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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21. 2019

씨네 21식 비평이라는 말에 반대한다


지난 9월에 창간한 ‘Material(마테리알이 공식적인 한글 표기다.)’이라는 잡지를 문득 접했다. 이 잡지는 영화를 전문적으로 다룬다. 그러니 읽을거리가 부족했던 이들에게는 읽을거리가 하나 더 늘어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도 흥미가 동해, 이제 막 창간해 얼마 되지 않는 글들을 보았는데 그곳에는 눈길을 잡아끄는 제목이 하나 있었다. 같은 년 (당연한 말이다. 올해 창간했으니까.) 11월 8일에 진행된 <비평의 비평>이라는 간담회에서 언급된 주제 중, 『씨네 21식 비평』이라는 대담이다. 


https://ma-te-ri-al.online/INTRO/view/1318785

1. 


제목만 보아도 구미가 당기는 이 글의 내용은 (언제나 그렇듯) 우리가 말해왔던 담론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 문장에서 핵심은, 항상 말해왔으니 지루할 법도 한데 여전히 재미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지긋지긋한 이야기”임에도 이 주제가 흥미롭다면 그 이유는 아마도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이것은 계속 타오르는 유전(油田) 굴뚝의 불꽃처럼 꺼지지 않는 화재(또는 화제)이다. 두 번째, 그게 꺼지지 않는 이유는 환경을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달라질 수 없는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해결책만을 내놓을 뿐,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것은 지진이나 태풍처럼 자연계를 이루는, 우리가 몸담은 토양의 대전제이기에 그 위에 사는 우리가 섣불리 건들 수 없다. 대전제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로봇 3원칙이라는 대전제를 풀었을 때 스카이넷이 등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공멸하게 될 테니 말이다. (여담이지만 유전의 굴뚝에 불을 붙이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기 중에 가스가 퍼져 아예 대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서다.) 


그러니까 ‘씨네 21식 비평’이라는 말은 마치 사파리에서 사파리 동물만 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 이유는 간단하게도 그곳이 사파리 기후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사파리가 자리한 아프리카가 수백만 년 전에는 울창한 수풀림이 있다는 점이 예전 시제로 깔려있다. 말하자면 역사에 빗대어 비유해볼 때 시대를 풍미한 ‘KINO’ 같은 잡지는 호모 사피엔스에 밀려 멸종한 네안네르달인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엇비슷한 시기에 창간한 두 잡지, KINO와 씨네 21이 공존하던 시대에서 씨네 21만 살아남은 이유는 KINO가 경쟁에서 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적합하지 않은 쪽으로 환경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물론 전자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나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합리적인 멸종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전자와 후자에서 전자를 멸종의 이유로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 경우에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피비린내가 나게 된다. 나는 그 냄새를 원치 않는다. 두 개의 잡지가 같은 필드, 영화 평론이라는 분야에 몸을 담고 있었다는 게 그들이 무대를 공유하고 있었음을 대변한다면, 서로 다른 길을 가기에 경쟁자가 아닌 동료로 서로를 여기던 그들의 의지를 존중하지 못하는 게 된다. 말하자면 그들은 같은 출발선에서 다른 곳을 향하던, 하지만 영화에 대한 사랑은 분명한 이들이었고, 어느 한쪽이 멸종할 때 다른 한쪽은 눈물을 삼켰을 것이지 미소를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라는 게 어느 하나만의 승자독식 논리를 따르기는 하지만, 그것은 극장에서 사라진 영화가 사람들에게 잊혀진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매정한 처사이자 논리이다. 왜냐하면, 극장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사후의 승자들이 영화 세계에는 더 많기 때문이다. 


2. 


