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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23. 2019

영화가 되려는 만화, 만화가 되려는 영화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같지 않다. 그 점은 확실하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영화와 영화 같은 애니메이션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둘은 어느 정도 유사하거나 부합하는 면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쉽게 말해, 비슷한 성질이 있기에 비슷한 도구를 끌어와 변형을 수행할 수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와 검증 과정이 필요하겠지만(이것이 논문이 아니라 에세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느끼는 그대로 서술하면 보는 그대로의 흥미로운 지점들이 몇몇 나온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만화와 영화에서의 시간성 차이 


영화가 되려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애니메이션이 되려는 영화도 있다. 이렇게 나열해보면 애니메이션과 영화가 서로의 질감을 추구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그 두 개의 매체에 대해 당장 떠오르는 이미지를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영화 : 단단함, 현실적, 사실적. 애니메이션 : 액체적, 상상력, 물렁함.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 분류에서 그들의 근간이 되는 것은 사진과 만화라는 매체이다. 사진에 유동성을 불어넣은 게 영화이고, 만화에 유동성을 불어넣은 게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는 사실이 있는데 그건 바로 ‘만화 영화’이다. 


만화 영화라는 것은 말 그대로 만화를 영화로 만든 것이지만, 이를 지칭하는 것에는 두 개의 단어가 혼용되고 있다. 만화 영화(Cartoon Movie)라는 지칭이 있고, 애니메이션 영화(Animation Movie)라는 지칭이 있다. 이 둘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근간이라는 차이가 있다. 전자는 만화를 영화의 형태로 변형한 것이고, 후자는 그림이나 인형을 영화의 형태로 변형한 것이다. (제작과정에 사용하는 원리가 비슷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영상이 요구하는 형식이지 원안에 대한 설명은 아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두 단어는 다르지만, 두 개의 용어가 혼용되는 현 상황에서는 구태여 둘을 구분하지 않고 통합해서 만화로 지칭하도록 하겠다. 다르게 말하면 이것은 이 글에서 언급하는 만화라는 게 셀 애니메이션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만화란 별개의 그림을 종이 위에 순차로 나열한 것을 뜻한다. 따라서 만화란 기본적으로 그림의 모음집이다. 순서가 어떻게 되어있든 간에 흐름이 이어지기만 하면 된다. 바로 이 점이 영화와 비슷하다. 영화는 사진에 해당하는 쇼트를 모아 시퀀스를 만들고, 그것을 자유로이 배치하여 완성하는 매체이다. 이는 영화 제작의 예비 작업인 콘티 제작과정이 만화 그리기와 유사하다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허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영화의 쇼트가 일방적이라는 점이다. 


만화를 세로로만 쭉 나열할 것인지, 아니면 아파트를 쌓듯 대각선 칸으로 배열할 것인지를 고려해볼 수 있다. 말하자면 만화는 쇼트를 적층하는 것에서는 비교적 자유롭다. 굳이 형식을 유지할 필요가 없기에 모든 방향으로 쇼트가 작용할 수 있다. 예컨대 만화에는 시간에 방향성이라는 게 없거나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나 영화의 경우에는 상영 시에 필름 롤이 가로나 세로 둘 중 하나로만 돌아가야 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간은 무조건 위로만 적층된다. 그래서 만화의 시간을 영화의 시간에 견주어 보면 오독이 일어난다.


만화의 시간은 축조의 방식이 자유롭지만 영화의 시간은 그렇지 않다. 영화의 시간은 오로지 두루마리처럼 감길 뿐이지만, 만화의 시간은 종이 한 장 전체를 자유로이 응용한다. 여기서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 것은 영화의 시간이 심층적으로 보이는 이유와 만화의 시간이 단편적으로 보이는 이유인데, 그 이유는 단지 영화는 영상이고 만화는 그림이라는 점 때문이다. 쉽게 말해 영화와 만화는 전제가 된 물질이 다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들은 그들의 전제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들은 각각 자신이 잘하는 것을 하려고도 했지만, 자신이 못하는 것을 하려고도 노력했다. 영화는 자신의 시간이 심층이라는 것을 거부하고 그것을 평면으로 무화하려 했으며, 만화는 그들의 다각성을 거부하고 보다 심층으로 나아가려 했다. 이 시도는 그들의 정체성에 다양한 변화를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 대목에서 그들이 서로 닮고 싶어하는 것을 두고, 전제삼은 것을 선미에 놓는다면 그들을 각각 ‘영화가 된 만화’와 ‘만화가 된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 영화의 만화화와 만화의 영화화에서의 어려움


그들은 물질을 바꾸지 못하니 시간을 바꾸는 방식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물질을 어느 정도 획책하려 했다. 그렇다면 그 시도는 어떤 방면으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만화를 영화로 만들 때는 만화 고유의 시간 방향이 무너지면서 영화의 시간으로 재배치된다. 이는 만화를 영화로 만들었을 때 왜 그리도 이질적인 풍경이 나오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반대로 영화를 만화로 만들 때는 영화 고유의 시간을 무너뜨리고는 만화의 시간으로 재배치한다. 이 경우에는 영화가 갖던 물질성, 시간의 일방적 정렬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다양한 측면에서의 구현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물론 이들은 그들의 전제를 깨부술 수 없기에 서로가 요구하는 방법론을 취하게 되는데, 이 점에서 그들 각자의 흥미로운 변주 지점이 도출된다. 


