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의 형태로 이어지는 관계​

<선희와 슬기>(2019)

by 수차미


박영주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는 선희(정다은)라는 중학생 소녀가 이름을 잃고 방황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여기서 이름을 잃는다는 표현은 빼앗긴 게 아니라, 저버렸다는 맥락으로 사용했다. 영화에서 친구의 자살을 눈앞에서 목격한 소녀는 그에 충격을 받아 가출을 감행하는데, 이때 뜬금없이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 강가에 뛰어드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죽은 친구를 따라가려는’ 듯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죽으려던 소녀가 되돌아 나오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그녀는 살아난다. 아마도 이 대목에서 그녀의 이름은 강물에 씻겨 내려갔을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에 따르면, 흐르는 강물은 매 순간의 형태가 지정되어있지 않기에 그걸 지칭하는 이름이 없고, 따라서 이 강물을 건너는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저버리는 게’ 된다. 이른바 ‘*스틱스 강’인 셈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저승에 있는 강으로, 이 강을 건너는 순간 망자는 전생의 기억을 모두 잊는다고 한다.)


이름을 잃고 헤맨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여성 영화의 맥락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단순한 생각으로, 여성 감독이 그려낸 사춘기 여학생의 이야기는 최근 한국 사회에서 그런 맥락으로 읽힐 가능성이 있다. ‘Gone girl’이라는 여성주의적 관점을 한국어로 번안하면 ‘사라진 여성’이라는 뜻이 되는데, 말뜻 그대로 세상의 여러 분야에서 여성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여성주의적 관점은 말한다. 그리고 이 관점은 드라마나 영화와 같은 여러 매체에도 안팎으로 적용되는데, <선희와 슬기>에서는 그것이 이름의 문제로 나타난다. 요컨대 이 영화에서 ‘사라진’ 것은 회사나 사회에서의 지위가 아니라, 중학생 여자 아이의 이름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 영화에서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사회 외부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 이전에 존재하는 개인의 내면인 셈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특기해야 할 지점은 이름이 사라졌다는 게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이름은 그녀가 타의에 의해 빼앗긴 게 아니라 스스로 저버린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대목에서 생각해볼 지점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여성 감독의 여성 표현이고 둘은 그녀가 이름을 저버리는 과정 혹은 방법이다. 즉 외부와 내부라는 두 가지 측면이다. 그러나 나는 둘 중 후자에 접근해보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에 서툴러서 그 분석을 잘 수행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접근하고 싶은 것은 사회가 우리를 부르는 법과, 그 부름이 ‘이름’에 의해 수행된다는 사실이다.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이름을 스스로 저버리게 되는 선희, 혹은 슬기의 모습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0aba07b4396649f1bfb9e0d77d96b6f21551747623227.jpg?type=w966 영화 <선희와 슬기>의 한 장면 © 리틀빅픽쳐스




‘살아야 한다’는 죽은 말


영화의 플롯은 간단하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 극빈한 가정의 딸인 선희는, 친구들로부터 관심을 끌기 위해 여러 거짓말을 한다. 그중 같은 반에 정미(박수연)라는 친구가 있는데, 선희는 정미의 성숙한 모습에 반해 그녀의 성격이나 외양 등을 따라 하려 한다. 하지만 그 모방의 방법이란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서, 주변 친구들로 하여금 선희를 따돌리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예를 들어 선희는 정미의 머리 스타일을 따라 하거나, 정미가 했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재포장하고는 했다. 아이돌 기획사에 아는 오빠가 있고, 키 크고 잘생긴 연세대 오빠가 자신의 집 앞에서 번호를 따갔다는 식의 거짓말이다.


그러나 선희의 거짓말로 같은 반 친구가 자살에 이르게 된다. 유인물을 전달하려 친구의 집에 방문했던 선희는 그것을 눈앞에서 목격한다. 이후 선희는 집을 나와 어느 외딴 시골로 향하고, 어딘가의 저수지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자살은 실패하고, 선희는 지나가던 어느 여인에게 구출되는데, 때마침 그것은 보육원으로 향하는 봉고차여서 선희는 보육원에서 머무르게 된다. 그렇게 선희는 슬기가 된다. 아무리 이름을 물어도 답하지 않던 선희는 어느샌가 슬기가 되어 그 이름으로 학교에까지 입학하게 된다. 요컨대 이것은 우리가 신화에서 흔히 보던 ‘부여된 사명’으로서의 이름이 아니라, ‘저버리는 식의’ 이름인 것이다.


