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2019)
조던 필이라는 감독을 <겟 아웃>으로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가 재능있는 여러 감독 중 한 명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이미지와 상징으로 점철된 그의 영화가 미국 내 인종 이데올로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라도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우리는 재능있는 신인 감독들이 만든 데뷔작을 그동안 많이 보아왔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이야기가 풍부해지는 것 또한 목격하곤 했다. 즉 나는 그의 재능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감독은 많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테다. 초반에 빨리 달리면, 후반에 지친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조던 필을 그냥 지나치려 했던 건, 그의 재능이 흔해서가 아니라 ‘초반에 빨리 달리는’ 감독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 이후의 작품들에서 힘이 빠질 듯한 안타까움을 섣불리 넘겨짚어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의 두 번째 작품인 <어스>를 보고 나서 느낀 점은, 그가 재능있는 감독이 아니라 그저 한 명의 소시민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이었다. 어떤 면에서 그는 <어스>를 통해 자신은 아직 힘이 빠지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하기도 했다. 아마 이 글은 이 한 문장을 설명하는 것에 모든 지면이 할애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던 필을 따라 되도록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가고자 한다.
‘나가라!’, 하지만 어디로부터?
그에 내딛는 발걸음 첫 번째는 그가 인식하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정말로 이분법을 표방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아마도, <겟 아웃>에서 제시되는 두 가지 일들을 보면서 이것이 백인과 흑인이라는 이분법에 관한 분류를 채택하고 있노라고 여기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되돌아보면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미국 사회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보는 것은 모두 ‘조여진 초점(Framing)’이라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러한 생각으로 영화를 보다 보면 조던 필이 보여주려는 것이 미국 사회 전역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닌 것만 같은 착각이 들고, 그런 생각에는 주인공 크리스 워싱턴(대니얼 칼루야)이 감금된 게 바로 ‘흑인의 탈을 쓴 백인들의 마을’이라는 점이 보조제로 작용한다.
이를테면, 이 영화 <겟 아웃>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나가라!’라는 메시지가 전달된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나가라!’라는 말은 집이나 특정한 장소, 그것도 방문이 달려있고 안과 밖의 구분이 확연한 곳에서나 들려올 법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테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가 ‘나가라!’라는 말을 들어보는 건, 부모로서 사춘기 아이들의 방에 들어갈 때나 혹은 어떠한 종류의 고양이든지 간에 자신의 영역에 들어왔을 때 외치는 비명일 테다. 내가 이 이야기를 통해 지적하려는 것은 <겟 아웃>이라는 제목 자체가 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금단의 영역으로 침입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과연 무엇 때문에 ‘나가라!’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 이때 이 호기심을 반대로 뒤집으면 다음과 같이 번안할 수 있다. 우리는 어디로부터 나가야 하는 걸까? 그리고 이때 우리는 그 장소로의 침입자일까, 혹은 그 장소를 지켜내야만 하는 수비자인 걸까? 전자라면 그것은 스크린을 향한 강한 응시에 비견될 수 있을 테고, 후자라면 우리의 집(마음)에 쳐들어온 낯선 이데올로기를 쫓아내야만 할 테다.
