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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08. 2019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게 곧 우리의 등을 떠미는 행위

영화와 게임이라는 두 가지 단어는 얼핏 보았을 때 서로 상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짤막한 영화 (Cinematic Trailer)를 작품 내에 삽입함으로써 게임 플레이어들에게 이야기 이해를 돕는 쪽의 연구가 이루어져 왔고,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이야기 진행을 선택할 수 있게 함으로써 영화 관람의 경험을 게임화 (Gamification) 하려는 시도가 줄곧 있었다.


여기서 전자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서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많은 게임들이 자사의 게임을 영화처럼 보아주기를 원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플레이어를 이야기에 몰입하게 돕는 역할이기도 하고, 실사에 가까운 그래픽을 자랑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하게도 그 ‘시네마틱’이라는 단어에 ‘그래픽’이라는 개념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실사’라는 것은 ‘실물’에 가깝지 않아도 그것이 진짜 같다고 믿게 만드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라스트 오브 어스>의 그 유명한 오프닝 장면에는 영화와 게임 플레이의 경험이 동시에 진행된다. 게임은 플레이어를 세계에 유인하기 위해 영화를 이용한다.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조종하다가 특정 명령을 수행하면 플레이가 멈추고 컴퓨터의 조종을 받게 되는데, 이것을 영화에 비유하자면 영화 관람 중에 ‘본다는 것’의 행위를 객석이 아니라 스크린으로 빼앗기는 셈이다. 말하자면 이 게임의 진행은 이야기 진행의 주도권을 서로 주고받는 탁구게임과도 같다. 그래서 이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실사처럼 느껴진다. 자기 자신이 모든 걸 해나가는 것이 게임이라면, 무기력하게 지켜만 봐야 하는 게 영화인데, 그 두 가지 사이에 타협점을 찾은 이 기법에서 플레이어는 삶의 높낮이를 번갈아 겪게 된다.


이 게임이 게임의 영화화라면 그 반대에는 영화의 게임화가 있을 테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블랙미러 : 밴더 스내치>라는 이름의 영화로 공개된 바가 있고, 흥행에 성공했다. 물론 이런 시도가 이번이 최초는 아니지만, 넷플릭스라는 이름의 OTT(Over the top) 서비스를 타고 흘러왔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일반적으로 게임 하나를 위해 특정 장소에 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떠올려본다면 그렇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영화관에서만 보아야 한다는 전통적인 개념을 깨트린 게 넷플릭스라면, 집에서 영화를 본다는 ‘간소한’ 경험이 게임화에 접목할 때,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그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체험의 영역에 발을 내디디게 될 것이다.


영화와 게임이 시간과 공간을 경유하는 방법


영화와 게임의 본질적인 차이는 매체가 기반하는 시간의 흐름에 있다. 영화가 현실의 시간을 그곳에 가두었다는 식의 말은 시오타 역의 열차 (뤼미에르의 유명한 필름들) 이후로 줄곧 언급되어왔던 사실이고, 그것이 영화 밖의 편집 (몽타주)과 영화 내부의 배치 (미장센)를 통해 뒤섞일 수 있다는 것도 깨우쳤지만 (<시민 케인>), 그럼에도 필름이라는 질료는 뒤에서 앞으로만 가야 하는 것, 즉 영화란 기차이다. 그러니까 영화 속에서 어떤 시공간으로의 탈출 혹은 이입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결국에 영화란 끝이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허우 샤오시엔은 오즈 야스지로의 그것을 생각하며 <카페 뤼미에르>의 열차를 그려내었고, 알랭 레네는 그 열차가 수평이 아닌 수직으로도 <사랑해, 사랑해> 달릴 수 있다고 말했었다. 이처럼 여러 감독들이 영화시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근본적으로 필름이라는 질료까지 극복하지는 못했다.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 모토코처럼 몸을 벗어나 마음으로 향한 그들은 마음을 네트워크에 올려두어 육체에서 벗어나게 된다.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이 말하는 것은 영화가 필름이라는 몸을 벗어두고 마음을 정제한다는, 태초의 형상으로 되돌아가겠다는 선언이었다. 어떤 면에서 넷플릭스를 반대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영화관이 영화를 탄생시킨 자궁이라는 점을 의미하고 있고, 영화 제작 시스템이라는 사업 및 배급의 맥락을 제한다면 그들의 목소리는 필름이라는 유물론에 기반하고 있는 것일 테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그 유물론이 긍정적이라거나 부정적이라는 것에 대해 어떠한 쪽으로 가치판단을 하게 된다. 넷플릭스를 통해 배급되었던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를 거부한 유물론적 가치관의 칸 영화제가 있고, 유물론적 가치관에서 점진적으로 고개를 들어야 한다는 베니스 영화제는 <로마>에 상을 안겨주었다.


