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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02. 2019

게이미피케이션으로 영화 알아가기



‘서서히 스며드는’ 무언가


우리가 아는 매체를 일렬로 나열해 볼 때, 그 소통의 정도가 높은 순서는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먼저 사진과 회화를 가장 왼쪽에 놓고, 그다음에는 사진과 회화의 동사형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놓자. 그렇다면 이때 오른쪽에 와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게임이다. 게임이라는 매체가 점들의 집합인 ‘퐁’에서 시작된 이후로 그것은 현대에 들어 인터넷 방송이나 가상현실 또는 광고로도 진출했다. 쉽게 말해 게임이라는 것은 사진이나 영화처럼 그것이 기록된 질료에 기반한 게 아니라, 우리가 직접 그 속에 뛰어들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게임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게임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에 기반해 이용자의 업무 수행을 재밌게 하도록 돕기 위한 업무의 게임화라는 개념 (Gamification)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정작 우리는 그 게임이라는 것에 특정한 형태를 부여할 수 없다는 점에 불안감을 느끼기도 한다. 요컨대 이 형태의 불특정성은 마치 유령과도 같아서, 우리가 마음대로 그들을 제어할 수 없음에서 오는 통제의 불가침성이 마음에 스며들고, 그 스며듬을 마치 냉전 시대의 이념처럼 ‘서서히 스며드는’ 무언가로 치환하는 게 반대진영의 목소리다.


그러나 이 스며듬이 사진이나 영화가 주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을 떠올려 볼 수 있다. 흔히들 어떤 것을 보며 마음속에 슬픔이 적셔온다 혹은 분노가 끓어오른다는 표현을 하고는 하는데, 이때의 감정이 우리의 마음속이 아니라 저 매체 속에서 전이되었음을 떠올려 본다면, 게임의 스며듬과 영화의 스며듬은 그 작동원리에 있어서 별반 다를 바가 없을 테다. 이때 만약 누군가가 영화를 보며 느끼는 감정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의견에 반대하며 이렇게 답할 것이다. 영화가 당신에게 건네는 목소리를 정말로 듣지 못 했느냐고 말이다.


레벨 바이 레벨, 쇼트 바이 쇼트


영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목소리는 그 서사, 혹은 시나리오라는 이름의 구조에서 오는 정해진 진로와 통제 아래에 놓인 짜임에서 들려오는 게 아니다. 영화가 말해주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 그러니까 그것은 영화라는 이름의 자아 그 속의 영혼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이것은 마치 『햄릿』의 죽은 왕이 죽은 자신의 육신을 영혼의 상태로 구원하려는 것과도 같다. 그 영혼은 죽은 육신에서 빠져나와, 아직 살아있는 자신의 자아를 통해, 아직은 그 무대에 남아있는 관객에게 자신의 육체를 보아달라고 애타게 구걸한다. 요컨대 영화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은, 자신의 자아를 구축하고는 쇼트 바이 쇼트로 구축된 육신에 스스로를 이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쇼트 바이 쇼트라는 영화의 가장 최하 단계에는 영화의 질료가 접착제로 작용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쥬 이론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쇼트 사이에는 필름이 아니라 관찰자의 시각이 중요한 접착제로 작용한다. A와 B라는 두 가지 쇼트를 붙여 놓으면 C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나오는데, 그 경우의 수는 A와 B라는 영화의 질료만으로는 이루어 낼 수 없다. 말하자면 그 C는 영화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온 외계 생명이며, 영화라는 이름의 원시 바다에서 탄생한 생물체가 아니라 지구 밖에서 등장한 씨앗이다.


즉 영화 구조의 근본적인 결합에는 영화의 자생이 아니라 외부의 시선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선이 바로 우리의 생각이고 접착제 역할을 한다. 요컨대 이것을 <프로메테우스>에서 외계인들이 원시 지구에 와서 자신을 바쳐 인류를 탄생시킨 것에 빗댈 수 있을 테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영화라는 생명을 탄생케 한 창조주이다. 결국 영화라는 매체는 그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전달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영혼에 육신을 만들어줌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쇼트 바이 쇼트라는 단계적인 영화 육신의 구축 과정을 게임의 단계(level) 구축에 대응시킬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쇼트 바이 쇼트의 사이에 우리가 개입하는 것처럼, 게임의 단계적인 수행에는 우리가 직접 개입하는 어떠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영화와 게임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 개입의 과정에서 그들의 육신이 형체를 갖거나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의 쇼트 바이 쇼트는 그 자신의 존재감을 숨기면서 암묵적으로 우리의 참여를 유도하려 하지만, 게임의 레벨 바이 레벨에는 자신의 존재감을 명확히 드러내면서 우리의 참여를 유도하려 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때 존재감을 숨기고 드러낸다는 차이에는 단순히 시각의 요소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와 게임은 우리에게 관측된다는 점에서 둘 다 시각의 영역에 속하고 따라서 그것이 그 둘을 가르는 요소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 둘의 차이를 구별해내는 것에는 시각문화의 접근법이 아니라 질료의 형상에 대해 물음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영화의 질료가 필름이고 게임의 질료가 뇌간이라면,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 필름은 육신이고 그 뇌간은 영혼이다. 그리고 그 육신들을 조합하는 것은 영화라는 매체의 일이며 그 사이의 관절을 조립하는 것은 우리의 몫, 즉 남겨진 설계도면에 접착제를 붙여넣는 것이 우리의 몫인데, 게임의 경우에는 육신과 영혼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그것이 일체화되어 있기에 영혼을 정하는 게 곧 육신을 정하는 것이 된다.