해당 글에서 씨네 21식 비평이라고 부르는 게 무엇인지는 알 것 같다. (그들이 제공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런 이미지가 딱 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떠오른다는 점에서 그것이 우리 세계에 얼마나 밀착되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원래 익숙한 것에는 설명이 따로 필요하지 않으니 말이다. 달리 보면 우리 사회가 최근에 논의하는 것 중 하나인 언어에서의 젠더적 함의와 편견이 떠오르기도 한다. 예를 하나 들자면 도련님이나 아가씨라는 호칭은 서로에게 성 역할을 고정시킬 수 있으므로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걸 지적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이 단어에 의문을 품지 못했다. 왜냐하면 단어는 그냥 단어이기 때문이다. 대일밴드나 포크레인이 본래는 회사 이름이었던 것처럼 어느 하나가 고유명사로 지정되는 사례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말하자면 ‘씨네 21식 비평’이란 그런 종류의 비평을 뜻하는 고유명사이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씨네 21식 비평’이라는 게 대중의 은유와 상징에 대한 퍼즐 맞추기 식의 쾌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하위문화로 분류된다면(하급과 상급이 아니다. 유의할 것.), 그 단어는 분명 좋은 어감으로 쓰이는 일이 많지 않을 것이다. (분야는 조금 다르지만) 그리고 서브 컬쳐라는 단어에서 서브라는 게 주류 문화 이외의 것이라는 뜻을 품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주류가 아니기에 소외되고 냉대받는 무언가라고 생각할 여지가 충분하다. (우리는 서브 컬쳐를 두고 왜 그들을 오타쿠라고 불렀는가. 그러니까 여기서 오타쿠와 영화광이라는 칭호가 다르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컨대 ‘씨네 21식 비평’이라는 단어 자체는 대중을 위해 존재하는 대중 담론의 최전선에서 기능하는 무언가로 읽혀질 우려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그런 식으로 기능하는 씨네 21식 비평이 다른 비평의 설 자리, 즉 ‘파이값’을 앗아간다는 점에서 비평계의 공공의 적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러니까 이러한 인식이 불러오는 잘못된 연역은 주류 시장의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해버리고 그렇기에 그가 나쁘다는 언더도그마이다. 


주류가 주류인 것에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합당하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동의와 반론 말고는 없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란 대중이 그것을 선호하고 그렇기에 우리가 그걸 따라간다는 점이다. 그러니 인기가 많은 이가 시기의 대상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의 외모나 성격이 잘났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고, 능력이 뛰어난 이가 시기의 대상이 될 수는 있겠지만,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여기서 능력이란 실력과 동일한 말이 아니다. 비즈니스나 세일즈와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자본주의 시장에 흔히 드러나는 상품의 승자 논리를 우리가 비평이라는 예술 분야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일까. 


예술은 상품이 될 수 있다. 그건 확실하다. 미술관에 걸린 그림들도 결국에는 경매에서 돈으로 낙찰되고, 영화라는 예술은 극장에서 상품으로 팔리는 대중문화의 일부이다. 그러나 이런 점이 예술에 돈으로 환산되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음에 대한 단 하나의 증명이 되지는 않는다. 예술에는 아우라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환원 불가한 고유의 가치가 있다. 예컨대 예술은 각자의 삶이 있고 개성이 있으니 우리는 그들 모두를 존중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같은 예술의 범주에 있다 하더라도 그 외견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외모 또한 미를 결정하는 범주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외모가 빼어난 이를 중요시한다는 외모지상주의의 세태를 비판하는 게 아니라, 예술이라는 것의 완성도에 돌리는 말이다. 이를테면 <잔느 딜망>과 <무서운 집>은 비슷한 주제의식을 갖지만 역사적으로나 풍경적으로나 전자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반대로 <무서운 집>은 자기 스스로 광대되기를 자청했다는 점에서 진지하게 비교될 수 없기도 하다. 


그러니 나는 이런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 씨네 21식 비평이라는 게 대중을 위해 짜인 형식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게 차지하는 상대적으로 큰 범주에 다른 것들이 밀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점이 다른 곳으로 밀려난 게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고, 그를 위해서 주류에 있는 것을 밀어내야 함을 증명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만약 주류에 있는 것만이 정도라면 우리가 그 길을 걷는 게 맞겠지만, 세상에는 그게 전부라고 믿는 이들만 있는 게 아니다. 그게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고 믿는 이들은 이미 주변부에 자리 잡고는 자기가 믿는 비평을 행하고 있다. 여기서 혹자는 중심에 속하지 않으면 우리가 살아갈 수 없기에 그것은 사실상의 권력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 말도 분명 일리가 있지만, 우리가 아는 그런 카르텔과는 다르게 씨네 21식 비평은 주변부의 것들을 몰아세우려고 압력을 가한 적이 없다. 단지 중심에 속하기 위해 씨네 21식 비평을 추구하는 이들만이 있을 뿐이다. 


