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전제와 그런 왕국

<겨울왕국 2>(2019)

by 수차미


영화 <겨울왕국 2>의 작품 포스터 © 월트 디즈니 픽처스



<겨울왕국 2>의 개봉을 앞두고 인터넷에 도는 우스갯소리가 하나 있었다. 1편이 왕국이라면 2편은 공화정이나 제국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해하지 못한 이를 위해 친절하게 설명해두자면, 이것은 현실 역사에서 왕국이 무너지고 나서 공화정이 들어선 여러 나라의 사례에 빗대어 말하는 유머이다. 예컨대 전제 군주정이 무너졌다면 다른 대안을 찾아보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것인데, 두말할 것도 없이 ‘디즈니’ 영화에 그런 진행이 이루어질 리는 없다는 점에서, 실소는 자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디즈니라는 회사가 아이들의 꿈을 지켜주는 걸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그런 성인의 잣대를 들이밀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디즈니는 19세 영화를 만들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이유는 아이들의 동심을 헤치고 싶지 않아서. 이미지가 곧 생명인 캐릭터 산업에서 동심은 중요하기 마련이다.)



1절을 했으니 2절까지는 해두려 한다. 겨울왕국이 무너지고 나면 그다음에는 어떤 정권이 들어설까. 위에서 말했듯이 ‘겨울제국’이나 ‘겨울공화국’이라면, 아무래도 겨울이라는 단어가 주는 차가움이 제국과 공화국이라는 현실역사의 사례에 대입될 수 있을 테다. 이를테면 한국에서는 민주화 항쟁을 말하는 은유적 표현이 바로 ‘봄’이었다. ‘아랍의 봄’이라는 사건이 있기도 했고, 가상 매체에서는 <스타워즈> 시리즈에 나오는 은하제국과 퍼스트 오더가 유독 하얀 제복(스톰 트루퍼의)과 겨울이라는 배경을 바탕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에서 열병식을 거행하는 퍼스트오더 군단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어쩌면 구 나치독일과 소련 사이에 있었던 긴 겨울을 은유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런 유머에서 내가 떠올린 것은, 겨울이라는 단어가 접미사에 따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이다. <겨울왕국> 1편과 2편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가 바로 그렇다. 1편이 말 그대로 왕국이라는 느낌, 아이들에게 상상과 순수를 안겨준다는 느낌이라면, 2편은 왕국보다 공화정에 가까운 느낌이다. 결말을 먼저 살펴보자면 2편의 결말이 그런 체제를 택하기도 했다. <겨울왕국 2>의 결말에서 엘사(이디나 멘젤)는 안나(크리스틴 벨)에게 왕권을 넘겨주고는 자신은 숲으로 들어간다. 이는 1편에서 ‘내버려둬’를 외치며 산으로 들어갔던 엘사를 떠오르게 하지만, 그 목적은 완전히 다르다. (영화의 초반에 여행이 시작되는 장면에서, 1편에서 엘사가 지었던 얼음성이 뒤로 지나가기도 한다. 그것이 이전 시대라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 묘사다.)



