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노와 초호기, 전쟁과 인류보완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1997)

by 수차미


<신세기 에반게리온 -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 가이낙스




네오 ‘새로운 것’


일본의 90년대에 당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오토모 카츠히로가 <아키라>를 제작한 게 1988년이고 안노 히데아키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제작한 게 1995년이다. 이 두 가지 작품은 제작비로나 설정으로나 유사한 점은 없지만, 큰 틀에서 보면 시대의 흐름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아키라>에서의 기괴한 신체변형이 대폭발로 이어진다는 점을 안다. 그리고 이건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이어지는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도 동일하게 재현된다. 힘을 탐하던 인류는 손에 들어온 것을 주체하지 못하고 기괴하게 변형되고, 그 결과 수십 년 전에 겪었던 사고를 다시금 겪게 된다. 두 만화 모두 1945년을 떠오르게 하는 버섯구름으로 나라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리고, 세월이 흐르고 작품의 내러티브가 진행되는 장소로는 ‘네오도쿄’가 지정된다.


이때 네오도쿄로 흘러들어오는 것은 다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로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인간의 탐욕이 있다. 두 번째로는 시간이 흘러 등장한 주인공 세대가 있다. 여기서 전자는 과학으로 파괴된 나라를 과학으로 재건하려는 탐욕을 보여주고, 후자는 사고를 수습했던 이들이 기성세대가 되어 주인공인 자녀세대와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네오도쿄라는 미래는 그들이 사는 현재와 다르지 않다. 혹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1945년을 기점으로 멈춰버린 시간대에서, 이후의 시간은 모두 ‘네오’ 즉 ‘새로운 것’이 된다고 말이다.


멈춰버린 시간이 있다면, 그 위로는 새로운 시간이 흐르게 된다. 그런데 흘러야 할 시간을 거부하며 멈춰버린 시간에 갇혀 있으려고 든다. 우울증의 형태로 신경증을 동반하는 이 병의 이름은 ‘트라우마’다. 트라우마가 보편적인 마음의 병이라는 점에서 별 게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1945년과 ‘네오’를 대입할 때 그 트라우마는 다른 속뜻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예를 들어 위의 두 작품에서 인간 찬가를 부르짖으며 자신들의 과오를 극복하려 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과오를 인간이라는 종의 개인적인 한계로만 생각한다는 점이 밝혀진다. 이 논리에 따르면, 인간은 혼자 있을 때 나약하지만 뭉치면 강한 존재, 즉 프로메테우스적인 존재다.


그러나 집단 지성으로 일구어낸 신화가 나치당의 창립과 같은 그릇된 이성의 형태로 나타나자, 그것을 두고 인간 개인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전체 속의 개인이라는 주제의식은 이 부분에서 만들어진다. 다르게 말하면, 전체주의 혹은 군국주의가 불러온 몰락은 일본이라는 나라 전체에 대한 회의감을 불러일으켰다. 정확하게는 일본인이라는 ‘종’ 자체가 문제이고, 그런데 자신들은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에 몸담고 있으니, 나라가 어떻게 되든 간에 정체성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들은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허나 일본의 90년대에 나온 두 작품이 흥미로운 건, 단지 그런 점 때문만이 아니다. 과학을 향한 탐욕과 거기에 군국주의를 감미하여 자국을 비판하는 작품은, 이미 1950년대에 데즈카 오사무가 만들어 낸 <철완 아톰>이 있었다. 요컨대 <아톰>에서 파생된 메카물의 계보는, 이데올로기의 분할과 합병을 거치며 90년대의 두 작품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또한 기성세대와 자녀세대의 대립이란 주제는, 자체로만 보면 딱히 특이할 것도 없다. 이른바 전전과 전후, 두 개의 이데올로기가 하나의 국토에서 싸우는 형국은 ‘하나의 신체와 두 개의 영혼’이라는 테마로 반복해서 나타났으니 말이다. 나가이 고의 70년대 <데빌맨> 시리즈가 이에 대한 좋은 예고, 이후 오시이 마모루가 만들어낸 90년대 ‘케로베로스 사가’와 ‘<공각기동대> 시리즈’는 그 연장선에 있다.


