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여, 어떻게 살 것인가

교토 애니메이션을 위한 추모, 전쟁과 소녀

by 수차미
Violet-Evergarden-3.jpg 애니메이션 <바이올렛 에버가든>의 작품 포스터 © Kyoto animation


원래는 이 글을 쓸 생각이 없었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불행에 슬퍼하며 펜대를 들게 되었다.


누군가를 자신의 맞은편에 놓는 것은 삶의 모든 것을 건다는 것


2019년 7월 28일에 일어난 교토 애니메이션 방화 사건은 사망자와 부상자와 범인을 포함해 약 70여 명이 피해를 입었다.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는 사실만이 슬픔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예술인이기도 했고,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보기 드문 신념을 지니기도 했으며, 작품의 퀄리티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었다. 그들은 여성을 소비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그런 식의 소비는 하지 않았고, 진정성이 필요한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들려주었다. 아마도 <울려라 유포니엄>을 그런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이유로 페미니즘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은 마땅히 있어야 존재였고, 거기에 무언가 부연설명을 붙이게 된다면 존재의 의미가 퇴색된다고 생각한다. 굳이 사족을 달자면 회사의 구성원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테다. 물론 좀 전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그들의 존재 의미는 아니다. 쿄애니는 그냥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었기에 좋은 회사이다.


이쯤에서 잠시, 애니메이션 제작사에 대해 말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세계의 현전이라면, 애니메이션은 세계의 모사이다. 누군가 영화를 두고 플라톤식의 이데아, 이상적인 것을 어쩔 수 없이 변형하면서까지 현실로 옮겨둔 것이라고 말했는데. 실은 애니메이션이야말로 이상을 잘 그려내는 매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상적인 것을 현실을 거치지 않고 표현해낼 수 있는 건 카메라가 아니라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자신들이 왜곡한 현실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기 위해 불가시편집법을 만들어냈다면, 애니메이션은 그저 있는 그대로 꿈을 꾸었을 뿐이었다. 즉 애니메이션은 꿈을 꾸는 이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오손 웰즈의 유고작인 <바람의 저편>을 오랜 세월이 지나서 완성할 수 있었다. 그것은 영화였다. 그러나 곤 사토시의 <꿈꾸는 기계>는 그의 사망 이후 그대로 취소되고야 말았다. 그것은 애니메이션이었다.


애니메이션은 여러 사람이 하나의 꿈속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다른 분야로 치면 홍대 거리의 젊은이들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곳의 인디밴드가 공통된 꿈을 향해 달려가는 무형 문화재라면,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그러한 꿈을 현실로 불러내려는 유형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집단이 곧 정체성이라는 점에서 작가주의를 표방하는 영화와 어느 정도 결이 다르다. 애니메이션은 내가 떠올린 것을 당신도 떠올렸는지 자문하고, 현실을 거치지 않았기에 더욱 원형적이다. 요컨대 불길 속에서 그동안 작업해온 여러 프로젝트 원화가 사라졌다 하여도, 작가가 무사하다면 얼마든지 다시 그릴 수 있다. 인간은 늘 꿈을 꾸기에, 기록이 사라졌다고 해서 꿈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여러 프로젝트의 중핵을 담당했던 이들, 수십 년의 경력이 있던 사람이 사망했다. 전 직원 120여 명 중에 절반 이상이 죽거나 다쳤고, 말 그대로 둘 중 한 명이 죽은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무어라 섣불리 말하기 그렇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자원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가치를 자원쯤으로 표현한다는 점에 불쾌감을 표할 사람도 있겠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를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다. 회사에 다녀보면 알겠지만 해당 분야에 특화된 숙련공이 회사를 그만두는 순간 주변 업무는 마비된다. 그러니까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사람을 다시 뽑아 그만큼 숙련시킬 시간과 비용을 들인다는 것이고, 그동안에는 이전만큼의 효율을 뽑아내지 못하니 업무가 마비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심지어 그 사람이 정말로 큰 비중을 차지했을 경우에는 부재를 이기지 못하고 집단 전체가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이것은 전쟁에서 대장과 왕을 죽이면 곧바로 승리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는 전쟁에서 전투기 조종사라는 최고급 인력을 무슨 짓을 해서라도 생환시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단지 집단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인간을 일종의 회사에 빗대어본다면, 인간은 기억으로 살아가는 생명체이고 그들이 없다면 살아가지 못한다. 그 말인즉슨. 그 회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어떤 기억이 부재한다면, 인간은 더는 형태를 이루지 못하고 붕괴하게 되리라는 말이기도 하다. 요컨대 인간은 기억이라는 신경망으로 동작하고, 그것의 중추를 잃으면 더는 살아가지 못한다. 그러니 어쩌면 인생에서 단 하나의 소중한 사람이라는 말은 생존에 불리한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소중한 이를 잃게 된다면, 그를 토대로 달라붙은 기억의 형태가 붕괴하면서 함께했던 모든 일은 파편처럼 가라앉게 될 테니 말이다. 따라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던 가장 증오하던 사람이든 간에, 누군가를 자신의 맞은편에 놓는 것은 삶의 모든 것을 건다는 것. 혹은 준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연은 어떻게 원망의 대상에서 원죄의 대상으로 변했는가