이 영화가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소재는 자연과 인간의 갈등이며, 1편이 엘사의 자기긍정기였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그 갈등의 수원(水原)은 내면이 아닌 외면으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수원이라는 게 보통은 안에서 바깥으로 흐른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내면에서 외면으로 바뀐 화제는 <겨울왕국>의 이야기가 그만큼 더 많은 것을 담아내고자 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아마도 이 점이 겨울왕국이라는 엘사의 음침한 (하지만 아름다운) 얼음성의 문이 열려야만 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즉 1편에서 얼음성이 엘사의 차가운 마음을 묘사하는 메타포였다면, 그것이 배경으로 지나가는 2편의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자기갈등이 주된 소재가 아니다. 그러니 이것이 안으로만 들어서는 왕국의 서사로 진행될 리가 없고(왕국을 다루는 작품은 보통 그 내부 구성원의 이야기를 그린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사극을 떠올려보면 된다. 궁 안에 갇혀 갑갑한 왕궁 구성원과 그를 막으려는 호위무사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겨울왕국>의 2편을 두고 제국이나 공화정이라는 농담을 섞는 건 그렇게 지나친 행동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는 <모노노케 히메>가 떠오르기도 한다. 자연과 인간의 대립을 그리다가 결국에는 화해로 귀결된다는 점도 그렇지만, <모노노케 히메>에서 중점으로 다뤄지는 건 서로의 진영으로 떠나는 탐험 서사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여행을 떠나는 인간 진영의 대표자 아시타카(마츠다 요지)는 여행길에서 인간의 제국과 자연의 제국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을 본다. 그것은 각각 울타리와 수풀림이라는 차단막으로 가려져 은밀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거시적으로는 다르지만 세부를 뜯어보면 그런 인상이 <겨울왕국 2>에도 전반적으로 있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 아렌델과 노덜드라 부족의 관계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큰 틀로 분류될 수 있는데, (항상 그렇듯이) 여기서 자연을 침범하는 건 인간이었다. 예컨대 자연은 그냥 그대로 그곳에 놓여있는 것인데 인간은 자신의 발전을 위해 자연의 영역을 침범해온다. 이 논리가 <겨울왕국 2>에서 엘사의 할아버지가 댐을 세우는 이유였다. (“댐을 세우면 물이 말라 지반이 약해지고 그러면 노덜드라 부족은 아렌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만으로 <겨울왕국 2>에 대한 완결성 있는 논의를 끌어낼 수는 없다. 다만 <모노노케 히메>의 서사와 유사하게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하지만 귀결은 동일한), 엘사와 안나는 자연과 인간 진영을 대변하는 이가 된다는 점을 고려해볼 수는 있겠다. 말하자면 이 둘로 대표되는 자연과 인간은 정치적으로 (또는 이념으로) 두 개의 집단인데, 그들이 한자리에 모이기까지의 과정이 전근대적 풍경에서 근현대의 풍경으로 (아마도 프랑스 혁명이나 메이지 유신이 떠오를듯한) 변화한다는 점에서, 어떤 형태로든 ‘왕국’이라는 타이틀은 내려가게 된다. 다름이 아니라 1편의 이야기가 왕국을 무너뜨리려는 한스 왕자(산티노 폰타나)를 악역으로 등장시키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도, 1편의 근간은 외부에서 내부로 침범하는 것들을 견디는 왕국의 이야기였다. (엘사의 얼음성과 그곳에서의 ‘내버려둬’는 그걸 보여주는 직접적인 이미지이다.)



그러니까 실은 1편과 2편의 차이가 있다면, 그 안쪽을 안정화했으니 외부의 적이 침범해올 차례인 것이다. 물론 때로는 외부보다 내부의 적이 무서울 때가 있긴 하지만 <겨울왕국>의 2편이 그리는 것은 엘사가 그 모든 것을 ‘내려둔’ 후의 이야기다. 말하자면 <겨울왕국 2>는 그런 빈 것에 무언가를 채워야 하는 영화이다. 그리고 2편에서 엘사의 공허한 마음에 찾아오는 것은 불현듯 찾아오는 악몽과도 같은 목소리이다. 여기서 그 목소리는 엘사에게만 들린다는 점에서, 스크린의 바깥에서 들려온다는 점에서 관객인 우리가 겪는 사운드와 동일하다. 즉 그것은 디제시스에서 미메시스로 침입해오는 사운드이다. 그러니 이를 두고서 엘사가 실재계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런 딱딱한 정신분석보다는 전통적인 방식대로 해석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신화에서 영웅이 모험을 떠나게 되는 이유는 대게, 외부에서 신탁이 내려왔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부터 오디세우스까지 그리스적 영웅의 표본은 신전에 가서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니까 <겨울왕국 2>의 도입부가 마치 영웅에게 내려오는 신탁처럼 보인다는 점을 우리가 지적해볼 수 있다. 예컨대 이런 도식에 따르면 엘사는 무언가를 찾아야만 하는 영웅이다. 그리고 이런 도식을 전제로 해둔 순간부터 이 영화의 서사는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이 영화를 두고 서사를 세밀하게 흩어본다면, 아무래도 본편만으로는 흥미가 떨어진다고 판단할 심산이 크다. 물론 <겨울왕국 2>는 등장하지 않아도 전개에는 별 지장이 없는, 귀요미 그 자체인 브루니(올라프가 귀여우니 용서가 된다고 말하는 도마뱀 정령이다.)를 등장시키는 것과 같은 ‘상품화’를 염두에 두었으므로 이야기 같은 건 그렇게 큰 상관이 없을 것이다.



