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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11. 2019

21세기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 <포탈> 시리즈


<포탈>이라는 게임을 가장 잘 설명하는 수식어는 21세기이다. 21세기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밀레니엄’이라는 이름의 디지털 혁명으로 인식된다는 점을 떠올릴 때, 이 수식어는 몹시 합당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게임의 시스템은 인류 역사에서 매체가 발전해온 계보의 끝자락에 자리해 있고, 공교롭게도 작품의 배경은 인류가 절멸했지만 기술만이 남아있는 한 연구소 안이며, 공간을 잇는 기술이 외부가 아닌 내부에 한정될 때 그 이어짐이 어떻게 응용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요컨대 우리는 전통적인 RPG 게임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던 포탈의 개념이 세계 안의 어딘가로 이어진다는 소모품 성격에서 벗어나는 현장을 눈앞에서 목격한 것이다.


전통적인 게임에서 포탈이란 것은 플레이어가 조작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텍스트로 구현한 턴 제 RPG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인지하는 건 자신이 죽을 때 특정한 분기로 되돌아온다는 점이었다. 쉽게 말해 이것은 게임의 특정 시점을 저장하는 세이브 & 로드 시스템의 원형이었다. 세이브 & 로드가 플레이어에 의해, 혹은 플레이어가 특정한 시점에서 게임이 저장된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포탈의 형태로 제시되는 시점의 되돌아감은 시스템상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즉 이때의 게임은 플레이어와 시스템의 구분이 명확했고, 플레이어는 새로운 세계 안에서 세계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탐색하는 탐험가였다.


하지만 세계의 한정됨을 모두 탐색한 플레이어가 세계의 끝자락에 당도하고 나면 그 세계에 대한 흥미도는 떨어지게 되었다. 플레이어는 왜 게임이 타자로부터 주어진 세상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고, 게임 속에서 만큼은 명확한 주체성을 원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제공해야 하는 것은 무언가를 탐색한다는 게 아니라, 그 세계를 탐험한다는 게 자신이라는 주체의식이었다.


이것이 영화와 게임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영화와 게임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게 세계를 탐험하면서도 세계 밖에 있다는, 자리의 중심을 미묘하게 유지하는 것이었다면, 게임 속 세계는 늘 현실과 달라야 했고 그래서 플레이어는 게임을 게임으로만 인식하게 되었다.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바로 이 부분에서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가 탄생했으며, 이 용어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개인의 세계와는 다르고 그래서 그것을 유희의 대상으로 보는 사람들, 혹은 그 장르에 붙여진다.


개인의 세계와 매체의 세계


개인의 세계가 현실의 세계와 다르다고 인식하는 점에서 이것은 어쩌면 ‘중이병’이라는 철없는 목소리로 표현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인의 세계를 붙들고 매체 속을 탐험한다는 맥락에서 우리는 모두 게임적 리얼리즘을 체험하고 있는 게 된다. 그 누가 <반지의 제왕>을 보면서 사우론이 직장에 쳐들어오리라고 두려워할까? 그 누가 <엣지 오브 투모로우>를 보면서 이 세계가 사실은 외계인이 쳐들어온 전장이고 몇 번이나 시간이 되돌아갔다고 생각할까?


그러니까 게임적 리얼리즘이란 것은 개인의 세계가 매체의 세계에 동화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영화의 논의에서 벗어난다. 영화는 관객을 동화하는 매체이고, 반면 게임은 사용자가 사용자라는 사실을 인지해야만 비로소 의미를 찾는 매체다. 요컨대 아바타라는 개념이 그에 맞는 사례일 텐데, 플레이어는 아바타가 게임상의 자신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현실에서의 자신은 여전히 ‘나’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은 플레이어가 게임 속 세상에서의 자신과 현실 속 세상에서의 자신을 딱 잘라 구분하기 때문이다. (게임이 플레이어를 과몰입시킨다는 ‘게임중독’의 논의는 틀렸다)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영화가 게임의 매체적인 성격을 받아들이려는 시도가 진행되었고, 그 논의에 따라 지금까지 우리가 마주했던 여러 영화가 게임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이 밝혀졌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가 보았던 영화에서 그 안쪽으로 향하는 포탈을 찾아냈다. 예를 들어, 기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는 게임적 리얼리즘으로 해석될 수 있는 영화 중 하나이다. 이 영화에서 현실의 세계와 동화 속 세상은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데, 말하자면 모호함을 품고 있고, 그래서 관객은 과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판타지인지를 따져 묻게 된다. 이때 영화는 답을 말해주지 않으나, 우리는 주인공 소녀가 그 통로를 지나갈 때가 바로 포탈을 지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통로는 스페인 내전이라는 처참한 현실로부터 소녀를 도피하게 돕는 굴(포탈)이기 때문이다.