전통의 보전과 미래로의 진보라는 두 가지 방향 중에서 무엇이 어떤 꼭 좋은 결과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확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이 고민들은 미래의 훗날에 역사의 한 장으로 기록되리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가 그 두 가지 판단 사이에서 무언가를 지지하지 않는 쪽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 두 가지 판단 중에 한쪽에 손을 들어주기가 싫거나 어렵다면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아도 된다. 영화가 뒤에서 앞으로 흘러가듯이 그 시간은 어떠한 미래로 우리를 이끌 테다.


그래서 우리는 그 두 가지 판단을 보조할 수 있는, 그 두 가지를 제하고 난 주변부의 이야기에 대해 생각을 해보려고 한다. 집에서 영화를 본다는 간소한 경험을 죽어도 다시금 살아날 수 있다는 생명의 간소함이 담긴 게임에 접목할 수 있다면, 그 게임이 특정한 시점을 저장하고 불러오는 시스템에서 영화의 시간에 대해 논의할 점이 있지 않을까? 혹은 같은 장면에서도 같은 시간과 공간을 경유하는 그 과정에 대해서 우리가 영화의 기법들을 겹쳐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시선의 출발과 도착지점에서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


일반적으로 게임 속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게임이 특정 시점을 기록하고 불러올 수 있는 ‘로드 & 세이브’ 시스템을 언급할 수 있을 테다. 바르트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게임의 이 시스템은 우리가 기억하는 특정 순간을 시각화해서 (사진), 그것을 들여다볼 때 언제든지 그 시공간 안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을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게임이 허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의 세이브 데이터를 구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 해두었던 ‘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시공간에는 족쇄가 없고 특정 개인에게 귀속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저 현실을 떠도는 특정한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때 현실을 떠도는 특정한 순간이라는 점은 영화를 본 우리가 영화의 특정 순간을 기억하는 모습과도 유사하다. (세이브되었음을 표현하는 게임 UI가 영화의 스크린과 비슷하게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그리고 그 네모난 창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영화의 스크린 그 속의 세계를 ‘관음’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게임의 특징이 특정 순간을 세이브하여 언제든지 그 시공간에 뛰어들 수 있는 것 (Dive)이라면, 영화의 특징은 특정 순간을 기억하고 언제든지 그것을 보던 순간에 뛰어들 수 있는 것 (Recall)일 테다. 요컨대 영화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영화 안에서만 존재하는 행위가 아니라 영화관이라는 스크린 밖에서도 존재하는 행위이다. 쉽게 말해 영화를 본다는 행위 자체가 의미가 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게임을 한다는 행위는 세이브와 로드에 의미적으로 기반을 둔다. 최초의 게임으로 알려진 <퐁>과 같은 경우에 ‘실패’는 곧 게임의 ‘종료’를 뜻한다. 이것을 영화로 바꾸면 하나의 쇼트와 시퀀스를 기억하지 못하게 된 순간, 필름의 선형성에 힘입어 자연스레 다음 공간으로 넘어간 순간 그 영화는 곧바로 끝이 난다는 말과도 같다.)


게임을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게임은 게임을 한다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다. 같은 게임이라도 친구와 하면 재미가 있는데 혼자 하면 재미가 없어지는 경우가 있고, 어렸을 때는 그토록 재미있었는데 다 커서 돌아보면 그게 왜 재미있었는지 잘 모르겠는 때도 있다.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뿌요뿌요>는 혼자가 아니라 대전할 상대가 있어야만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철권>과 <배틀필드>는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혼자서 하려면 이 게임을 구매할 이유가 사라지는 게임이며, 혹은 게임을 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 (트위치와 같은 게임 방송) 자체에서 재미를 느낄 수도 있다.