“서사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게 이야기를 지닌 매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다른 쪽으로 이야기해보고 싶다. 이 영화는 아이들만큼이나 어른들도 이입할 이야기 구조를 지녔다. 대표적인 게 영화 중반에 크리스토프(조나단 크로프)가 고백할 타이밍을 놓쳐 심란해하다가 문득 뮤지컬 장면으로 전환되는 시퀀스이다. 이 시퀀스는 뮤지컬 장면임을 감안해도 비현실적인 요소를 많이 끌어오는데, 그중에는 화면 바로 앞에 캐릭터의 얼굴을 들이대면서 화면의 절반을 얼굴로 채우는 것과 같은 연출이 있다. 이게 뭐가 문제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허공에 붕 떠있으면서 절반이나 차지하는 인물의 얼굴을 두고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사람은 없을 테다. (한국에 개봉했던 <아바타> 포스터가 심미적으로 비판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장면이 통째로 유머를 위해 준비되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은 성인 관객층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 장면을 보면서 가만히 있는 건 주로 아동층이고, 웃음을 터뜨리는 건 성인층이다.



여기에 크리스토프가 안나에게 고백할 타이밍을 재는 것도 아동층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다소 성숙한 감정에 속한다. 어떤 면에서는 엘사와 안나 자매의 우정이 동성애적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엘사와 안나가 우정을 말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성인은 여성들의 연대를 보지만 아이들은 엘사의 드레스를 본다. 그리고 내가 지적해두고 싶은 건 1편보다 2편에서 그게 더 심해졌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 영화가 극의 동력원으로 삼는 건 “물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올라프의 말인데, 이것은 작품에서 과거에 있었던 일을 보여주기 위해 기억이라는 소재를 응용하는 것이지만, 더 나아가보면 그 끝에 죽음이라는 사건이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영화에 나오는 댐이라는 게 홍수를 막기 위해 축조된, 편의를 위한 건축물이지만 위의 말을 떠올려보면 그것은 “기억을 막는 것”이나 다름없다. 예컨대 그런 이유로 이 영화는 댐을 무너뜨려야 한다. 막힌 기억을 다시 흐르게 한다는 건, 죽은 엘사의 부모님을 현세의 기억으로 소환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작에서는 짧게 언급되었던 자매의 양친은, 본작에서 조금이나마 더 많이 회상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흐르는 물을 두고서 만물은 변화함을 떠올렸다. 또는 신화에서 흐르는 물은 자신의 얼굴이 늘 잔상으로만 남게 됨을 표현하기도 하며, 더 나아가서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뜻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물이라는 것은 죽음이라는 기억의 끝으로 수렴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엘사가 바다 너머에 있는 강으로 건너가 진실을 마주하는 장면은 그런 기억을 건너가는 것처럼 보인다. (저승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여러 강 중, 레테의 강을 건너면 망자는 이승에서의 기억을 잃게 된다.) 물의 정령이 유니콘의 형태로 나타나 엘사의 귀향을 방해하는 것도 그런 시련의 일부일 테다. 그러니까 여기서 엘사가 거센 바다를 넘어가는 장면을 이미지로 받아들여보면, 물에는 기억이 있다는 작품의 주제의식이 엘사가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감정으로 넘어간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건 성인인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그리 어려운 감정이 아니지만, 어린아이들에게는 다소 어려운 개념이리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작중에서 올라프가 말하듯이, 어린아이의 순수함은 그 자체로 멈춰있는 듯한 시간의 영원성을 대변하며 그게 바로 어린 어이가 기억과 죽음에서 자유로운 이유이기 때문이다.



