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퐁>(2014)
유아사 마사아키의 작품에는 늘 그만의 특색이 있다. 마치 지문처럼, 이 작품은 유아사가 만들었노라고 선언하는 족적이 어딘가에 찍혀있다. 애니메이터이면서 애니메이션이라는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 그의 창작기법에는 플래쉬와 같은 현대적인 질감도 있고, 동시에 파스텔톤과 크레용이라는 따스한 색감도 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유아사 마사아키의 강점은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말한다는 점에 있다. 이게 무슨 뜻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을 직접 보는 게 더 빠를 테지만 그럼에도 예를 든다면, 그의 작품에서 그려지는 하나의 쇼트에는 앞에서 뒤쪽으로 원근법이 제정되고 있으면서도 위에서 아래로는 인체의 비례가 무시되는 현상이 자주 목격되고는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현실도 가상도 아닌 그사이의 어딘가를 보는 듯 느껴진다.
아마 이 모습에 가장 근접한 설명은 현실과 가상이 한데 어울리고 있다는 게 맞을 테다. 두 마리의 용이 서로를 감으며 승천하듯 그의 쇼트에는 날렵한 선들이 꼬아 올라가고 있다. 앞을 보면 뒤가 멀어지고 뒤를 보면 앞이 멀어지는 그의 그림체는 현실의 카메라가 보여줄 수 없는 환상을 우리 눈앞에 보여준다. 이것을 두고 우리가 내릴 수 있는 평가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왜 이리 그림체가 유동적이냐는 것이고 둘은 왜 이리 그림체가 환상적이냐는 것이다. 분명 미적인 수려함을 담지한 타 애니메이션의 그림체에 비하면 그의 그림체는 별 볼 일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의 애니메이션에서 그 별볼일 없는 그림체가 갖는 강점은 따로 있다. 날렵한 선들이 꼬아 올라가는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마성의 과즙, 영화의 맨살 (하스미 시게히코의 비평집 이름이기도 한)을 들여다보면 비쳐 보이는 그로테스크한 상피, 고무처럼 쭉쭉 늘어나는 그림체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가 유아사 마사아키의 작품을 보며 느끼는 점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영화의 땅에서 목격한 유아사 마사아키의 작품,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그리고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는 모리미 토미히코와의 협업에 의거한 바가 있다. 모리미 토미히코라는 작가의 스타일이 그와 맞았기도 했지만 유아사 마사아키가 흔쾌히 수락한 것도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었던 밑바탕이었다. 그 작품에 대한 설명.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에서의 인어 루가 흥겨운 노래를 부를 때 우리는 결말을 위해 노래하게 된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에서 주인공 ‘나’가 짝사랑 상대를 향해 구애할 때 우리는 그를 따라 찌질히 걸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이때 문득 떠오르는 의문점 하나. 유아사 마사아키는 단순히 그림만을 그리는 사람인가? 요컨대 만화에서 스토리 작가와 그림 작가가 따로 있듯이, 그는 단순히 그림 연출만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 다른 표현으로는 특정 작가와의 협업에서만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우리는 그런 것을 생각해 본다.
만약 그런 생각을 했다면 질문을 던지고 물음에 답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유아사 마사아키의 흔적을 거슬러 오른다 그리고 목격한다. 2004년의 <마인드게임>뒤로 펼쳐지는 유아사 마사아키라는 이름의 은하(<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의 다다미 갤럭시), 하지만 그 중에 잠시 쉬어갈 만한 곳을 꼽으라면 단언 <핑퐁>을 꼽을 수 있다. 2014년에 그러니까 그의 공식 데뷔작인 <마인드게임>으로부터 10년 뒤에 시작한 이 TV 애니메이션에는 그가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 어떠한 경지에 다다랐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속속 숨어있다. 위에서 했던 말을 복기하자면 이 작품에서 우리는 그가 단순히 일러스트레이터에 불과하지 않고 감독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즉 원작도 그림도 상관없다 이것은 그저 유아사 마사아키라는 감독일 뿐이다.
웹툰의 형태를 빌려온 <핑퐁>
<핑퐁>의 그림체는 상당히 특이하다. 로토스코핑 기법(대고 그리기)을 사용한 듯하면서도, 구도를 보면 로토스코핑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는 불쾌하다고도 말하는 이 그림체에서 우리는 유아사 마사아키 연출의 특징인 제멋대로 원근법을 다시금 확인한다. 즉 그에게 그림체는 어찌 되었든 별 상관이 없는 듯 보인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유아사 마사아키라는 타이틀은 이 작품에서 조금은 다른 영역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연출기법은 우리가 흔히 웹툰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영화의 방식으로 옮겨놓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영화에서는 카메라가 주목하는 곳이 하나의 쇼트라면 웹툰에서는 시선이 닿는 끝 지점을 원하는 테두리로 포장하는데, 이 작품에서의 카메라/시선은 작가/인물의 시선이 닿는 지점에 대응한다. 쉽게 말해 하나의 테두리에 여러 개의 쇼트가 침투한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이것은 영화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연출이다.