쉽게 말해 게임의 질료는 우리가 눈앞에 보는 게 허구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눈앞에 있는 게임의 레벨은 영화의 필름처럼 물리적인 형태가 없기에 언제든지 격파될 수 있는, 이른바 신기루와 같다. 우리가 보드게임처럼 현실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도구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 게임의 규칙은 자의적인 판단으로 여러 방면에 걸쳐 수정될 수 있고 또는 원래의 목적과는 정반대로 사용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트럼프 카드로 여러 바리에이션의 놀이를 수행할 수도 있지만, 그냥 그 카드를 손으로 집어 던지고 놀 수도 있는 게 바로 게임의 규칙을 우리 스스로 창조해내는 것이고, 레벨 바이 레벨에 영혼을 개입하는 그 행위에서 육신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게임이라는 매체의 상호 소통성을 영화라는 매체에 대입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레벨 바이 레벨을 쇼트 바이 쇼트에 대응시키고, 그 영혼에서 육신이 피어난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관객이 쇼트를 구축하는 방식이 영화의 본질을 결정할 수도 있다는 영화 매체의 게이미피케이션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영화를 보는 방식은 그 쇼트 바이 쇼트를 접합하는 즐거움인 ‘해석의 즐거움’이 아니라, 레벨 바이 레벨을 구축하는 ‘창조의 즐거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 생리의 이해


그러니까 이것은 영화의 수용방식을 달리해보려는 시도가 아니라,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탐구하려는 시도다. 영화가 해석의 대상이라는 것은 영화를 타자화하는 것, 즉 우리와 그는 스크린이라는 막을 두고서 서로 다른 세계에 있음을 전제하는 것인데, 이 영화와 관객의 관계를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가 아닌 육신과 영혼의 일체화라는 ‘아바타’로 설명하고 싶다. 쉽게 말해 제임스 카메론이 <아바타>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과 같이, 인간과 나비족이라는 두 갈래의 이분법은 나비족이라는 육체에 인간이라는 영혼이 깃드는 게 아니라, 나비족이라는 육신에 인간의 영혼이 뒤따르는 후천적 판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바타>가 어떤 영화인지를 생각해보면 영화의 게이미피케이션화에 대해 우리가 나아갈 판단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제이크 설리(샘 워딩턴)는 하반신 마비의 불구자인데, 그것을 고칠 비용을 얻으려 나비족의 행성을 침공하는 아바타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된다. 이 아바타 프로젝트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영혼을 나비족의 육신에 넣고 그 육신으로 나비족과 교감하려는 시도인데, 말하자면 육신만 그럴듯한 채 사실은 인간의 영혼으로 그들을 꾀어보려는 술수이다.


여기서 영화의 쇼트 바이 쇼트의 구축 논리를 가져와 대입하면 다음과 같다. 이 영화에서 인간을 관객에 대입하고 나비족을 영화라는 타자로 설정한다면, 제이크 설리의 모습은 질료의 동질성만을 유지한 채 그 영혼의 이해는 뒷받침되지 않은 관객일 테다. 말하자면 이때의 제이크 설리는 자신이 나비족의 창조주가 될 수 있다는, 나비족의 생리는 인간의 개입이 있어야만 진행될 수 있고 또 그사이에는 전혀 다른 것이 나올 수 있으므로, 꼭 나비족과 나비족의 결합이 아니어도 된다는 에이젠슈타인적인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그 충돌 몽타쥬는 꼭 인간과 나비족이라는 이종 간의 충격이어야만 할까?)


