카드 형태로 툭 튀어나온다. 다시 말해, 알 수 없는 삶이 그들 앞에 제시되었다. 그렇다면 영화 결말의 바로 전 쇼트인 이 장면이 영화에 삽입된 것은 사랑을 망설이던 두 남녀가 사랑을 결심하게 된 주요한 동인이었던 게 아닐까.
“곧 10월인데 도쿄의 기온은 내려가지 않는다”라는 작중의 대사가 도쿄의 이상고온 혹은 범지구적인 이상기온 현상을 지적하는 것이라면, 내 생각에 그것은 비정상적인 사랑의 온도이기도 한 것 같다. 도시가 달아오르면 사랑 또한 달아오른다. 더우면 벗어야 하고 벗는 것은 사랑을 위한 준비단계에 해당한다. 하지만 여기서 사랑의 배면인 죽음을 불러온다면, 장례 절차에서도 시체의 옷을 벗기는 건 필수절차이다. 여기서 소환하는 다른 영화의 한 쇼트는 <큐브>에서 사망이 예정된 두 남녀가 열렬히 섹스하다가 그대로 말라버리는 상황이다. 무중력 공간을 둥둥 떠다니는 교접된 남녀 미라, 이것이 사랑과 죽음의 열렬한 지지표시라면 그 두가지 갈림길은 이웃집 노인의 죽음과 동료 공사장 인부의 죽음이라는 양 갈래로 나타난다. 하나는 사랑하는 이의 지지 아래에 죽었고, 다른 하나는 독거 노인이라는 이름의 슬픈 현대 사회의 단면이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도쿄의 하늘은 항상 푸른색이 아니다. 어느 날엔 미세먼지가 자욱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미세먼지가 사실은 화장터에서 뿌려진 삶의 잔존물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삶은 무엇이었고, 그 삶이 여러 형태의 다른 이름으로 지칭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이름과 추억으로 지칭되는 이 도시는 하나의 모습만이 있는 게 아니다. 낮과 밤이라는 두 가지 세계는 지구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늘 계속될 것이다. 그러니까 낮과 밤은 한 자리에 있지 않으면서도 지구라는 하나의 공간을 경유하는 주제이다. 그 주제, 낮에 담긴 것은 노동의 자리, 밤에 담긴 것은 본능의 자리. 같은 직장을 다니는 커플이라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밤일한다. 하지만 사내연애가 늘 그렇듯 그 두 가지는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하기 마련이다.
무언가 우스운 비유지만 이것을 이렇게 바꾸어 본다면 어떨까. 여러 이름으로 살아온 개인이 우연한 기회에 타자와 결합하게 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이 자리에는 우연성의 필연성이라는 테마의 연애 영화가 자리한다. 너를 만난 건 운명이었어, 또는 지금 이 자리에 너와 함께 있어. 하지만 필연성의 우연성이라는 형태 또한 사랑이 될 수 있다고 이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라는 말은 살다 보니 죽어버렸네요. 라고 망자가 말하는 과거 한탄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두 남녀가 다른 커플을 보며 그들의 현재가 아닌 과거를 지칭하는 과정에는 지금 주위를 둘러보니 그 커플들이 이곳에 있었다는 현재형의 시각이 담겨있는 셈이고, 우리는 그들이 현재에 바라볼 두 가지 세계 중 어느 곳을 보고 있을지에 대한 상상을 해볼 수 있을 테다. 그녀는 누구를 보는 걸까. 저 커플의 남자? 여자? 다시 한번 반복하자면, 그들은 이 도시의 어떤 면을 보고, 느끼고, 말하면서 살아가는 걸까. 이 도시는 무엇일까. 도쿄, 혹은 서울. 젊은 청춘이 살아가는 방식에는 정답이 없지만, 정답이 없기에 혼란을 겪는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찾는 구원의 한 방식은 한쪽 눈이 멀어버린 청년 신지다. 말이 많은데 정작 영양가는 하나도 없다고 구박받기 일쑤인 신지에게 그녀가 건넨 한마디가 이 영화를 풀어나가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 것 같다. 그는 생각을 많이 하고 살기에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거다. 이 삶을 공간의 방식으로 번역, 그 도시에는 많은 삶이 있기에 소란스러워지는 거다. 그래서 천만 명만큼의 죽음이 있는 거고, 천만 명분의 희망이 있는 거고, 그 속에서 우리는 영화 속의 노랫말처럼 그저 힘을 내며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fVaz9UyikH4&start_radio=1&list=RDfVaz9UyikH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