웹툰을 이루는 컷이 한 장면에 침투해온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웹툰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하나의 쇼트에서 수 개의 쇼트가 줄곧 침투해오는 방식은 만화가 카메라의 형태, 말풍선과 같은 형식적인 것으로도 운동이미지를 표현해냈다는 점에 의거한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영화의 언어로 보면 이 작품은 하나의 쇼트에 여러 쇼트가 공존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마치 벌집과도 같다. 들여다보면 별개이고 멀리서 보면 하나이다. 더 나아가 서사에 침투하면 이것은 개인의 삶이면서 작품 자체이기도 하다. 여기까지는 담론의 영역, 영화도 충분히 할 수 있는 행위다. 그런데 이것은 웹툰의 형식, 카메라의 포착이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 누구를 포착할 것인가 라는 카메라 역사의 무구한 물음은 이 작품에서 ‘모두다’로 변화한다. 누구를 보듬으면 누구는 소외되는 상황이 이 작품에서는 벌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작품은 쇼트 밖에 존재하는 그림 틀의 형식에서 운동 이미지를 빌려온 후 그것을 담론의 층위에 꽂아 넣는다. 담론의 층위에 침투 혹은 삽입하는 운동 이미지의 모습은 그것이 카메라의 시선이 향하는 지점으로 보이도록 하고, 여러 시선이 하나의 담론으로 침투하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비교를 위해 영화를 소환하자면 영화라는 매체의 근본적인 한계는 카메라가 단지 하나뿐이라는 점에 있다. 즉 영화의 시선은 늘 하나이다. 적어도 물리적인 면에서는 그렇다. 영화의 시선은 인물의 관계 혹은 욕망을 읽어내는 담론의 층위에서 벌어지고 교차하기 마련이다. 카메라는 단지 하나일 뿐이고, 그것을 잘라 엮을 수는 있어도 한 화면에서 물리적으로 두 개 이상의 화면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택한 것은 근경에서 후경으로 관통하는 딥포커스, 렌즈의 깊이를 통해 쇼트의 깊은 곳으로 시선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영화의 시선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나아가는 것에 특화되어있다. 그것을 찍는 게 딥포커스이고 그것을 찾아보는 게 롱테이크이다. 결국 영화에서 관객이 할 수 있는 것은 영화의 깊은 곳으로 줄곧 들어가기만 하는 것으로 한정되어있다. 요컨대 영화에서 관객은 동굴의 탐사자이다.
빔 밴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바로 그것이리라. 위에서 아래로의 종이동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카메라의 시선을 옆으로 돌리면 단박에 횡이동으로 변화하게 된다는 놀라움이 깃들어있다. 빔 밴더스는 이 영화를 통해서 영화에는 시선이 있다는 점을 말해주었다. 무슨 시선인가 하면 그것은 관객이 스크린을 본다는 단 하나의 시선이 아니라, 천사의 ‘시선’이 곧 도시의 시선을 따라잡는 이 영화에서 우리는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시선의 분할을 보게 된다. 천사는 도시가 되어 빈민의 이야기를 듣고, 쓰고, 날개를 접어 땅으로 내려온다. 이쪽(근경)에서 저쪽(후경)으로의 이동, 이것이 위에서 아래로의 하강이 될 때 그것은 인민을 보듬는 따스함이 된다. 사랑을 깨우친 천사는 날개를 잃었고, 투명함을 잃게 되었고, 시선의 이동을 가능케 하던 날개가 은폐장치임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카메라의 역할이었음을 깨닫는다. 즉 사랑을 깨우친 카메라는 투명함을 잃고 만다.
사랑을 깨우친 카메라가 투명함을 잃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빔 밴더스의 이 영화는 그가 영화에 보내는 러브레터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나는 <핑퐁>이 유아사 마사아키가 애니메이션에 보내는 러브레터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애초에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논리적으로 풀어낼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품에서 만화가 영상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본다. 작가가 그려내는 것이 상상적 시선이 투과되는 세계의 특정한 지점임을 고려할 때, 그 컷 자체에 운동 이미지가 깃들어 있다는 점은 단순히 제4의 벽이라든가 하는 형식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물질이 세계의 벽을 뚫고 어떻게 나아가느냐에 대한 질문이 될 수 있다. 요컨대 나는 유아사 마사아키가 웹툰의 형태를 영상 위에 소환한 이 작품은 만화라는 매체에 대한 존중, 혹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영화를 존중하여 영화에 애니메이션의 물감을 적절히 입혔던 것처럼, TV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화의 질감을 구현해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애니메이션 감독인 그가 애니메이션이 아닌 만화의 형태에 천착했다는 사실 자체로도 그것은 충분히 사랑일 테다.
