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면을 이곳에 불러오는 신묘한 힘

<사울의 아들>(2015)

by 수차미



<사울의 아들>에는 근경이 없다. 영화는 주로 롱테이크를 사용하는데, 화면 안에서 인물이 나가고 들어올 동안 초점이 일정하게 유지된다. 이를테면 카메라 앞에 서 있던 인물이 화면 밖으로 나가고 나서도 초점은 여전히 앞에 있다. 이때 카메라 뒷면은 흐릿한 채로 남겨지며, 이런 모습은 마치 하나의 화면에 두 가지 세상이 들어앉은 듯 보인다. 즉 이것은 배면이 한자리에 모이는 형상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의 카메라는 현실에 있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우리는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이 카메라에 주목해야 한다. 아우슈비츠라는 역사적 사실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고, 그런 현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배면을 이곳에 불러오는 신묘한 힘에 대해 우리는 알아보아야 한다.


영화 <사울의 아들>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역사라는 터널


<사울의 아들>은 아우슈비츠에서 일하는 존더코만도 인부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 이름은 사울(게자 뢰리히), 여기서 존더코만도란 시체를 치우는 유대인 노동자를 지칭한다. 매일 같이 죽어 나가는 시체들을 보고 있으면 미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래서 그들은 일종의 특혜를 받는다. 주로 술과 담배를 공급받는데, 짐작하다시피 이것들은 항정신성 제품군이다. 술을 하지 않으면 미칠 것이고, 담배를 태우지 않으면 자신이 타게 될 것이다. 요컨대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술은 시체들의 피요, 담배는 인부들의 한탄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다.


시체에는 피가 없다. 핏빛이 가신 육체는 그저 하얗기만 할 뿐, 어쩌면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피는 포도주 육체는 빵’이라는 말의 안티테제로 작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피는 포도주 즉 술이다. 그러니까 존더코만도는 시체들의 피를 뽑아내어 마시는 것이고, 그런데 그 피는 시체를 치우기 위해 먹는 것이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두 문장 사이의 조합이다. 이제 그걸 실행해보자. 존더코만도는 시체를 (치우기) 위해 술을 마시는데, 그 술은 시체들의 피다. 눈치챘겠지만 그 술이 어떤 방식으로 옮겨졌는지에 대한 중간과정이 생략되어있다.


그 중간과정에는 나치가 있다. 이 사실은 영화 속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양측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근경과 후경이라는 두 가지 세상이 분리되어 있다. 즉 중간이 없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늘 하나의 초점만이 있고, 그것은 근경이거나 후경일 뿐 중간지점을 응시하지는 않는다. 요컨대 이 중간지점의 ‘없음’은 근경과 후경이 일종의 입구와 출구로 작용하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터널처럼, 가까운 곳의 입구와 먼 곳의 출구만이 있는 듯 보인다.


다시금 첫 문단으로 돌아가서 카메라의 화법을 지적하면, 근경의 인물을 응시하던 카메라는 인물이 사라지고 나서도 여전히 근경을 응시한다. 이때 후경은 초점이 흐릿하므로 가려진다. 다시 말해서, 입구는 여전히 그곳에 있고 출구는 여전히 멀다. 이것을 터널로 본다면, 그 가려진 어둠에는 나치가 있을 테고, 그것이 가려진 이유를 따져 물으면 ‘어둡다’고만 말할 수 있게 된다. 왜 어두운가? 나치가 존재했던 2차 세계대전 시기는 ‘어둡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블라인드(어둡게)’ 처리된 이유는 무엇인가? 너무 잔혹해서인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영화가 선택한 것이 침묵임을 알게 된다. 터널 속에서 불을 밝히는 것은 태양이 아니라 성냥이다. 쉽게 말해 그 어둠은 아무리 애를 써도 걷히지 않는 짙은 안개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코 시대를 외면하는 것이 될 수 없다. 눈을 감은 게 아니라, 나치라는 시대(터널)에 던져진 이들이 시간을 타고 뒤에서 앞으로밖에 나아갈 수 없는, 선형적 흐름의 터널이므로 그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는 단지 숨을 참는 것밖에 할 수 없을 테다.


