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왕국 : 올라프 예찬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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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른스트 블로흐는 인간이 바라는 것을 신화로 엮는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신화는 과거를 되살리는 게 아니라 미래와 만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아마도 이 말은 우리가 흔히 보는 매체가 신화적 도식을 차용함에도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그것은 분명 신화의 거죽을 하고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런 신화를 두고서 다음과 같은 반응을 하는 건 몹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첫 번째, 그것은 과거의 외피를 하고 되살아났기에 우리는 그를 과거처럼 대하게 된다. 그는 내가 알던 누군가를 닮아있어서 우리는 그를 이전처럼 대하려 한다. 하지만 조금만 이야기를 섞어보면 그가 내가 알던 그와 다른 이라는 걸 알게 된다. 두 번째, 이때 우리는 내심 실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걸 숨길 수 없다. 허나 그럼에도 거죽이라도 좋기에 우리는 그를 선호하게 된다. 말하자면 신화는 우리가 알던 것의 복각이다.




이 말에서 신화의 범주를 무엇으로 놓을 것인지에 따라 할 수 있는 말이 달라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전제를 살펴보면 신화란 기억을 전하는 매질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신화란 무언가를 전하려고 사람들이 창조해낸 구전이다. 여기서 신화가 전하려는 건 대체로 교훈이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신화에서 사실과 은유의 관계를 구분 짓는 건 애매한 일이 된다. 예를 들어 헨젤과 그레텔 동화를 단편적으로만 보면 영아살해에 대한 경고이겠지만, 숲에 사는 마녀가 어떠한 사정으로 숲에 홀로 살게 된 여성이라는 점을 고려해볼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핵심은 우리가 사는 시대에 따라 그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신화는 자체로 하나의 도식이기에, 주변부의 것들이 달라지면 속에 자리할 내용물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게 신화라는 단어가 단지 오래된 무언가에만 적용되지 않는 이유이다. 신화란 바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래서 신화에 딱히 정해진 계보가 있지는 않다. 회사나 학교에서 얼핏 들었던 선배들의 이야기도 지금의 자신에게는 모두 신화에 해당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런 부류의 인간상이 있고 경험담이 있다는 도식이다. 이때 우리는 그런 인간상과 경험담을 보면서, 자신이 앞으로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고 어떤 경험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예컨대 신화는 해야 할 것과 말아야 할 것, 되고 싶은 것과 되지 말아야 할 것, 나아갈 곳과 피해야 할 곳을 지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2.




보통 신화라는 이야기에는 영웅이라는 존재가 있으므로, 우리가 신화가 되기를 바라는 건 몹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신이 신화로 남는다는 건 이름을 알린다는 뜻도 있지만, 자신이 바라는 영웅상이 되고 싶은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니 말이다. 예컨대 우리가 신화가 되려는 건, 우리가 알던 영웅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아는 영웅이 되기 위해서다. 어쩌면 아버지 살해라는 도식이 이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왕자는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후대에겐 선대보다 앞서려는 마음이 어떤 형태로든 있다. 이 과정에서 선대는 후대가 치고 올라오는 걸 방어하려 하지만, 자기보다 뛰어난 이를 두고서 한 수 접지 않을 수는 없다.




이 말이 다소 잔혹하게 들린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자녀는 부모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 이유는 자녀가 부모를 계승한 유전자이기에, 부모가 못다 한 것을 자녀가 이룬다는 대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진화란 곧 발전과 동의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간이 앞으로만 흐른다는 점에서, 유전자의 계통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생존에 유리한 형태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이 대목에서 유의해야 할 점이 하나 생겨난다. 진화라는 것은 꼭, 전보다 상위의 개념인 것만이 아니다. 생존에 유리한 형태가 되는게 바로 진화이다. 덩치가 커지거나 이빨이 많아지는 게 이전 개체보다 상위의 존재임을 시사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가 부모보다 잘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려면, 돈이나 사회적 지위만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진화라는 것은 신화와도 같아서, 과거가 아닌 미래를 위한 행위이니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진화와 신화는 그런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같지는 않지만 우리가 살아가는데 어떤 제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그리고 진화와 신화라는 두 가지 단어를 톺아보면 <겨울왕국 2>는 1편을 신화로 만드는 형태로 진화한 영화이다. 먼저 <겨울왕국 2>의 도입부가 어떻게 시작하는지를 떠올려본다. 2편은 엘사와 안나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장면은 1편에서 나오지 않았던 장면이기에 관객의 궁금증을 해소하는 역할을 한다. 작품 전반에 대한 원동력을 제안하기도 한다. 어린 안나와 엘사가 침대에 누워 아버지의 이야기,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이 장면에는 두 개의 신화가 한데 모인다. 하나는 아버지가 들려주는 잊혀진 숲에 관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북쪽의 강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는 근본적으로 부모가 자녀에게 들려주는 구전의 형태를 한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이때 1편의 도입부가 엘사와 안나의 부모님이 바다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는 것이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1편과 2편의 도입부는 과거회상이라는 점에서, 작품 전반의 주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얼추 비슷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2편의 도입부는 1편의 도입부가 없다면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1편에서 자매의 부모가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그것이 영화 전체의 사연이었으니 2편을 관람하러 온 이들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1편을 봐야만 2편이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2편은 1편의 이야기를 자기 이전 시대의 이야기로 넘겨두면서, 말하자면 1편의 이야기를 신화로 만들면서 그것이 부재한 현실을 2편으로 만든다. 그 증거로 1편에서 왕국에 찾아오는 것은 이웃 나라의 왕자 한스(산티노 폰타나)이고, 2편에서 왕국에 찾아오는 것은 어느 낯선 목소리이다. 예컨대 1편이 부모의 부재가 영향력을 끼치는 현재를 그리는 반면, 2편은 부모의 부재가 신화로 넘어간 부재하는 현실을 그린다.




