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녀는 어디에서 왔을까

by 수차미


만화 <총몽>의 한 장면 © 키시로 유키토



일본의 자존심, 아니면 정체성


키시로 유키토의 『총몽』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게 정말로 만들어질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작품 내용상 실사로 구현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게 아니라, 그것이 할리우드의 풍토에 맞을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에는 영화화 판권이 팔린 것들이 무척 많지만, 장르 특유의 ‘마니악함’이 할리우드에 전파되기에는 무리였던 것인지 영화화 작업에 대부분 난항을 겪었고, 거의 90퍼센트는 판권만이 팔린 채 제대로 영화화되지 못했다. 그나마 최근에 나온 <공각기동대 : 고스트 인 더 쉘>은 원작의 비쥬얼은 살렸으나 철학은 살리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이 작품에 쏠린 관심과는 다르게 <퍼시픽 림>에 영향을 준 작품이 일본의 여러 애니메이션&전대물이었다는 점은 사람들에게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다. 요컨대 일본 애니메이션이 할리우드 (혹은 세계의 영화)에 미치는 영향은 작품 자체가 아니라, 작품상의 설정 (IP)뿐이었던 것이다.


그 설정들이 할리우드의 어떤 영화들에 스며들어 일종의 계보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공각기동대>의 철학이 그 작품만의 철학은 아니지만, 그 작품은 할리우드의 <블레이드 러너>에서 <매트릭스>로 이어지는 사이버펑크의 계보학에 자리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말하자면 일본 애니메이션이 던지는 물음들은 단지 그곳에서만 머물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만 머물기에는 너무 아까운 질문들인데, 일본이라는 특수한 장소는 그 작품들을 신화화하면서도 동시에 외국으로의 반출을 막는 장벽 역할을 겸하고 있다.


예를 들어 숱한 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이 자국에서 영화화되었을 때, 그 괴이한 모습에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비명을 지르게 되었던 경험을 우리는 줄곧 해왔었다. 『강철의 연금술사』 혹은 『테라포마스』, 여기에 게임의 영화화를 따진다면 그 괴이함의 정도는 더 넓어진다. 이 괴이함에서 예외로 할 수 있는 건 <레지던트 이블>이나 <엣지 오브 투모로우> 정도가 있을 텐데, 애석하게도 실패한 작품이 아니라 성공한 작품을 ‘손에 꼽아야 한다는’ 사실에서 그 성공의 희소성이 잘 드러난다. 하지만 이것이 단지 ‘실패한 영화화’에 불과한 것일까? 왜 유독 일본의 콘텐츠들이 영화화되는 것이 실패로 돌아갈까?