만화의 형식에서 흐름은 이야기의 맥락이기도 하지만 그림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즉, 그림이 곧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서사로 보면 이야기라 할 수 있겠지만 수사로 본다면 이야기 자체로만 볼 수는 없다. 예컨대 만화에서의 그림은, 만화적 표현을 위해 부가적으로 첨부되는, 현실 언어로 치자면 대화의 풍성함을 위해 끌어오는 관용어구이기도 하다. (인물의 뺨에 그려진 동그란 모양의 홍조나, 머리에 돌탑처럼 올려진 혹들이 그렇다.) 그리고 그것은 이것이 만화임을 선언하는 것에 어느 정도는 일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쉽게 말해, 영화가 영화(적 시간)임을 영화 안에서는 자체적으로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만화는 이것이 만화(적 시간)임을 인정하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만화가 만화임을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에는 만화적 리얼리즘의 문제와 연결된다. 일본의 서브컬쳐 비평가 오스카 에이지는 만화적 애니메이션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전통적인 매체인 글이나 영화나 사진과는 다르게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는 ‘나’라는 주체가 아닌 ‘캐릭터’만이 있다고 말한다. (오스카 에이지가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통틀어서 지칭한 이유는 두 매체의 물질성이 아니라 시간성에 그 유사함이 있음에 주목해서다.) 그에 따르면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보는 이들에게서는 ‘나’는 아니지만 ‘나’의 대리인으로 섭정된 캐릭터로의 지지가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나’가 아니기에 직접적으로 그에 필요한 능력이나 상황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나’가 아니기에 현실에 구애받지 않고 오직 이입만을 할 수 있는 편안한 상태가 조성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만화적 리얼리즘은 독자에게 현실의 일방향성으로부터 탈피하고는 만화 속에서의 다방향적 시간으로 동참할 것을 요구하거나 매혹한다. 


그런데 어쩌면, 현실과 만화의 물질성이 다르기에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말 보다는 현실의 일방향적 시간이 무너졌기에 원초적인 물질로 돌아가 다른 시간을 꾀한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듯 보인다.  소위 말하는 현실 도피일 수도 있지만, 만화를 영화로 만들 때 만화적 시간이 영화의 시간으로 변형되기를 요구받는다는 점에서, 만화가 영화가 되기를 거부하는 만화 영화에서의 어떤 현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것이 영화의 시간이 아니라는 점(현실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속이기 위해)을 강조하려 하지만, 만화는 이것이 만화의 시간이라는 점을 독자에게 설득해야 한다. 그러니 만화가 영화가 될 때는 만화의 자유로움을 벗어던지고 현실의 그것을 설득하려 하는 영화적 시간을 어느 정도는 수용할 필요가 있다. 허나 문제는, 여기서 현실의 담론을 뒤집어쓴 만화가 만화적 리얼리즘에서 말하는 ‘나’라는 존재를 다시금 수면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만화에서 발견하는 고유한 가치는 사라지고야 만다. 아니, 작품 전체를 지지하던 기반이 붕괴해버릴 수도 있다. 만화적 리얼리즘을 구성하는 시간은 캐릭터라는 것에 우리가 이입하는 방식, ‘나’가 아니지만 ‘나’의 대리인을 내세우는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만화의 다방향적 시간으로부터 존재하는 것들이 ‘나’의 대리인을 구성한다. 반대로 보면 ‘나’가 그렇게 다양한 시간에 각자 대응할 수 있는 이유는 본체가 아닌 캐릭터에 시간이 투입되어서다. 말하자면 만화에서의 주체는 파편화된 채로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파편화된 채가 아니라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영화의 시간성을 만화로 개입하게 되면, 파편화된 채로 주입되던 시간성이 일방향으로 정렬되면서 주체로의 구성을 이루어내던 것들이 반대편으로 역류하게 된다. 즉 우리는 그들로부터 공격받게 된다. 영화가 만화로 변화할 때 시간을 분할하며 사용했던 에너지는, 그 반대의 경우에 막대한 에너지를 요구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왜 영화를 만화로 만들기는 쉬워도, 왜 만화를 영화로 만들기 어려운지를 말해준다. 


