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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03. 2020

살아있는 이레귤러들의 밤 – 봄날의 검은방 나들이


지난번에도 같은 말을 했던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코로나를 뚫고 극장에 방문해 영화를 보았다. 1일 차에는 <이장>과 <온다>를, 2일 차에는 <주디>를 보았다. 


지난 2월 27일에 장률의 <후쿠오카> 관람을 위해 극장을 다녀온 뒤로 극장에 가지 않았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3월 말이 되자, 통신사 멤버쉽이 제공하는 무료 티켓 2장이 생각나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사실 이렇게 영화 관람을 못하게 되었던 건,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보다 ‘그냥 볼 영화가 없었다’는 이유가 더 크다. 코로나로 인해 개봉예정이던 영화들이 개봉을 취소하거나 연기했고, 극장가 또한 사회적 거리 두기의 일환으로 상영시간 및 상영관을 폐쇄 축소함으로 인해 볼 영화와 시간 모두 사라지고야 만 것이다. 


위에서 말한 장률의 <후쿠오카>는 물론이고, 본래 2월 26일 개봉 예정이던 <기생충>의 흑백판도 기약 없는 기다림 너머로 사라졌다. 이 와중에 윤성현의 <사냥의 시간>은 극장에서 개봉을 포기하고서 넷플릭스행을 택했다. 기약없는 기다림을 추구할 바에 새로운 흐름에 몸을 맡기겠다는 판단이다. 반면 정승오의 <이장>은 코로나 사태임에도 독립영화라는 점을 근거로 개봉을 서둘렀다. 이 판단이 의아할 수 있겠지만 이는 독립영화가 예술영화로서 홍보되기 위해 충족해야 하는 최소한의 상영관, 상영시간이 있기에 이루어진 판단이다. 


<이장>은 최소한의 상영관만 충족한 채로 개봉한 후에 예술영화 카테고리로서 IPTV로 가는 것에 배팅했다. 이는 단지 <이장>만은 선택은 아닌데, 작년에 배급사를 통해 수입된 이래로 한일갈등으로 인해 개봉을 연기해왔던 <걸즈 앤 판처>는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배급사의 판단 아래 일단은 개봉을 한 후에, IPTV나 VOD와 같은 유통처를 통해 수익을 얻겠다는 노선을 택했다. <걸즈 앤 판처>가 4DX 플랫폼을 주력으로 밀고 있다는 걸 고려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판단일 수도 있지만, 배급사 측은 아마 두터운 팬층의 힘을 믿는 듯하다. 쉽게 말해 이 영화를 볼 사람은 한정되어 있고, 어떤 시국이든 간에 그들은 이 영화를 보러 올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다. 


극장가에서는 사회적 거리 두기에 동참하여 좌석을 무조건 띄어놓도록 예매 시스템을 수정했다. A 열부터 C 열까지 있다면, 그 중간의 B 열은 비워두는 방식이다. 하지만 세로 열은 그렇다 쳐도 가로 열은 예전 그대로 빼곡히 들어앉을 수 있기에, 이런 정책이 얼마나 효율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영화관 안이 바글바글 들어차는 것보다 낫다는 건 확실하다. 이런 노력이 위의 상영관 축소 및 시간 조정과 겹쳐 그나마 안전한 영화관람 여건을 제공한다는 건 확실한데, 문제는 영화관에 볼 영화가 없다는 점이다. 영화관이 영화를 보러 오는 곳이라는 점에서 이는 영화관에 올 이유가 없다는 것, ‘코로나 사태’라면 더더욱 올 이유가 없다는 점에 대한 이유가 된다. 