영화 <사울의 아들>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숨을 참는 이들, 존더코만도


그들은 숨을 참는다. 이 영화의 포스터에서도 알 수 있듯, 사울의 대표적 이미지는 마스크를 쓴 채 이쪽을 응시하는 것이다. 미세먼지에 찌든 요즘 한국 상황에서는 무언가를 걸러낸다는 의미가 더 강할 테고, 시대적인 흐름으로 보면 침묵한다는 것이 더 두드러진다. 두말하지 않아도 마스크란 침묵이라는 항의의 표시로 자주 사용되고는 한다. 결국 우리가 이 영화에서 찾아내는 건 마스크에 담긴 두 가지 이미지가 한 자리에 모이는 현상이다. 어떤 현상인가 하면, 산 자와 죽은 자라는 두 가지 이분법 속의 하나의 인종이다. 하나인데 어떻게 둘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면 우리는 이 영화의 카메라를 떠올릴 것이고, 딥포커스(Deep focus)라는 카메라 기법이 반대로 작용하는 모습에서 초점이 분할됨을 목격한다. 즉 여러 시야를 한곳에 모으는 게 아니라, 하나의 시야를 두 갈래로 분할한다. 그리고 그 분할된 것 사이에는 영화가 가리고자 하는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게 된다. 정말로 가려졌는가? 가려지지 않았다. 영화가 의도하는 건, 가리려 해도 가려지지 않는 하늘이다. 즉 역사의 거대함이다. 혹은 비극의 거대함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 아무리 애를 써도 가릴 수 없는 하늘이 이곳에 있다. 그게 바로 역사다. 나치가 벌인 학살극이고, 이때 그 학살극을 대변하는 것은 존더코만도와 시체소각장이다. 시체소각장에서 뿜어나오는 연기가 하늘로 승천할 때, 그 연기는 결코 하늘 전체를 뒤덮지 못한다. 그들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에서 눈앞으로 가려지는 육신은 있어도, 형태가 없는 것들은 화면을 덮지 못한다. 신음이든 비명이든, 안개 또한 마찬가지다. 그 뿌연 안개가 누군가의 눈물이 눈앞을 가리는 모습에 비견될 수 있다면, 가려지지 않는 시야는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는, 혹은 그런 와중에도 깨어있어야 한다는 피식자의 슬픔이기도 하다.



영화 <사울의 아들>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연기와 신음, 불타는 고통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들


형태가 없는 것들, 신음과 비명 그리고 안개. 여기서 그 두 가지 단어들의 이미지는 분명 유사하다. 유대인 희생자의 시체가 소각로에 던져지는 장면에서, 사울을 비롯한 존더코만도 일원은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러니까 소각로 밖으로 뛰쳐나오는 연기들에는 그런 한숨이 섞여 있는 듯 보인다. 요컨대 이 장면에서 그들의 입은 소각로의 이글거림에 대응한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입에는 시체가 들어가고 연기만이 나오는데, 이것을 이른바 ‘육체의 죽음’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침묵한다. 수용소라는 장소가 그렇게 만들었다. 즉 언어는 죽었다. 그래서 육체만이 남는다. 그런데 그 소각로는 육체의 죽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연기만이 빠져나온다. 이때 우리가 생각해보는 건 그 연기가 그들의 언어, 잃어버린 말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더 나아가면 그 말은 뿌옇고 흐릿해서 금세 하늘로 흩어져버리니, 그들의 언어 또한 그럴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그야말로 이것은 아우슈비츠라는 장소가 어떤 곳인지를 잘 보여주는 셈이다.


영화에서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다. 늘 감시 속에 둘러싸인 그들은 뒷말을 흐리고는 한다. 굳이 다 말하지 않아도 말이 통하기도 하고, 그걸 다 말해서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다시피 이 영화가 근경과 후경을 명확하게 나누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한 장소에 펼쳐진 두 개의 세상이다. 예를 들어 뒷말이 흐려지는 것은 앞말만이 살아있다는 것, 앞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걸 뜻한다. 앞쪽에만 초점이 있고, 뒤쪽에는 초점이 없으니 두 가지 세계는 분리된다. 즉 카메라의 응시가 언어로 옮겨간다.