3.




부모의 부재가 신화로 남겨진 이상 본편이 그걸 직접 다루어야 할 이유는 없다. 신화는 과거를 돌아보는 성격의 것이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신화는 신화가 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도식을 방법론으로 제공한다. 그리고 우리는 신화가 남긴 방법론을 들고 와 우리 생활에 적용한다. 2편의 전반적인 이야기가 대략 그렇다. 2편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를 따라 모험을 떠난 엘사와 안나가 부모 세대의 갈등을 마주한다는 이야기다. 예컨대 자매는 그들이 신화로 알고 있던 게 사실은 신화가 아니라 현실이었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러니 이 과정에서 우리는 신화가 되살아난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목소리의 형태로 들려온 신화가 그들에게 미친 영향은 마을의 파괴이다. 엘사는 마을에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정령들의 모습을 목격하고는 모험을 떠날 것을 마음먹는다. 따라서 그들에게 들려온 신화는 과거의 현신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구원의 시도이다.




중간을 생략하고 결론부터 말하면, 엘사가 정령으로 승격되는 이 작품의 결말은 신화의 귀결이 진화의 시작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구체적으로 분류하면 여기에서 신화는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으로 나뉜다. 이유는 간단한데, 과거의 것이 그대로 살아난다면 재현에 그치기 때문이다. 예컨대 과거의 신화가 현재에 도래하는 방식은 육신은 그곳에 둔 채로 도식만을 옮겨오는 방식이다. 마찬가지로 1편에 적을 둔 이 신화는 2편에서 엘사와 안나가 여행을 떠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신화를 역사가 아닌 것으로 알던 이들은 들려온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충분히 일어날 법한 현실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그래서 자매는 혹시나 돌아가셨다고 여겨지는 부모님이 살아있거나, 또는 어떤 형태로든 재회할 수 있지 않을지를 기대한다. 부모가 죽었던 현실이 과거로 잊혀지고, 초상화의 형태로 배후에 자리하다가 문득 고개를 드는 것은 자매의 과거 회상 장면이다. 본편의 오프닝 장면 말이다.




부모 세대를 신화로 만들어버린 건 2편의 제작진이다. 자매가 부모님이 들려주는 신화를 들었던 건 아주 어린 시절이므로, 1편 시점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쉽게 말해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는 소리다. 물론 1편 이후에 2편을 기획한 것일 테니 방금 한 말은 맞지 않다. 다만 부모 세대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을 통해 원초 자아에 신화를 심는 이 작품의 주제의식은 부모가 된다는 게 아니다. 1편에서 엘사가 왕국에 왕으로 등극함으로써 나라의 부모적 지위를 획득하므로 아버지 살해라는 신화적 도식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재에 주어진 것이었고 과거의 것 또한 남아있었다는 점을 2편은 선언한다. 이 선언을 통해 제작진은 작품의 이야기를 무에서 유로 끌어냈다.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이 이야기는 땅속에 묻혀있다가 발굴된 것이다. 우리도 모르는 역사가 그곳에 있었고, 그걸 찾아가는 이야기가 본편의 여행이라면, 과거를 찾아가는 과정이 사실은 말 그대로의 전진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신화의 끝이자 진화의 시작이다.




