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Feb 12. 2019

영화/현실의 애니메이션화에 관한 물음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라이트 노벨(일본의 경소설로 주로 하위문화 장르를 다룬다)의 특징은 캐릭터의 성질이 드라마에 우선한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캐릭터가 존재하는 세계는 우리 현실과 그 캐릭터 사이를 매개하는 개념이 된다. 쉽게 말해서 작품 속의 캐릭터성이란 곧 작가가 말하려는 의미 자체이다. 그리고 그 의미를 감싸는 게 작품 속 세계이다. 이때 그 감싸안음이 강한 의미체계를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완충지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일종의 직설화법에 해당하는 만큼 내용의 이해도 쉬울 것으로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어떤 면에서 그 완충 지대는 현실의 법칙을 뚫고 나아가게 되는 이질적인 지점이고, 현실에서 작품 속의 세상으로 이어지는 통로라는 점에서 타인의 무분별한 수용을 거부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니까 만화애니메이션소설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그 세계에 충분히 이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대화할 시도를 하지 않으면서 혹은 대화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그들이 보고 있는 건 단지 겉 부분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사람들은 이따금 그 두 가지 세계 중에 완충지대를 제외한 알맹이를 먼저 보고는 그 이질감에 놀라며 혀를 내두르고는 하는데, 그 속에 있는 우리에게 그들의 모습은 무지하거나 무례하게만 보인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그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고, 그 사회 및 심리적인 격차에 대해 먼저 알아두어야만 진심으로 소통하는 계기가 되지 않던가.


아이들과 대화하려면 아이들의 수준으로 자신을 낮추어야 대화가 된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을 볼 때 자신을 아이들 수준으로 낮출 필요는 없다. 단지, 애니메이션이 요구하는 세계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캐릭터에 직접 자신을 동일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 작품을 즐기고 싶다면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를 찾아내어 그곳을 통한 의미적 동일시, 신화화를 거처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신화화는 딱히 어려운 것도 아니다. 대부분 작품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알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저 그 세계의 법칙에 귀속되어있기에 바깥의 우리에게는 직접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뿐이다.


우리 자신의 또 다른 면


애니메이션 장르를 논할 때 필요한 것은 영화가 말하는 현실의 논리가 아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영화는 시나리오 뒤에 콘티가 있고 콘티 뒤에 카메라가 있는데, 애니메이션은 콘티가 곧 한 장의 쇼트를 대변한다. 다시 말해서 애니메이션은 감독과 스크린을 매개함에 있어 카메라라는 현실의 질료를 거치지 않는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은 무엇보다 감독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에 특화된 장르이다. 라깡의 말을 빌리자면 애니메이션은 상징계와 상상계의 결합이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에서 캐릭터성이란 곧 작품의 의미와 동일하므로, 그 캐릭터들은 감독의 생각이 스크린에 퍼져나가는 하나의 방법론에 해당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인형이라는 말보다 나르시시즘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존재다.


여기서 나르시시즘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건, 그 캐릭터들이 영화라는 자아의 여러 방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나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 특정한 방향을 위해 양쪽에서 치고받는 이들을 만들어낸다는 게 나르시시즘적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또한 어쩌면 이것이 내가 나아갈 방향이 어떻게 정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그 캐릭터들이 있든 없든 간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이고 따라서 여러 캐릭터의 존재 자체는 무의미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 혹은 그 캐릭터들이 독립적으로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사실은 우리가 그들을 조종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러나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들을 ‘우리 자신의 또 다른 면’이라고 지칭하는 게 맞을 테다. 그러니까 나는 우리가 그들에게 하나의 삶을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때 당신은 이러한 말이 파편화된 자아를 긍정하는 것이냐고 물을 수도 있을 테다. 대답은 ‘그렇다’. 나는 라이트 노벨에서 발안한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가 애니메이션 영화로 넘어올 때, 그 별개의 쇼트가 하나의 캐릭터성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그 쇼트는 하나의 캐릭터에 해당하고, 별개의 삶을 살아가는 셈이다. 그리고 그런 삶의 모음이 바로 영화 전체를 이룬다는 점에서 이것은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와도 같다. 이때 그 세포들이 모인 게 바로 몸이라는 점, 그 몸에는 영혼이 깃든다는 점에서 우리는 영화 (애니메이션)라는 매체의 물질성과 정신성을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