요컨대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본다는 것)은 그 시선의 도착지점이 아니라 시선이 비롯된 출발지점을 기림에서 비롯되는 행위이다. 게임을 하는 스트리머의 방송을 본다는 것은 그 게임이 주는 경험이 출발한 지점인 스트리머를 보기 위해서이며,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것은 그 시선이 도착하는 스크린이 아니라, 그 시선이 출발한 우리의 사고 및 생각에서 삶의 의미 혹은 감정적인 공감을 얻기 위해서다.


영화는 응시가 아닌 체험이 될 수 있다


2007년 밸브 사에서 발매한 <포탈>이라는 게임은 여러 상품을 판매하려고 의도적으로 끼워 넣을 요령으로 만들어졌다. 쉽게 말해 미끼 상품이었다. <하프라이프 2>와 <팀 포트리스 2>라는 거물들 사이에 들어온 <포탈>이라는 게임에 대해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고 그래서 존재감이 미미했었다. 이 존재감 없는 게임은 <하프라이프 2>를 만들었던 것과 동일한 엔진(텍스처)으로 만들었을 정도로 제작사에서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대박이 나버렸다. 위의 두 거물을 저렴하게 구매하려던 플레이어들이 이 게임을 해보더니 푹 빠져버린 것이다.


이 게임이 대박이 난 이유는 간단하다. ‘포탈’이라는 개념을 새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 게임에서 창안한 포탈이라는 개념은 이쪽과 저쪽에 구멍을 뚫으면 이쪽으로 들어가 저쪽으로 나오는 블랙홀과 화이트홀의 그것이었다. 게임의 진행방식은 이 포탈을 뚫을 수 있는 ‘포탈건’을 통해 여러 난제들, 우리 식으로는 ‘퍼즐’ 장르에 해당하는 문제를 헤쳐나가는 것인데, 여기까지만 보면 이 게임은 RPG 게임에서 자주 사용되던 포탈의 개념 (특정 장소와 장소를 잇는, 이를테면 전장과 마을)을 퍼즐에 옮겨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과 공간이 이어진다는 점에 있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중력 가속도를 이용한 여러 방식의 플레이를 경험하게 된다. 요컨대 플레이어가 절벽에 서 있고 그 절벽을 넘어갈 방법이 없다고 가정해보자. 이 게임에서 제시하는 해답은 자신의 뒤쪽에 파란 포탈을 열고 절벽 아래에 오렌지 포탈을 여는 것이다. (포탈의 색은 상관없이 모두 입구와 출구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서 붙는 중력 가속도는 오렌지에서 파란 포탈로 이동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되기에,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곧 절벽 뒤에서 그만큼의 가속도로 튀어나오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그 떨어짐을 다시금 반복하면 중력 가속도에 점진적으로 증가하면서 마치 물수제비처럼 포물선 방식으로 점점 높이 튀어나가게 된다.