작품의 플롯을 보면 잘 알 수 있듯,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춘기 소녀의 그런 감성이 필요하다. 여타 여성 영화에서도 말이 오가는 부분이지만, 아무래도 여성 감독이 여성 주체를 더 잘 표현하리라는 의견에 힘이 실리는 게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이 영화의 완성도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어떤 면에서, 어딘가로 다시금 사라져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이 영화의 결말은 그토록 허망하기까지 하다. 그녀는 계속해서 저버리고, 이 영화에서 그녀가 이름을 거머쥐기를 원했던 관객은 실망하게 될 테다.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외면하는 듯 보이기에 말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 영화에서 우리는 ‘살아야 한다’라는 명령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살아야 한다’라는 문장의 기원을 잠시 설명하자면, 나는 이 문장의 기원을 일본의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 찾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와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서 아시타카와 산의 관계는 ‘살아야 한다’는 주제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아시타카와 산은 서로의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볼 것을 다짐한다. (산은 아시타카를 좋아하지만, 아시타카와 함께 살고 싶지는 않아한다. 그래서 아시타카는 타협안을 제시하는데, 서로의 위치를 고수하면서 간간이 만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의 관계는 결국 한 자리가 아닌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형태이다. 이것은 일본의 문화에서 찾을 수 있는 해석의 지점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보면 개인이 각자의 자리를 고수하면서 사회의 한 지점을 구성할 수 있음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이것은 용광로가 아닌 샐러드 볼으로서의 문화적 원형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원령공주>는 문화적 원형만을 제공하고 있을 뿐, 그 방법이나 방향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암시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저 그렇게 끝나 버린다. 두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스크린의 어둠 너머로 사라져버린다. 반대로 보면 스크린이 그들을 삼켜버린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내가 바라보는 것은 스크린이 그들을 삼켜버렸다는 쪽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살아야 한다’는 말을 통해 스크린 안에서만 살아있게 된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는 ‘살아야 한다’는 말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므로 사실상 죽은 말이나 마찬가지인 게 된다. 또한 그들이 그 속에서 찾아내는 것은 죽은 말에서 비롯된 죽은 담론일 테다.





7c281f1ca1fa4b4c8d372999802212981551747607281.jpg?type=w966 영화 <선희와 슬기>의 한 장면 © 리틀빅픽쳐스




모든 것이 학교로 연결된다


다시금 돌이켜보면 이 ‘살아야 한다’는 문장은 문제 해결의 방식이 사회 전체가 아닌 개인의 선에서 기원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이 문장은 칸트식의 정언명령처럼 보인다. 임마누엘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정언명령이란 그것 자체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는 형태이다. 요컨대, 살아야 한다는 문장은 ‘어떻게’나 ‘왜’가 아닌, ‘그저’ 살아야 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이익이나 목적도 도덕법의 기초로 삼을 수 없다. 도덕법은 사람, 즉 그 자체가 목적인 사람에게만 관련되기 때문”이라고 칸트는 말하는데, 그러므로 기실 따지고 보면 ‘살아야 한다’라는 말은 바깥세상으로의 삶이 아닌, 내부로 파고드는 자아를 구제하는 삶을 직시하는 것이 된다. 쉽게 말해, 닫힌 사회에서 닫힌 개인을 양육하는 이런 방식은 ‘살아야 한다’라는 것의 본래 의미를 바꾸어 놓는다.


내가 이 영화가 정언명령을 뜻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건, 아무쪼록 영화 초반에 잠깐 언급되는 학교의 모습이 바로 그렇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학교라는 작은 공간에서 공부를 위해 살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에는 오직 학교 이외의 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모든 것이 학교로 연결된다. 다르게 보면 학교를 거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이야기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소녀들의 대화는 오직 학교에서 꺼낼 이야기로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선희는 친구들의 대화에 참여하려고 비싼 암표를 구매해 친구들에게 무료로 준다. 또한 대화에 참여하려는 목적으로 서투른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사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이 성인이라고 가정할 때 이들의 모습은 정말로 풋풋하고 어린, 학교 자체 내부로서만 존재하는 청소년기의 자아를 상정하고 있다.


문제는 이 장면에서 선희의 모습은 대화가 목적이 아닌, 학교 그 자체에 주안점이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그녀의 모습은 친구들과의 교우관계보다는, 학교에 다니면서 얻는 기쁨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집과 학교라는 청소년기의 주요한 두 가지 공간에서, 부모로부터 소외받는 집과는 다르게 친구가 있는 학교야말로 존재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일 테다. 요컨대 청소년기는, 친구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점에서 친구라는 단어는 정언명령이 도착하는 장소인 셈이다. 그리고 선희는 그것이 정언명령이기에 친구를 사귀는 이유는 별로 상관이 없고, 친구를 사귀는 것이 곧 자신을 사귀는 것과 같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우리가 소녀들이 선희의 뒷담화를 하는 장면에서 느낄 수 있는 생각은 다음과 같다. 용광로가 아닌 샐러드 볼로서의 문화적 원형이 그 학교의 교실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소녀들의 관계는 서로를 진심으로 위하는 게 아니라 단지 같은 학교의 같은 반에 있으므로 이루어지는 것뿐은 아닐까? (친구가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게 아니라, 친구 자체가 목적인 삶은 아닐까?) 쉽게 말해 피상적인 관계에 불과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것은 학창시절을 겪어본 우리가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이야기지만, 그것이 담론으로 형성되기까지는 그러한 절차가 필요하다. 학교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 이에 대한 대답은 학교가 의무교육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적어도 고등학교까지는 사실상의 의무교육에 해당한다. 실제로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다. 그리고 작중에서 선희는 중학교를 중퇴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첫번째 문단으로 돌아가 다시금 나의 해석을 복기해보려 한다. ‘살아야 한다’라는 정언명령이 도달하는 게 친구라는 관계가 아닌, 친구가 있는 학교라는 공간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학교를 이탈한 선희가 강가에 몸을 던지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때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를 바라본다는 것이 이어질 수 없는 타자를 강제로 몰아넣은 공간인 교실에 대응될 수 있다면, 학교라는 공간이 의무교육이라는 점을 떠올릴 수 있을 테고, 이 대목에서 우리는 관계의 의무성 즉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관계’를 논할 수가 있을 테다.