<포탈>이라는 게임이 우리가 21세기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판의 미로>가 등장인물을(현실)을 판타지 세계(게임)로 인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이곳과 저곳을 잇는 것, 그 굴이야말로 포탈이라 부를 수 있을 테고, 우리는 그 소녀가 그쪽 세계의 인도를 받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초기 게임의 포탈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다음에 오는 게임적 리얼리즘의 형태가 세이브 & 로드 시스템을 취한 <엣지 오브 투모로우>라면, <포탈>이라는 게임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향하는 ‘포탈’을 시스템이 아닌 플레이어의 손에 쥐여줌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시간이 아닌 공간의 영역으로 옮겨놓음으로써 21세기의 게임(이라는 매체)를 완성하게 되었다.


시간이 아닌 공간의 영역으로


<포탈>이라는 게임에서 포탈이라는 개념은 이전까지의 그것과 동일하다. 단순히 볼 때는 그렇다. 포탈건이라는 도구를 통해 한쪽 벽에 A를 뚫고 다른 어딘가에 B를 뚫으면, 그 두 개의 공간은 이어지게 된다. 물론 그것은 4차원 영역에서이고 우리가 눈으로 보는 3차원에는 단지 구멍 두 개만이 뚫려 있을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 플레이어가 간섭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애초에 이것은 게임의 영역에서 벗어난 게 아닐까? 연극에서 연극을 원할하게 하는 것이 무대 뒤의 기술자들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 무대 아래의 연주자들은 눈에 보여도 못 본 척해야 하는 존재이고, 말하자면 그 기술자들은 3차원의 관객들이 연극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 4차원의 존재들, 더 상위차원의 존재들인 것이니까. 요컨대 <포탈>에서의 포탈은 현 세계의 존재(플레이어)가 게임 속 세계에 진입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것들이 작동하는 배후의 세계(개발단계)에 간섭할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물론 게임상에서는 레벨 디자인으로 막아놓았지만, 그것이 본디 적용될 수 있는 범위를 떠올려 볼 때, 그 ‘4번째(4차원 그리고 4의 벽)’를 돌파할 수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


<포탈>이라는 게임에서 제시하는 그 포탈의 원리는 전장에서 마을로 이동한다는 전통적인 개념의 포탈이 아니라, 시공간을 반으로 접어 그 두 개의 지점 사이를 잇는 웜홀의 원리이다. (작품은 그것을 소형 블랙홀을 탑재했기에 가능하다고 말한다) 영화로 말하자면 우리가 보고 있는 그 필름의 두 가지 쇼트를 잇는 것에는 어떠한 도구도 필요 없고, 단지 눈에 보이는 즉시 포탈을 생성하면 양 갈래의 쇼트가 하나로 합쳐지는 셈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게임의 시공간이 늘 특정한 장소(블록)으로 한정된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 게임의 맵은 정말로 거대하지만, RPG 게임처럼 한 번에 모든 맵(월드)을 불러오는 게 아니라, 단계별로 그것을 로딩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이 설계는 게임이 구동되는 컴퓨터 사양을 낮춤으로써 (게임을 이루는 맵, 하나의 블록만을 불러오면 되므로) 보다 많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접할 수 있게 하는 탁월한 선택이기도 하면서, 그 공간의 한정을 통해 이전까지의 포탈 개념과 21세기의 포탈을 단절하겠다는 매체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포탈이 게임의 시간을 되돌아가게 하는 것, 플레이어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용도였다면 이 게임에서의 포탈은 그런 용도로 사용되지 않았다. 공간을 접는다는 것에 있어 그 공간이 물질적으로 만져질 수 있는 인지의 영역에 해당한다면,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작품 속의 세계에 어떻게 간섭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품게 된다. <문명>이나 <심시티>처럼 무언가를 설계하는 ‘신’으로서의 플레이어가 아니라, 그 게임 속 세계를 넘어 게임이라는 매체의 창조 단계로 넘어가는 ‘신’으로서의 플레이어, 다시 말해서 영화라면 관객이 감독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는데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얼마든지 감독이 될 수 있다.


