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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Jan 06. 2020

리얼과 언리얼, 꿈을 꾸는 꿈



1.




음악에서 멜로디가 중요하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음악에서 가사가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동의하지는 않는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가 팝송을 들을 때 팝송의 가사가 어떤 의미인지를 매번 따져가면서 ‘좋다’고 느끼지는 않으니 말이다. 쉽게 말해 음악에서 가사가 있거나 없거나를 따지기보다는 가사를 어떻게 발음하고 노래하는지가 더 중요해 보인다. 힙합이라는 음악 장르에서 가사야 어떻든 간에 라임이 중요한 것을 떠올려보면 그렇다. 이른바 운율인데, 이는 음악의 몇몇 분파에서 음악의 운율 자체가 형식으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이 흥미롭다. 일본의 정형시인 하이쿠나, 한국의 정형시인 시조를 읊을 때는 리듬이 내용에 어떠한 심상을 부과한다는 점에서 그 리듬이야말로 정형시에서의 정수라고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가사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사람들이 음악을 선택하는 것에 가사를 고려의 대상으로 포함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 그것을 리듬과 가사 둘 중 무엇으로 느끼는 지다. 가장 합리적인 답은 둘 다라고 답하는 것이겠지만, 구체적으로 따져 보자면 음악이라는 것 안에 노래라는 ‘가사를 지닌 멜로디’가 있는 것이므로 노래에서 중요한 것은 멜로디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노래에서 멜로디란 일종의 뼈대 같은 것이다. 같은 노래라도 약간의 편곡을 거치고 나면 전혀 다른 가사로 들려온다는 점이 그 부분을 증명한다. 그런데 멜로디가 같아도 가사가 정말로 다르다면 그건 패러디에 불과한 무언가에 그치기만 할 뿐, 원본이 주던 인상을 떠오르게 하지는 못한다. 예컨대, 멜로디의 변주가 가사를 바뀐 것처럼 느끼게 할 수는 있어도 가사의 변주가 멜로디를 변한 것처럼 느끼게 할 수는 없다. 가사가 변해 노래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다면, 그건 가사에 대한 인상이지 멜로디에 대한 인상이 아닌 것이다.




요약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멜로디 위에 가사가 있고 가사를 바꾸어도 곡 전체의 느낌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멜로디라는 이름의 본성이다. 다르게 말해, 같은 말이라도 다른 리듬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전혀 다른 인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는 음악이라는 게 어떤 면에서는 이상하다거나 무섭다고도 느껴지게 하는 부분이다. 아무런 운율 없이 툭 내뱉으면 경솔하게 느껴질 만한 발언도 음악의 리듬 위에 올려놓으면 큰 무리 없이 납득되거나 간과하게 된다. 굳이 지적하자면 주로 상대에 대한 아쉬움과 고충을 음악에 담은 힙합 장르에서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지는 감이 없지 않지만, 힙합이라는 게 자신이 하려는 말을 운율감있게 말하는 장르라는 점에서도 멜로디의 힘은 여실히 드러난다. 멜로디는 가사보다 우선한 무언가이며 그만한 힘이 있기도 하기에 오용되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해보는 것은 그 반대의 사례가 가능한지에 대해서다. 즉 가사는 멜로디를 견인할 수 있는가.




2.




음악은 객관적인 주소를 지정해주는 종류의 유희거리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음악이 재현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전체에 대한 심상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부모님과의 기억에 대해 말하는 음악이 있다면, 그것을 들으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게 되는 것은 음악이 우리에게 그것을 지정해주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음악을 들으며 그걸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음악에서 가사라는 건 신탁이 내려주는 삶의 방향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적절한 용어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음악을 들으며 얻는 떨림을 표현하기에는 이런 단어 말고는 떠오르지가 않는다.)