이러한 가정하에 조던 필의 시선이 집약되는 곳은 바로 미국 사회에서의 흑인이다. <겟 아웃>이라는 영화에서 조던 필은 흑인의 강한 몸을 원하는 유약한 백인 남성을 설정함으로써, 흑인의 신체와 백인의 영혼이라는 이중적인 자아를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본래의 흑인 자아는 흑인의 몸에서 주도성을 잃고 그 속 어딘가로 처박혀 버린다. 요컨대 이런 모습은 마치, 백인인척하는 흑인 혹은 은연중에 흑인을 지배하는 백인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은유하는 듯 보인다. 즉, 백인과 흑인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리 ‘젠틀’해진다 하더라도, 사회의 주류가 백인인 이상 모든 것이 백인의 기준에 맞추어 돌아간다고 조던 필은 <겟 아웃>에서 말하고 있다. 이것을 간단히 말하자면, 이미 자유롭거나 이미 평등하다고 느끼는 우리 사회의 어떤 면들은 사실 ‘선행된 이데올로기 위에 수반되는 이차적 조응 구조’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마치 로라 멀비(Laura Mulvey)가 말했던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 논문의 ‘흑인 사회’ 버전처럼 보인다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로라 멀비는 1975년에 이 논문을 통해 페미니즘에 관한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 내용을 아주 간략히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할리우드 고전 영화에서 여성은 타자인 동시에 계속해서 타자화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영화를 보는 여성들이 그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영화가 주는 시각적 쾌락은 남성 이데올로기 중심의 시선이 마치 ‘여성인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것처럼 그들을 ‘눈속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로라 멀비의 담론이 현재에도 어느 정도 유효하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그것은 조던 필이 <겟 아웃>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설명할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겟 아웃>에서 나타나는 로라 멀비와의 조응성
이 글에서 나는 로라 멀비를 지적하지 않는다. 다만 그를 인용할 뿐이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해당 논문에서의 내부자인 남성과 외부자인 여성의 자리에 각각 백인과 흑인을 넣어볼 수 있다는, 흥미로운 가정을 해볼 수가 있다. 영화와 현실 간의 문제의식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는 나중에 논하도록 하고, 이데올로기만을 먼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백인 위주의 사회에서, 흑인은 백인의 시선에 자신의 시선을 대입하여 ‘백인화된 흑인’이 된다. 요컨대, 주체라고 생각했던 그는 사실 백인을 따라 할 뿐인 것에 불과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자유를 찾았다고 생각했던 인형이 사실은 인형극 위의 주인공에 불과할 뿐이었다는 점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어스>에서도 우리가 목격하는 철창 안의 토끼들은 바로 그런 점을 직시하고 있다.
<어스>를 논하기 전에 <겟 아웃>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겟 아웃>이라는 영화가 어떠한 영화인지를 나는 앞에서 미리 지적했었다. 바로 이 부분을 위함이다. 그 영화에는 ‘흑인의 신체를 원하는 백인들’과 ‘백인이 되길 원하는 흑인’이 있다. 즉 양자의 몸과 마음은 서로를 가로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흑인이기를 원하는 백인이 있고, 백인이기를 원하는 흑인이 있다. 이때 중요한 점은 그것이 정신적으로 자신이 인지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자신의 욕망이라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사회의 욕망이 자신에게로 주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겟 아웃>에서 목격하는 것은 단순히 백인 사회 내에서의 흑인의 위치뿐만이 아니라, 화해와 타협을 말하면서도 끝내 조응하지 못하는 양자의 불합리성, 불가침성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영화에서 어떠한 두려움을 느낀다면, 주인공 크리스 워싱턴이 최면에 걸려 자신의 신체 속으로 떨어지는 장면에서의 이원화된 신체가 아닌, 미국이라는 강인한 신체 안으로 떨어지는 썩어가는 심리적 상태에서일 테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영화에서 목격하는 것은 흑인과 백인이라는 인종의 이분법이 아닌, 타협하는 것과 타협하지 못하는 두 가지 담론을 중심으로 미국이라는 하나의 사회가 분열되고 있다는 간은하적(interstellar) 우주의 공포인 셈이다.