제 4의 벽을 뚫을 수 있다는 게 단지 카메라를 눈으로 응시하는 배우의 모습이라면(<살인의 추억>), 우리는 그들이 여전히 그곳에 있고 이쪽으로 넘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반대로 우리 또한 그쪽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만약 우리가 그것을 돌파할 힘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같은 시간에 다른 공간이 흐르면


<포탈> 시리즈는 늘 답답한 공간에 플레이어를 가두어둔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게임의 사양을 낮추려는 레벨 디자인적 요소이기도 하지만, 그 공간이 한정되어있지 않을 때 퍼즐 자체가 재미없어지기 때문인 것도 있다. 요컨대 이 작품에서 공간이 한정되어있다는 것은 <몬스터 헌터>처럼 방대한 세계관을 구축하는 전통적인 개념의 포탈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다는 주체적 이미지로서의 힘이 있는 것이다. 그 주체적 이미지는 플레이어가 포탈을 생성하는 총을 들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언제든지 공간에 구멍을 낼 수 있다는 것, 이전의 포탈이 그 편리성을 이유로 플레이어가 즉각적으로 이용하지 못하게 막아두었다면 이 작품은 다르다. 이 작품은 그 편리성 자체가 게임의 일부이고, 하지만 편리하면서도 편리함만으로는 풀어나갈 수 없는 게임이기도 하다.


오래 전 영사기사들이 하나의 필름을 연속적으로 돌려 영화를 상영하던 시절에, 그 필름은 수시로 끊기곤 했다. 그래서 영사기사들은 필름이 끊어지는 순간을 포착하는 게 중요했고, 그 순간에 득달같이 달려가 필름을 다시금 이어놓아야 했다. 그러므로 이 필름은 한번 끊어졌다가 붙여진 순간부터 이미 이전의 필름과 동일하지가 않게 된다. 그 필름은 지금의 필름과 다르다. 왜냐하면 한번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 말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보자. 그 공간은 지금의 공간과 다르다. 왜냐하면 한번 구멍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태까지 포탈을 응용한 작품들을 보면서 그것이 단절되기 이전의 것과 동일하다는 점을 단 한 번도 의심해본 바가 없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 주인공 남자가 수도 없이 살아남에도 우리는 그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사이버펑크 장르의 어느 안드로이드로 따지면, 기억만이 유지된 채로 신체는 수도 없이 바뀐다고 말할 수 있는 이 상황에서, 정신만 같다면 몸이 달라도 같은 사람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이 부분은 다른 논의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시간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게 뇌라는 점에서, 머리라는 점에서, 그 머리가 시간이고 몸이 공간이라면, 우리의 신체가 몸과 마음을 더해 ‘시공간’이라는 기호가 된다면, 같은 시간에 다른 공간이 흐르면 그것은 ‘여전히 같은 사람’일까?


이 게임에서 A 포탈과 B 포탈을 뚫고 계속해서 나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그녀가 늘 하나의 시간에 머무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주요한 단서이다. 즉 이것은 시간이 연속되고 있음을 눈으로 보여주는 단서이다. 로켓이 아래에서 위로 나아가듯이 이것은 시간이 흐르고 있지 않은 것 같은 우주 공간에서도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2001 :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그것과도 같다. 시간이 정지한듯한 이 하얀색 외벽의 공간은 어쩌면 정신 병동이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환자가 몰라야만 그들을 영원토록 가두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이 환자이기에 시간적 개념이 분열되고 있다 하더라도 병원이라는 공간은 그들의 시간을 흐르지 않도록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줄곧 잡아두는 것이다.