3. 


또한 우리가 여기서 오도하는 것은, ‘씨네 21식 비평’이라는 단어에서 ‘씨네 21’을 ‘해당 단어의 기원’이기에 단어에 따르는 ‘모든 책임을 져야 할’ 주체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도 없이 잘못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낸 씨네 21식 비평이라는 단어는 씨네 21에서 파생된 게 아니라, 그런 분위기에 어떤 이름을 붙일지를 생각해보다가 그의 대표격이 씨네 21이기에 붙인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이 경우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우리는 씨네 21이 몸담은 시대를 비판하려고 씨네 21이라는 대표자를 희생자로 만들어버린 게 되니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왜 대표자가 희생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묻고 싶다. 과거가 KINO의 시대였고 현재가 씨네 21의 시대라면, 씨네 21이라는 것은 시대의 분류이지 시대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선을 조금 돌려서 창조자가 아니라 소비자에게로 눈을 돌려볼까. 씨네 21식 비평을 소비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반 대중이다. 이 맥락에서의 대중이라는 말은 절대로 영화적 유희를 추구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섞여 있지 않다. 왜냐하면 영화라는 게 과거보다는 더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매체가 되었고, 이는 곧 영화에만 몰두하는 이들이 그만큼 소수자가 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인식의 오류를 하나 겪게 되는데 그건 바로 소수자의 오류이다. 영화에 몰두하는 이들, 소위 말하는 영화광이 소수자가 된 것은 영화광의 수가 줄어들어서가 아니라 영화 소비자 계층 전반이 커져서다. 영화 시장이 커졌지만 영화광의 수는 예전과 엇비슷하기에 이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자리가 작아 보이는 감이 있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영화광의 수와 영화 시장의 파이값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없기에 그것이 타당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비평의 죽음을 말하는 이들 중에서, 그게 죽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이전보다 영화 시장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가 없다는 점이다. 오래된 영화라도 구글에 검색하면 토렌트 파일의 형태로 취득할 수 있는 현시대에, 영화를 보기 힘들어서 영화광이 되지 못한다는 핑계는 먹혀들어가지 않는다. 극장도 마찬가지다. 전국에 있는 프렌차이즈 극장은 그 밀도가 균일하지 않고(서울과 경기권에 대부분 집중되어있으니), 거기서 개봉하는 각 작품의 밀도가 세밀하고 공평하지는 않지만(몰아주기를 당하는 몇몇 영화들), 적어도 극장 하나에만 하나의 작품이 개봉했던 국도극장의 시대보다는 우리의 영화 접근성이 더 높다. 여기에 극장을 갈 필요도 없이 그저 스마트폰을 들기만 하면 (약간의 돈도 필요하다.) 우리는 영화를 볼 수 있다. 예컨대 영화를 보기는 아주 손쉬운 시대다. (한국이 세계에서 손꼽는 영화관람률을 자랑한다는 점도 그렇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영화를 많이 본다는 게 영화를 많이 애호한다는 것과 동의어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영화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졌다는 점이 영화 비평에 대한 관심으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주류적 시선이 비평을 바라보는 것에도 엇비슷하게 재현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볼 수 있다. 영화에 접근하기 쉬워진 만큼 영화 비평을 쓰는 것도 쉬운 일이 되었다. 과거에 비하면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의 보급률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만큼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지 ‘비평’을 쓰지 못할 이유는 더 적어졌다. 스마트폰의 보급률이 세계적으로도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90프로를 넘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영화 비평이 기본적으로는 텍스트의 형태라는 점에서 (숱한 유튜브에도 불구하고) 글쓰기에 대한 수고는 이전보다는 덜할 것이다. 이는 왓챠나 트위터처럼 한줄 쓰기에 최적화된 매체에 영화를 언급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으로 증명된다. 그러니까 영화비평은 한줄 쓰기와 별점 주기라는 이름으로 (긴글보다는 더 많이) 우리 곁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다. 