그런데 여기서 특기할만한 지점이 나타난다. 전자는 인간과 악마 후자는 인간과 기계를 다루고 있는데, 각각의 메타포가 ‘세계’라는 광범위한 주제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이른바 ‘하나의 신체’에 일본이 아니라 세계 전반을 대입한다는 점에서 이 움직임은 심상치 않다. 예를 들어 주체와 타자이지만 결국에는 같은 ‘종’이 아닌지를 물을 수 있겠고, 여기서 침투하는 것은 일본인의 자아의식이다. 도이 다케오에 따르면 일본인에게는 아마에(甘え)라는 게 있는데, 그대로 읽으면 어리광이라는 뜻이 된다. 이때 그는 이것을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에 빗대면서, 일본인의 주체의식은 타자에게 비춰지는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어머니가 바라는 자녀상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크리스테바의 아브젝시옹(abjection)을 떠오르게 하는데, 타자를 경유하는 자신이 이루어낸 바다에서, 원류에 해당하는 주체는 점진적으로 희미해진다는 점이 그렇다. 요컨대 어머니가 바라는 자신과 자신이 되려는 자신 사이에서 주체의 입지는 모호해진다.


타자 속의 개인, 개인 속의 타자


인간이 아닌 이들이 인간이 아닌 것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아니게 되어야만 한다. 괴물을 이기기 위해 괴물이 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사도 침공을 막기 위해 출격하는 에바는 신체적으로나 파일럿으로나 그들이 무찌르려는 괴물과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이다. 사도와 인간의 유전자가 99.9퍼센트 일치한다는 말이 그들 신체의 동일함을 설명해주고, ‘인조인간’ 에바에 탑승하는 게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들 사도의 영혼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이를테면 에바의 재료는 아담과 릴리스의 신체인데, 여기에 인간의 영혼을 통해 파일럿을 매개한다. 결국 다를 바 없는 양측의 괴물들을 보여주면서, 선과 악은 상대적인 것일 뿐이라고 작품은 말한다. 또한 이에 따르면 ‘종’이라는 개념은 상대적이어서, 전체 속의 개인이라는 말은 종을 구분하지 않은 인간 전체로 확대된다. 여기서 인간과 개인의 관계, 이른바 타자 속의 개인과 개인 속의 타자가 기원하게 된다.


타자 속의 개인과 개인 속의 타자라는 주제의식은 <에반게리온>을 정신분석학으로 읽게 해주는 일등공신이다. 선과 악이라는 표면적인 구조 아래에는 주체와 타자를 가르는 게 무엇인지에 관한 물음이 전제되어 있다. 사도들이 사용하는 AT 필드를 마음의 장벽에 직접 연결한다는 점에서 이 메타포는 명징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여기서 주체와 타자는 개인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일본인과 일본국가라는 사회적인 측면으로도 해석된다. 일본인종의 본질을 순수한 것, 창세신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남매를 아담과 릴리스라는 기독교의 발원지에 대입하면서, 인간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추방시키고 그들로부터 방어해야만 하는 의무를 부여한다. 이 모습은 공격성이 거세되어 방어본능만이 남은 일본 평화헌법을 떠오르게 하면서도, 신체 안에 갇힌 영혼 즉 소통하지 않는 현대인을 떠오르게 한다. 다른 측면으로 보면 개인주의가 발달한 일본사회, 사회 속의 개인과 그런 사회를 주체의 자리에 놓고 살아가는 개인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른바 아마에다.


이런 식의 사고를 따라가다 보면, 아담과 이브에 대응하는 아담과 릴리스 포지션에서 릴리스가 인간의 모태가 된 것은 ‘어머니’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즉 여성인 동시에 신이기도 한 릴리스는 일본 사회에서의 정신분석학적인 어머니, 또는 신화적 의미에서의 덴노를 뜻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릴리스가 네르프 기지 지하에 영혼을 잃은 채로 잠들어 있던 것은 실권 없이 상징으로만 남게 된 현대 사회의 덴노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그런 덴노의 미숙한 복제품인 에반게리온 초호기는 복사된 상징이며, 그 속에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품을 수 있으므로 메타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요소라 말할 수 있겠다. 따라서 신지의 어머니가 영혼의 형태로 초호기에 자리한다는 점이 신지의 탑승을 일종의 임신에 빗대게 해준다면, 덴노의 신체와 정신분석학적인 어머니가 결합하고 그 속에는 일본인이 탑승해야만 비로소 ‘나라는 이름의 타자(=사도)’를 무찌를 수 있는 것일 테다.