꿈을 향해 전력투구하는 이들의 모습
이것은 탁구 만화이다. 다시 한 번 반복, 이것은 탁구 만화인가? 이에 대한 유아사 마사아키의 답변은 애니메이션이 만화를 말하는 방법에 대한 자신만의 연구라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하나의 쇼트는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요컨대 평면으로 이동하는 이 쇼트에는 근경에서 후경을 가로지르는 심도가 없다. 애초에 애니메이션이라서 그렇다고 말한다면 애니메이션에서도 영화 기법을 적용하는 작품은 꽤 흔하다고 말해둘 수 있겠다. 쉽게 말해 이건 온전히 그의 선택이다. 애니메이션, 그것도 TV라는 평평한 판자에서 방영되는 이 작품에서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별개의 쇼트는 핑퐁게임에서 벌어지는 운동의 형태를 아주 잘 반영하고 있다. 단적으로 생각해보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던져지는 공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던져지는 ‘쇼트’로 표현될 때 그 쇼트에는 탁구에서 벌어지는 힘의 물물교환이 그대로 옮겨가게 될 테다. 그러니까 탁구에서 ‘핑’이 있다면 ‘퐁’이 있듯, 그 핑퐁에는 반대항의 쇼트 또한 있을 것으로 자연스럽게 예측할 수 있을 테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와의 대화, 즉 티키타카이다. 우리는 그가 말하려는 것을 눈치채어 다시금 질문을 던지고 이때 영화도 질문을 받아 다시금 대답하게 된다. 영화가 살아 숨 쉬게 되는 것은 우리가 질문을 던질 때뿐만이 아니라 그가 던지는 질문을 날렵히 잡아챌 때도 해당한다. 결국 이것은 살아 숨 쉬는 쇼트 쉽게 말해 옹기이다. 옹기는 단단해 보이지만 공기가 통한다. 이것을 영화의 언어로 번안하면, 쇼트는 단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담론이 통한다. 그래서 영화를 분석하는 작업은 자신이 그에게 무슨 질문을 던졌고 어떤 답변을 받았는지의 문제이지 그것이 합리화될지 말지는 개인과 타인 선의 문제이다. 요컨대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자신이 얻은 답변을 토대로 세계를 구축하고, 그 세계를 타인의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 입출력 규격을 맞추는 게 바로 영화의 담론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핑퐁>에서 목격하는 것은 여러 쇼트가 한데 어울리는 하나의 쇼트, 세계 속의 개인이 겪는 종횡이동, 하나의 시선에서 어떻게 서로를 감싸 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그 부분을 가정하고 작품을 보게 되면 우리는 인물이 주고받는 대화를 ‘말없이’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핑퐁을 하는 것에 말이 필요하던가? 말은 필요하다 그러나 말과 행동은 다르다. 언행일치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시각과 청각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점에서 우리는 탁구의 운동과 쇼트의 운동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를 목격하게 된다. 이를테면, 축구경기를 볼 때 카메라는 늘 하나의 시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 시선은 다채롭게 변화하는데 사실은 여러 곳에서 여러 대로 경기를 찍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경기를 중계하는 하나의 화면 뒤에 숨겨진 여러 카메라의 시선을 염두에 두면서 경기를 보게 된다. 그중에 어떤 것이 주요한 시선으로 선택될지는 감독의 권한이겠지만, 하나의 시선에서 여러 갈래로 파생되는 담론을 목격할 수 있다면, 그 모습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자명하다. 이 시선은 다른 시선과 어떤 방식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을까? 이곳에서 저곳으로 한 붓 그리기, 혹은 바늘 꿰기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이것이 쇼트의 연결성을 담보하는 콘티뉴이티의 차원이 아니라 인물과 인물 사이 단지 내부뿐만이 아닌 안팎을 관통하는 담론 측면의 ‘딥포커스’라고 생각한다. 삼차원에서 유입된 시선이 스크린이라는 벽에 가로막히는 순간, 그것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다. 어쩌면 우리는 담론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 모습에서 TV 애니메이션은 필연적으로 분절된다는 사실을 떠올려볼 수도 있을 테다. 총 11화로 분리된 이 애니메이션은 11회에 걸쳐 인물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는데, 요컨대 그것은 하나의 시선이 아니라 11번의 시선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 속에서 노력하며 살아가는 어떤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박진감 넘치는 탁구경기는 공이 아닌 대화를 대변하고, 거칠지만 서툰 방식으로 ‘대화의 맨살’을 드러내 보이는 게 그 쇼트의 형식이다. 스포츠인은 말이 아닌 몸으로 말한다는 것, 마음가짐이 공에 드러난다고 말하는 어느 스포츠 장르의 뻔한 이야기를 장르의 형식이 온몸을 다해 보조할 때, 그것은 꿈을 향해 전력투구하는 이들의 모습이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tZzhH5pO3G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