물론 한줄로 쓰인 그것이 우리가 아는 그 비평과 동일선에 서지는 못한다. 이는 노력이나 수고에 대한 것보다는 한줄이 긴글보다는 많은 정보를 담지 못한다는 점에서 귀인하는, 어쩔 수 없는 정보의 격차이다. 여기에 부차적으로 따라붙는 문제가 그만큼 많은 정보를 담기 위해 사용자가 어떤 노력을 했느냐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줄이 긴글보다 못한 것은 사용자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없어서다. 그러나 우리가 한줄 쓰기를 긴글쓰기보다 못한 이유로 사용자의 게으름을 지적할 때, 그것은 단순히 영화를 즐기는 향유층에 대한 무지와 게으름에 대한 계몽적인 성격을 담은 비판이 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영화 평론가의 한줄평과 트위터에서의 한줄평을 동일한 선에 놓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영화 평론가가 일반인보다는 영화를 더 면밀히 살펴보았다는 점이 뒷받침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 평론가의 한줄평이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을지, 말하자면 그것이 과연 어떠한 빙산의 일각인지를 알고 싶어한다. 따라서 우리가 만약 한줄평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면, 빙산의 일각에서 빙산으로 눈을 돌리게 하는 ‘긍정적인 피드백’을 도출해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일 테다. 


4. 


결국에 이 논의는 우리가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바로 비평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우리가 방금 했던 말에 따르면, 비평이란 것은 최대한 빙산의 전체를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평가란 그런 빙산의 전체에서 자신이 본 일부를 묘사하고, 독자들이 그런 묘사를 들으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빙산을 그려내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또한 여기서 그 빙산에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이는 비평이란 게 장님이 더듬는 코끼리가 아니라 어린왕자의 양이 든 상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대중이 비평가에게 말하는 ‘작품에 기생하는 기생충’이라는 말도, 비평가가 대중에게 말하는 ‘무지하고 몽매한 자’라는 비판이 자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나와 당신이 무엇을 보았고, 그런 미학적 유대를 공유하는 이들이 연대할 수 있는지다. 


돌려 말하지 않겠다. 이 공론장에서 문제가 되는 쪽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아무도 없다. 애초에 미학이라는 것에 책임을 져야 할 이가 없을뿐더러, 가르치는 쪽이나 받아들이는 쪽이나 어느 한쪽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라는 스크린 위의 유령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이 뿜어내는 아우라에 대한 심상은 우리가 신에 대해 말하는 신앙심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도가 아닌 이가 신도에게 신이 있음을 어떻게 믿느냐고 물을 때 자주 하는 말은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믿느냐’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시각에 의존하는 존재라는 점을 말해준다. 이때 신도가 그 신앙심에 자신을 대입하는 방법은 데카르트의 방법론과 정반대이다. 생각하기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존재하기에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신이 있는 이유는 어느 신화나 대지에 신의 현신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기독교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이 성경의 진정한 시작이듯이), 일단은 존재를 해야 그 신적인 것의 영역을 볼 눈이 뜨인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를 두고서 데카르트 이전의 시대, 즉 종교의 시대로 다시 회귀하려는 게 아니냐고 말하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영화는 종교와 많은 부분이 닮아있고 그런 이유로 그 무엇보다 믿음이 중요한 매체이다. 이상한 말이지만 사실을 목격한다고 여겨졌던 사진에서 영화가 파생되어 나왔을 때, 그것은 편집이라는 이름으로 현실 세계로부터 등을 지게 되었다. 예컨대 현실 세계의 일부였던 영화는 속세를 등지고 스크린으로의 수행을 떠난다. 그래서 스크린은 우리 현실과 독립적인 세계로 여겨진다. 영화사의 대표적인 갈래도 현실을 반영하려는 영화가 아니라 그곳에 현실을 구축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테라포밍이거나 서부개척이다. 미국이라는 대륙이 식민지라는 자손적 지위에서 시작해 골드러쉬라는 이름의 신세계로 변모했듯이, 영화 또한 현실 세계에서 출발해 독립적인 신세계로 변모했고, 그래서 우리는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를 갈망하게 되는 것이다. 