애니메이션과 꿈, 집단과 기억에 관한 메타포를 뉴스를 보면서 떠올렸다. 교토 애니메이션이 최근에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아 제작한 <바이올렛 에버가든>이 그들에게 있어 아름답게 남을 마지막 기억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전쟁과 소녀에 관해 말하는 이 작품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계보적인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넷플릭스라는 거대 자본을 통한 애니메이션의 해외 진출이다.


넷플릭스의 투자는 기존 시장에서는 끌어낼 수 없는 거대한 양으로서, 한국의 <킹덤>처럼 기존이라면 나올 수 없는 작품들을 가능케 했다. 무형적으로나 유형적으로나 일련의 자유를 보장했는데, 넷플릭스는 단지 자본만을 제공했을 뿐 내용에 관해서는 아무런 터치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영수증 관리를 철저히 하여 예산 낭비는 막았다고 하니, 그 돈이 다 작품으로 흘러갔다는 점에서 좋지 않은 작품이 나올 리는 없겠다. 말하자면 기회만 주어지면 그만한 퀄리티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 다른 것으로는 이것이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방영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해외에서는 주로 아동층을 대상으로 제작되던 애니메이션이, 넷플릭스를 통해 배포되면서 성인들도 즐겁게 볼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다. 이는 일본서도 유효한데, 그들의 시청 연령대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서 대체로 가벼운, 즐겁게 볼만한 작품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것은 가볍지도 않았고 즐겁지도 않은 작품이었다.


<바이올렛 에버가든>은 원작을 바탕으로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아서 교토 애니메이션이 제작한 13부작 TV 애니메이션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사회와 단절된 채로 자라 감정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소녀와 그녀에게 전쟁 수행 능력을 가르쳐 전장을 함께 누빈 소령 한 명, 이 죽고 나서 소녀가 홀로 남은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작품의 표면적인 플롯은 전쟁이 한창인 가상의 대륙과 그곳의 전장에서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남긴 소령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대필가를 자청하는 소녀의 성장담이다. 그리고 그렇게 홀로 남겨진 이의 슬픔이 작품의 내적인 플롯이다. 그녀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을 잃고서, 말하자면 삶의 2차적인 언어 중추를 잃고서 공백을 대체할 교과서적 학습 장소를 찾아다닌다. 그러니 원작의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애니메이션의 매화에 대응한 이 작품을 두고, 성장에 관한 모험담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테다. 즉 이것은 감정의 부재를 인간의 조각으로 채워나가는 분열된 주체에 관한 이야기다. 또한 그 분열은 전쟁을 두고 벌어지는 갑론을박의 장을 뜻하기도 한다.


먼저 우리는 대필가라는 직업에 초점을 두고 논의를 진행해볼 수 있다. 작품에서 대필가를 칭하는 용어가 자동 수기 인형인데, 이 직업이 거의 여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진다는 점에서 약간의 불쾌함을 느낄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이 직업은 어느 남편이 아내를 위해 만든 타이핑하는 인형으로부터 시작했다. 이때 그들에게는 타이핑하는 기계가 아니라 아름다운 문장을 직조하는 ‘인간’이 필요했고, 그래서 인형의 자리를 사람이 대체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여성적인 능력이라는 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 허나 작품 속 어느 대사가 그런 의심에 영혼을 불어넣는다. 부잣집에 시집을 가기 위해 대필가를 하는 게 아니냐는 시선은, 여성을 인형이라는 수동적 존재에 빗대어 보여준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독이 아니다. 그 설정이 감정이 텅 비어서 인형에 가까운 상태인 주인공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더라도, 해석이 방향이 틀어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하지만 아마도 그런 것을 의도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요컨대 이것은 문제를 묘사하는 방법의 두 갈래이다.


