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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r 26. 2020

로만 폴란스키에 관한 두 개의 글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5033

http://www.cine21.com/news/view/?idx=0&mag_id=95034

1. 


관점을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로만 폴란스키를 통해 영화의 윤리를 말하는 두 글 중에 손을 들어주고 싶은 건 듀나이다. 듀나와 튜나(*주 : 참치)가 비슷해서가 아니라, 영화와 윤리 중 윤리의 측면에 선 박우성의 입장이 윤리를 논하는 이들의 전형적인 화법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형적인 화법’이라는 말에 불쾌함을 표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본질적으로 관념을 구현하고 그걸 표현함에 있어 정해진 형태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런 화법이 나올 수밖에 없게 한다. 단적으로 말해, 윤리적 행동이란 무엇인가? 로만 폴란스키와 같은 경우라면 확고하게 답할 수 있겠지만, 그 외에 법이 지정한 테두리의 정중앙에 자리하며 굉장한 모호함을 제공하는 것들에 대해 우리가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바로 그런 점이 씨네21이 두 편의 글을 통해 논하고자 했던 부분일 테다. 그러니 이 부분을 말하기에 앞서 두 편의 글 전체를 논할 필요가 있다. 모호함의 테두리를 둘러싸는 것들은 듀나와 박우성의 말로 대표되고 있긴 하나, 그 외에도 많은 의견이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런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모호함을 조명하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문제의 본질인 “예술인과 작품의 관계, 폴란스키와 그가 만든 영화”에 관한 윤리를 빗겨가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 선수 과정을 제쳐 둔다면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테두리 안의 공허와 그 주변부에서 꺼지지 않는 둑에 물을 붓는 이들의 모습일 것이다. 


2.

 

듀나와 박우성이 논의를 요약 및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듀나는 “적어도 내가 알기론 폴란스키의 영화에서 감독이 미성년자를 강간하고 유럽으로 달아난 남자의 작품이라는 걸 보여주는 단서를 찾기는 어렵다.”라고 말하면서 작품과 작가의 분리를 전제한다. 이후 “당시엔 어떻게 생각했건 지금의 기준이 옳다.”고 말하면서 앞서 말한 자신의 의견에 자체적으로 선을 긋는다. 요약하자면 듀나의 의견은 “그때는 맞지만 지금은 틀리다.”라는 시간의 순번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 즉, 연대기적 형식으로 구성된 그녀의 논법에서 영화란 근본적으로 (시간의 측면에서) 유물론적인 존재이며, 이는 우리가 현실에서 영화가 비롯된다고 믿는 것과 같은 부류의 유물론을 의미하기도 한다. 


듀나식의 시간관이 현실에서 영화가 비롯된다고 믿게 하는 이유는, 영화의 시간이 현실로부터 잘려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편집과 같은 게 대표적이다. 그래서 이는 영화의 시간이 현실의 잔액, 혹은 파편이라는 점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는데, 반대로 말하면 영화의 시간이 절대로 현실보다 앞서 나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영화는 현실로부터 시간을 ‘읽어들이는’ 일종의 ‘장치’이므로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되는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니 말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영화가 미래를 예지하는 성격이 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영화를 통해 미래를 구축하고자 하는 시도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들 영화가 보여주는 미래는 모두 현재에서 갈망하는 현재, 즉 ‘현재의 현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후 박우성은 “그의 과거, 현재, 미래의 영화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어 있으며, 이는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미학이라는 투명한 창을 악랄하게 걷어찬 장본인은 로만 폴란스키 자신이다.”라고 말하면서 듀나와는 정반대의 지점을 탐색한다. 박우성에 따르면 로만 폴란스키가 범죄를 저지른 시점부터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영화는 모두 ‘오염’되었다. 이 발언 자체는 ‘인과’라던가 ‘업보’라는 불교식의 발언을 옮겨온 듯 보이기도 하는데, 불교에서 강조하는 시간이 ‘윤회’라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가 알다시피 불교의 시간은 전생의 잘못이 현생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으로서, 이 과정 속에 과거, 현재, 미래의 자신은 형태는 달라도 모두 하나의 개인으로서 존재한다. 기독교와는 다른 의미로 우리는 이를 ‘삼위일체’라고 지칭하고 있다. 셋 중 하나라도 없으면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삼위일체의 세 축, 과거현재미래를 박우성의 말에 적용하면 그 말은 다음처럼 읽혀진다. “로만스키를 논함에 있어 과거현재미래를 분리할 수는 없다. 그가 어떤 인과로 범죄에 도달하게 되었든 간에 말이다. 앞으로 나아갈 지점도 마찬가지다. 그의 과거는 현재와 미래이기도 하다.”


3. 