3. 영화의 만화화가 필요한 이유 


그렇지만 근래에 우리는 굳이 물질성을 획책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물질, 이를테면 신체와 같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굳이 중요하지 않게 된 디지털 사회에서 시간은 물질 없이도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물질(방향) 없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대두되었다. 디지털 사회에서 시간이라는 것은 더는 무언가를 가리키거나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그저 네트워크 안을 떠돌기만 할 뿐이다. 그게 자생적으로 자라났든, 아니면 오랜 장소를 거쳐 물질의 기표를 잃어버렸든 간에 그것은 신체 없는 것들로서 유령과도 같은 지위를 점하게 되었다. 


물질 없는 시간에 유령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다른 분과로의 나눔이 가능해진다. 이를테면 김소영이나 손희정이 말하는 한국 영화에서의 근대성이란, 줄리안 크리스테바의 비체(Abject) 개념에서 원용된 주체도 객체도 아닌 유령처럼 떠도는 여성들이다. 손희정을 비롯한 여러 평자는 한국 영화를 통해 해당 부분을 지적했지만, 그 지적의 근거를 넓은 지평으로 확대해보면 여성이라는 신체 없는 괴물(성), 그 빗금 쳐진 주체에 대한 무언가이기도 하다. 여기서 빗금 쳐진 주체란 만화에서 말하는 다방향적 시간과 비슷한 맥락이 있고, 다르게 말해서 그것은 분열된 시간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연대로 구분할 수 있다면 순차로 자리할 근대와 현대라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회에서는 시간이 아닌 물질의 부재가 주된 동력으로 대두한다. 물질 없이 존재하는 시간의 개념이 현실에 안착하면서 우리는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유령처럼 존재하는 것들에 꼭 신체를 부여하지 않고서도 불러낼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 말을 위에서 했던 표현으로 고쳐 쓰자면, 우리는 이제 우리의 시간이 특정한 방향성을 지녀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났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여기에서 시간성이라는 게 그 안에 포진한 담론과 면밀히 결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시간에 방향성이 있어야 했던 이유가 그것이 품은 물질들, 영화나 만화에서의 서사 구조를 견인하기 위해서였다면 그때의 서사는 현실에서 끌어온 영화적 시간에 귀인하는 것이었다. 이는 영화가 현실에서 파생된 무언가였고 그렇기에 영화는 자연스레 현실로부터 작동하게 되었던 게 이유이다. 그러나 만약 영화라는 시간이 현실이라는 물질로부터 물질 없이도 생존 가능함을 깨우친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 경우에는 현실 없이 존재하는 영화가 될 테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견인할 현실이 없기에 자연스레 분열될 테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의 주장은, 그런 분열이 영화적 시간의 측면에서는 일종의 붕괴이거나 혼란처럼 보이지만 만화적 시간으로 보면 오히려 영화가 만화적 리얼리즘의 구조로 변화하는 과정에 대한 증거라는 것이다. 예컨대 이곳으로 흘러든 주체도 객체도 아닌 것들은 단지 캐릭터라는 이름으로 지칭되기만 할 뿐이다. 그것들은 분열로 인한 현실의 구멍으로부터 흘러드는 일방적인 것들에 동시다발적으로, 다방향으로 대응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에 먼저 존재하는 사례가 있다. 그것은 바로 현실 세계에서의 캐릭터화다. 디지털 사회에서 실물 없이 데이터로만 존재하는 주체를 사람들은 주체로 여기지 않고 유령처럼 여긴다. 모니터 안에 존재하는 닉네임으로만 지칭되는 그는, 분명 모니터 너머의 인격임에도 불구하고 주체도 객체도 될 수 없다. 모니터 안에서 닉네임으로 지칭되는 이들은 단지 바라보는 이의 필요에 의해서만 즉각적으로 존재하는 유령에 가깝다. 즉 주체의 캐릭터화가 진행되고 있다. 예컨대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그런 비체를 무수히 양산해낸다. 현실 세계에서의 비체란 소수자 문제에서만 주로 거론되고 있지만, 인터넷 세계에서의 비체란 그 공간 자체에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영화나 만화가 물질 없는 세계로서의 만화적 리얼리즘을 주된 방법론으로 끌어오는 이유, 그런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인터넷 세계에서 제거된 물질이 현실에서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만큼, 그런 현실로부터 시간을 수혈받는 영화로서는 그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해결방법으로는 현실에 존재하는 비체를 영화 안에서의 비체로 갚아주면서, 현실의 비체가 영화 안으로 개입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게 제시되었다. 그러니 영화의 만화화와 만화의 영화화라는 두 가지 갈래에서 영화의 만화화라는 방법론이 우선시되는 것은 만화에서의 주체는 본래부터 비체임에도 그 이전의 대응항이 없어서다. 


말하자면 과거에 만화가 영화보다 하위문화로 취급되었던 이유가 그가 비체였기 때문이라면,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서 영화가 만화를 모방해야 현실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현실이 만화적 리얼리즘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방향적 시간이 하나의 주체에 깃드는 게, 분열의 신호가 아니라 경직된 현실에 물꼬를 틀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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