어떤 문제를 말할 때는. 주인공을 문제 수행 능력이 뛰어난 인물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문제를 배경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게 함으로써 그 위의 주인공을 부각할 것인지의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전자는 원더우먼형이고 후자는 비원더우먼형이다. 물론 배트맨처럼 양쪽 다인 경우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비현실적이다. 그래서 보통은 역사상 뛰어난 모습을 보여준 ‘예외’적인 인물을 호명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우상을 만들어낼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현실 문제 해결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마리 퀴리 부인이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업적이 뛰어나다고 해서, 그들을 동경하는 것만으로 사회가 변하지는 않는다. 단지 사회 속의 개인만이 변할 뿐이다. 여기서 그런 개인의 수가 늘어나면 언젠가 사회가 변하지 않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누군가를 동경해서 그처럼 되기를 원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사회적 문제 해결보다는 동경심을 자신의 것으로 수행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는 점에 있다. 말하자면 주체적인 여성이 아니라, ‘남성 집단 안에서도 성공한’ 예외적이고 우월한 한 명의 여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반대의 이야기를 해볼 수 있다. 원더우먼과 같은 예외적인 여성은, 그들에게 있어 너무나 거리감이 있는 나머지 동경의 대상이 될지언정 모방의 대상이 되지는 못한다. 정말로 안 된다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처럼 해내지 못하리라고 생각해 암묵적으로 포기해버리고 만다는 뜻이다. 예외적인 몇 명만이 그에 감명을 받아 행동에 나서고, 그중에서도 몇몇 소수만이 현실의 장벽, 안 될 것이라는 내적인 자괴감을 극복해 다음 단계로 나서게 된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핵심은, 개인보다는 세계를 조명해서 이곳이 당신이 사는 세계임을 자각시키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점에 있다.


잔 다르크의 특수함은 모두의 기억에 남았지만, 세계를 바꾸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는, 어쩌면 이곳이 정상이고 자신이 비정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요컨대 담론을 말함에 있어, 세계를 개인의 내면에 자리시키는 것도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개인에게는 부재가 자리해야 한다. 함께 자란 가족의 부재, 혹은 그를 둘러싼 사회적 울타리의 부재. 그래야만 세계의 모순을 주인공의 내면에 끌어들이면서, 거대한 문제를 최소한의 모습으로 소화해낼 수가 있다. 이것은 폭탄을 바깥이 아니라 금고 안에서 터뜨릴 때, 금고만이 손상을 입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그렇게 세계의 모순을 극복한 주인공에게는 세계를 변화시킬 힘이 주어진다. 이 대목에서 변화하는 세계는 관객의 그것과 동일하다. 작품을 보면서 등장인물의 수난사에 공감한 관객의 세계는 작품과 이어지기 때문이다. 즉, 매체는 세계의 연장선이다.


<바이올렛 에버가든>에서 주인공의 이름은 바이올렛 에버가든인데, 작품의 제목으로 주인공 이름을 선정하는 것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호명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명은 관객에게 기대를 불러 모으는 효과가 있으면서도, 주인공 중심의 내러티브를 보여주지 못할 경우 그에 수반한 큰 실망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마치 원근법과도 같은 작용을 한다. 세계의 모순점에서 출발한 선은 중앙의 주인공으로 소실된다. 말하자면 이 작품에서 세계를 담는 그릇은 바이올렛 에버가든이고, 그 빈 부분으로 설정된 게 감정이다. 이것을 두고 전쟁이 인간에게 앗아간 것, 그것을 수복하려는 자연의 회복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해할 수 없는 주인공의 모습은, 사랑이 부재한 세계의 모습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그녀의 말은, 세계가 사랑을 원한다는 뜻이다. 어쩌면 작품에서 살인 병기 수준으로 묘사되는 주인공의 전투력은, 인간 찬가의 반대 방향, 인간 존재의 잔혹함에 대한 은유일지도 모른다. 길가메시와 헤라클레스는 그에 대한 신화적인 원형이다.