d19483e0599d47e3acd84fb2cfaf64b71551747645037.jpg?type=w966 영화 <선희와 슬기>의 한 장면 © 리틀빅픽쳐스




이름의 형태로 이어지는 관계


위에서 나는 “이 영화에서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사회 외부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 이전에 존재하는 개인의 내면인 셈이다.”라고 언급한 바가 있는데, 이 사회가 영화 속에서 교실이라는 장소로 은유됨을 우리는 이제 알 수 있다. 더 나아가면 교실과 학교, 직장과 직원, 국가와 국민이라는 식의 여러 관계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아무쪼록 그런 해석은 너무 과한 것 같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이 영화를 여성 영화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면,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음과 같이 변형될 수 있다. 교실 안에서 이름의 형태로 이어지는 관계는 마치 사회 안에서 이름의 형태로 이어지는 관계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사실, 그들을 이어 놓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 사회이다.


영화 속에서 선희가 친구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게 그 때문이다. 선희가 받은 충격은 자신의 말로 친구가 죽었다는 연유도 있지만, 단단해 보이던 친구 관계가 얼마든지 쉽게 깨어질 수 있다는 균열의 조짐에서 귀인했다. 선희가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 하던 친구라는 사회는, ‘너와 나’라는 두 가지의 집합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교실 안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때 선희가 강을 건넌다는 것은 이름을 씻어내는 행위이기 이전에, 그 강 너머에만 본질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선희가 건너려던 강은 그 너머에 사회가 있고, 그 사회가 선희를 부르는 형태인 ‘강물(매 순간 다른 시간을 지녀 이름으로 지칭될 수 없는)’인 셈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 이 영화의 기본적인 틀은, 사회 안에서 사라진 이름을 찾아 나서는 개인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인 듯하다. 그리고 여성 영화로 볼 때, 그 틀은 사회 안에서 사라진 여성의 이름을 찾아 나서는 여성 주체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일 테다. 서사를 ‘스틱스 강’이라는 신화적 관점으로 해석할 때, 그 모습은 흡사 사회 공동체 안에서 주어졌던 이름을 씻어내고, 새로운 이름을 획득해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결말에는 다시금 어딘가로 이동하는 선희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선희는 왜 계속해서 이름을 ‘저버리는’ 걸까? 아직 때가 아니라서? 사회가 도와주지 않아서?


이 영화에서 선희가 다시금 도피하는 이유는 자신을 찾아 나선 부모님의 소식(실종신고 포스터)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떠나온 곳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즉, 그녀는 탄생의 근원이 없는 상태, 자궁 없이 태어난 아이, 마치 ‘흐르는 강’처럼 매 순간을 뒤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선희의 모습을 주체로 거듭나는 여성의 모습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주어진 이름에서 벗어나 무(無)의 영역으로 줄곧 이동하는 모습은 응당한 사회질서 안에 편입되는 것조차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선희의 선택은, 자신의 과거를 보육원 사람들에게 고백하고 그 현실 질서의 안으로 편입되는 것이야만 했다.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게 사회 외부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 이전에 존재하는 개인의 내면이었다면, 그 사회와 개인의 관계는 관객과 영화의 관계에 대응될 수 있을 테다. 요컨대 감독은 이 영화를 하나의 개체, 인격으로 가정하며 관객이 주인공 선희의 내면에 천착하기를 바라는 듯 보인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선희의 행동에서 유추할 수 있는바, 이 영화는 끝없이 자기 속으로 파고들면서 과거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불안정한 주체인 듯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방식으로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구분 짓는 ‘살아야 한다’는 정언명령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는 관계는 사랑과 같은 감정에서나 유효하지, 개인의 목소리가 하나의 힘이 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유효하지 않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본래 의도가 ‘선희’가 아닌, ‘선희’의 뒤에 있는 여러 담론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또한, 그런 담론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개인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사연을 보태야 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개인의 자리가 끊임없이 해체되어가는 모습만이 있다. 만약 이 영화가 그것이 강요된 불우한 현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면 모를까, 가족의 호명을 받아 이름의 의미를 되찾은 그녀가 다시금 사라져버리는 모습은 정말로 이상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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