엘사가 거센 바다를 건너는 장면에서 아이들은 말을 탄 엘사의 멋짐을 본다. 하지만 어른들은 이 장면에서 어머니에 대한 궁극적인 그리움을 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를 데리고 극장에 온 부모라면, 그들 다수의 부모는 몹시 늙었거나 아니면 이미 망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성인 관객이 이 영화를 보며 느끼는 감정은 엘사와 안나 사이에 존재하는 자매애나, 여성 주인공 위주로 진행되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이야기가 아니라 부모에 대한 효심 그 자체일 심산이 크다. 그리고 이는 무척 단순하지만, 신화라는 게 어떤 이야기인지를 떠올려보면 그렇게 이상한 게 아니기도 하다. 신화에서 영웅이 무언가를 하는 이유는 인간이라면 으레 그렇기에 하게 되는 것들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그렇고, 이성에 대한 사랑도 그러하며, 기본적인 금기를 지키려는 태도 또한 그렇다. 말하자면 이 영화가 사용하는 레토릭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그런 레토릭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영화가 아이가 아닌 성인을 위한 만화란 말인가. 아니다. 위에서 크리스토프가 노래하는 장면이 아이보다는 성인에게 더 코드가 맞다고 말했는데, 그에 비견될 만한 장면을 만들어내는 캐릭터가 바로 올라프다. 이 영화에서 올라프는 아이들의 순수함을 대변하는 캐릭터다. 일단은 올라프 자체가 엘사와 안나가 어린 시절에 만들고 놀았던 눈사람의 이미지를 본따온 것이기도 하고, 눈 사람인데 녹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변하지 않는 존재다. 이 과정에서 물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대목은 고체화된 물인 얼음, 그리고 그게 녹지 않는다는 점에서 변하지 않는 기억이라는 은유가 된다. 그러니까 올라프는 변하지 않는 기억, 어떻게 보면 동심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는데 그런 점에서는 올라프가 작중에서나 현실에서나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은 몹시 당연한 일일 테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올라프의 말 중 하나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올라프는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인간 이전의 순수함을 표현하는 캐릭터인데, 그런 그가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라고 말하는 대목은 이것이 아이들 또는 동심을 그대로 표현하는 캐릭터라는 점을 말해준다. 여기에 엘사가 숲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트롤의 장로가 하는 경고가 그걸 뒷받침한다. 트롤의 장로는 떠나간 엘사를 걱정하며 “이전(1편)에는 힘이 너무 강해서 문제였지만, 지금은 힘이 약하지 않기만을 빌어야 할 판.”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러한 대사가 직시하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책임과 의무이다. 올라프가 말하는 것처럼,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는 사춘기 소녀 시기를 지나 타인을 아우를 성숙함을 지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작품의 플롯이 엘사의 내적고민에서 엘사의 외적고민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위에서 말한 메타포도 그렇지만, 댐을 개방해야 비로소 안개가 걷힌다고 말하는 해법은 흐르는 물을 막아서는 미래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담화이다. 우리가 흔히 무언가를 잊어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두고 “머릿속이 뿌옇다. 안개가 낀 것 같다.”고 말하고는 하는데, 여기서 안개가 은폐된 기억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이 영화에서의 안개 또한 그런 맥락일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댐이 있는 곳에 물안개가 끼는 게 자연스럽다는 점에서도 그런 연계는 강화된다. 물은 기억인데, 말하자면 흐르지 않는 물은 고인 기억인 것이고, 그걸 흐르게 해야만 미래가 제시된다는 점에서 망각이라는 말은 정지와 동급의 선언이다. 그게 작품에서 숲이 사람들을 가두어 놓은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다. (안개 숲에서 사람이 등장하는 처음 장면은 30여년 동안 서로에게 칼을 겨눈 채로 전쟁을 지속하던 양측 진영의 대립 장면이다.)