그런데 이야기의 진행을 보면 조금은 색다르게 보이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은 엘사가 정령계 대표로 가고 안나가 인간계 대표로 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이것은 작품의 결말이라는 점에서 진화의 마지막 부분이다. 따라서 적어도 스크린 안에서는 궁극의 진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렇게 양쪽으로 공생하는 게 작품의 최종 목표일 테다. 서로 사이 좋게 지낸다는 점에서 단순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도식은 이상하다. 왜냐하면 1편의 한스 왕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화 속 세계에는 아렌델 왕국만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렌델은 인간계의 대표가 아니다. 단지 그 지역에서 정령과 합의한 게 아렌델일 뿐이다. 그러니까 실은 이 도식에서 핵심은 양측이 제자리에서 본분을 다한다는 게 아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마무리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문장에서 과거의 범주가 어디까지인지만을 우리는 따져볼 수 있다.




4.




저승의 강은 과거로 흐른다. 그렇다면 이 강은 수원지가 어디일까. 분명 강을 말할 때 시작과 끝을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지금 보는 건, 강 중의 한 단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것에 대한 은유가 되기에는 충분하다. 영화의 마지막에 엘사와 안나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데, 그 과정에서 언급되는 건 ‘다리에는 입구와 출구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 말인즉슨 이유가 없으면 결과도 없고, 선두가 없으면 후미도 없으며,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없다는 것이다. 엘사와 안나가 손을 잡으며 말하는 이 대사가 올라프(조시 개드)의 말과 함께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이 대사는 과거와 현재의 관계에서, 과거는 내버려두고 현재만을 보거나, 현재를 내버려두고 과거만을 보는 이들에게 전해진다.




이를테면 안개 숲에서 군인들이 서로 마주하는 이야기를 떠올려볼 수 있다. 30여 년 동안 그들은 싸우고 있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도 모르는 이 전쟁에 대해 그냥 눈앞의 것을 헤쳤을 뿐이다. 말하자면 이 싸움과 대립은 시간이 흘러 수원지가 신화로 넘겨져 버린, 그래서 입구와 출구가 사라진 상태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를 이미지로 보여주는 건 안개에 싸인 숲이라는 신화적 풍경이다. 물론 안개가 수증기의 파생이라는 점에서 만연하는 기억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예컨대 이 숲에서 안개는 입구와 출구를 가리는 신화라는 이름의 기억이다. 다시 말해서 신화가 된 것은 입구와 출구를 지우고 그 자체로만 육체를 보존하고자 한다. 이 과정으로 나온 결과물은 마치 유리구슬과도 같아서, 어느 쪽으로 접근해야 할지를 알 수 없다. 그러니 여기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파괴하거나, 또는 통째로 삼키는 것뿐이다. 그게 신화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지 중 하나이기도 하고 말이다.




궁극적으로는 과거를 거슬러 오르는 이야기다. 물론 본적은 이곳에 둔다. 시간여행 같은 마법은 없다. 이 작품에서 엘사가 물의 정령을 타고 물 위를 달리는 장면은 아마도 시각적인 화려함과 파생 상품 제작을 위한 콘티였을 것이지만, 반대로 보면 ‘북쪽에 진실이 있다’는 신화를 따라가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엘사가 건너는 게 왜 물 위인지를 생각해보면 올라프가 세 번에 걸쳐 강조했던 ‘물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라는 대사가 이유로 거론된다. 말 그대로 엘사는 기억을 건너가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언급되는 저승의 강 중에는 기억을 잊게 하는 것도 있다는 점에서 이 이미지에 담긴 함의는 보다 명확해진다. 거센 풍랑으로 쉬이 건너갈 수 없는 이 강을 두고서 오래된 기억으로의 접근이 힘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모가 죽은 바다에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오래된 기억이 현재에서 과거로 건너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셈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엘사가 오래된 기억의 저항을 뚫고 과거로 건너가는 것이라고 말할 테다. 은유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작품에서 기억과 시간과 신화의 관계를 둘러보면 시간은 과거로 흐르지 않는다. 단지 현재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30여 년간 닫혀있던 숲 속에서 사람들은 그저 늙기만 했을 뿐 죽은 사람이 없다. 물론 제작사가 디즈니이기에 누군가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만, 현실세계의 필연이 개입하는 실사와는 다르게 선택만으로 이루어지는 애니메이션에서 그런 선택은 필시 의도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 작품이 선택한 것은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 초반에 마을에 정령이 찾아와 난동을 부릴 때, 그 진의가 실은 마을에 닥쳐올 재앙으로부터 대피시키려는 것이었다는 점도 그렇다. 그래서 엘사가 강을 건너가는 장면은 저승에 있는 기억을 건너가는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현재를 위한 횡단에 불과하다.