논점 이탈 방지를 위한 잠깐의 쉼표를 제공하자면, 내가 조던 필에게서 목격하는 것은 로라 멀비 식의 이중적 자아이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할리우드에서의 성 불평등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하나의 기의가 분열되어 남성과 여성이라는 양자의 기표를 담지하고서, 주체인 A와 타자인 B가 보여주는 요상한 자아 분열적 양태를 스크린 위에 펼쳐놓는 것이다. 하나의 미국? USA? 이 축약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미국이 사실 ‘미합중국’이라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주들의 연합이며, 따라서 그(미국)는 하나의 자아가 아니라 하나의 육체를 공유하는 수십 개의 ‘정신(Sprit)’이다. 따라서 이러한 맥락으로 생각해볼 때, 그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가치는 ‘미합중국’이라는 하나의 육체가 그들에게 만들어내고 강요한 합일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즉, 그들은 연방정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각 주(State)의 모습이 정말로 자신 주의 모습일 것이라는 환상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논점이탈일 수도 있으므로 미리 양해를 구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모습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는 사자성어는 바로 <어벤져스>이다. ‘복수자들’이라는 이 제목의 영화에는 미국의 여러 주에 해당하는 여러 영웅들이 공공의 적을 무찌르기 위해 하나로 뭉친다는 ‘연합’의 형태가 여러 변형(Variation)으로 줄곧 나타난다. 그들은 모두 영웅이지만, 하나로 뭉칠 때 더욱 빛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서로 간의 무기력함을 목격하거나, 혹은 이곳에서 자신의 역할이 정말로 무엇인지에 대해 회의감을 품고는 했다. 그런 갈등이 터져나온 게 <시빌 워>였었다면, 그 이후의 영화들에게는, 다시금 집단 내에서 자신의 사적인 이념과 그에 대한 화합을 실행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공공의 적 (<어벤져스 3>, <어벤져스4>)로 이어진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언제나 ‘또 다른’ 위기라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내부의 균열은 외부의 적을 통해 ‘일시적으로’ 봉합된다는 것이다.
이제 재미있는 가설로 넘어가 보자. 위에서 세웠던 것을 그대로 가져와 보자. 여기서 내부는 무엇이고 외부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영화를 보는 관객과 그들이 응시하는 스크린의 관계에 대응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곳이 현실일지 혹은 스크린 안일지의 문제는, ‘영화보다 영화 같은 현실’이라는 우스갯소리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겟 아웃>을 보고 나서 사람들이 하는 푸념 중의 하나는 아마도 ‘영화보다 현실이 더 무섭다’라는 것일 텐데, 그렇다면 이때 스크린과 현실의 관계는 뒤집힌 게 아닌가? 나는 바로 이 부분에서 로라 멀비의 논의를 메츠(Christian Metz)적으로 응용해보고 싶다. 이제 그 마술이 바로 이곳에 펼쳐진다. “현실 세계가 스크린에 펼쳐져 있다고 생각하던 관객은 사실, 스크린 속의 이념을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에 불과했다. 즉, 영화가 보여주는 여러 이데올로기의 장은 타자화된 자신을 바라보는 객체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방금 내가 응용한 이 문장에서 현실이라는 단어는 여성에, 스크린이라는 단어는 남성에 대응한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조금은 쉬워질 테다.
로라 멀비에 따르면 고전 할리우드 영화에서의 욕망은 남성의 그것이다. 시선이라던가, 욕망이라던가 여러 가지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여성들은 스크린 안의 여성들이 여러모로 대상화된, 자신에게 불쾌감을 안겨주는 피학대성을 담지하고 있음에도 유희로서의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조던 필의 <겟 아웃>을 보는 관객들은 스크린 안의 담론이 여러모로 대상화된, 자신에게 불쾌감을 안겨주는 피학대성을 담지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단지 ‘이미지와 상징’을 추론하는 ‘추상게임(빌렘 플루서의 논의대로)’으로만 여기고 있었던 셈이다.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입체에서 평면으로, 평면에서 선으로, 선에서 점으로 이어지는 ‘시공간을 추상화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쉽게 말해 그것은 조각에서 그림으로, 그림에서 책으로, 책에서 사이버로 이어지는 미디어의 소실점에 해당한다. 이 소실점으로부터 뻗어 나가는 그림의 가지가 바로 조합게임이다. 플루서는 디지털 시대에 해체되어가는 이미지의 모습을 다시금 조합하는 것 또한 우리 인간의 능력이라고 믿었다. 내가 로라 멀비에 플루서를 소환한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아주 명백하게, 조던 필의 영화는 미국 사회의 어떤 담론을 스크린에 구현하면서도 그것에는 비교적 진지하게 임하지 않고 있다. 부차적으로는 그의 본래 직업이 ‘코미디언’이었다는 점이 배경에 깔렸기도 한데, 코미디언이란 언어 뒤에 숨겨진 함의를 통해, 그 불일치에서 슬픔을 행복으로 승화하는 ‘언어의 마술사’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사회 비판적인 역할을 겸하는 게 코미디언이라는 점은 두말할 것도 없고, 그런 면에서 역으로 사회적으로 비판받을 만한 이들을 두고 ‘코미디언’ 같다고 말한다는 점도 상기해볼 필요가 있겠다. 말하자면 조던 필의 <겟 아웃>에는 이것은 단지 코미디 풍자극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들 또한 코미디언이라고 말하는 상호텍스트성이 포함되어 있다. 영화 속에 벌어진 상황이 표면적으로는 공포이지만 저런 상황이 벌어질 리가 없다고 말하는 게 바로 ‘코미디’라면, 그런 이미지와 상징을 면밀히 짚어내지 못하는 둔감한 관객 또한, 혹은 그것을 보고도 모른 체하면서 부정해버리는 반대편의 관객은 바로 ‘반(反)코미디언’이라고 그는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로라 멀비 식의 해석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든 이 영화에서 끝내 타자가 될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필연적으로 <겟 아웃>하게 되는 셈이다.