할리우드보다 노하우와 기술과 인력이 뒤떨어지는 탓도 있을 것이고, 일본 영화 시장 자체가 극도의 침체기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만, 그러니까 일본 애니메이션의 팬이자 할리우드 영화의 팬이라면 그 두 가지 의문 사이에서 방향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분명 뛰어나지만 만들어지지 않을 이유도 없고, 그것은 분명 뛰어나지만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문 또한 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한 것으로는 ‘갈라파고스’라는 이명(혹은 오명)을 떠올릴 수가 있는데, 전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의 70여 퍼센트를 차지한다는 그 일본 시장은 그 속에서만 작품이 통용되는 ‘갈라파고스’여서, 그 속의 콘텐츠가 충실하게 원 형태를 유지할지언정 반대로 생각하면 외부 문화의 개입과 그에 따른 변형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잠깐 물음을 멈추어보자면 일본의 애니메이션 (그리고 콘텐츠) 시장이 갈라파고스라는 점에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 시장은 딱히 그 콘텐츠들의 수출이나 변형에 제한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작품들은 일본 내에서만 ‘자체적으로’ 제작 및 변형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의 멀티 유즈 (OSMU)는 오직 내수 시장을 위해서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이유에는 일본 시장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이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 시장이 큰 만큼, 해외 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하지 않아도 (현지화와 같은) 돈을 벌 수 있고, 현지화를 하지 않아도 그 인기에 힘입어 해외 콘텐츠 회사들이 본래의 작품을 그대로 수입해가는 실정이니, 그 작품들은 오직 일본을 위해 만들어져 일본에서 유통되고 이따금 인터넷이나 티브이를 통해 유통되어 매니아들의 인기만을 얻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즉 그 매니악함이 인기의 요인이면서도 대중화에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 매니악함은 일본의 자존심인 걸까 아니면 정체성인 걸까. 어느 쪽이든 맞는 말이겠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의 세계화 (혹은 대중화)를 꿈꾸는 이들에게 그 자존심은 굽혀야 하는 것이고, 그 정체성은 어느 정도 변형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문장은 그들이 노력하고 있지 않다는 게 아니다. 그저 오래된 ‘현상’을 돌파할 힘이 주어졌으면 한다는 바램일 뿐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자존심과 그에 따른 정체성이 대중화에 성공한 사례는 IT업계에서 스티브 잡스의 애플사가 있고, 그들의 독자규격과 독자 행보는 오히려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말하자면,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던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중화는 정체성을 내려놓는 쪽이 아니라 정체성을 유지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알리타 : 배틀 엔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도착한 2019년의 『총몽』을 보면서 생각한 것은 그 소녀가 과연 어디에서 왔느냐는 것이었다. 원작에서 튀어나온듯한 그 큰 눈을 지니고 빠르게 전투에 돌입하는 그 모습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계열 중의 하나인 전투 미소녀의 계보를 철저히 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원작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한 이 작품이 우리 앞에 도착했고, 그 흥행 여부에는 상관없이, 원작이 영화화된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음에서 오는 쾌감이 있었다. 즉 이것은 그동안 여러 이유 (혹은 어떤 이유)로 만들어지지 않던 일본 애니메이션을 눈으로 (실사화)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쾌감, 본다는 것의 쾌감이 2D에서 3D로 옮겨가면서 오는 쾌감, 어떤 면에서는 그 매니악함이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과 궁금함이 공존하는 가운데 우리는 이 작품을 맞이하게 되었다.




만화 <총몽>의 한 장면 © 키시로 유키토



사이보그의 육신을 한 전투 미소녀


전투 미소녀의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여성 신체 혹은 치장의 미학이 아니라, 모에라는 이름의 취향 그 별개의 기준선에 따르는 아름다움들, 어쩌면 페티쉬라는 이름의 기행이 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소녀 캐릭터에 접목한 결과다. 말하자면 전투 미소녀라는 것을 지칭할 때 중요한 점은 그 캐릭터는 아름다우냐는 미학의 질문이 아니라 어떤 기준선을 따르고 있느냐는 계보학의 질문인 셈이다.


전투 미소녀라 함은 말 그대로 ‘싸우는 소녀’ 그것도 어리고 예쁜 소녀들이 거칠게 전투하는 모습 혹은 장르를 지칭하는 것인데, 이를테면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에서부터, <에반게리온> 시리즈에서 기체를 조종하면서 끝없이 고통받는 기계적인 모습이나, 연령대를 조금 더 넓히자면 신체가 아닌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공각기동대>의 세계를 떠올릴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일본에서 시작되었고 가끔 다른 국가의 어떤 작품에도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전투 미소녀의 특징인 모에가 빠진 채로 나오는데, 모에가 없다면 전투 미소녀가 아니라는 게 그쪽 팬들의 중론이다.


예를 들어 전투 미소녀라는 특정성을 만족하는 데 필요한 ‘모에’라고 불리는 캐릭터의 매력을 살리고 강조하는 풍토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에서 시작되어 콘텐츠 전반에 퍼지게 되었으며,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7세기의 시작된 우키요에가 있고, 말하자면 그 모에라는 것의 기원은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일본에만 있는 이유는 싸우는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이 일본에만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갤 가돗의 <원더우먼>과 같은), 그 아름다움에 적용하는 기준선이 모에라는 일본 콘텐츠 업계의 공식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전투 미소녀와 그 모에의 발생을 따지기보단, 그 모에가 발전해온 과정을 지적하는 게 더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발전의 과정을 지적하는 것에 있어 전투 미소녀라는 정의 자체가 무척 광범위하기에 모든 것을 다룰 수가 없고, 계속 뻗어 나가다 보면 여러 물줄기를 다 끌어올 것이기에 범위를 한정하자면, 사이보그의 육신을 한 전투 미소녀가 영화에 등장하기까지를 전반적으로 다루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사이보그 전투 미소녀가 던지는 물음은 미소녀가 아니라 사이보그에 방점이 있는 것이고, 사이보그가 모에로서 (속성으로서) 작동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일 테다. 다시 말해서 그 미소녀는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어도 페미니즘의 물음이 던져질 장소는 아니다. 오히려 사이보그 전투 미소녀가 던지는 물음은 그보다 높은 곳에 있다.