그러니 이 경우에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담론을 이곳에 끌어올 수 있겠다. 먼저, 대필가에게는 편지에 감정을 담아내는 직업적 능력이 요구된다는 점을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감정적인 공감으로써, 상대방의 말에서 본심을 캐치해 글로 변환하는 감정의 번역 능력이다. 그리고 그 직업은 대체로 여성들이 맡아 하니, 그 직업에 필요한 능력의 부재를 겪는 주인공을 두고 여성성이 부재한다고도 할 수 있을 테다. 다르게 말하면 여성성은 곧 자연적인 것, 원초적인 회복력이고 그것이 부재한다면 전쟁 이후에 남겨진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는 셈이다. 그것은 마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부해가 맡은 역할과 동일하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나우시카의 계곡에는 정말로 독이 서려 있다는 것이고, 이 작품에서는 전쟁이 남긴 상처가 감정의 형태로 독을 내뿜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전쟁은 끝나 신화로 사라질지언정, 부재하는 이들-그 상처는 회복되지 못한 채 여전히 언어의 자리를 떠돌고 있다.


말하지 않으면 언어로 떠돌지 못하고, 그렇다면 그것은 회복되지 못한다. 말을 해야만 회복된다, 혹은 감정이 수복된다, 고 말하는 이 작품의 화법은, 인간을 잇는 건 결국에는 공기라고 가정하는 듯 보인다. 여기서 공기는 매질로서가 아니라 세계의 직접적인 현전, 피부에 가장 처음으로 맞닿는 세계이다. 말하자면 마음을 전하려면 어찌 되었든 간에 세계를 거쳐야 하고, 그 방법이란 건 세계를 향한 발화이다.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장의 굉음 속에서 대화는 묻히고, 그렇다면 소리 없이 전달되는 방법이란 게 편지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리고 그 편지는 라깡의 그것과는 다르게 수신인이 없다면 발신자에게 돌아오는 기의이다. 반대로 말하면, 공기를 거치지 않으면 다시금 마음속으로 돌아오는 메아리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언어라는 기표, 의 본질을 잡아내어 편지라는 기의, 로 직조할 대필가가 필요하다. 요컨대 공기 중에 떠도는 감정을 정제하는 것은 자연에 보다 가까워진 이들이고, 그것이 두 손이 잘려 양팔을 기계로 대체한, 또한 인간적인 감정이 부재해서 ‘상대적으로’ 인공성을 띤 주인공 소녀에게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바이올렛 에버가든의 기계 의수를 통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성의 신체에 남성인 요소인 기계를 결합함으로써 양성의 결합을 꾀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어쩌면 그건 일종의 피뢰침으로써 세상에 떠도는 전류, 폭력적인 요인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다음 회복 지점을 만들어 두는 것일 테다. 쉽게 말해 우리는 인간을 해치는 기계, 총 칼 포탄이 마음을 전하는 인간적인 따스함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목격하는 중이다. 번개는 어떻게 인간이 사용하는 전기가 되었는가. 또는 총칼은 어떻게 평화의 요소가 되었는가. 마지막으로, 자연은 어떻게 원망의 대상에서 원죄의 대상으로 변했는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는, 자연은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면서 그들을 원죄할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나우시카는, 여성성에 삽입된 자연성을 몸으로 맞이하며 작품의 주제의식을 우리에게 전한다. 즉 그녀의 여성성은 여성주의를 위해 사용된 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라는 두 개의 구도 안에서 성립하는 양측 간의 전달자이다. 나는 이 부분을 통해 작품에서 여성적 해석을 적용할 때 일어날 설계 오류를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이올렛 에버가든은 여성 서사의 쾌감을 부여해 왜곡된 세계에 대한 진리를 전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만이 할 수 있는 가장 폭력적인 일, ‘발화’를 통해 세계에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캐릭터다.


