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이 없어서 희망이 없었다는 자기 비관은 그만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

by 수차미
8345051.jpg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작품 포스터 © 스튜디오 지브리




타카하타 이사오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을 보면서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잘 생각해보니 그 이유는 작품 속의 우화가 너무 선명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좌파학생운동을 손길 하나 안 거치고 옮겨 놓은 너구리들의 모습에서 비린내가 진동했다. 이야기를 가공하지 않은 채여서 날 것의 냄새가 났고 어쩌면 피비린내 같다고도 생각했다. 이를테면 그런 것. 동물을 소재로 한 이 작품에서 너구리들이 인간에게 복수한답시고 교통사고를 낼 때, 시체는 보이지 않지만 창가에는 혈흔이 튄다. 전복된 덤프트럭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 갈 때, 그걸 지켜보던 너구리들은 기쁨에 겨운 웃음을 자아낸다. 어찌 보면 그저 만화적 허용일 뿐이라며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학생운동에 관한 직유법임을 알아버린 이상 우리는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을 동물에 빗대어 이데올로기를 전하는 건 고전적인 수법 중 하나이니 말이다.


이것을 두고 똘이장군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과장이 너무 심한 말이다. 하지만 <센과 치히로>의 요괴들처럼 간접적으로 은유되던 이들이 이곳에서는 곧바로 드러난다. 센과 치히로라는 두 가지 이름이 양쪽의 세계, 법적 무능력자와 강제된 노동성을 드러내었다면 이곳에서 너구리는 터전을 잃은 이들처럼 보인다. 여기서 삶의 터전을 잃었다는 말을 두고서 도시로 떠나는 농촌의 젊은이들을 떠올릴 수도 있을 테지만, 그에 앞서는 생각은 그들의 정치적 영토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일 테다. 말하자면 이들의 운동은 중세 시대에 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영토들을 두고 벌이는 공성전처럼 보인다. 선거철마다 티브이에 나오는 전국 정당 당선표라고나 할까.


그 전쟁에 대해 너구리들이 최종적으로 택한 방법은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폼포코>에서 너구리들은 요괴들의 행렬을 따라 하는 방식으로 인간에게 겁을 주려고 시도한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요괴란 인간을 쫓아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이 대목에서 요괴가 그들보다 상위의 존재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즉 <센과 치히로>는 <폼포코>보다 정치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영화다. 이유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데, 그중에 일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센과 치히로>의 요괴들은 온천장에 와서 즐기는 이와 온천장에서 일하는 이들로 나뉘어 있다. 허나 개중에 인간이나 동물은 없다. (그는 개구리 ‘요괴’다.) 그리고 동물은 인간보다 못하거나 약한 존재로 여겨진다. (센의 부모님은 돼지가 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너구리들은 온천장에서 일하는 센보다 아래 계급인 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다. <센과 치히로>의 최종적인 목표는 이름을 되찾는 것 말고도 돼지로 변한 부모님을 구원하는 것이었었다. 즉, 그 논리를 따라가면 <폼포코>는 너구리로 변한 무언가를 구원해야 하는 게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누군가는 <센과 치히로>의 동물은 자본주의 사회를 대상화한 것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테다. 버블경제의 산물인 쓰러진 놀이동산의 입구에서 돼지로 변한다는 점이 그렇다. 허나 그 영화의 마지막에서 돼지들은 자기들끼리 무언가 소통하는 듯한 눈치를 준다. 요컨대 <센과 치히로>에서 돼지로 변해버린 이들에게도 시점 쇼트가 존재할 수도 있다. (센과 돼지가 된 부모님의 운명적인 교감.) 분명 그들에게도 목소리가 있을 테고 단지 우리와 말이 통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폼포코>에서 인간화된 너구리들이 동물화된 모습으로 묘사될 때, 그들의 대화 장면이 그저 눈치로만 변환된다는 점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물의 시선에서는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지만, 인간의 시선에서는 나레이션만이 들려올 뿐이니까.


그런 이유로 동물의 시선으로 시작해 인간이라는 타자의 시선을 주입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들의 영토에 인간의 시점 쇼트가 점점 더 늘어나다간 언젠가 이곳이 완벽하게 인간의 땅이 되리라는 불안감을 느꼈다. 당신도 인간인데 인간이 땅을 지배하는 게 뭐가 나쁘냐고 물을 수도 있을 테지만, 적어도 목소리가 하나뿐이라는 점에서는 무척 슬픈 일일 테다. 왜냐하면 상대 집단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패자가 떠난 곳을 지배하는 승자들을 지금 보고 있지 않던가.


