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게리온 : Q>(2012)
다른 시간대, 다른 시점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서 무인도 편이라는 희대의 촌극을 벌인 안노 히데아키에게,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저예산이 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정확한 진상은 그들만이 알고 있겠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예산을 날려먹은 안노 히데아키는 허리띠를 졸라매야만 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든 작품이 대박 나버렸다. 예산의 한계로 본래 구상이나 연출의도를 온전히 구현하지 못한 부분이, 오히려 득이 된 것이다. 마치 이것은 일종의 게임과도 같았다. 맥락상으로만 드러나는 단어 하나를 두고 그것이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고 팬들은 추측했다. 하지만 안노는 침묵했고, 이에 팬들은 작품 속의 이미지와 상징을 조합해 퍼즐의 남은 조각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안노는 줄곧 침묵하다가, 미디어믹스를 통한 파생상품에서 자잘하게 설정을 풀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었다. 아마 최초의 성공은 우연이었을 것인데, 그 인기가 유지되는 건 안노의 공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사실상 미완으로 남은 작품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자. 단적으로 말해 이 작품의 25화와 26화는 오로지 예산 절감을 위해 편성된 화다. 26화 완결로 기획되었는데 예산은 촉박하고, 그럼에도 제대로 된 완결은 내고 싶으니 일단은 25화와 26화를 인물의 심리묘사만 보여준다. 그리고는 아직 제대로 된 결말이 나지 않았다면서 극장판으로 25화와 26화를 다시 만들어 개봉했다. 이때 타임라인은 극장판이 현실의 시간이고, TV판의 마지막은 극장판의 내적 시간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돈이 없어 결말을 흐지부지로 끝내기보단, 내면의 심리묘사를 예고편으로 깔아둔 후에 극장판을 만들기로 다짐한 듯 보인다.
안노 히데아키 본인이 말한 바는 없지만 정황상 이게 맞을 것이다. 방영 당시에도 이미 인기를 끌었었고, 원래 그런 컨셉이었기에 열린 결말을 내도 무난하게 버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 안노는 TV판의 방영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극장판 제작에 착수했다. 이 말인즉슨, TV판을 만들면서 이미 극장판 기획을 짜두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TV판이 TV도쿄의 예산으로 제작된 것과는 다르게, 극장판은 가이낙스 자사의 예산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안노의 선택은 합리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보통은 TV판의 성공이 극장판이라는 별개의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안노는 극장판을 만들기 위해 TV판을 희생시켰으니 말이다.
비유하자면 이건 후속작이 아니라 잘린 꼬리에 가깝다. 안노는 TV에서 보여준 ‘완전한 세계의 불완전한 파편’을 매체에 응용한다. TV판과 극장판이 전혀 다른 시간대, 다른 시점의 이야기가 아니라 같은 시간대와 같은 시점임이 드러날 때, 그 두 개의 판본은 세계의 조각이 된다. 이 조각은 마치 깨진 거울과도 같아서 한 덩어리가 여러 개로 나뉘더라도 여전히 같은 상을 보여준다. 이때 왜곡은 없다. 다만 분열이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런 분열상이 TV 애니메이션이 갖는 20분짜리 효용에 잘 대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20분의 애니메이션, 그것도 중간광고 삽입으로 전편과 후편으로 나뉘고, 그런 게 26개나 있다는 점에서 TV 애니메이션은 깨진 거울처럼 보인다. 각 편이 기승전결이 있으면서도, 전체가 모여 기승전결이 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나가 되는 것
누군가는 사기극이라 부를 수도 있다. 구축되는 중의 세계를 조각내어 판매한다는 점에서, 방대한 세계가 아니라 미완의 작품을 내놓은 것이니 말이다. 나홍진의 <곡성>이 주로 그런 쪽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었다. 또한 이 비판은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세계를 이루는 방법론 중 하나라는 점을 고려해볼 수 있다. 꼭 완성되어 유기적으로 동작하는 것만이 세계의 모사인 것만은 아니다. 일렁이는 환영 속에서 불이해의 지점에 개인의 판단을 투입하고, 그렇게 부닥치면서 벌어지는 잡음이 마치 게임처럼 다가오는 순간에, 설사 그것이 허구라 할지언정 당장의 위안이 된다면.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주인공을 학대하는 이 작품이 무슨 위안을 주느냐고 말이다. 이를 두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이것 하나는 말해 둘 수 있다. 알다시피 이 작품은 내러티브가 아니라 그 형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다르게 말하면 관객의 삶이 아니라 관객이 살아온 시간과 공간에 관심이 있다. 이러한 선언은 먼 훗날 유행하게 되는 ‘이세계’로의 여행과도 맥락이 닿는다. 이세계물에서 주인공은 여태까지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시작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공간과 시간은 명확하게 분리되며, 단지 자신이 몸담았던 관습만이 따라올 뿐이다. 요컨대 이것은 삶을 보듬는 게 아니라 삶의 형식을 보듬는 것이며, 영혼이 아니라 신체에 위안을 주는 것이다.