허나 우리는 여기서 로만 폴란스키의 미래가 아니라 영화의 미래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서 듀나의 시간관이 “영화는 미래를 구현할 수 없다.”였다면, 박우성에게도 여전히 그 논리는 성립하기 때문이다. 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듀나의 입장은 로만 폴란스키의 미래로 그의 영화를 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를 듀나는 “가장 쉽게 꺼낼 수 있는 이유는 영화가 감독만의 예술이 아니라는 것이다.”라고 표현한다. 듀나의 이 발언은 영화가 감독만의 예술이 아니고, 그렇기에 만약 책임을 지운다면 스태프 전원에게 도덕적 연대책임을 물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여기까지는 내 억측에 불과할 수도 있다. 팩트는, ‘감독만의 예술이 아니’까지다. 이 점에 유의할 것.) 또한 ‘가장 쉽게 꺼낼 수 있는 이유’라는 말로서 이 발언의 간단명료함을 성토하고 있다. 예컨대 이 발언은 가장 근본적이기에 변할 수 없는 것의 지대를 설정해둠으로써,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설정해 둔다. 


문제는 이 발언이 국지적인 곳에서 전면지대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듀나는 바로 뒷 문단에서 “모든 예술 작품은 수많은 맥락 안에서 존재한다. 폴란스키의 초기작은 냉전시대 동유럽 영화사의 장대한 흐름 안에 큰 덩어리로 존재하며 폴란스키를 빼면 이 흐름은 깨져버린다.”라는 말로서 폴란스키의 개인사에서 영화사 전체로 논의를 확장한다. 이 절차를 밟으며 과거와 현재로서 존재하는 시간은 개인사가 아닌 역사가 된다. 그리고 영화를 통해 역사로 나아간 이 시간관이 미래를 묘사하는 방식도 답습된다. 영화가 미래를 묘사하는 방식이, 1) 이상을 그려내고 영화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2) 그것이 필름으로 응결되는 지점은 현재라는 망막이므로 3) 우리가 마주하는 건 언제나 현재 혹은 그 이전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그런 식으로 주어지는 역사가 자칫하면 운명론과 같은 갈망과 구원의 성격이 될 수 있을 뿐더러, 엇나가면 숙명론이라는 우울함을 품에 안을 수도 있다. 


이런 점이 듀나가 글머리의 제목에 딸린 ‘미투운동’에 반대한다거나 혹은 무기력한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적어도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송구스럽게도 ‘개인적’이라는 표현을 한 번만 더 사용하자면, 듀나는 영화의 본편보다 영화사 전체를 바라보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듀나가 평소 글을 쓰며 여러 영화를 인용하는 것에서나, 본문에서도 ‘냉전시대 동유럽 영화사’라는 구체적인 장소를 지정한 것에서도 이는 드러난다. 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로즈마리의 아이>와 같은 오컬트 영화 장르만을 언급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듀나가 폴란스키를 언급하는 문장이 장르가 아닌 역사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그의 관점을 뒷받침 한다. 그리고 듀나의 맥락에서 글을 독해하면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아마도 이쯤이 아니었을는지 싶다. “나는 우리의 미래를 구축하는 작업이 현재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현재, 실시간으로 쌓이는 과거가 미래를 침범한다는 건 영화가 우리를 잠식한다는 것이며, 이는 마치 하늘이 땅으로 주저앉는 듯한 충격이 될 것이다.”


4.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다 태우지말라는 한국의 옛 격언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누군가는 훗날 역사가 그를 심판하리라는 식으로 말하는 듀나에게 반감을 가질 수도 있다. 이를 두고 듀나는 글의 말미에 “우리가 후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 최대한 정직하게 기록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잊히고 폴란스키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망각의 순서를 정하는 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듀나의 글을 읽었다면 이 발언 자체가 영사기 위의 필름롤에 기반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할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위에서 말했듯이 듀나는 시간적인 측면에서 유물론을 지지하는 사람이며, ‘과거에서 현재로 나아간 인간’과 ‘현재에서 과거를 기록하는 물질’을 ‘인간과 영화의 관계’로 설정해 두고 있다. 


그러나 박우성의 말인 ‘영화가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척도에만 머무르지 않고 일종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점’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틀린’ 말이라기보다는 ‘옳은’ 행위이고,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일이다. 이 대목이 박우성과 듀나가 전격으로 충돌하는 지점이다. 듀나는 영화에 미래란 개념이 없으며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현재 진행형의 미래라고 말하는 유물론자다. 반면 박우성은 과거현재미래라는 표현을 통해 영화에 부여한 시간을 지우고, 그곳을 우리 현실의 다른 영역으로 여기는 윤리학자다. 듀나에게 영화가 층층이 쌓인 연대기적 필름롤과 같은 형태라면, 박우성에게 영화란 우리 주변의 미발견지대로서 우리가 마땅히 바라보지 않을 시에는 언제든지 오염될 수 있는 장소이다. 