2010년대 들어 우파 강세로 나타나는 일본의 정치 지형도는 실패한 일본의 좌파학생운동이 성공했다면 어땠을지를 상상해보게 한다. 그러나 <폼포코>는 너구리들의 비참한 실패로 끝이 난다. 그들은 실패를 인정하고서 작품의 소재이자 동물 사회를 견인했던 변신술을 이용해 인간 사회에 숨어든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은 인간이 아닌 인간이 된다. 이 표현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면 너구리는 2등 인간조차 되지 못한다는 것이며, 하지만 동물임을 커밍아웃할 수도 없으니 동물이 될 수도 없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이들의 모습은 거의 완벽하게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학생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뿔뿔이 흩어진 이들이 도착한 곳은 일본의 영화, 애니메이션과 같은 예술 세계였다. 영화에서는 일본의 고다르로 불리는 오시마 나기사가 있었고, 애니메이션에서는 세 마리의 사냥개를 푼 오시이 마모루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시간만이 흘러갈 뿐이었다. 이때 그들의 이전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아니 저 사람이 저렇게 순해졌다고? 또는, 다 지나간 일일 뿐이죠. 원래 세월이라는 게 사람을 무상하게 만드는 법이지만,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무기력함이나 무능력함으로 보이기도 했다.


첫 번째로 무기력함. 작품 안에서는 그 후의 이야기가 명제로 제시되고 있지 않다. 말 그대로의 열린 결말, 그렇다면 그 결말이란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일 것이다.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이유는 단순히 우리가 동시기에 겪었던 비슷한 사건 때문만은 아니다. 그 동시대는, <폼포코>가 도착한 1980년대뿐만 아니라 2010년대의 한국에도 유효하다. 요컨대 이 영화 또한 그들이 만들어냈고, 그런 이유로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들의 원한이 담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너구리들의 한탄, 우리가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기나 해?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바위가 깨져?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이 문구는 성숙함의 끝이 졸업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을 반대로 돌려볼 수도 있다. 그들이 졸업했을 때, 그들의 부재로 어떤 풍경이 남겨질 것이고 또한 졸업한 이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말하자면 학생운동을 하던 이들이 그곳에서 졸업했을 때, 이것은 패잔병이 아니라 성숙한 채로 전장을 떠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장은 그들의 명예만을 회복해줄 뿐 그들의 투쟁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이를 두고서 그들이 골치 아픈 문제를 떠넘겼다고 비난할 수도 있을 테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회의론은 <폼포코>의 결말처럼 공허한 메아리로 들려온다. 그 점이 무섭고,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이것이 구천을 떠도는 원혼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허나 그것이 열린 결말이라면 목소리 또한 들리지 않는 게 아닐지. 유령의 존재가 무서운 것은 우리 세계의 물리 법칙이 통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통하지 않는 법칙 중에 목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목소리가 공기의 떨림이라는 점에서, 그런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유령의 세계는 너구리들이 사는 숲에 티브이가 들어왔을 때부터 창조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테다.


매질 없이 전해지는 목소리는 티브이 속의 울림에 불과하다. 즉 전파는 목소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목소리를 낼 때 그것이 누구에게도 들리지 못할 것만 같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전파와 요괴에 관한 물밑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전파와 요괴의 공통점, 그 첫 번째. 농경 사회에서 요괴를 신사에 모시던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버렸을 때, 그 도시라는 문명의 상징은 바로 티브이다. 티브이가 시골 집안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가 곧 침략을 당하는 시점과 일치하며, 이는 과거 한국의 농촌에서 마을에 딱 한 대 있던 티브이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너구리들이 인간 세계를 염탐하기 위해 들여놓은 티브이가 오히려 그들 세계의 파멸을 암시하는 전주곡을 들려준 셈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서 요괴를 숭배하던 인간들이 도시로 떠나가면서 요괴를 더는 믿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괴와 티브이의 공통점과 차이점. 요괴도 그렇지만 티브이 또한 현실에 보이지 않는 이상한 것들을 묘사하면서 우리를 현혹한다. 이때 요괴의 현혹은 자연에 대한 우상숭배로서 농촌 사회에서는 필수적인 것이 된다. 즉 요괴를 본다는 건, 자신이 이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티브이는 우리를 이데올로기의 대상으로만 소비할 뿐 무언가 생각을 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도심 속의 그들이 너구리들이 만들어낸 요괴 퍼레이드를 보았을 때, 이미지의 제국인 놀이동산과 같은 현혹으로만 여기면서 그들의 터전이 아니라 티브이 속 세상을 떠올린 것일 테다.


너구리들이 요괴를 흉내 냈지만, 그것은 이미지의 제국인 놀이동산 사장의 “내가 그랬어요.” 발언을 통해 무마되어 버린다. 이에 너구리들은 자기들이 한 일인데 왜 인간이 한 일로 오해받느냐면서 분통을 터뜨린다. 이 과정에서 티브이는 화풀이 대상으로 박살 나버린다. 그리고 그 안에는 퍼레이드 중에 무리로 사망한 장로의 영정 사진이 모셔진다. 말하자면 요괴를 흉내 내는 과정에서 소모된 것은 오래된 너구리 장로와 낡은 티브이 한 대다. 이 대목에서 너구리들은 요괴이기도 인간이기도 모두 포기한 것처럼 보이고 그렇다면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다. 이때 이미 멸망한 여우 일족이 다가와 자신들은 이미 인간사회에 숨어들었으니 당신들도 변신술 재능을 살려 놀이동산에 취직이나 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그들은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하다가 그대로 사라져버린다. 그것은 말 그대로의 졸업일 뿐일 테다.