이 게임에서 포탈을 통과하는 플레이어는 자신이 하나의 시간을 돌파하고 있다고 자각하면서도, 포탈로 들어가기 전과 후의 공간이 마치 달라 보이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쉽게 말해 공간이 시간을 붙들어두는 환상이 아니라, 시간이 공간을 붙들어두는 환상을 겪게 된다. 그러니까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그 분열되는 공간을 돌파하는 하나의 시간에 들러붙어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고, 이 모습은 마치 <메멘토>의 거꾸로 된 서사를 관객 스스로가 머릿속에서 조합해보는 것과도 같다. 즉 영화로 따지면 미장센(공간)을 돌파하는 몽타주(시간)이고, 편집이 쇼트를 응집한다는 것에 대한 대답이 <메멘토>였다면, 그 쇼트를 관객이 자의적으로 조립하고는 자신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간다고 말하는 게 바로 <포탈>일 테다.


우리는 늘 하나의 시간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니까 <포탈>이라는 게임이 제시하는 것은 시간이라는 바늘로 공간을 꿴다는 게임적 리얼리즘의 21세기다. 게임적 리얼리즘이 제시하는 게 두 가지 현실, 개인의 현실이 작품 속 세계에 자연스럽게 이입할 수 있는 것, 동화가 아니라 이입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했었다면, <포탈>의 언어로는 같은 공간에서도 별개의 세계를 줄곧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허공에 뚫은 포탈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고 우리가 진입하는 순간에 그것은 우리의 순간이 된다.


<포탈>의 2편은 1편에서 주인공에 의해 죽임당한 악당 컴퓨터 ‘GLaDOS’가 자신이 사망하는 모습을 수만 번을 돌려보았다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데, 그 컴퓨터가 사실은 누군가의 인격을 바탕으로 제조되었음을 우리가 알게 되었을 때, 이 컴퓨터는 몸과 마음이 분리된 게 된다. 그 몸은 기계인데 그 마음은 인간이고, 우리가 위에서 말했던 언어로 번역하면 그 공간은 기계인데 그 시간은 인간인 셈이다.


기계적인 공간, 그러니까 작품의 무대가 되는 실험실은 악당 컴퓨터에 의해 설계되고 실시간으로 변형된다. 반면 그런 기계적인 공간에는 따스한 인간, 따스한 시간이 살아있다. 아마도 이 작품이 시작된 것은 주인공이 사악한 악당 로봇의 술수에 넘어가서 사망하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기계적인 공간을 돌파하는 것은 인간적인 시간이고, 그 인간들이 그동안에 컴퓨터의 술수로 사망했었다면, 어느 한 인간이 등장해 그 공간을 깨부술 때 작품의 시간은 비로소 흐르게 된다. 그러므로 이 게임이 1편에서 2편으로 넘어가면서 흐르게 되는 시간 또한 그녀가 살아있기 때문에 흐르는 것이고, 그녀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연구소 안에서 밖으로 나가게 되는 결말 또한 그 연구소의 기계성이 종말을 맞이하는 순간일 테다.


그러니까 나는 어쩌면 이 게임이 가혹한 현실에 맞서 싸우는 한 인간의 삶, 사실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 안에 담긴 시간이 그 공간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포탈을 쏘아 올리는 순간에 그 공간은 가혹한 현실, 우리가 아는 어떤 현실과 이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게임에서 주인공은 특정한 현실, 악당 컴퓨터가 존재하는 현실로 진입함으로써 게임적 리얼리즘의 세계로 진입하는데, 그 속에서 우리가 아는 어떤 현실에 구멍을 내고는 그 현실이 모두 이어져있음을 인정하는 방식에서 나는 우리 삶의 어떤 고민들을 보았다. 그 고민들은 다른 시간대에 다른 곳에서 떠오른 것이지만, 결국에는 지금의 내가 짊어지고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그것들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게 될 테다. 그리고 <포탈>이 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늘 하나의 시간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고민하던 그 순간들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의 개념이다. 나는 이 게임에서 바로 그것을 보았다. 시간은 우리 곁에 흐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시간의 형태로 그 공간을 돌파하고 있다는 것이다.


삶에는 세이브 & 로드가 없다는 점, 다양하게 분할된 몸/공간/순간을 하나로 엮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고 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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