뒷말을 잃은 언어, 뒤쪽을 잃은 카메라, 이 두 가지 사실을 하나로 규합할 때 영화는 양쪽 세계를 한 자리에 불러모은다. 청각과 시각, 그 두 가지가 하나로 뭉쳐질 때 그것은 신체가 되고 발화가 된다. 쉽게 말해 그 신체에서 터져나오는 언어는 일종의 터널에 해당한다. 목구멍 아래에서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는 과정에는 식도가 있고, 그 식도가 터널 속의 어둠인 것이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의 시선은 있고 청각이 없는 이유는 이 대목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배경음악이 일절 사용되지 않는 이 영화에는 불타는 소리와 인부들의 작업 소리로만 가득하다. 이른바 침묵만이 존재하는데, 그게 입술 밖으로 소리가 나오기 전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 영화가 목구멍 아래와 입안 어딘가를 맴돌고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이 있다면 이 영화는 배면을 하나로 불러모으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정확하게는 배면이 아니라 하나의 면이다. 터널을 중심으로 입구와 출구가 서로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배면이 될 수는 있겠지만, 터널을 차단막이 아닌 통로로 여긴다면 그것은 하나의 세상이 된다. 쉽게 말해 그 터널을 뚫을 수 없는 어둠으로 여기지 않고, 언젠가 빛을 볼 절망 속의 희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사울의 아들>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익명, 이름이 없는 것, 미지의 수 X


식도를 중심으로 이어진 몸과 입은 이것이 신체의 세계와 언어의 세계임을 보여준다. 신체의 세계는 죽음이 지배하는 장소이고, 언어의 세계는 침묵이 지배하는 장소이다. 사실 이 두 가지 장소는 침묵/죽음이라는 한 가지 성질의 두 가지 면모, 즉 배면적인 의미를 떠오르게 한다. 죽음은 곧 침묵이다. 또는 침묵은 곧 죽음이다. 여기서 전자는 신체적인 의미의 죽음이고 후자는 사회적 의미에서의 죽음이다. 불의를 보고도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게 침묵이다. 또는, 죽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므로 일단 지금은 침묵하는 게 맞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관점에 따라 그 단어의 성격은 정반대로 뒤집히게 된다.


이를테면 존더코만도의 등짝에 가려진 X 표시는 죽이지 말아야 할 사람을 표시한 것이자, 4개월 동안만 사용하고 버려진다는 표적 표시이기도 하다. 이 X 표시는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뜻하는 동시에, 제거되어야 함을 뜻하기도 한다. 즉 이것은 어떤 것의 결말로 제시되는 X이다. 세상의 끝, 언어의 끝, 막혀버린 입 구멍 혹은 삶의 마지막 자리. 미지의 수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X가 미지의 세계인 죽음 혹은 항명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것은 어딘가로의 통로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통로가 바로 신체와 언어가 하나로 모이는 장소이다.


영화 속에서 존더코만도 사울의 신체에서 X 표식이 두드러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주인공인 탓도 있겠지만, 오직 사울만이 신체와 언어를 하나로 이으려 시도하기 때문에 그 표시는 통로로써 사용된다. 다른 존더코만도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거나 혹은 죽음 속에 빠져들 때, 사울은 홀로 가만히 서 있는다. 영화 이전은 몰라도 영화 중의 사울에겐 오직 아들을 구해야만 한다는 생각뿐이다. 영화를 다 보면 알겠지만 그 아들은 사울의 진짜 아들조차 아니다. 생판 남남이고, 그 또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들을 구원하려 하는 것뿐이다. 과연 사울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까지 유대인의 방식으로 생판 남의 장례식을 치러 주려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이 영화의 사울은 그 두 가지 세계의 통로로서 제시된 인물인 것 같다. 요컨대 그는 감독의 의도 그 자체이고, 그래서 영화의 개연성은 거의 따져 물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다음으로 넘어가자. 그가 구원하려는 아들은 독가스를 마시고도 살아남은 하지만 죽여야만 했던 누군가의 자녀인데, 이때 독가스에 중독되어 숨을 헐떡이는 아들의 모습을 본다면 그것이 침묵하는 이의 얼굴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입을 열지 못해서 침묵이고, 곧 죽음으로 향하기에 침묵이다. 그 두 가지 일치가 이루어지는 곳이 영화 초반의 시퀀스이고, 여기서 사울은 수용소 안의 세태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을 목격한다. 존더코만도라는 것은 누군가를 죽음으로 보내면서 곧 죽음이 예정된 사람이고, 비난을 받으면서도 비난을 할 수 없는 처지의 누군가라는 점이다. 그 누군가, 익명, 이름이 없는 것, 미지의 수 X, 미지의 것은 제거됨의 표상이요 우리는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이들을 이 영화에서 목격한다. 그리고 X는 시체소각장에서 연기가 되어 하늘로 승천하게 된다. 이때 그것은 또 하나의 승천, 신체가 언어로 바뀌는 풍경을 사울은 목격한다. 그러니까 사울은 자신이 평소 해오던 일을 반대로 행한다면 자신 또한 구원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영화 <사울의 아들>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두 가지 세계가 흐릿한 초점을 통해 다른 한쪽으로 집중될 때