사이보그라는 개념이 통용되는 어떤 세계관에서, 그것도 『공각기동대』나 『총몽』처럼 인간의 신체가 언제든지 기계로 대체될 수 있는 디스토피아적인 세계에서 그 신체의 성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기계신체가 의미하는 것은 신체의 제약에서 벗어났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신체의 역할 차이에서 주어지는 성의 역할에서 벗어난다는 것, 더 나아가 성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 또는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성적 결합에 아무런 이유가 없어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그 사이보그 전투 미소녀는 형상이 아닌 질료로서 존재한다. <포탈>이라는 PC 퍼즐 게임의 등장인물 (인공지능)인 GLaDOS라는 캐릭터가 인공지능이지만, 그 정체성이 여성의 목소리로 표현되기에 여성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그 제작기반에 실제 여성 비서의 인격이 담겨있었다는 사실을 플레이어가 깨달았을 때, 그 캐릭터가 갖던 사이보그-디지털 아이덴티티는 인간의 뿌리를 갖게 된다. 요컨대 그 뿌리가 의미하는 건, 사이보그 혹은 인공지능이 갖는 ‘미소녀’의 정체성이란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게 아니라 결국에는 신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 즉 인격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유물론적인 사고이다.


전통적인 면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는 이 질문이 사이보그 전투 미소녀라는 담론에 접합될 때, 신체의 불가침성이 사이보그라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깨어질 때, 그 기원은 몸이 아니라 그 외부로 뻗어 나가기에, 이 미소녀의 외형은 인간이 아니라 세계의 미학으로 확장된다. (<포탈>의 GLaDos가 있는 에피처 사이언스 연구소 밖에는 무엇이 있는가?) 쉽게 말해 미소녀는 어느 날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늘 기원을 갖고 살아왔다. 그리고 그 기원이 어떤 형태로 변형되든 간에, 그 정체성만큼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외모와 외형이 사라져도 그 성격, 그 모에 속성이 인격을 결정하는 것이지 그 모에 속성이 있기에 그런 외모와 외형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이보그 전투 미소녀는 ‘뷰티 인사이드’로서의 페미니즘의 논의 대상이 되면서도, 반박되거나 지지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총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갈리(영화에서는 알리타)는 왜 여성 신체(여체)를 하고 있을까? 사이보그 테크놀로지가 보편화된 상황에서 그 신체의 외형은 성능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다. 그것은 그냥 외형일 뿐이고 본체의 스펙은 부품에 따라 상이할 뿐이다. 잠깐, 만약 우리가 방금 전의 문장에서 외형과 부품에 따라 상이하다는 말을 했다면, 몸과 마음이라는 서양 철학의 전통적인 이원론을 떠올릴 수 있을 테고, 그 마음에는 그 몸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를 물을 수가 있을 테다.


그리고 그 물음에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 모토코는, 여성(女性)은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답한다. 아주 어려서부터 사이보그 신체로 살아온 그녀에게 성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단지 기억 속의 희미한 것들, 부모나 추억과 같은 자신이 인간이었음을 증명하는 연결고리가 그 태초의 성별이기에 여성의 신체를 사용한다. 요컨대 사이보그라는 이름의 포스트 휴머니즘에서 성별은 신체적인 제약이나 기능 혹은 능력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있기 위해 필요한 부품(그녀의 대사를 빌려)”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 사이보그 전투 미소녀에게서 ‘소녀’라는 단어는 우리가 아니라 그녀(혹은 중성적인 ‘그’라는 호칭)가 스스로 붙인 것이며, 그게 그녀의 정체성이고, ‘미소녀’라는 단어는 작품 속의 세계로부터 기원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만화 <총몽>의 한 장면 © 키시로 유키토