문제 해결 방법 없는 문제 영화
이제 뒤늦게야 <어스>를 따져 묻자면 이 영화는 <겟 아웃>에서 펼쳐지는 이차적 조응 구조의 불일치성이 다시금 반복된다. <겟 아웃>에서도 그러했듯이 <어스> 또한 근본적인 화해나, 그것을 위한 토대는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부분이 조던 필의 영화를 ‘문제 해결 방법 없는 문제 영화’로만 보이게 하는데, 바로 이 부분이 조던 필의 영화를 지적하는 지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생각하기에, 오히려 이 부분은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부분이 영화 내부의 텍스트가 아니라 영화와 관객의 사이라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근시안이다. 조던 필은 영화 내부에서 백인과 흑인이라는 이분법을 선고하는 게 아니라, 영화와 관객이라는 두 가지 이분법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요컨대 스크린과 관객은 필연적으로 분리될 수밖에 없다는 세계의 이중주를 우리는 아주 잘 알고 있으므로, 이것이 백인과 흑인이라는 인종의 분리성을 말하는 것에는 아주 탁월하게 적용될 테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내가 여기서 로라 멀비의 해당 논문에서 지적된 비판을 반대로 응용했다는 점을 눈치챘을 테다. 말하자면 나는 텍스트에서 제기되는 비판점 자체가 하나의 텍스트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이 부분을 통해 지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조던 필의 영화가 인종에 관한 이데올로기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단지 미국 사회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을 우리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기시감은 단지, 영화관 속에 뚫린 스크린이라는 터널이 바로 그 터널 입구의 우리가 터널 끝의 빛줄기만을 응시하게 하는 ‘강제성’을 띠는 덕택이다. 이때 나는 그 강제성이 바로 조던 필 영화의 장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냥 솔직하게 나의 터부를 털어놓자면, 이것은 마치 조던 필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티브이의 이데올로기 전파의 역할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다.
티브이라는 매체가 갖는 함의는 정보가 빠르고 쉽게 전달된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청각이 아닌 영상의 세계로 들어왔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티브이는 라디오와도 다르고 신문과도 다르다. 그것은 눈으로 듣는 각각의 가정에 들어오는 생활의 필수품이자, 그렇기에 모두를 현혹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바보상자’이다. 그런데 조던 필의 영화에는, 아직 두 편에 불과하나 <겟 아웃>과 <어스>에는 티브이가 영화에서 중요한 오브제로 등장한다. <겟 아웃>에서는 주인공에게 최면을 거는 도구로써 사용되고, <어스>에서는 1986년의 어떤 이야기를 논하는 도구로 영화 오프닝에 제시된다. 여기서 나는 앞의 문장을 다시금 반복하고자 한다. 조던 필의 영화에서 티브이는 정보를 빠르고 쉽게 전달하면서도, 우리에게 정보를 강제로 주입하는 ‘필수적인 현혹도구’이다. 어쩌면 이것이 영화 이미지를 생성하는 단순한 미쟝센일 뿐이라며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거시적으로 볼 때 이미 영화관에 <어스>를 보러 온 우리는 스크린을 강제로 응시해야만 하는 ‘자발적으로 현혹되는’ 상태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조던 필의 영화는 영화 안이 아닌, 영화의 안팎을 이어놓는 상호텍스트성을 띠게 된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 조던 필의 영화는 결코 ‘미국적 인종차별’을 말하고 있지가 않다. 그것은 ‘우리의 탈을 쓴 우리’일 것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어스>에서 목격하는 것은 조던 필이 제공하는 로라 멀비 식의 관람법이다. 