한줄의 문구가 신세계로 가는 방법을 알려줄 수는 없지만, 신세계로 떠날 계기를 심어줄 수는 있다. 잡지 구석에 실린 여행사의 홍보문구를 보고 문득 여행을 떠나는 이가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이때 신세계를 목격하는 것은 여행을 떠나는 이이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 사항이 발생하게 된다. 여행사의 홍보문구나 홍보 잡지를 보고서도 여행지에 직접 가보고 싶어하는 이가 줄어들어 버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터넷을 비롯한 매체의 발달로 직접 가보지 않아도 생생하게 묘사를 해줄 대리인과 대리물이 정말로 많아졌다. 대표적인 게 게임방송이나 먹는 방송이다. 이제 사람들은 직접 게임을 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게임을 하는 걸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직접 하려면 게임에 들어갈 시간과 비용이 있을뿐더러 그에 익숙해지기까지 온갖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하는데, 스트리머의 방송을 보면 그 모든 걸 제쳐놓고 그냥 본다는 것 하나만을 완벽하게 충족할 수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지적하는 씨네 21식 비평이라는 게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대중이 원하는 지점만을 콕 집어 설명해주는 일종의 미슐랭 가이드라면(미슐랭은 그런 비평을 설명하기에 너무 고급진 단어일까? 아니다. 미슐랭 가이드는 더는 맛집의 척도가 아니다. 그냥 맛있는 식당에 대한 이미지 메이커일 뿐이다.), 대중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도록 그 이전에 미리 길을 터주는 작업이다. 미리 길이 닦여있고 그 위로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간편조리식품과 같은 것이 씨네 21식 비평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그런 요리를 제공하는 요리사가 어떻게 보면 유명 호텔의 조리장과는 다른 무언가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점에 나도 동의한다. (백종원은 요리를 잘하지만 그를 요리사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확하게는 백종원은 요리사라기보다 요리 사업가에 가까운 이미지다. 이게 이동진이라는 평론가에 대한 이미지와 겹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것이 증명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요리를 먹기 편하게 되었다는 것이지 요리를 만든다는 것에 관심이 떨어졌다는 게 아니다. 즉, 영화를 먹기 편하게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는 게 대중이 영화에 대한 탐구를 이전보다 못하게 되었다는 말과 같지 않다. 


영화를 궁금해하는 이들은 영화에 다가가려고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요리를 잘하고 싶은 이들은 요리를 잘하려고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다르게 보면 그건 자신이 얼마나 깊게 빠지고 싶은지 아닌지의 문제이다.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던 이에게 영화를 깊게 좋아하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무언가 그의 태도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이는 위에서 말했듯이 종교와 유사하다. 영화라는 종교에 깊은 신앙심을 빠지게 하려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거나 길 가던 이에게 불쑥 말을 건다면, 그저 불쾌하기만 할 뿐이고 오히려 거리가 더 멀어질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영화로 향하는 길을 간략하게나마 터준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한여름 밤의 파티장에 놀러 왔다가 다시 돌아갈 것이지만, 소수는 자리에 남아 영화로의 탐구를 택할 것이고 어쩌면 평론가라는 수도사에 귀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이유로 여기에는 평론가도 대중도 어느 한쪽으로만 전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 평론가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으로 대중에게 호객 행위를 하고 있고, 그게 소위 말하는 씨네 21식 비평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호객 행위가 어떻게 보면 구차하고 구린 행위처럼 보일 수 있다. 과외 전단을 돌리는 가난한 대학생처럼 절박하거나, 또는 나이트클럽 입구의 삐끼처럼 구질구질한 돈벌이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영화라는 세상에 다가가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각자가 저마다의 꿈을 지니고 영화를 보는데 그중에 소수가 자신의 꿈을 타인에게 전파하려고 시도할 뿐이다. 조금은 오그라드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영화를 보는 이들이 저마다의 꿈을 꾼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쉽게 말해 영화는 좋은 의미에서 관객에게 꿈을 심어준다. 그게 자신의 의도를 상대에게 전파하려는 광고나 선전의 일종일지라도, 나는 그것이 자신이 목격한 신의 형태에 대해 써내려가는 바이블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5. 