두 번째로 무능력함. 예술이 개인의 세상을 담는다는 점에서 예술인에게는 사상이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직업에 비하면 조금은 더 그렇다는 소리다. 물론 여기에는 다양한 사례와 사정이 있겠지만 젊었을 때보다 나아지지 않았거나 혹은 신념을 저버렸을 때 그들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일례로 우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인 <바람이 분다>에 쏟아진 수많은 비난을 알고 있다. 이 영화는 비행기를 우상으로 삼아 업으로 살아가는 대전 시기의 한 남자를 보여준다. 이 영화를 두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전쟁과는 무관하게 그저 비행기를 만들고 싶었을 뿐인 남자를 묘사했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작품 안에서는 자신이 만든 비행기가 의도와는 무관하게 전쟁에 사용되어 사람을 죽이는 것에 회의감을 품는 주인공의 모습이 여러 차례에 걸쳐 드러나고는 한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사람들은 영화를 자신의 생각대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 해석에 따라 미야자키는 일본에서는 좌파적이라고 까였고 한국에서는 우파적이라고 까였다. 이때 대체로 사람들의 반응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드디어 노망이 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작품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비판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물론 우리가 이런 반응에 대해 무어라 말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여도 그들은 그렇게 살아갈 테니까. 다만 적어도 이런 시각에서, 그가 좌파와 우파라는 어느 구역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 의문을 품을 수는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실제의 성향이 아니라 그들의 주장에 중간이 없다는 점을 말하려고 한다.


우파도 좌파도 아니라면 미야자키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에 대한 가장 좋은 답변은 그는 그일뿐이라는 점이다. 모든 것은 오로지 자신의 상황에 비추어본 상대적인 관점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어쩌면 <폼포코>의 너구리들일지도 모른다. <폼포코>의 너구리들이 학생운동이라는 탈을 쓰고서 일본의 좌파를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심지어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미야자키 작품이 아니고 그가 수장이었던 지브리의 작품일 뿐이니 직접적인 연관성도 없다만. 결국에는 실패로 끝난 자신들의 신화를 그곳에 재현해두는데, 이게 당최 무슨 의도인지도 모르겠는 그 필름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아마도 이것이다.


그들은 지나간 날에 안주해버렸다. 그렇게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세상이 빠르게 변하면서 그들은 숲 속의 너구리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알지 못했겠지만, 너구리가 인간에게 복수한다는 것이 쥐가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단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을 우리가 <폼포코>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인간 아닌 인간이 된다는 것은 전장을 졸업한 노병처럼 살아있는 신화로 기능한다는 것이고, 하지만 그가 살아있는 이상 신화는 깨어질 수밖에 없으니 이것은 참으로 비참한 상황이다.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말은, 죽어버린 영웅보다 훨씬 유지하기 어려운 칭호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폼포코>는 지브리의 다른 작품과는 결이 다른 영화였고 심지어는 기분이 나쁘기까지 했다. 무엇이든 좋으니 하고 싶은 말은 하세요. 그런데 <폼포코>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은 채 자신들은 구닥다리였고 이대로 죽어버리겠다고 선언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오와 지브리의 미야자키에게 물어야만 했다. <원령공주>에서 인간의 왕이 아닌 자연의 대변인을 옹호하는 제목 ‘원령공주’를 내세우면서까지 했던 자기주장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그들은 인간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택했다는 점에서 소외된 이의 낭만조차 취득하지 못한 존재이다.


이를테면 <붉은 돼지>, 이것은 미쳐버린 세상에서 실패한 이의 모험담이 따스하게 긍정되는 영화이다. 그 유명한 명대사인 “애국은 인간끼리 하쇼.”는 작품을 설명하는 하나의 키워드이자 자신을 덮는 따스한 담요이다. 애국은 인간끼리나 많이 하라는 말은 돼지인 그에게는 국적이 없다는 말일 테고, 이 대목에서 우리는 너구리들의 국적이 숲이라는 사실을 깨우치게 된다. 돼지와 너구리 모두 국적은 숲이요 이름도 분명하고, 그들의 애국은 망국을 긍정하는 것으로 끝나버린다. 하지만 두 축생 사이에 있는 가장 큰 차이점은 <붉은 돼지>에는 낭만이 있다는 것이고 또한 그 낭만이 전쟁의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폼포코>는 낭만도 없을뿐더러 그런 낭만의 부재가 자신들이 속한 사회와 그것을 긍정한 자신들 때문이라는 비관만이 담겨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끝없는 비관이 담긴 영화이고 그래서 더욱 심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는 그 무능력함이 ‘능력이 없어서 희망이 없었다’는 자기비관론으로 변하는 것을 원치 않으니 말이다. 또는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비관하는 그들의 모습이 ‘능력이 없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의, 결핍된 희망에 대한 자기 위로’가 되는 것을 우리는 원치 않는다. 그런 면에서는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가 되겠다.”고 말하던 그의 모습이 간절해진다.



https://www.youtube.com/watch?v=iltrkH_A-k4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직 한 편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