그 몸에는 영혼이 깃든다는 말이 뜬구름처럼 들릴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고 말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발언, 캐릭터성이 드라마에 우선한다. 그걸 우리는 이렇게 받아쓴다. 그 몸/세계(드라마)에는 살아가는 캐릭터/영혼이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볼드모트가 자신의 영혼을 여러 사물에 조각냈듯이, 그 조각난 영혼은 자신이 살아있으려는 시도의 일환이고, 요컨대 그 영혼들이 별개의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볼드모트식의 해석은 우리가 애니메이션에 적용해야 할 시도 중 하나다. 차이점이라면 우리는 그 영혼들을 하나로 불러모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작품 속에서 부유하는 형태로, 이미지의 형상을 빌려 스크린에 존재하는 유령과도 같으므로 말이다.


현실에서 애니메이션의 세계로의 변환


애니메이션 혹은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다 보면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주로, 영화의 자아가 강할 때 이런 일이 벌어진다. 물론 애니메이션의 흐르는 이미지가 그 생명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림이란 선을 그리는 것이기에 애니메이션 쇼트 안의 것들도 흐물흐물하게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다른 말로는 그 선이 흐물거리는 느낌에서 영화의 자아가 느껴진다는 점을 지적할 수도 있겠다.


애니메이션의 흐물거림은 몸과 영혼의 두 가지 층위가 이어지지 않음에서 오는 신기루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서 드라마와 캐릭터성이 있다면, 캐릭터성이 드라마를 이끄는 형태에서 그 물과 기름의 이질성이 등장한다. 우리는 이것을 ‘감싸 안는다’고 표현했지만 다른 시각에서는 초콜릿을 싼 포장지처럼 감싸 안기만 했을 수도 있을 테다. 쉽게 말해서 이야기가 좀 억지처럼 보일 때가 있다. 감수성이 부족하다고 해야 하나, 두 남녀를 위해 세계가 전력 질주하는 느낌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영화라면, 현실 세계의 돌파를 위해 그 법칙을 따라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애니메이션에서는 세계가 그들의 행동을 보조한다고 지적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해 세카이(セカイ)라는 말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 세카이에서 주인공을 남녀가 아니라 몸과 영혼으로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니까 기표가 기의와 사랑을 나눈다고 가정해보는 건 어떨까. 애니메이션의 쇼트가 흘러가는 스크린, 이것이 기표의 세계라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캐릭터의 모습(캐릭터성)을 기의라고 가정하자. 이때 스크린과 캐릭터라는 두 남녀를 위해 전력으로 투구하는 것은 영화의 의미체계, 세카이일 테다. 그러니까 나는 그 쇼트의 삶과 캐릭터의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게 바로 애니메이션의 세계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애니메이션의 심신 불일치에서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식의 말밖에 하지 못한다.


다른 표현도 사용해보자. 왜 개연성이 부족하게 느껴지는지를 따져 묻는다면 캐릭터성이 드라마를 견인하기 때문인데, 그 캐릭터성이라는 게 현실에는 없을 법한 인물이고 따라서 그에 이어지는 에피소드 또한 현실에 없을 법하기에 개연성이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던가.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애니메이션 속의 세계에 진입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이들에게 벌어지는 문제이다. 우리가 휴전선 너머를 바라볼 때 북한에 무엇이 있는지를 눈으로 봐도 모르는데, 그곳에 가서 주민에게 물어보면 눈으로 본 철골 구조물이 무엇에 쓰는 건지를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처럼, 애니메이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실에서 현실의 논리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애니메이션의 세계로의 변환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돈다