대략 그렇다는 이야기다. 기억에 관한 제안만으로 이 영화가 전작보다 더 낫다고도, 더 성숙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여기에 영화는 전작에서 관객의 인상에 남은 몇몇 장면을 스스로 오마주하는 방식으로 1편에 대한 기억을 환생시키는데, 결국에는 알아도 그만이고 몰라도 그만인 요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최대한 전체 이용가를 추구하는 디즈니가 어린아이들이 몰입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만들 것 같지도 않다. 물론 디즈니가 <겨울왕국>의 1편과 2편 사이에 다양한 파생 이야기를 만들기는 했지만, 1편과 2편 사이에 존재하는 건 아이들의 동심이 아니라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왜냐하면 1편에서 작품의 시작이자 자매애의 근원이었던 부모님의 죽음이 2편에서는 작품의 결말이 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1편의 끝은 2편의 시작이고, 2편의 끝은 1편의 시작이었다는 소리다. 그리고 이러한 선형적인 도식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건 집안의 이야기가 있다면 집 밖의 이야기도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1편이 왕국이라면 2편은 왕국이 아닌 무언가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고 말이다.



종국에 양측 세계의 화합이라는 서사가 주인공 엘사를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만 소화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우리가 아는 신화의 형태와 많이 닮아있다. 신화에서 배경은 오로지 영웅을 위해서만 소모되니 말이다. 본래 디즈니의 의도를 고려해보자면, 이는 <모노노케 히메>처럼 자연과의 공존이라는 적시 적소의 균형이 아니라 그 가운데 자리한 엘사라는 이로 대표되는 화합과 중재의 가치일 테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상품의 측면 말고도 캐릭터가 큰 비중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 시대에 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싶은 가치는 그런 리더쉽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전작에서도 그랬지만 자연과 대화하는 이들이 많이 나온다. 트롤이라던가 순록이라던가와 대화하는 크리스토프라는 캐릭터의 친화력은 2편에서의 노덜드라 부족으로 계승된다. 말하자면 우리가 고민할 것은 그런 배경으로 이미 깔려있는데, 이게 의미하는 건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그런 것 위에 엘사라는 이가 탄생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런 점이 잘 버무려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오히려 그만큼 우리 세상이 혼탁한 것 같다. 가두어놓은 물을 흐르게 하고, 거센 물 너머로 향하는 영화의 제안 자체는 우리가 (그럼에도) 거두어야 할 기억이 있다는 점을 말한다. 여기서 흐르는 기억에 슬퍼하는 쪽은 과거에 얽매이고 싶은 이일 것이고, 그건 우리가 하는 어떤 망상과도 유사하다. 댐처럼 물, 그 과거를 가두어 놓으면 우리는 평화롭게 살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인간이라는 존재가 마을이라는 내부에서 자연이라는 외부로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이다. 이때 영화가 설정하는 도식은 외부로 눈을 돌리는 이들이 취하는 방식이 바로 댐을 건설하는 것, 기억을 가두어 두는 것, 그 배후에 있는 모략은 자연이라는 외부, 그 타자가 내부인인 우리에게로 굽혀 들어오게 유도하는 것이다.



어라, 이렇게 쓰고 나니 무엇이 생각나지 않는가. 내지인과 외지인, 그 기억에 관한 문제에서 한국인인 우리는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본디 아메리카에서 시작된 인디언과 총잡이의 형식에서 출발한 이 도식이 화해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우리가 그런 것을 본받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엘사의 말처럼, 다리에는 입구와 출구가 있고 두 세계를 잇는 게 두 자매라면, 우리도 그런 리더가 등장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된다. 영화가 개봉한 이곳에는 무너진 ‘왕국’이 있고 그 후에는 그보다는 나은 무언가가 등장했다. 적어도 이전의 미국 영화들이 두 세계의 중재자를 등장시켰다가 다시 알 수 없는 영화 밖의 영역으로 퇴장시켰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둘 다를 말하는 이 영화는 그때와 지금 사이에 있는 백 년의 시간이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 같다.



가족이 된다는 건, 자신의 힘을 자기방어가 아니라 가정에 쏟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엘사가 자연에 귀의하고 안나가 왕국의 대모가 되는 이야기다. 어쩌면 바르게 사용되지 못하는 가정 내 지킴이를 향한 비판일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정말로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를 댐을 무너뜨리는 장면에서 안나는 묻는다. 으례 군인이라면 그렇듯이 국가에 충성해야 하지만, 전제부터가 잘못된 명령을 거부하는 것 또한 국가에 대한 충성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겨울왕국 2>는 그런 전제를 깨우치고 전제정치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l1uoTMkhU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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