실권이 없는 덴노를 움직이는 건 네르프와 제레라는 정치적 단체, 국가이다. 그런데 제레가 바라는 것은 모든 인류가 LCL 용액으로 환원되어 새로운 종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이때 LCL 용액에서는 AT필드(=마음의 장벽)라는 게 존재하지 않게 되는데, 그렇게 주체와 타자 개념이 없는 세계가 LCL 용액으로 가득찬 바다, ‘원시 바다’로 묘사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칼 융이 말하는 집단 무의식 개념을 그대로 옮겨온 이 모습을 보면서 아브젝시옹과의 연결 고리를 찾아낸다면, ‘인류보완계획’이 곧 일본인종을 태초의 지점으로 돌려놓으려는 시도임을 눈치챌 수 있다. 요컨대 모든 인류가 하나가 된다는 말은, 덴노의 재림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자는 말이나 다름없다. 안노 히데아키는 이 부분을 통해 군국주의의 탄생과 그에 대한 비판을 겸하는 듯 보이는데, 2차 세계대전 시기에 국민과 군인들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된 게 유일 민족 그리고 덴노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작품에서 에바를 통해 사도를 무찌르는 행위는, 과학기술과 덴노 사상의 결합이 불러온 전쟁의 비극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하지만 세컨드 임팩트가 곧 2차 세계대전의 메타포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이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퍼스트 임팩트는 풀리지 않는 실마리로 남게 된다. 오히려 세컨드 임팩트를 1차 세계대전에 대입해야만, 세컨드 임팩트와 서드 임팩트 사이를 보여주는 작품의 내러티브를 설명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멸망의 시기로 달려가는 일본 국가의 모습과, 그것을 막으려는 신지의 마지막 선택이 도드라진다고 볼 수 있다. 혹은 이런 표현도 가능하다. 인간의 이성이 거부되는 현장을 목격한 기성세대는 자신들을 반성하려 하고, 전후를 살아가며 패전국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로 살아가는 자녀세대는 윗세대에 대한 의문과 현재를 위해 과거를 되돌리고 싶어한다고 말이다. 따라서 타인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 예스맨이 되어버린 신지가, 아버지의 칭찬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행동하게 되었다는 점은 그런 점을 묘사한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일본인의 아마에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벌어졌는데, 아버지의 이름으로 쓰인 아마에를 부정하고 어머니의 이름으로 쓰인 아마에를 선택하자 세계는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덴노와 전쟁, 인류보완계획


아담은 사도를 만들어냈고 릴리스는 인간이라는 사도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아담을 남성으로 그리고 폭력성으로 연결한다면 아담의 자손인 사도의 침공은 남성성의 침공이 된다. 그렇다면 사도에 대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남성성과 남성성의 대결이라 볼 수 있고, 하지만 정작 두 존재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태어났으니, 인간은 ‘어머니가 품은 아버지’라는 이질적인 자리에 서게 된다. 말하자면 어머니가 품은 아버지는 ‘아마에가 촉발한 군국주의’나 다름없다. 이 대목에서 신지와 아버지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단순한 부자 관계가 아니라 전쟁을 둘러싸고 나뉜 기성세대와 자녀세대라는 주장이 다시금 확인된다. 예를 들어 겐도는 아내 유이의 육체에 릴리스의 영혼을 담은 레이를 만들어냈는데, 이를 풀이하면 어머니의 육체에 어머니의 영혼을 담은 게 레이다. 반면 릴리스의 분신인 에반게리온 초호기에는 유이의 영혼이 들어가 있는데, 이를 풀이하면 어머니의 육체에 어머니의 영혼이 담긴 게 된다. 이후 레이가 릴리스의 육체 안으로 들어간 후 에반게리온 초호기와 융합된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인간의 어머니와 신지의 어머니가 각각 몸과 영혼을 되찾게 되는 게 된다. 말하자면 서드 임팩트는 일본이라는 국가와 일본인이라는 개인을 전쟁 이전의 시기로 되돌리려는 시도인 셈이다.