영혼이 몸을 지배한다. 혹은 캐릭터가 드라마를 이끈다. 또는 미장센이 몽타쥬를 결정한다. 셋 다 같은 말이다. 그러나 그 논리의 맥락은 다르다. 그런데 그 논리의 물줄기가 애니메이션이라는 삼각주에 집합하는 순간에 벌어지는 일은 신기하다. 출신지가 다른 것들이 모두 하나의 아귀에 들어맞는다는 것은 기막힌 우연이거나, 혹은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기만 할 뿐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저 관점의 차이일 뿐, 그 매체들은 별반 다르지 않은 셈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이 다른 선상에 놓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 추세를 보면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경계가 거의 허물어지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반대의 경우에는 익숙하지 않은 듯 보인다. 보기 좋게 문장을 다듬으면 대략 이렇다. 애니메이션의 영화화는 흔하면서 영화의 애니메이션화가 드문 이유는 무엇인가? 작품 외적인 것, 상업적인 면을 접어두고 말해보자.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나 곤 사토시의 <퍼펙트 블루>와 같은 애니메이션 영화가 카메라라는 질료를 거치지 않음에도 그것을 거치는 듯이 구도를 짜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애니메이션은 자기만의 강점인 쇼트의 삶을 두고 영화의 질료를 모방하게 되었는가?


사람들은 영화에 애니메이션의 정수가 깃들었을 때 극도의 거부감을 보인다. 캐릭터가 드라마를 견인하는 모습에서 영화는 현실의 재현이라는 제1의 원리를 방해받고, 또 다른 현실 속의 자신이 이곳에서는 결핍된 욕망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낸다는 제2의 원리를 방해받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것은 영화에서 주로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루는 로맨스 장르에 치중되는 경향이 있는데 (운명 같은 사랑이란 말은 그 운명이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다는 모종의 희망에서 비롯된다), 코미디 장르에서도 간간이 보이고는 한다. 과거의 <염력>이나 최근의 <극한직업>이 그중 하나다. 이 작품에서 캐릭터성은 곧 드라마 전체를 견인하는 확실한 요소이고, 그 캐릭터성이 없다면 시나리오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가령 <염력>은 작품이 시작하면서 염력을 갖게 된 남자가 있고, <극한직업>은 포스터에서부터 치킨집을 운영하는 형사라고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염력>은 실패했고 <극한직업>은 성공했다. 전자는 말도 안 되는 설정이라고 까였고 후자는 그럭저럭 재미있게 봤다는 사람이 대다수다. (천만을 훌쩍 넘겨 삼백만을 넘어버렸다. 2019.02.12.) 그래서 나는 관객들이 거부감이 드는 이유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해보려 한다. 캐릭터성이 드라마를 견인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동일한데 왜 그 작품은 실패했고 이 작품은 성공했는가?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간단한 문제다. 개연성이 없기 때문이다. 방점을 찍자면 개연성이 없기 때문에 성공한 것은 후자이다. 실적 부진에 시달리던 형사들이 치킨집에서 잠복근무를 하다가 치킨집으로 대박을 낸다는 스토리, 그런데 그들이 치킨집이나 하고 있을 인재가 아니라는 반전은 마지막에 밝혀진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게 된다. 이 개연성 없음은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일까? 그 꿈과 현실, 상상계와 상징계라는 스크린과 현실의 간극에서 어디에 발을 내딛고 서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우리의 머릿속을 강타할 때, 이 작품의 개연성 없음은 작품 안이 아닌 현실로서 작용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 개연성은 작품이 아니라 현실에 작용한다. 다시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렇게 살도록 내버려두는 이 세상은 개연성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한탄 속에서도 개연성이 없어도 괜찮다고 긍정하는 게 바로 애니메이션적인 요소이다. 왜 괜찮은가. 애니메이션의 세계에서는 캐릭터성이 드라마를 견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이 세계를 견인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주체일 수 없고 혹은 주체라고 생각이 들지 않던 우리가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돈다는 천동설을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것의 힘