집단이 꾸는 꿈을 표현하는 방법


전쟁은 게임이 아니다. 이 중요한 사실은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여 다시금 화두가 되었다. 그 이유는 전쟁을 게임처럼 수행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점에 있다. 현대 사회에서 전쟁이란 전략 시뮬레이션게임의 원리와 일치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쟁에서 게임을 끄집어낸 게 전략 시뮬레이션이다. 여기서 더 파고들면 시뮬레이션이라는 것, 현실에서는 실패할 수도 있기에 그 리스크를 피해 가상세계에서 연습하는 프로그램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조금 첨가하면 시뮬레이션 게임이 된다. 트럭을 운전하는 <유로 트럭 시뮬레이터>가 있고, 우주로 날릴 로켓을 만드는 <KSP>라는 게임도 있다. 이처럼 일상에 게임을 접목하여 효율성을 끌어내는 작업, 이른바 게이미피케이션이란 게 게임의 긍정적인 요소로 떠오른 현대 사회에서 그 응용법은 무궁무진하다.


예를 들면. 실패하면 리셋하여 다시 도전해보는 것은 단계적인 발전을 낳는데, 사람들은 영상 광고를 단계적으로 소비하고, 그런 식으로 광고는 즐거움의 일부로서 우리를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한다. 이처럼 게이미피케이션의 가장 근본적인 작동 원리는 실패를 거름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경험을 쌓아 다시금 도전하는 게임의 원리, 노력하는 과정이 정말로 즐거워지는 걸 느낀다. 즉 게이미피케이션이란, 즐겁게 노력할 수 있도록 돕는 단계적인 직무수행의 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이 그 효율성 때문에 즐거워야 한다면, 그것은 윤리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킬 테다. 그러니 언젠가 세상은 게임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 속에서 우리가 밟고 지나가는 사소한 사항들이 과연 어느 곳으로 향하는 계단을 만들어내었는지를 따져 물어야 한다. 요컨대 우리의 삶은 (윤리적으로) 올바른 가상 머신 위에서 시뮬레이팅되고 있는가. 계단을 전제로 하는 시뮬레이팅이 무엇을 밟고 지나가는지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그것은 그저 생존을 위한 발악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 이곳에 내가 있기 위해 떠나보낸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진흙탕에 빠져 발을 허우적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소리다.


그래서 나는 피카레스크식으로 쓰인 이 작품을 두고서, 매화의 감정적 폭이 넓은 게 그만큼 위로 나아가기 위한 발돋움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것은 성장담이다. 이때 이 작품의 감정적인 터울이, 마지막 화에 가서 본류에 합쳐지는 물줄기와 같은 쾌감을 만들어낸다는 점은 지적할 수는 있겠다만. 단지 그것을 위해 준비되었다고 보기에는 전체적인 결합도가 긴밀하지 못했고, 솔직히 말해 잘 만든 애니메이션이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작화로는 우수하지만, 작화만을 따질 것이라면 최근에 개봉한 <라이언 킹>의 실사 영화는 엄청나게 우수한 영화일 테다. 그러나 <라이언 킹>의 실사 영화는 구시대를 똑같이 만들어 버리는 과오를 범하면서, 최근 자신들이 노력했던 변화의 조짐을 인어공주의 물거품처럼 만들어버렸다. 또한 애니메이션이 갖는 감정인 풍부한 감정표현, 마음에 담긴 감정을 세계에 직접 모사할 수 있다는 점을 실사를 위해 포기해버렸다. 동물의 얼굴에는 얼굴 근육이 풍부하지 않아서 인간과 같은 감정 표현을 할 수 없는데, 그걸 실사로 재현한답시고 무표정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밟고 왔는지를 잘못 이해했다.


허나 내가 이 작품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 있다면, 바로 그런 과오이다. 담론을 위해 작품의 완성도를 소비해도 된다는 식의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분명 이 작품은 완성도가 높지 않지만, 작화가 훌륭하다는 것만으로 고평가 받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은 자신이 그동안 걸어온 길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응용하려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이를테면 나는 작품이 전후를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했다. 단순히 전후가 아니라, 그곳을 살아가고 남겨진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전후라는 설정은 거시적인 흐름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서 그 안의 섬세한 것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 지금 떠올리는 몇몇 전쟁 영화 중에서, 그 안의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일반적인 고찰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려 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중 다수는 전쟁을 수행하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전쟁을 추모하는 이들에 관한 말은 하지 않는다. 대부분 매체에서 전쟁은 영원한 상처, 혹은 영원한 폭력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트라우마가 되고, 공포가 되고, 역린이 되어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구멍을 만들어내고야 만다.