요컨대 우리는 이 게임에서 우리의 도착지점이 사실은 출발지점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도착지로 설정한 포탈로 들어가면 출발지점으로 나오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스크린에서 우리의 생각을 엿보는 것과도 같다. 우리의 시선이 출발한 게 뇌라면, 그 뇌가 도착하는 지점은 상상계라는 이름의 스크린이고, 그 스크린은 다시금 우리의 뇌로 돌아온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게임에서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일련의 과정들을 몸으로 체험하는 셈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일반적으로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의미를 얻는 과정에 대해 그리 깊숙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영화를 보고 나서 옆에 있는 이와 방금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큼은 즐긴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영화를 보고 있는 셈인데, 우리가 게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게임이 영화를 체험의 영역으로 끌어낼 수 있다는 것, 즉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응시가 아닌 체험(체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저 어디든 바라만 볼 뿐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게임이 영화와 차별화되는 지점 중에 하나는 세이브와 로드라는 시공간의 포착, 기억, 추억하는 게 자유롭다는 점이다. 물론 이 게임도 세이브와 로드가 있다. 하지만 이 게임에서 로드와 세이브는 게임이라는 매체의 성격에만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게임에는 시공간의 개념이 포탈과 포탈이라는 두 개의 접합지점을 통해서 자유로이 이어지고 헤어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카메라가 포착하는 특정 구도와 순간이 하나의 쇼트에 해당한다면,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주위를 둘러보는 행위는 매 순간의 쇼트를 생성하는 행위일 테다. 요컨대 게임은 플레이어가 곧 카메라의 역할을 겸하고, 그 때문에 어디를 볼 것인지의 의식이 플레이어에게로 넘어온다. (영화에서 포착이 일종의 윤리의식에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주권의 양도는 큰 혼란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재밌게도 <포탈>은 멀미를 일으키는 대표적 게임 중 하나다) 즉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시선을 응시하는 사람 즉 카메라다. 그리고 그런 카메라가 시공간을 이동한다는 것은 영화에서의 죽은 시간 (A에서 B로 이동하는 과정), 편집 없이 어딘가로 이동하는 행위를 줄곧 보여주는 것일 테고, 하지만 이 게임 <포탈>처럼 특정 입구에서 특정 출구로 나오면서 그사이의 죽은 시간을 없애버린다면 그것은 곧 영화라는 매체의 후기 성격과 닮은 것일 테다.


영화가 여러 이론가의 실험을 거치기 이전, 그러니까 그 순수했던 시절, 뤼미에르 형제가 최초로 창안했으며 현재까지 영화의 원전 그 순수함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필름들에는 죽은 시간이 없다. 그 필름들은 보석으로 따지면 땅 속에서 캐낸 광물 그대로이며, 회 뜨기 전의 생선 그 자체이다. 태블릿 쇼트(Tablet shot)라는 이름의 그 응시에는 마치 창가에 걸터앉아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시적인 고민거리가 담겨있다. 그러니까 뤼미에르가 창안한 영화는 이 세계에서 저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 (열차가 저 세계에서 이 세계로 ‘도착’ 하듯이), 스크린이라는 이름의 창가에 걸터앉아 우리를 시적인 생각에 잠기게 하는 회화적인 성격에 가까웠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하고 영화를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고 믿은 (프랑스의 파테 영화사로부터), 하지만 미학적으로 볼 때 그 속에 우리가 살아가는 풍경이 아닌 이야기를 담고 싶은 여러 시네아스트들에 의해서 (조르주 멜리어스의 깜찍한 영화들), 영화는 이야기 (내러티브)를 갖게 되었다. 다르게 말하면 그 필름이 조각남으로써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은 ‘사라졌다’. 최초의 필름처럼 창 너머의 세계가 단 하나에 불과했을 때, 그것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연결된 하나의 ‘포탈’이었고, 그 포탈을 통해 우리는 저 안쪽의 세계를 뛰놀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가 이야기를 품고 복잡한 시공간을 만들어내었을 때, 그 통로는 웜홀이 아닌 우주가 되어 우리를 이야기의 세계에서 둥둥 떠다니게 했다. 분명 그 경험이 재미가 있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우리가 무언가를 ‘보고 있음’을 빼앗아갔다는 사실에도 동의할 수 있을 테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스스로 되묻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너무 복잡했고, 그래서 해석해야 했고, 그게 영화의 의미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두 갈래의 사람들이 있었고, 끝내 우리는 영화를 본다는 것을 텍스트 (Text)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포탈>이라는 게임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은 그 본다는 행위가 영화의 본질이라는 사실, 게다가 그 본질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에 대한 실마리였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어지는 행위, 그 주체의 연속성 (가속도)이 점점 붙는다는 것, 우리는 그 포탈을 통해 죽은 시간 없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하나의 시공간에서 맛보게 된다. 이 이동행위에는 로드와 세이브처럼 시간의 단절이 굳이 필요하지 않으며, 그래서 오래된 사진을 보는 것과 같은 낡은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이 게임에서 어딘가로 이동한다는 행위는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래서 이 행위에는 시간의 단절도 공간의 단절도 없이 오직 우리의 주체 의식 (Gaze)만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보는 곳은 곧 우리가 보는 곳과 연결된다.