S2 기관이 생명의 씨앗이라는 점에서 이 구도는 선명해진다. S2 기관이 있어야만 비로소 완전해진다는 에반게리온 초호기를 보면, 자궁에 수정란이 없으면 잉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하다. 다르게 말하면 아이를 잉태한 여성, 어머니야말로 비로소 신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게 된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는 동정녀 마리아가 아니라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남매로서 결혼에 다다랐다는 점을 떠올려야 한다. 아담과 릴리스를 아담과 이브에서 따왔다면,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었으니 유전적으로 남매라고 할 수 있겠고, 그런데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어 아이를 낳으니 일본의 창세신화와 유사하다. 따라서 아담과 릴리스 남매 모두가 인간의 기원이라면, 아담 없이 인류를 낳은 릴리스는 동정녀 마리아가 된다.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이 예수라는 점에서, 릴리스의 아들인 에반게리온 초호기는 예수에 대응한다. 따라서 에반게리온 초호기가 작품의 핵심키워드인 이유는, 예수님과 같은 신에 의존해왔던 인류가 신에 가까워지려는 모습을 통해 멸망에 이르는 모습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즉 이것은 일종의 바벨탑이다.


두 신화를 겹쳐볼 때 드는 기시감은 덴노에 가까워지려는 행위가 곧 바벨탑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다르게 말하면 덴노의 이름을 전쟁 이데올로기로 소모한 2차 세계대전은 실패로 끝날 것이다. 즉, 안노 히데아키에 따르면 초호기를 이용해 인류보완계획을 실현하려는 제레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야만 했다. 재밌게도 그는, 서드 임팩트의 순간에 초호기를 십자가 모양을 한 세계수(이그드라실)로 변형시키는 발칙함을 보여준다. 기독교에서 북유럽 신화로 이어지는, 배면에는 일본 창세신화가 담겨있는 이 장면은 덴노를 향한 광적인 심리를 보여준다. 여기에 예수의 외견을 한 초호기를 십자가에 매달아 성흔을 남기고, 롱기누스의 창이라는 쐐기를 박아 넣으며 그 덴노를 순교자로 만든다. 이때 덴노가 전범재판에서 면제되었음을 떠올려 본다면, 초호기의 순교는 그런 덴노를 지지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현실 역사와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초호기 안에 신지가 탑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장면을 두고 생명의 씨앗을 받아들인 어머니가 다시금 인류를 재창조할 힘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데, 동시에 신지를 자궁 안으로 되돌린다고 볼 수 있을 테다. 안노 히데아키는 LCL 용액에 녹아버린 신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것을 예고한 바가 있다. 그렇다면 인류가 남성성을 추구하려는 이유가 설명된다. 정신분석학의 맥락으로 보면 어머니의 모습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추구하려는 인류에게서 폭력성이 발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인류보완계획이란 그런 폭력성을 제거하기 위해 태초의 지점으로 돌아가려는 심리치료라고도 볼 수 있을 테다. 말하자면 작품 전체가 일본이 현재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 전후를 거치며 희석되었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당시의 폭력성이 남아있기에, 그것을 완전히 뜯어고치려면 모든 자아를 원초적인 지점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자신을 개인이나 사회가 아닌 국가에 곧바로 대입하는 사고방식에서,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는 사회 속의 개인과 ‘나’라는 개인 간의 내적갈등이 되어 버린다. <에반게리온>에서의 에바는 그 의도에 정확히 부합한다. 작품 내에서 주로 묘사되는 내적 갈등이 바로 그 부분에서 유발된다. 대체로 이 부분은 라깡식의 오이디푸스&엘렉트라 콤플렉스로 해석되는 모양이지만, 에바 파일럿들의 나이가 14살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학도병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맥락을 따르면 이 작품은 단순히 기성세대와 자녀세대의 갈등만이 아니라, 어른들이 아이에게 해주지 못한 것을 뜻하는 게 된다. 요컨대 우리는 어른과 아이를 국가와 장병의 관계에 대입해볼 수 있다. 아마 이 대입은 무리한 해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이 작품에서 유의미한 자리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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