단적으로는 이런 상상을 해볼 수 있겠다. 히어로 영화에서 영웅이 악당을 물리치고 나면, 파괴된 도시를 복구하는 건 누구일까. 만약 들판의 한복판에 불이 난다면 그것을 수복하는 건 당연히 자연일 테다. 하지만 전쟁이 파괴하는 것은 자연만이 아니다. 전쟁이 파괴하는 것은 자연에서 파생된 인간이라는 작은 존재의 몸과 마음이기도 하다. 포탄이 떨어지면 굉음에 귀가 멀거나 사지의 일부가 절단되거나 하는 게 전장의 모습이다. 우습게도 현대전쟁에서 가장 멀쩡하게 죽는 방법은 총알에 머리를 맞는 것이고, 불특정다수를 효과적으로 사살하도록 설계되는 현대전의 무기들은 인간에게 인도적인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요컨대 현대전에서 인간은 가장 자연스럽지 못한 방법으로 죽는다. 병에 걸리면 자연의 일부로서 죽는 것이지만, 전쟁은 자연이 만들어낸 섭리가 아니다. 여기서 누군가는 전쟁이란 게 자연선택이 존재한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말할 수 있을 테지만, 도태된다는 게 누군가를 밟고 올라선다는 속뜻이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게임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다면 승자 없는 게임을 할 수는 없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단계를 밟는다는 것은 절차를 밟는다는 것이며 그렇다면 대기권 진입을 위해 사용된 연료 엔진은 탈락될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로켓은 우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안주하고만 싶은 이만 세상에 있는 게 아니어서 세상은 늘 변화할 수밖에 없다. <라이언 킹>의 심바는 자연은 순환의 아래에 있다고 말하지만, 그 순환은 우리가 살아서는 눈으로 볼 수 없기에 그냥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마치 75년을 주기로 지구를 맴도는 핼리 혜성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전쟁의 위협을 설파하는 것보다, 전쟁이 할퀴고 남은 대지에 솟아나는 것의 생명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같은 이유로 <작전명 발키리>보다 <덩케르크>가 더 훌륭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품성과는 별개다.) 때때로 공격이 최선의 방어인 경우가 있지만, 많은 죽음을 막기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보다는 개인을 희생해 많은 죽음을 살려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실. 흔히 존재하는 영웅 서사는 우리를 동경에 이르게만 할 뿐, 실제 현실에는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 그것을 보며 우리는 단지 영웅의 도래만을 기다릴 뿐이고, 허나 언제까지만 기다릴 수는 없다는 게 누군가의 생각일 것이다.


요컨대 당신이 미소녀와 전투의 조합에서 전투 미소녀라는 개념을 떠올려냈다면, <바이올렛 에버가든>의 계보는 그들을 부정하면서 자신을 긍정하는 식의 단계적인 진화라는 점을 눈치챘을 테다. 전투 미소녀가 나오는 작품의 대부분은 여성성과 남성성을 한 자리에 모으면서, 그 이질성이 호기심으로 변환되기를 원한다. 그 과정에서 정신분석학적인 어머니를 대입하는 경우도 있고, 그 공식은 대부분 호기심 그 이상의 것으로 소모되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직설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아름다운 폭력이 아니라 그냥 여성의 대상화일 뿐이다. 여기에서 예외적인 몇몇 작품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의 나우시카나, <모노노케 히메>의 아시타카 정도이다. 그리고 그런 것 중에서도 상처를 긍정하는 모습이 주된 주제로 말해지는 작품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없었다고 답할 수 있다. 말하자면 나는 상처로의 회복을 보여주는 이 작품에 대해서 그런 평가를 내리고 싶다. 작품 하나로만 보면 그냥 기존에 있던 전투 미소녀 작품의 변주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들이 밟아온 전체적인 계보를 생각해볼 때, 이것은 그동안의 변주를 통해 상처를 긍정하는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그것은 집단이 꾸는 꿈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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