마침내 이 이상한 문구는 우리가 도착한 곳이 출발한 곳으로 다시 이어진다는 뫼비우스가 된다. 영화를 보면 우리가 영화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환원론적인 사고가 아니다. 환원론이 A에서 B라는 공간으로 넘어가는 것이라면, 이 포탈은 하나의 시공간에 존재하므로 A1 과 A2의 연결이 된다. 사실 그 쇼트의 구분에 숫자가 필요한지도 의문이다. 당장 생각을 해보면 우리는 우리가 주위를 둘러보면서 응시하는 특정한 틀 안에 숫자와 같은 분류법을 붙여넣는 짓을 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지우는 게 아니라 우리는 그저 어디든 바라만 (Gaze) 볼뿐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영화 역사상 유일한 시간의 마술사로 남은 알랭 레네의 영화 중에는 <사랑해, 사랑해>라는 이름의 귀여운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서 한 남자는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그 순서가 뒤죽박죽이고 머무는 시간도 잠깐이다. 영화상에서 한 5초쯤 떠났다가 다시금 현재로 돌아오는데, 그런 식의 스노우 볼링이 이어지다 보면 어느새 못 보던 쇼트가 나와 있고 그게 바로 남자의 어느 과거인데, 그 과거가 순서 대로가 아니라 무작위여서 영화를 보다 보면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타임라인을 맞추어 보는 것을 우리는 그만두게 된다.


비슷한 시공간이 반복되는데 그것은 분명 남자가 겪었던 단 하나의 순간이고, 그 순간의 다음 쇼트에 붙은 이미지는 마치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처럼 무작위로 들러붙어 기억들을 충돌시킨다. 그 충돌의 순간에 무엇이 태어났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알 수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은, 시간 여행이라고 우리가 기존에 알던 것이 과거나 미래의 특정 순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면, 사실 그 시간 여행은 우리 자신이 하나의 시선으로 그 순간들(쇼트)을 꿰어맞추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 결론이 말하는 점은 간명하다. 영화가 나열하는 쇼트들이 그 의미 조합을 특정한 구석으로 유도할 수는 있겠지만, 관객이 그걸 다 무시하고 자기만의 주관으로 재구성한다면 영화는 전혀 별개의 것이 된다. 누군가는 이러한 행위를 두고 정답지에서 정답을 고르지 않는 행위라고 하겠지만, 그런 의외성이야말로 우리가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기회가 되기 마련이다.


여러 비슷한 순간으로 인도하는 우리 자신의 시선이, 그 기억들, 쇼트들을 향해 간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할 말이 많다. <포탈>이라는 게임이 말하는 것도 비슷한 이야기다. 게임에서 퍼즐을 풀다 보면 당연하게도 실패를 몇몇 하게 되는데, 그 실패를 되풀이하며 성공으로 나아가는 과정에는 비슷한 시공간, A 포탈에서 B 포탈로 나아가는 여러 물리적인 실험들이 진행된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것을 우리가 시공간에 만들어내는 응시의 지점, 그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동하는, 뒤에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다시금 뒤로 돌아오는 그 시간의 이동에 대해서 우리가 할 말은 아주 많다.


모두 비슷해 보인다. 게임을 하다 보면 숱한 기시감이 우리를 덮쳐온다. 너무 많이 실패하다 보면 멀미가 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시공간, 허허벌판 혹은 허공이라 불리는 그 아무것도 없음 (無)에서 무언가를 새로이 창조해낸다는 것, 포탈건으로 허공을 찌르는 행위, 바르트의 푼크툼, 사진을 찍으면서 시공간의 어떤 시기를 박제한다는 것, 그 사진과 사진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새로운 경험인지를 모른다.


더 나아가서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설정된 이 게임은 과거에 미래의 기술을 개발한 어느 회사를 배경으로 하는데, 그 회사 속에 갇혀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 나서 깨어나는 게 2편의 시작지점이다. 애초에 바깥으로 나갈 수 없으므로 바깥세상과의 단절을 겪은 이곳이 영화관에 비견될 수 있다면, 그 속에서 알 수 없는 시간을 흘려보내는 주인공의 모습은 우리 관객의 모습이고, 그가 포탈건으로 공간의 이동지점을 뚫는 것은 영화 안에 존재하는 여러 쇼트를 주체적으로 꿰어가는 행위, 영화의 쇼트는 A에서 B로의 진행이 아닌 그 위에 수많은 A 혹은 그 변형을 적층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게 아닐까?