따라서 다소 과격하게 보이기도 하는 박우성의 이하 문장은 다르게 해석될 필요가 있다. 박우성은 본문에서 “나는 우리가 그의 영화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역사에 그것의 지분이 있다지만 그걸 뺀다고 역사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며 설사 허물어지더라도 지우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다.”라고 말한다. 얼핏 보아서는 한 과격론자의 발언처럼 보이는 이 문장은 글이 표현하는 그대로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박우성이 이 문장에서 적용하는 역사란 듀나처럼 연대기적 층위가 아닌, 평평한 대지에 존재하는 하나의 영토이다. 말하자면 박우성은 영화사에서 로만 폴란스키라는 지명이 사라진다 하여도 그곳에 있던 대지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나라가 망해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까지 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 나라가 망하고 그곳이 다른 나라가 된다 하더라도 해당 영토에 살던 이들의 삶은 여전하다. 단지 그들을 통틀어 묶는 하나의 단어가 (그들로서는) 자의적으로 변형되었을 뿐이다. 


5.


그래서인지 언뜻 나에게는 박우성의 말이 다소 무섭게 들리기도 했는데,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다. 박우성의 말은 영화사에 대한 생각과 현실 사건에 대한 감정이 혼합된 형태로 제시되고 있어서 마땅히 내야 할 뚜렷함을 내고 있지 않다. 여기서 현실 사건에 대한 감정이란 글 전반에서 감지되는 비난의 논조이다. 박우성이 “지금 우리는 다른 무엇도 아닌 아동 성폭행 범죄에 대해 말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지적한 문장에서 그 지적의 범위와 내용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말이기 이전에 행동이고, 사건에 분노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발언이다. 그렇지만 이 글의 무대는 로만 폴란스키라는 영화인이자 성범죄자라는 영역 위에 세워졌다. 따라서 위의 발언을 옹호하면 우리는 영화가 제공하는 논리의 단초를 잃게 된다. 


듀나가 “영화제나 영화상에서 이 작품을 감독과 분리해서 순수하게 작품만 보고 평가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역시 아니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에서 로만 폴란스키라는 이름을 떼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를 반대로 말하면 로만 폴란스키라는 성범죄자에게서 영화인이라는 카테고리를 떼놓을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박우성의 글은 그 점을 간과하고 있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보면 듀나와 박우성의 글은 각각의 위치에서 제 할 말을 하고 있기도 하다. 듀나의 글은 로만 폴란스키가 성범죄자임에도 영화의 역사로 판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박우성의 글은 로만 폴란스키가 영화인이지만 성범죄자라는 사실로 판결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어쩌면 박우성의 글에 감정적인 면모가 있는 건 그런 순번에 따라 사고를 진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라는 논리와 현실이라는 감정이 있다면 논리 이전에 감정을 내세워야 했던 박우성에게 글이 어떻게 되든 별 상관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6. 


두 사람의 글을 제하고 나서 개인적인 생각을 짧게 덧붙이고 싶다. 위의 결론과는 무관하다. 


우리의 로만 폴란스키에 대한 논의는 박우성이 “이것은 윤리 파수꾼의 지위에 도취된 자기 확증의 결론이 아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덧없으며 수사적 차원에 머문다.”라고 말한 지점에서 끝나야 한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모호함이란 현실이 쫓을 수 없는 미래와의 간극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시를 하나 들어보자. 영화를 보는 우리와 스크린이 있다고 가정할 때, 우리가 사는 세계와 영화가 재현하는 세계 사이에는 안구의 광학 작용이 이루어지는 중간 세계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영화를 논할 때는 주로 영화의 측면과 관객의 측면을 말하지만, 그 중간지대에 대해서는 상세하고 폭넓은 무언가를 말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인간의 안구 작용이 데카르트의 카메라 옵스큐라와 유사하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위의 도식에서 우리의 세계는 오직 ‘나는 생각한다’라는 주체적 위치에만 머무르게 된다.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는 어디까지나 깜깜한 암실 안의 빛 한줄기만을 붙들게 된다. 이른바 암실 안의 빛 한 줄기가 우리가 지닌 모호함에 대한 고민으로 치환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닌 안구 안의 맹점이 있음을 시사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듀나의 말처럼 “옛 시대의 작품을 올바르게 감상하는 작업은 현대인의 관점으로 이 거칠고 더러운 이야기 속에서 어떤 미화나 삭제 없이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라는 직관을 수행할 수 없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건 중간 세계를 배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박우성의 말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해자 중심의 ‘한가한’ 논란이 아니라 피해자가 주인이 되는 ‘절실한’ 윤리다.”라는 주체 아닌 피사체의 논리를 수행할 수도 없다. 영화를 영역으로 지정하는 박우성의 논의에서는, 영화라는 피사체가 세계의 주인이 되어, 영화라는 현실과 현실이라는 영화를 하나로 우그러들게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둘 중 무엇을 택하든 다른 쪽을 배제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 딜레마를 통해 우리는 글이 시작하기 전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결국에는 로만 폴란스키도, 영화도 아닌 ‘현실’을 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듀나의 말처럼 말이다. “가장 좋은 건 역시 신비스러운 보호를 받으며 정당한 처벌을 피하고 있는 폴란스키를 법정에 세우는 것이다.” 두 개의 딜레마에 종지부를 찍는 건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파훼하는 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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