먼저 신탁에 대해 말해볼까. 신탁이라는 게 알려주는 삶의 교훈은 대체로 얼추 비슷하지만, 그런 신탁을 내려주는 매개물은 시대나 지역이나 국가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스 시대에는 신전에 갔고, 조선 시대에는 무당에게 갔고, 메이지 시대에는 신사에 갔지만 그것들이 제시하는 삶의 방향은 대체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서 신탁을 받는 장소를 음악이 제공하는 심상적인 요소로 가정해볼 수 있다면, 어떤 내용을 전달받든 간에 우리는 그런 심상적인 요인에 이끌려 개인의 주관을 떠올리게 된다고 볼 수 있을 테다. 따라서 비슷한 가사를 하더라도 멜로디나 장르가 다른 음악은 삶의 같은 부분을 다르게 들여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하나의 순간(=심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것은 하나의 가사를 여러 장르로 변주해 노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자신이 어떤 음악을 들을 때, 그 곡의 가사를 알아들을 수 있든지 없든지 간에 멜로디를 통해 먼저 첫인상을 결정하게 되는 우리는, 그 후에 가사의 뜻을 알아보거나 알아들음으로써 음악에 대한 전반적인 자기 인상을 결정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연한 기회로 찾아왔지만 지금의 나에게 영감을 주고, 그 영감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그 뜻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에 적용하게 된다는 점에서 신탁이라는 제의적 행위와 유사하다. 신탁에서 내려진 한줄기 문장이 개인의 상황에 따라 능동적으로 변형된다는 점에서 (내적으로는 아닐지 모르지만) 풍부한 갈래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음악에서 내려진 한줄기의 가사는 개인의 상황에 따라 능동적으로 변형될 수 있고 풍부한 갈래를 지니는 것도 그렇지만, 그것을 품은 멜로디가 이미 특정한 방향을 지정해주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멜로디의 가사’인 것이지 ‘가사의 멜로디’는 아닌 것이다.




되풀이하자면, 신탁의 순간인 것이지 순간의 신탁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삶의 어느 때에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면 이미 알던 것을 현재의 맥락에 재매개(Remediation)하는 과정을 거쳤을 뿐이다. 새로 등장한 매체가 기존에 있던 매체를 자신의 맥락으로 재편한다는 뜻을 지닌 ‘재매개’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들려오는 멜로디가 기존에 있던 가사를 현재의 심상에 따라 재편한다는 뜻으로 재매개라는 용어를 나는 선택했다.




반대로 말하면 나는 음악이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음악에서 여러 좋은 가사를 발견할 수 있지만, 그 가사가 지정하는 순간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음악에 공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멜로디, 라는 이름의 리듬이 가사보다 우선하기에 삶의 리듬, 심장의 고동과 같은 게 유사했던 기억이 있다면 그런 가사는 언제든지 자신의 삶 안으로 편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다른 매체를 살펴본다 한들, 우리가 화자가 되어본 적이 없기에 화자의 마음에 깊게 이입할 수 없는 것은 몹시 당연한 일이겠지만, 개중에서도 음악이라는 매체는 유독 화자라는 구분이 아니라 심상에 따른 구분만이 있는 듯 느껴지는 이유가 그 때문은 아닐까. 느낌에 이유를 대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럴 수 있다면 음악의 장르라는 건 사람이 느끼는 심상을 종류별로 구분해놓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




2019년 말에 발매된 그룹 넬의 앨범 ‘COLOR IN BLACK’에는 <꿈을 꾸는 꿈>이라는 곡이 있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 곡은 꿈에서만이라도 꿈을 꿀 수 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만 놓고 보면 단순히 꿈을 꿀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곡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2012년을 겪고 난 우리에게는 거기에 추가로 떠오르는 생각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영화 <인셉션>이다. (마침 2020년을 맞이하여 영화가 재개봉한다고 한다.)




영화 <인셉션>은 꿈속에서 다시 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설정을 토대로 만들었다. 영화가 크게 성공한 나머지 꿈속의 꿈이라는 개념 자체가 인셉션이라는 제목으로 대명사화되었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도 『구운몽』과 같은 종류의 소설이 있었으니 개념 자체는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꿈에서 깨어나도 여전히 꿈이라는 것과 꿈이 아니라면 꿈을 꿀 수 없다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마땅히 깨어나야 하는데 깨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현실로 돌아오지 못함에 대한 감금적인 요인이 불안을 유발한다. 반면 후자는 그런 불안이 꿈 안의 것과 별 하등관계가 없고, 꿈에서라도 꿈을 꿀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꿈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불안이라기보다는 염원에 가깝다. 예컨대 전자의 맥락으로 후자를 바라보면 불안을 염원하는 게 되어버린다.