따라서 <어스>에서 등장하는 ‘너와 나’의 담론이 도플갱어를 직시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그 해석에 결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위에서 로라 멀비 식의 관람법이 조던 필의 영화에서는 미국이라는 자아, 또는 미국이라는 자아와의 ‘강요한 합일의 환상’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을 더욱 추상화하여서 각 나라의 관객들이 자신이 처한 별개의 상황에 맞추어 그 담론을 주체적으로 변형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테다. 조던 필이 제공한 건 영화를 관람하는 틀 혹은 설계이지, 그 속에 담긴 내용물이 아니다. 분명 그 내용물이 중요한 것은 맞는데, 정확하게 파고 들어가면 우리는 조던 필의 영화가 ‘어느 사람’에게서나 적용될 수 있는 상호텍스트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그 영화가 미국의 우화처럼 보이는 건 그가 미국 사회를 그렇게 보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즉 그는 단지 미국 사회의 소시민일 뿐 무언가를 말하려는 미국 사회의 영웅인 것이 결코 아니다.
스크린이라는 주체의 거대한 심리극
이 대목에서 나는 위의 어느 단락에서 이야기했던 경고문을 외쳐보려 한다. <어스>의 가족에게 낯선 침입지가 출몰했을 때, 그 장소에서 나가야 하는 것은 과연 어느 쪽일까? 애들레이드(루피타 뇽오)가 사실은 테더드(지상의 인간을 따라하는 복제인간)였다는 충격적인 결말이 반전으로 제시되는 것이 이 영화에서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그들의 가정에서 나가야 하는 것은 침입자인 테더드 가족이 아니라 내부의 내부(집 안에 있는 가족)에 있던 애들레이드였다는 사실이다. 영화가 제시하는 인간과 테더드라는 두 개의 도플갱어 관계가 직시하는 것은 분열된 미국 사회의 하나의 국민을 은유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국가라는 집이라는 전통적인 은유),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로라 멀비 식의 영화 관람법의 양 극단에 대응하는 것들이다. 문제는 바로 이 영화에서 그 두 가지 양면의 관계는 ‘양 극단’이 아니라 사실은 ‘배면’을 통해 이어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이 영화에는 스크린과 관객이라는 두 가지 면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이어지는 하나의 점만이 있을 뿐이다. 이 대목에서 복기하는 플루서, 이 영화 <어스>는 트럼프 시대이자 4차 산업혁명이라는, 디지털 시대이기도 한, 조합 게임에 해당한다.
미디어가 곧 우리의 사고구조가 된다고 말했던 마셜 맥루언(Marshall McLuhan)의 말을 빌려오자면, <겟 아웃>에서 주요한 극 중 장치로 사용되었던 티브이가 그 후속작인 <어스>에 와서는 ‘AI 스피커’와 같은 신문물에 역할을 넘겨주었다는 사실도 그에 대한 설명이 될 것 같다. 물론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시대의 신문물은 <겟 아웃>에서도 실종자를 묘사하는 방법으로 소개된 바가 있지만, 단언컨대 이 영화에서 ‘Ai 스피커’와 같은 신문물이 직시하는 것은 단지 영화 속의 배경이 작품 밖과 동시대라는 점뿐만이 아닐 테다. 그것은 모두를 하나로 잇는 인터넷 세상 (world wide web)이 디지털 시대에는 일종의 영혼의 네트워크, ‘림보(Limbo)’라는 점을 말해준다. 굳이 성서적인 의미를 따르지 않고서도, 이 림보라는 말은 우리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선택의 유예지점이라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즉 그것은 갈등이 일어나는 게 유예되어 있는데, 사실은 갈등이 아주 잘 드러나는 장소이다. 인터넷 세상에서는 어떠한 의사결정이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이를테면 투표와 같은 정치 행위는 여전히 현실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설전은 온라인상에서 아주 치열하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는 그 인터넷 세상을 상과 벌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고만 여길 수 있을까? 아닐 테다.