신체에 위안을 준다는 말의 대척점에는 영혼이 조각나 있다는 표현이 자리한다. 작품 속 신지의 모습처럼 사람들의 영혼은 끊임없이 붕괴한다. 그 이유는 아마, 디지털 시대가 제시한 게 탈신체화와 영혼의 정체성이라는 점에 있을 테다. ‘네트는 광대해’라는 오시이 마모루의 주제의식이 신체를 해체하고 영혼을 주체로 돌려놓는다면, 이것이 <인랑>과 같은 현실 문제에서도 개인과 단체의 관계로 나타난다는 점을 떠올려 볼 수가 있다. 즉 디지털 시대이기에 도드라진 건 아니다. 신체-단체와 개인-영혼이라는 맥락에서 <인랑>은 세계화 시대의 난민, 분해되는 신체로부터의 대탈출극을 보여준다.
이때 <에반게리온>의 궁극적인 종착지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자. 단순무식한 해결책이지만 속이 편하기는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뒤에서 앞으로 돌려볼 수 있다. 이른바 ‘대합체극’이다. 하나의 정신으로부터 분열하는 신체로 분할되려 한다고 가정하면, 안노 히데아키가 오타쿠를 비판한다는 맥락의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그가 말하는 오타쿠라는 게 불완전한 해석에 몰두함으로써 신체의 불완전함을 보완하려는 이들이라면, 근본적으로 영혼이 주축이 된다고 할 수 있을 테다. 그리고 이 오타쿠들은 <에반게리온>이라는 주제로 뭉치면서 영혼의 안식을 찾으므로, 이것이 일종의 ‘대합체극’처럼 보이는 건 과언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있어 이데아란 자기 자신이며, 작품을 해석하는 행위는 곧 자신을 해석하는 행위인 셈이다. 그러나 그게 자아에 대한 추구라기보다는 시각의 완전함에 추구라는 점에서, 이 모습이 비판될 수는 있겠다. 그들이 하는 건 애초에 답이 정해지지 않은 게임이니 말이다. 이에 따르면 <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은 그 어떤 것도 대입될 수 있는 무한함수와도 같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적인 도상을 통해 인물의 행동을 설정한 후, 어떠한 인간군상이라도 자신을 찾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이 작품의 미완전함에 대하여 조금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미지 제국의 붕괴
안노 히데아키는 ‘자신이 원하던 결말’이 아니었다며 <에반게리온>을 리메이크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후 2007년에 신극장판 시리즈를 런칭하며 <에반게리온: 서>를 선봉에 내세운다. 이와 동시에 안노가 불완전한 해석의 틀을 깨부수겠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고 알려져있는데,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맥락상으로 보면 그 발언은 정확히 들어맞는다. 왜냐하면 1995년의 TV판과 2007년에 시작된 신극장판 시리즈는 일종의 평행세계와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안노는 지독한 우울증에서 탈출이라도 한 것인지, 아니면 돈을 많이 벌고 싶었던 것인지는 몰라도 한층 밝고 쉬운 모습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것은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대중화나 다름없다.
여기서 잠깐. 전 4편으로 기획되어 2020년에 종장이 나올 신극장판 시리즈이므로, 아직 3편까지만 나온 이 시기(2019)에 글을 쓴다는 건 섣부른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 작품이 기존 작품을 변형하여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우리는 이것이 불완전한 세계, 미완의 작품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그 말대로 TV판과 신극장판은 약간의 변주가 자아낸 또 다른 결과, 선택의 갈림길이라는 타임루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요컨대 이것은 A와 B로 존재하는 평행 우주가 아니라 현존하는 것으로 남아있는 시간, 선택되는 게 아니라 선택되는 순간의 총아이다.
안노는 그렇게 해서까지 아티스트가 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신극장판 시리즈에서는 TV판에서처럼 세세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TV판을 거의 완벽하게 따라가는 신극장판 1편의 경우, 12화 정도를 2시간에 넣으려다 보니 잘려나간 부분이 많다. 애초에 불완전했던 서사는 아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렸다. 그렇지만 분명 이것은 하나의 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파편이다. 그러니 이상하다면 이상할 수밖에. 두 개는 나란히 놓인 동등한 세계이지만, TV판을 보지 않는다면 신극장판을 즐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게 정말로 하나의 영혼이라고 볼 수 있는 걸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생각은 TV판이 신극장판의 과거라는 점이다. 평행 우주가 아니라, TV판과 구극장판의 관계처럼 구판과 신판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했던 말을 다시금 써본다면, 신극장판이 안노의 본래 기획에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안노는 과거에 시간과 예산이 부족하여 이야기를 다 못 풀어낸 것과는 다르게, 보다 의도적인 방식으로 그 불완전함을 투입한다고 볼 수 있다. 축약해서 말하면. 구판 전체와 신판은 하나의 영혼에게 주어진 두 개의 신체, 하지만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기에 빠지게 되는 딜레마이다.