불안을 염원한다는 말은 확실히 과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쪽에서는 꿈에서 깨어나는 게 목표인 가운데, 한쪽에서는 꿈을 꾸어보는 게 목표이다. 그러니까 전자의 용어로 말하자면 후자는 림보를 염원하는 것이니 전자의 입장에서는 후자가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림보에 빠지면 돌아오지 못한다고 <인셉션>은 말하기 때문이다. (림보에 빠지면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는 그곳이 가장 완벽한 현실을 구현해서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하기에 림보는 꿈의 가장 깊은 곳이다.) 그러나 사실 이해가 가지 않아야 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아니라 꿈을 꾸는 꿈을 꿈꾸도록 한 현실이다. 꿈 안에서라도 꿈을 꿀 수 있다면 좋겠다, 혹은 꿈이 아니면 꿈을 꿀 수 없다, 이 둘 중 하나로 해석될 <꿈을 꾸는 꿈>에서 현실은 꿈을 꾸기 어려운 환경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꿈에서라도 꿈을 꾸려 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소망, 즉 ‘꿈’으로 풀이될 수 있으니 말이다.




각자가 처한 환경에 대해 말해보자면, <인셉션>에서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꿈(Dream)으로 인해 꿈(가정)을 잃고 (자신의) 꿈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다. 여기서 각각의 꿈들을 간략하게 지칭하면 비즈니스, 현실, 대상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비즈니스로서의 꿈은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다는 것이고, 현실에서의 꿈은 행복하게 잘 살아보자는 것이며, 대상으로서의 꿈은 자신이 잠들었을 때 체험하는 리얼한 그것이다. 따라서 <인셉션>은 비즈니스로 인해 현실을 잃고 그것을 대상하려는 영화다. 그리고 <꿈을 꾸는 꿈>에서의 꿈이란 ‘꿈에서라도 꿈을 꾸는 것’을 희망하는 것이었고, 앞의 용어로 정리하면 ‘비즈니스로라도 현실을 추구하기’를 대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테다. 말하자면, <인셉션>이 잃어버린 것을 채워넣는 영화라면 <꿈을 꾸는 꿈>은 채워넣어야 할 것을 잃어버린 노래다.




<인셉션>에서 코브의 꿈이 자신의 지난 삶을 수면위로 끌어올리는 것이라면, <꿈을 꾸는 꿈>에서 화자의 꿈은 자신의 지난 삶에서 꿈이라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하는 것이다. 앞의 문단에서 <인셉션>에서의 림보에 해당하는 게 <꿈을 꾸는 꿈>이 추구하는 상황이라고 말했었는데, 림보라는 상황(혹은 공간)은 그것이 현실을 기준으로 할 때는 리얼한 것이 아님에도 그곳 안에서는 그게 리얼한 것으로 여겨지고, 아무리 이룰 수 없는 꿈이라도 인지할 수 없기에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이때 그런 림보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 리얼한 것이 아니기에 리얼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는 절대 불문의 사실을 발견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코브는 그 수단으로 팽이 형태의 토템을 사용했는데, <꿈을 꾸는 꿈>이 말하는 현실에서는 그런 토템이 별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꿈을 꾸는 꿈>이 말하는 현실이란 리얼하지 않은 것도 리얼한 것처럼 여겨지고, 리얼한 것보다 더 리얼한 언리얼이 넘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4.