반면 영화의 후반부에 제이크 설리가 나비족과 진정으로 교감하게 되는 장면에서, 제이크 설리는 인간의 육신으로는 나비족과 성적인 결합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말하자면 이것은 두 개의 다른 쇼트가 올바르게 교접될 수 없다는 쇼트 바이 쇼트의 차단인데, 그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것은 아바타에 영혼을 이입하는 게 아니라 그 아바타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이 영화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이 자신의 자아를 구축하고는 쇼트 바이 쇼트로 구축된 육신에 스스로를 이입하는 것이라면, 제이크 설리가 아바타 그 자체가 되는 과정은 자신이 영화의 의미(나비족의 삶)를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을 포기하는 것, 즉 그는 영화 자체가 되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이크 설리의 현 상태를 생각해보면 그는 신체적으로 불완전하기에 그 수복을 위한 대상으로 아바타임을 택했다는 것을 떠올려볼 수 있다. 신체불구자이기에 아바타 프로젝트에 자원했는데, 그 아바타가 되면 자유로운 신체 그러나 인간이 아닌 나비족의 신체가 되고, 영화의 언어로 번안하면 관객이 되기 위해 영화에 동일시하려던 그가 결과적으로는 영화의 편에 서려는 것을 제임스 카메론은 보여주었다. 즉 이것은 레벨 바이 레벨이라는 영화 생리의 이해, 영화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내미는 손길, 요컨대 게임의 의미가 재미가 아닌 주체적인 구축에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우리가 영화와 교접하는 방식


<아바타>에서 제이크 설리의 모습을 보면 나비족과 인간이라는 종족의 불가침성이 그들을 교접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는 점을 떠올릴 수 있다. 설사 아바타 상태로 나비족과 성교를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제이크 설리 자신이 인간이라는 의식이 있기에 제대로 된 교점이 아닐 테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불구 하반신을 고치려고 아바타가 되었고, 따라서 그 수리의 대상인 인간 신체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므로, 이 교접은 육체적으로는 이루어졌어도 정신적으로는 불완전하거나 미이행되었음이 틀림없다. (나는 나임을 잊지 않고 그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이 말은 다음과 같이 바꾸어 쓸 수가 있다. 쇼트 바이 쇼트의 교접이 육체적으로는 이루어졌어도 정신적(영혼)으로는 불완전하거나 미이행되었다고 말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러한 쇼트 바이 쇼트의 접근법은 그(나비족)라는 타자에 대한 이해부족이 아니라, 우리가 관객석에 있다는 주체의식, 우리가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로 했던 바로 그 주체의식이 역으로 우리를 영화 해석의 실마리로부터 떨어뜨려 놓는다는 점을 뜻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화라는 타자를 온전히 이해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크리스티앙 메츠가 자크 라깡의 논의를 영화에 빌려왔던 것을 떠올려 볼 때, 우리의 영화 경험은 저곳이 거울임을 명확하게 아는 것, 즉 이곳도 우리이고 저곳도 우리라는 현실배반적인 동일시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었다. 즉 우리의 자아는 두 개로 분열된다 하지만 그곳은 타자이고 이곳은 우리이다. 요컨대 영화는 주체적인 타자이고 관객은 주체적인 자아인 셈인데, 그 주체가 타자를 지배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과도 같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깨닫는다.


이 믿음이 우리가 영화를 보는 근본적인 이유였었다. 현실에서 우리는 바라는 게 많은데 그걸 다 이룰 수가 없기에 늘 불만족상태였고, 그 불만족의 반대항으로 만족감을 스크린에 구현하고, 그것을 타자로 칭하면서 훔쳐보는 재미 (관음증)가 영화의 주된 재미였었다. 요컨대 이것은 나 자신과의 교접, 섹스, 나르시시즘, 유전적 동일성을 교환한다는 점에서 근친상간과도 같고, 그래서 이 교접은 유전적인 결함을 갖기 마련이었다.


‘나’라는 쇼트의 반대항으로 구현된 ‘나의 타자’라는 쇼트와의 교접, 그 결합의 사이에 우리의 영혼이 삽입되는 것만큼 이상한 일이 없다. 과연 이러한 접근법을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접근법에서 우리는 우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게 된다. 우리가 영화를 만들어 간다는 창조적 주체의 자신감이 영화의 쇼트 사이에 개입하면서, 이때의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 그저 우리 자신으로만 남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객석과 스크린의 경계를 허무는 레벨 바이 레벨의 게이미피케이션의 접근법으로 영화에 접근할 경우, 그 쇼트들은 결합의 대상이 아니라 각각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자아, 영혼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소통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영화의 규칙이 깨어지면서 게임의 규칙을 새로 쓰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박진영이 했던 “섹스는 게임이다.”라는 말은 이곳에 불려 올 수 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는 어떠한 이해관계나 현실법칙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연애의 규칙 그 개념을 만들어나간다는 동반자적 관점에서 그런 표현을 사용했다. 말하자면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는, 우리가 영화와 교접하는 방식은 재미를 위한 섹스가 아니라 서로를 위하며 연애의 규칙 그 개념을 만들어나가는 상호이해적인 방식, 나와 너라는 쇼트 바이 쇼트를 거짓된 주체의식으로 결합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를 차근히 밟아나가는 레벨 바이 레벨의 방법이어야만 한다.


우리가 영화만 보는 건 아니므로, 현실의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방금 나는 생각했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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