<포탈> 시리즈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천장에 A 포탈을 열고 바닥에 B를 열고는 그 속에 뛰어들어 무한히 반복되는 낙하운동을 경험하는 것이다. 요컨대 <포탈>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런 개념인 것 같다. 과거의 영화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처럼 여러 이미지가 교차하는 그러나 그것이 타고 내리는 플랫폼이 바로 스크린이라는 창구였다면, 알랭 레네는 그 이미지가 교차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지를 조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미지가 별개의 삶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말했었고 (그 열차는 신호에 의해 조종당하는 게 아니라 오가는 사람들의 의지가 모인 집합체이다), 넷플릭스라는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영화 경험이 있는 시대에 우리 삶의 경험도 언제 어디서나 연결되어있다. 쉽게 말해 우리는 기억들을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다. 스마트폰으로 바로 검색하고 바로 보내고 바로 기록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실 기억을 잊은 게 아니라, 기억을 방치하는 게 된다. 스마트폰에 메모하는 것조차 귀찮다면 머리로 기억하면 되는데, 스마트폰이 있기에 머리를 쓰지 않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눈으로 보면 되는 것을 굳이 사진을 찍는 요즘 시대의 어떤 풍경과도 닮았다. 우리는 그 사진을 통해 과거의 특정 장면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오히려 그것을 기록함으로써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고 방치하는 게 아닐까? 오직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볼 때 그 기억을 기억하려고 애쓰게 된다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던가?


영화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느 쇼트를 본다는 것은 그 쇼트를 통해 이곳에 왔다는 말과도 같다. 어쩌면 이 발언은 닭과 달걀의 관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탈 건에 따르면 그 두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 우선순위도 없다. 우리가 떠올리는 순간이 곧 우리가 떠나온 순간이 되고 그것들의 유기적인 결합에 논리체계가 사라지는 곳, 그러면서도 질서없이 질서가 생겨나는 곳이 바로 스크린이다. 이럴 때만큼은 정신분석학의 무책임함이 도움되는 것 같기도 하다. 다만 이 결정적인 차이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그 쇼트들이 우리라는 이름의 타자, 그 욕망을 반영한 것”이라는 말은 틀렸다. (라깡주의자들의) 그 말에 따르면 우리는 뒤에서 등 떠밀려 영화를 보는 것에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포탈>의 논의에 따르면 그 시선의 응시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게 곧 우리의 등을 떠미는 행위이다. 이것이 가속도이고 이것이 중력이다. 그러니까 어떤 맥락으로 그 중력은 위에서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 앞에서 뒤로 지나가는 시간 이미지에도 비견될 수 있다.


이때 포탈 안의 풍경이 마치 거울처럼 보이는 것은 이런 생각이 들게끔 한다. 그 거울, 라깡의 거울, 하지만 우리가 깨부수어야 한다. 과거의 영화가 우리를 영화 안으로 이끄는 현혹하는 것이었다면, 요즘의 영화는 우리가 무엇을 볼지 자유롭게 고민하는 즉각성, 그 시선이 꽂히는 순간에 바로 터치하면 영화가 흘러나오는 넷플릭스의 시대라고 말이다. 그리고 가장 간단한 물음을 던져보고 싶다. 스크린 자체가 빛을 내는 LED 스크린이 영화관에 도입되었다. (또한 스마트폰 액정 안에 영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영화관에 영사기가 없다. 그들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스크린은 이제 자아(生)를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대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에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우리가 보는 모든 화면은 쇼트이고 별개의 시공간을 갖고 있으며, 그 쇼트 안에 뛰어드는 것, 스마트폰에 몰입하는 행위가 곧 우리를 영화 속에 떠미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른바 A에서 B로의 이동, 하지만 사실 들여다보니 A의 변형, 나는 그런 면에서 요즘의 영화를 지지한다. 그렇다고 과거의 영화를 무작정 몰아세우는 것도 아니다. 시대의 흐름을 피할 수 없다면 그 속에 뛰어드는 게 과거로의 탐색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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