<꿈을 꾸는 꿈>이 실린 ‘COLOR IN BLACK’의 전반적인 컨셉은 그 제목처럼 어둠이라고 한다. 중2병이라는 게 아니라 그만큼 암울하다는 뜻이다. 넬의 설명에 따르면 밴드는 아니지만 맴버 개인에게 암울한 일이 있던 시기를 보내면서 이 앨범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본래 생각하던 제목은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색이라는 반타블랙이었다고 하니 전달하고자 하는 이미지가 확실한 듯 보인다. 덧붙여서 넬의 바로 전 앨범, 2016년의 ‘C’가 전반적으로 꿈에 대한 풍부한 이미지를 말했다는 점에서 그 대비가 두드러지는 감이 없지 않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COLOR IN BLACK’은 어둠이라는 컨셉에도 불구하고 밝은 곡조를 잃지 않음으로써 제목에서 말하는 ‘어둠에 깃든 색’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그래서인지 <꿈을 꾸는 꿈>의 가사가 그렇게 긍정적인 게 아니라 하더라도 이 곡은 아름답게 느껴진다. 곧 태어날, 혹은 이제 막 태어난 무언가에게 세상에는 이해가 가지 않을 일이 많겠지만, 그럼에도 너라는 존재는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흔한 긍정론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2016년의 앨범 ‘C’가 부풀어 오르는 꿈을 말하는 것이었고, 2019년의 앨범 ‘COLOR IN BLACK’이 무너져 내리는 어둠을 말하는 것이라면, 어떤 면에서는 앨범 ‘C’의 알파벳으로부터 ‘COLOR…’라는 2019년이 이어져 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유하자면 밝게 빛나며 부풀어 오르던 빅뱅 이후에 어둠만이 팽창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물론 넬이 이 이미지를 염두에 두며 앨범을 제작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앨범이 나온 2016년과 2019년의 사이에 우리가 겪은 일들이 그런 상상을 가능케 한다.




빛을 잃은 것들이 빛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진실이 아닌 것이 진실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진부한 보드리야르의 이야기를 꺼내볼 수도 있겠지만,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리얼과 언리얼을 우리가 말하는 꿈 이야기에 직접 대입하는 것은 너무 매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꿈을 꿈 안에서만 꿀 수 있다는 말이 언리얼에서만 언리얼을 도출해낼 수 있다는 말로 갱신되는 순간에는 애초에 그걸 불가능하기에 리얼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게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건 너무 슬픈 말이다. 일례로 <인셉션>의 코브가 불가능한 일을 하려던 이유는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걸 되돌리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에서 죽어버린 아내를 조우하게 되지만 코브는 흔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내는 (이미 죽어서) 언리얼한 것이었고 코브는 그런 언리얼에서만 언리얼한 것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코브의 언리얼함은 어디까지나 (설사 그것이 언리얼에 가깝더라도) 가능한 것들을 위해 투구되었고 소비되었다. 그 결과로 코브는 불가능한 미션을 해냈고 불가능할 줄 알았던 가족과 재회할 수 있었다. 그러니 <꿈을 꾸는 꿈>이 ‘불가능 안에서 불가능을 꿈꾸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일이 많다’고 말하는 노래이니 그들이 말하는 현실이란 곧 림보 전체를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맥락으로 보면 앨범의 컨셉처럼 어두운 분위기에 그쳐버리는 것 같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현실이 림보 전체에 대응한다는 말은 세상이 이미 미쳐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말하자면 세상이 이미 미쳐있는데 그게 언리얼이 아니라면 무엇이고 그런 세상에서 꿈을 꾼다는 행위란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언리얼에서 언리얼을 희망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희망이라는 가치를 그 속에 품고 있는 게 아닐까. 다시 말해서, 아무리 짙은 어둠이라도 프리즘을 투과해보면 그 안에서는 무지개빛 찬란함이 깃들어 있는 게 아닐까.




5.




영화 <날씨의 아이>에서 중2병에 걸린 듯 보이는 주인공의 대사가 ‘세상은 원래부터 미쳐있었으니 앞으로 계속 미쳐있어도 된다.’고 말했던 것은, 세상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미쳐있다 하더라도 세계는 줄곧 유지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영화는 좀 어물쩍하게 끝나버린 감이 있지만 말하려는 메시지는 넬의 이번 앨범과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요점은 하나다. 그것은 신탁의 형태로 들려와 미친 것 같은 행동을 우리에게 제시하지만, 종국에 가면 옳았다고도 생각이 드는 이유는 그런 행동이 당연하다고 생각되거나 혹은 당연하게 여겨지곤 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보여주어서다. <매드맥스>라는 미친 세상에서 맥스가 항상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듯이 미친 세상이라 해서 우리까지 미쳐버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꿈을 꾸는 꿈>을 통해서 우리가 무언가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런 가사를 통해 무언가를 느꼈다기보다는 밝은 음악 안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어둠이 우리 내면에서 그런 어두웠던 순간을 이런 미쳐버린 세상으로 불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그래서 <꿈을 꾸는 꿈>을 포함한 앨범 전체의 분위기가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을 것일 테고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pjgAPhzv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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