세속적 비평과 정의로운 비평이 따로 있지 않다. 이건 당연한 말이다. 그리고 씨네 21식 비평이 씨네 21의 영향 아래에 놓여있고 그들이 대중에게 스스로 사고하는 힘을 앗아간다고 말하는 건 이상한 말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당연한 말과 이상한 말은 다르다. 그러므로 씨네 21식 비평이 씨네 21의 주도하에 이루어졌기에 씨네 21의 책임이 있다는 논리를 제하고도, 위의 문장에서 말하는 당연함과 이상함 사이에 연결점을 찾으려는 시도는 어디까지나 억지이다. 본래의 주장에서, 씨네 21이 대중을 씨네 21이 구축한 제국 안으로 포섭하고 그게 조지 오웰식의 1984라는 주장은 두 개의 편 안에서 권력의 위계를 설정하려는 계급적 논리의 포섭일뿐이다. 쉽게 말해 정의로운 비평이 세속적 비평보다 위에 있는 일종의 선민의식이 그 근저에 자리하고 있다. 이때 누군가는 그런 선민의식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냐고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그 말이 맞다. 그렇지만 씨네 21식 비평이 있다는 이상한 문장은 그런 선민의식이 존재함을 전제한다. 그러니 그 문제 제기는 이 문장으로 행해져야 한다. 


씨네 21식 비평은 존재하는가? 만약 씨네 21식의 비평이라는 게 어떠한 양식 같은 것이라면 나는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이건 일본식 정원이나 한국식 반찬처럼 지역과 취향의 문제다. 한국에서 일본식 정원을 취한다면 매국노 소리는 듣겠지만 그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인이 일본식 사고를 그대로 받아들이고는 일본을 대변하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일본인처럼 보이려는 게 아니라 일본인이 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는 형식이 본질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의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씨네 21식 비평이라는 게 형식이라면 그건 단지 필자와 독자 사이에 존재하는 공급과 수요의 문제이다. 그러나 씨네 21식 비평이라는 게 질적인 문제라면 그것은 형식을 넘어선 본질의 문제가 되고 금기를 건드리는 게 된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사안은, 씨네 21식 비평이 질적으로 문제가 된다면 과연 어떤 면에서 질이 떨어지느냐고 물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돌려 말하지 않겠다. 씨네 21식 비평이 여타 다른 비평보다 저급한가? 그 기류의 주체로 지목되는 씨네 21은 저급함을 이 땅에 몰고 온 사탄인가? 만약 그가 사탄이라면 반대 측면에서 그가 에덴동산의 뱀처럼 아담과 이브에게 쾌락을 알려준 장본인인가? 말하자면 그 문장이 직시하는 바는 씨네 21식 비평이라는 게 대중에게 단지 쾌락만을 전하는 타락적인 무언가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때의 타락은 영화라는 종교에 귀의하는 이들이 피해야 할 무언가이고, 그렇기에 영화라는 신을 믿는 이라면 씨네 21식 비평이라는 뱀에게 홀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씨네 21식 비평이 있기에 다른 숭고한 비평이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한다는 말은, 시장에서의 1등은 무조건 악하고 그 외의 것들을 필사적으로 죽이려 한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승자독식 논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비평은 상품이 아니다. 씨네 21식 비평의 범주에 상품으로 분류될 만한 게 몇몇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평 전체가 상품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예술로서의 비평과 예술로서의 비평이 있다면 그걸 선택하는 건 선택하는 이의 취향 문제이고, 선택하는 이가 적다는 건 그런 취향을 가진 이가 적다는 것일 뿐, 어떤 것 간에 존재하는 위계서열이나 영향력 간의 상관관계를 입증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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