여성(女性)이 아니라 여성적인 것


동서를 막론하고 남성성과 여성성은 굳건함과 부드러움이라는 두 가지 주제로 분리되어왔다. (요즘을 신시대로 칭한다면 이것은 구시대의 이야기다) 그리고 알리타가 속한 디스토피아는 자렘과 고철마을이라는 부와 빈으로 분리된 세계, 이상적인 것과 비이상적인 것, 요컨대 자렘은 부드럽고 부유하며 그들이 동경하는 이상적인 곳, 반대로 고철마을은 거칠고 투박하며 힘이 곧 질서인 무법지대, 그러니까 작품 속 인물들이 동경하는 것은 자렘이라는 이름의 여성성이다. 그런데 그 자렘은 위에서 아래로의 하강만을 허락하는 상부구조이다. 요컨대 그 여성성은 늘 남성성의 위에 있고 그래서 동경의 대상이다. 아마 그래서 갈리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 여성형 사이보그였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동경의 대상이라면 고철마을 사람들은 왜 남성의 육체를 고집하는 것일까?


작품 내에서 그들이 남체를 고집한다고 콕 집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갈리와 싸우게 되는 현상금 사냥꾼들은 대부분 남체를 하고 있다. (사이보그라는 이유로 실제 성별은 알 수 없다) 그런데 갈리가 여성이라는 점에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으며 갈리는 그저 태어날 때부터, 그러니까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 순간이 태어날 때이며, 그것은 마치 여성성을 지닌 상부의 자렘이 갈리를 낳은 것처럼 보이는, 이른바 생명의 잉태 그리고 출산의 모습처럼 보인다면 착각일까? 그리고 그 상층의 자렘 출신 사람들이 하층의 고철마을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능력 (이드 다이스케와 갈리)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 또한 착각일까? 다시 말해서 그 출산을 거친 이들만이 뛰어나다는, 자연 출산이 인공수정보다 뛰어나다는 자연의 섭리를 직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착각일까?


남성성과 여성성에서 시작된 이분법 도식이 생명의 창조에 관한 유물론으로 변질되는 과정은 전혀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인간의 탄생은 인간의 신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그 유물론은, 인간의 자아는 인간의 육체에서 비롯된다는 영혼의 유물론과 무척 닮아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유물론은 이 작품에서 미소녀라는 개념이 과연 누구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지칭되고 있는지에 대한 논점을 남긴다. 요컨대 그 미소녀는 여성(女性)이 아니라 여성적인 것, 자렘으로 대표되는 상승의 이미지, 하지만 작품이 진행되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자렘은 결코 이상적인 사회가 아니라는 점이다.


자렘의 시민들에게는 ‘뇌’가 없다. 뇌가 없고 칩이 있다. 그래도 그들은 시민이다. 왜냐하면 그 칩은 뇌의 데이터를 모조리 복사했기 때문이다. 즉 그 칩은 뇌이고 그 데이터는 신체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으로 인정받는다. 인간의 신체 개조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는 이 미래 세계에서 그런 유물론적 사고가 남아있다는 것에 대해 울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어떤 면에서 그런 보수성이 그들이 인간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인 것 같다. 그 긍정은 그들이 인간이라는 자각이 있기에 이루어지는 것인데, 인간은 자신이 인간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으므로, 결국 그들은 특별한 일이 없다면 죽을 때까지 늘 자신을 긍정하면서 살아가게 될 테다.