5.




요약해서 말하면 엘사가 건너 도달한 북쪽 너머의 강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흐르는 강이다. 무엇보다 엘사가 신화에서 지적하는 장소가 그곳임을 알아차린 건, 본래 출항했던 곳과 동떨어진 자리에서 발견된 아렌델의 난파선 덕분이었다. 이 난파선에는 부모님이 타고 있었고, 그곳에서 엘사는 물을 끌어올려 그곳에 있었던 일을 장소에 구현해낸다. 물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서 파생된 이 CG는, 그곳에 있었던 일이 물의 형태로 얼어붙는 것인데, 이미지 그대로 보면 기체와 액체와 고체라는 물의 세 가지 형태 중에 가장 단단한 형태로 자리 잡는 것이다. 이게 어쩌면 기억이 바로 그렇다는, 기체인 기억은 쉬이 휘발되고 액체인 기억은 그리도 형태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기억에 모양을 잡아주는 신화화의 한 종류이기도 하면서 쉽게 깨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품은 여기서 다시금 분기점을 겪는다. 엘사와 안나의 모습이 마땅히 해야할 의무라는 점에서 어른의 그것을 표방한다면, 그들과 동행하는 올라프에게는 그런 의무가 없다. 무엇보다, 영화 안에서 올라프는 작품의 분위기와는 잘 어울리면서도 서사에는 크게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질적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그런 이질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생각해보면 올라프의 순수함에 그 원인이 있다. 그리고 그 원인에 원인을 따져 물으면 올라프에게는 시작과 끝이 없다는 점을 지적해볼 수 있다. 올라프는 엘사가 만들어냈고, 창조된 생명이기에 생명체로서는 근본이 없다. 마찬가지로 올라프에게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다. 다른 인물이라면 마땅히 죽음을 맞이할 상황에서도 올라프는 죽지 않는다. 실은 애초에 죽음이라는 개념이 통용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거시적으로 보면 눈이기에 바다로 돌아가 비가 되어 내리는 식의 순환이 가능하기도 하다.




그러니까, 올라프에게 입구와 출구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본편이 과거에 남겨진 것으로 알았던, 하지만 실은 현재였던 신화를 찾아가는 이야기라면 올라프와 엘사의 성격은 정반대이다. 엘사에게 들려온 목소리는 과거로부터 불현듯 찾아온 목소리이고, 그 이유는 그것이 어릴 적 부모님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또한 올라프는 1편에서 탄생이 목격된, 영화 안에서 그 시작이 점지 된 캐릭터이다. 이 모든 것이 올라프라는 캐릭터가 과거보다는 현재에, 미래보다는 현재에 가까운 캐릭터라는 점을 말해준다. 따라서 올라프가 순수해 보인다면, 과거나 미래보다는 현재에 가까운 시간관으로 살아가는 어린아이의 모습과 닮아있어서일 테다. 실제로 올라프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기도 하다. 그 부분이 반영되어 1편과 2편 사이에 올라프는 정신적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런 정신적인 성장 중에 가장 도드라지는 건 죽음이 무엇인지, 감정이 무엇인지를 깨우쳤다는 점이다.




어른이 된다는 게 무엇일지를 고민하는 올라프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 없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만화적으로 표현된 여러 장면에서는 올라프의 신체 분해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다. 사실 그렇게 중요한 대목은 아니다. 이것은 만화이다. 하지만 보는 사람이 누군지에 따라서 그 그림이 달라질 수는 있다. 어른들은 올라프의 모습을 보며 일종의 해방감을 느낀다. 그 이유는 올라프가 어른을 동경하면서 노래하는 것들이 너무 가슴에 와 닿기도 해서이지만, 시간적으로 현재에만 살아가는 올라프의 모습은 과거도 미래도 없이 떠도는 어른의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올라프가 작품에서 조연인 이유는 그런 모습이 주류가 되어서는 안 되어서일 테다. 실은 2편의 도입부가 엘사와 안나가 눈사람을 만들며 놀던, 함께했던 시절이라는 점에서 시기상으로 1편의 전에 자리하기도 하므로, 그 눈사람을 본떠 만든 올라프에 담긴 감정은 각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것은 말 그대로 가장 오래된 곳의 기억이니 말이다. 예컨대 동심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신화이자 기억이다. 1편에서 시퀀스로만 보면 가장 처음 나온 노래가 ‘같이 눈사람 만들래’ 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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