신체가 언어로 변하는 게 소각장이라면, 시체를 연기가 아니라 언어로서 구원할 때 그것은 언어가 신체로 변하는 것이 된다. 즉 말로서 자신을 보존하는 것이 된다. 아마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그것을 말하고 싶었을 테다. 신체와 언어라는 두 가지 세계가 흐릿한 초점을 통해 다른 한쪽으로 집중될 때, 다른 한쪽 세계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여전히 그 배면에 붙어있다고 말이다. 간단히 말해, 감독은 기존의 홀로코스트 영화들이 생존자와 사망자를 위시한 두 가지 세계를 분리하는 것에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르면 이 영화에서 존더코만도라는 소재는 그 중간계를 경유하는 지점, 카메라의 시선을 붙잡아둘 안착지이다. 존더코만도 사울의 등짝을 따라가는 이 카메라는 정사각형 비율에 가까운 스크린의 정중앙을 응시하면서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 거리는 늘 일정하고, 또한 초점 또한 일정하다.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또한 그만큼 갑갑하게 느껴진다. 결국 이것은 붙잡히지 않는 시선이다. 응시되는 동시에 응시를 피해가는 지점, 죽으면서도 죽지 않은 중간계에 자리한 게 존더코만도와 그를 바라보는 카메라다.


이 지점에서 내가 불러올 텍스트는 빅터 프랭클의 담론이다. 여기서 언급할 텍스트의 해석은 주관적인 나의 생각이다. 그걸 감안하고 보아주기를 바란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그는 자신의 생존담과 그곳에서 깨달은 점을 책으로 썼는데, 그는 공허 속의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삶의 공허감은 채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사고의 배면에는 또 다른 사고가 있다. 그래서 그는 그런 방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할 때 비로소 고민이 풀리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요컨대 이것을 신체와 언어라는 두 가지 고민이 한쪽 면으로만 우리에게 비추어진다는 것으로 해석해보면 어떨까. 신체의 공허함이 불러오는 것은 신체의 실존적 문제다. 또한 언어의 공허함이 불러오는 것은 언어의 실존적 문제다. 결국 그 공허함, 침묵 혹은 죽음이 불러오는 것은 그 세계에서 그것이 살아남는 방법, 존재하는 방법에 관한 물음이다. 그래서 아우슈비츠라는 세상과 괴리된 작은 세계 속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실존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근경에는 전면으로 비춰지는 신체가 있고, 후경에는 흐릿하게 보여지는 언어가 있다. 그 흐릿함에 가려 언어로만 전달되는 그들의 ‘모습’은 그들이 그곳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또는, 그들의 살아 생전 모습이 아직 여기에 잔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실존적 ‘선택’이다.


영화가 중간계를 근경을 바탕으로 한 후경인 사울로 설정한 것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인 것 같다. 언어는 신체를 바탕으로 성립한다. 그리고 시대적으로 볼 때 그 신체는 나치일 테고, 나치의 잔혹함 위를 떠도는 침묵하는 것은 언어 즉 존더코만도일 테다. 빅터 프랭클의 담론은 아우슈비츠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탄생하였고, 그에 따라 개인에게 적용될 때도 개인을 개인의 세계로만 축소하는 단점이 있지만, 적어도 스크린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는 유효한 것 같다.



영화 <사울의 아들>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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