그러니까 우리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볼 때 조금은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 (편협해도 된다)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면서 개연성, 그러니까 그 서사를 여러 방면에서 객관적으로 조합해보는 것은 영화적 맥락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애니메이션은 개연성(=현실 세계의 논리)을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 개연성을 끌고 가는 캐릭터야말로 작품을 풀어가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캐릭터성이 드라마를 견인한다는 것은 그 분리된 층위의 이질성이 돋보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현실적인 드라마를 주체적으로 끌어안을 수 있다는 점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쉽게 말해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고 그것으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게 좋은 애니메이션 영화의 표본이다.


가령 <목소리의 형태>를 보고 나서 내가 놀랐던 것은 장애를 가진 이의 사랑이라는 주요 테마가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의 사랑이 현실에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 독해에는 그다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에 집착하는 이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작품이 말하는 것은 이지메라는 왕따 문화에 대한 비판과 그 속에 있는 두 인물의 성장담이었고, 따라서 이 작품은 현실세계를 가져오면서도 그것을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두 사람, 두 캐릭터성으로 아픈 세계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을 본다면 초점이 아픈 세계 쪽에 맞춰져야 하지 캐릭터성에 맞춰져선 안 되는 것이었다.


쓸데없지만 사족을 더하자면 여러 올바름을 지지하자는 최근 추세에서 그들의 캐릭터성, 그들의 신념이 논의조차 되지 않은 채 간과된다는 점은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다. 이때 누군가가 그들이 비윤리적이거나 사회통념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것도 이해해주어야 하느냐고, 그 올바름이 관철되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딱 잘라 말하고 싶다. 매체라는 것은 현실에서 건드리기 힘든 부분을 순화된 무대에서 논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매체 속에서는 어떤 캐릭터성도 등장할 수 있고,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한 것들,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윤리적 도덕적 문제의 질문들이 던져질 수가 있다. (이런 면에서 SF나 판타지는 별반 차이점이 없다. <강철의 연금술사>의 그 유명한 장면은 오히려 애니메이션이기에 가장 직접적으로 물음을 던질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논의를 다시금 영화의 애니메이션화 쪽으로 옮기려 한다. 어쩌면 영화가 애니메이션이 된 시점에서 그 세계의 개연성은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나는 영화라는 매체가 지녀야 할 통념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 한다. 왜 영화는 개연성이 있어야 하는가? 나는 지금 열차의 도착과 함께 시작된 영화 이론의 무구한 역사에 반기를 드는 게 아니다. 우리가 걸어온 쪽이 있다면 걸어온 쪽의 옆에도 길이 있을 것이고,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별개의 길로 치부되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틀로 합쳐질 수 있다는 생각은 다들 하지 않았다. 애초에 다른 매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이 영화의 구도, 편집, 기법을 모방하는 한편, 영화가 애니메이션의 구도, 편집, 기법을 모방하려는 시도가 없다는 것과 그 해석방법이 제대로 정립되어있지 않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여기서 영화가 애니메이션의 구도를 따라갈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CG로 구현할 수는 있지만, (사실 CG인 시점에서 그것은 순수한 영화가 아니기도 하다) 그렇게 구현한다 하더라도 영화의 뿌리가 현실을 모방하는 것에 있기에 우리는 영화의 본질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의 애니메이션화는 그 캐릭터성만을 빌려오게 되는데, 이 캐릭터성을 이해하는 방법에 있어 애니메이션의 방법론을 적용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세계가 그들을 중심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관객이 그 캐릭터에 이입하는 게 아니라, 그 세계가 캐릭터에 이입하는 방식일 때,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것의 힘이 우러나오게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해석에 반대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