이를테면 구판과 신판의 차이점은 에바와 제레의 세세한 설정, 아스카의 성격이나 이름, 신캐릭터의 등장과 기존 캐릭터의 퇴장 등이 있다. 이때 우리가 보는 건 같은 외견인데 어딘가가 약간 다른 이미지이다. 신극장판 1편과 2편에서 기존 인물의 ‘if’를 보여주는 듯한 모습이 많이 묘사된다. 구판에서 스즈하라 토우지가 여동생의 병원비를 위해 포스 칠드런을 자청하고, 그게 신지의 정신붕괴로 이어지던 대목은 아스카가 3호기에 탑승하는 장면으로 바뀌게 된다. 그동안 세세한 차이점을 보여주던 신극장판의 흐름이 본격적으로 바뀌게 되는 대목이 이곳이며, 이후의 전개는 구판의 극장판이 보여주었던 엔딩과는 별개의 흐름으로 3편 <에반게리온 : Q>로 이어지게 된다.
구판과 비교해보면 구판의 이야기를 변형하는 것은 2편에 그친다. 즉 3편은 거의 구판의 연장선처럼 보이며, 심지어 이건 위에서 말한 불완전함의 상징이 아니다. 하나의 영혼과 두 개의 신체, 주제의식 하나로 이끌어가는 이미지의 난립에 종결을 고하는 3편을 보며 <에반게리온>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불완전함 이후를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구판에서 우리는 영혼의 통일을 원했었고, 그걸 해석해나가는 과정은 곧 오타쿠들의 자아 찾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허나 단지 오타쿠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불완전한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게 아니라, 그런 생존 자체를 유희로 생각하게 된 시점에서 우리에게 현실은 없어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그런데 안노는 신극장판 3편을 만들면서 우리에게 현실을 되찾아 주려는 듯 보인다. 먼저, 2편과 3편의 간극이 십수 년인데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다. 단지 신지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면서 ‘정말로’ 신지가 맞느냐고 물을 뿐이다. 아마도 이 대목은 안노가 인물의 입을 빌려 신지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이크를 통해 그들이 하는 말, 생물학적으로도 동일하고 기억의 연속성도 확인되며 자아라는 것도 확실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 말을 우리의 맥락으로 번안하면, 우리는 여전히 그런 게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며, 시간이 흘러도 이미지는 여전히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뜻이나 다름없다.
이미지의 시대에 이미지를 찾아서 조합하는 능력이 증대되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정말로 이미지인지를 확인하는 능력은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정보를 찾는 능력은 늘어났어도, 그걸 기억하는 능력은 약해졌다. 즉 우리는 이미지를 기억하기보다는 캡처한다고 볼 수 있다. 디지털 세계의 추상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앤디 워홀이 그러하듯 캡처한 이미지를 점으로 모아 면으로 만들어 낸다. 그런데 안노는 시간이 흘러 디지털 혁명이 막 진행 중인 2012년의 신극장판 3편에서, 인류 멸망의 이후를 다루는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를 불러낸다. 요컨대 그는 이 대목을 통해 자신이 구축했던 불완전한 세계로부터 빠져나간다.
아마 안노는 2015년의 작중배경이 이미 지나버렸음을 지적하면서 그 빼앗긴 현실을 우리에게 되돌려주는 게 틀림없다. 여기서 우리가 안노에게 물어봐야 하는 게 있다. 자신을 성공으로 이끈 그 불확실함과 그곳에서 위안받는 사람들을 왜 외면했느냐는 것이다. 안노 히데아키의 <에반게리온> 시리즈가 사라지고 갑자기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로 돌아간 듯한 오프닝 장면을 보면서, 신화의 반열에 오른 이미지 제국의 붕괴가 이루어지는 장면을 우리는 목격한다. 이런 시도 자체의 속뜻만 보면 그리 나쁜 것도 아니고, 오히려 현대 사회에서는 우리가 깨우쳐야 할 것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미지의 파편을 뿌려둔 그가 이렇게 손을 대는 순간에 이전까지의 과거는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다. 쉽게 말해 신극장판 3편은 그전의 작품들과 완전히 단절되었으며, 이런 기시감은 우리가 <라스트 제다이>에서 했던 보았던 그것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신극장판을 이야기로 잇기보다는, 여전히 신화 속에 파묻혀 있던 게 나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