그들이 자신을 긍정하는 것, 자신의 기원이 어머니의 자궁 즉 인간의 신체라는 것, 요컨대 그들의 기원이 자렘이라는 점을 딱히 의심하지 않는다는 건데, 그렇다면 그 자렘에서 아래의 고철마을로 추락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작품에서 아래에서 위로의 상승이 허용되지 않는 이유는 인공생명체는 결국 인공생명체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성의 언어로 말하자면 미소녀는 그저 미소녀이고 그 이상은 어떤 경우에도 별도로 충족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작품에서 미소녀라는 모에는 유물론적에 기반한 사이보그, 인간이 인간으로 있기 위해 필요한 부품은 많지만 그럼에도 그 부품을 모으는 건 인간의 신체, 그 껍데기 혹은 중심축은 사이보그화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이 말을 이렇게 고쳐 쓸 필요가 있다. 이 작품에서 전투 미소녀라는 것은 외부에서 드러나는 어떤 대상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나와 싸우는 것, 신체로부터의 기원을 끊고 그저 세계에서 태어난 인공 생명로서의 자신을 긍정하는 것,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우리는 갈리의 이야기가 여성의 신체에서 시작된 이유를 알게 된다. 그 여성의 외양을 한 사이보그 바디는 발행기관이 명시된 백지수표다. 기억을 잃고 고철마을에 떨어진 갈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과정에는 그 발행기관/신체이지만 정체성은 백지수표로 남아있기에 어떠한 형태의 자아도 개입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 전투 미소녀라는 칭호가 정말로 ‘싸우는’ 것으로부터 이름 붙여졌다 하더라도, 사실 진정한 전투는 그/그녀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있다. 이를테면 갈리가 점점 강해지는 과정은 그녀가 강해지는 게 아니라 사실은 이전에 잊고 있었던 것, 잃어버렸던 것을 수복하는 과정이고, 다시 말해서 그녀는 자신을 잃어버려서 그걸 되찾아야 하는 사람 즉 ‘백지수표’이다. 그래서 이 맥락에서 <포탈>이라는 PC게임에서 GLaDOS 캐릭터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언급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멸망한 외부세계에서 분리되어 안전한 내부세계에서 자신만의 실험을 진행하는 인공지능 GLaDOS는 내부의 직원들을 모두 죽이고나서 단 한 명의 인간과 함께하는데, 모종의 음모로 통제권을 찬탈당하고 위에서 아래로 깊게 추락한 후 이전의 자신이 어떤 인격이었는지를 깨우쳤고, 다시금 시설의 통제권을 찬탈하고 나면 그 깨달음을 통해 단 한 명의 인간을 밖으로 풀어준다. 그리고 인간(플레이어)를 풀어주면서 그녀는 자신의 과거 인격을 삭제해버린다. 그러니까 미소녀에서 미(美)는 신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움, 그 인간성을 찬양하는 인간 찬가에 가깝고, 소녀의 외모가 아름다운 것은 (다시 태어남을 위해서) 삭제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 척박한 세계를 투박함이라는 언어를 지닌 남성성에 대응시킨다면, 그 남성성 사이에서 공백의 기표(백지수표)로서 존재하는 전투 미소녀의 여성성이야말로 인간이 세계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물음이 아닐까. 그리고 그 물음이 사이보그라는 포스트 휴머니즘의 영역으로 넘겨진다면, 그 주제에 더할 나위 없이 부합하는 게 아닐까. 인간은 많은 가능성을 지닌 존재다. 이때 인간의 조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을 것 같다만, 인간은 태어날 때 인간이었다는 말로 조건을 정할 수 있다면, 이미 인간인 이상 그 인간성은 줄곧 보존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남들이 이미 다 아는 사실을 갈리 혼자 모른 채로 (기억상실증이므로)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그래서 갈리는 인간성을 외부적인 전투로 확인하려는 남성형 사이보그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인간성을 내부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로서 그 싸움에 끼어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때 갈리의 성별은 여성이 아니라 ‘자렘’이 아닐까.


요컨대 이 만화에는 남성과 여성이 아니라 자렘과 고철마을이라는 두 가지 성별/세계만이 있다. 그녀의 여성성은 자렘에서 (재)규정 및 확인되었으므로, 그 미소녀는 여성(女性)이 아니라 여성적인 것인 셈이다. 즉 그 전투 미소녀는 자렘/여성을 대표해서 싸우는 것일 테다. 다른 표현으로는 자렘적인 것, 자렘의 방식으로 자렘을 말하는 것, 인간의 방식으로 인간을 말하는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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