갑자기 인터넷을 언급하는 것에 의문이 들 독자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의문이 들어도 된다. 이 영화에는 물음 그 자체가 아니라, 완성된 물음이 이미 세계 안에 위치로서 지정되어있다. 이 문장에 대한 쉬운 설명, 영화가 시작하면서 조던 필은 두 도플갱어의 자리를 바꾸어 놓는다. 명계에 있던 이는 이승으로 나오고, 이승에 있던 이는 명계로 끌려가고야 만다. 이것은 아마 에우리디케 설화의 역설적인 응용일 것임이 분명하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 명계의 설화에서 불쌍한 에우리디케는 자신을 구하려 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직접 봉기하여 이승으로 쳐들어간다. 여기서 의문, 이것은 마치 위에서 말했던 로라 멀비 식의 해석법과 어느 정도 유사해 보이지 않는가? 스크린 안에서 타자화된 대상이 스크린 밖에서 ‘자신을 타자화한 이들’의 욕망에 이입하고 있다는 사실은, 명계에서 아무것도 모른 체로 이승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 하는 테더드들의 모습과 유사해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런 해석하에서, 조던 필이 <어스>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 자신이 <겟 아웃>에서 주장했던 로라 멀비 식의 해석을 ‘주체적이면서 주동적인 행동력’으로 변환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생각하기에 이 영화에서 정말로 무서운 것은 조던 필이 스크린과 관객의 관계에서 스크린 안을 명계로, 관객석을 이승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어둠과 밝음이나 개방성의 유무로서 그 공간의 위치가 결정되는 게 당연해 보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영화 초반에 인간과 테더드의 위치가 바뀐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수행되는 장소는 어떠한 ‘거울처럼 보이는 것’이다. 마치 오손 웰즈의 <상하이에서 온 여인>처럼 제시된 이 거울 방에서는 자아에 대한 주체의 쉴새없는 목격담이 승화되고 적용되는 듯 보인다. 그에 대한 실례로, 애들레이드는 자신의 거울상을 목격하고는 ‘패닉상태’에 빠진다. 라깡 식으로 말하자면, 실재계의 욕망을 직접 마주한 주체는 그에 접촉한 대가로 미쳐버리고야 만다. 정리하자면 이 장면은 마치 라깡의 거울 단계가 이미지로서 체현되는 듯 보이며,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시작과 결말 부분을 장식하는 놀이동산이라는 공간은 온갖 유희가 제시되는, 욕망으로 가득한 상상계일 테다. 그리고 그런 상상계에서 진리가 있는 곳은 바로, 스크린 밖에 있는 관객석이다. 이 영화에서 상징계란 다름 아닌 ‘우리 현실’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 나는 조던 필의 <어스>가 단순히 분열된 자아에 관한 도플갱어적 은유에 불과하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 단순히 도플갱어일 뿐이라면 그것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나 <캐롤>과 같은 영화에서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일개 ‘거울상’에 불과할 테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지점은 두 가지 면이 통하는 점(point)이 일종의 진리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바로 그것, 우리 속에 이미 타자가 있고 타자 속에 우리가 있다는 상호텍스트성이 이 영화를 ‘해독’하려 했던 우리를 역으로 해독하게 하는, ‘스크린으로부터의 반격’이 이 영화 <어스>에서 시작되고 있다. 그 전주곡은 영화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US(우리)’, 상상계에서 실재계로 이어지는 통로를 찾아낸 주체가 주이상스(Jouissance, 죽음*욕망 속에서의 환희)를 겪고 나서, 그 공격성이 스크린 밖의 상징계로 향하는, 스크린이라는 주체의 거대한 심리극이라고도 보게 하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이때, 그 세계에서 나가야 하는 것은 누구일까? 우리 혹은 그, 타자로 지칭되는 나라는 점에서 우리는 상상계로부터 스스로를 추방하는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