이에 대한 자구책으로 극장가는 ‘재개봉’ 카드를 꺼내 들었다. 좋게 보면 이미 관객에게 한차례 검증되었던 작품을 상영함으로써 관객에게 극장에 와야만 할 이유를 제공한 것이고, 나쁘게 보면 볼 영화가 없으니 옛날 영화 가져와서 스크린이나 채운 것이다. 물론, 둘 중 어떤 생각을 하든 간에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이 그것밖에 없다는 건 확실하다. 2020년 04월 1일 UN의 사무총장은 “코로나19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글로벌 위기”라는 말을 함으로써 이번 위기를 준전시급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코로나19에 대한 WHO의 판데믹 선언이 공식이라면, UN의 준전시 발언은 코로나19에 대한 비공식적인 인식을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그러니 공식적으로는 판데믹, 비공식적으로는 전쟁이라 부른다, 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흥미롭게도 이런 와중에 CGV는, 오는 15일에 조지 로메로의 전설적인 좀비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개봉한다. ‘재개봉’인 것 같지만 개봉한 적이 없으니 첫 ‘개봉’이다. 안 그래도 세계적인 코로나 사태의 봉쇄 정책을 두고서 <월드 워 Z>에 빗대는 농담이 있는데, 이 영화의 조상님격에 해당하는 영화가 개봉하는 것은 아무쪼록 묘한 기분이 드는 사실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월드 워 Z>의 좀비는 조상님들처럼 느리거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월드 워 Z>가 거리에서 뛰노는 시민들을 좀비에 빗대는 쪽이라면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집에서 자가격리 중인 이들에게 더 공감이 갈만한 영화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게 좀비는 아닐 것이다. 중요한 건 우리가 혼란하고 위험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점이고, 그런 와중에도 일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좀비영화에서, 건물 안과 밖이 위험한 곳과 안전한 곳으로 나뉘어 두 개의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한 무대가 되듯이, 우리에게는 ‘봄이 와서 놀러 가고 싶다.’는 마음과 ‘이거 대체 언제 끝나.’라는 양가적 감정이 두 개의 전장을 제공한다. 전시에도 생명은 태어났고, 좀비물에서도 느닷없이 사랑에 빠지는 두 주인공처럼, 이렇게 섞여버린 세상은 우리가 사는 공간의 반대편에는 마치 거울과도 같은 평행세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한다. 


거울과도 같은 평행세계가 있다는 상상은 우리가 보내는 일상 속에서도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누군가에 대한 의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른 차원’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국정원 요원이라던가, 해외로 치면 FBI나 모사드 같은 사람들, 또는 자기만의 작업에 열중하며 남들과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이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것이 안 좋은 쪽으로 변형되면 냉전 시대의 반동분자 색출이나, 근래에 코로나 19 확진자에 대한 안 좋은 쪽의 반감이 된다.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이것은 중세시대의 마녀나, 뱀파이어나, 늑대인간과 같은 ‘이레귤러(irregular)’에 대한 무정형의 공포나 다름없다. 


위에서 말한 좀비물은 그런 공포가 일상 속이 아닌, 일상의 밖을 점유함으로써 우리가 사는 제1의 일상이 세계의 일부로 축소되었음에 대한 적나라한 공포를 가정한다. 즉 세상이 너무 이상하고 그 속에서 소수의 정상인만이 집에 콕 박힌 채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쩌면 이는 다른 쪽으로 생각이 닿기도 하는데, 자기 구역 바깥의 것들은 모두 이레귤러이며 그것을 분간하는 작업은 어렵기에 세상 전부가 두렵다는 생각이다. 세상 모두가 코로나 환자라고 생각하는 건 망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N번 방이라는 사건이 터져버렸다. 


N번 방이라는 걸 기사를 통해 처음 접한 대다수 사람에게 그것은 단순한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심각한 사안이라더라도 자신 혹은 가족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면 찰나의 이야깃거리로 소모하는 게 평범한 반응이니 말이다. 물론 ‘평범한 반응’이라는 표현이 그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두고서 ‘비범한’ 무언가로 지칭하기 위해 쓰인 것은 아니다. 이 포괄적인 일반화가 의미하는 것은 만인을 위한 사건은 없다는 점이다. 모두가 만족하는 정책이 없고, 모두가 관심을 갖는 사건이 없다는 뜻이다. 


정치의 최대 목표는 그 ‘모두’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만, 이런 류의 사건에서는 ‘모두’를 만족시킨다는 전제가 성립하지 않거나 불가능하다. 그러나 반대의 지점을 둘러보면 모든 것에 가까워지고 싶지 않고, 모든 것에 만족할 수 없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N번 방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중에 일부는 그런 점을 지적하고 있다. 남자들 모두가 가해자일 수도 있다고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자들 모두는 가해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자기최면적인 암시를 사회를 향해 내거는 사람도 있다. 


흥미롭게도 이때 전자는 공감을 얻지만 후자는 최면적인 공감을 얻는다. 전자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직관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후자는 언론이나 인터넷과 같은 곳에서 받아적기, RT와 같은 행위를 통해 주술적으로 증폭된다. 물론 이는 본질적으로 공허한 것이기에 음에 음을 더한다고 해도 양이 되지는 않는다. 가장 공허한 수인 제로(0)처럼 모든 것을 무(無)로 환원해버리는 게 그런 암시의 최후이다. 하지만 이전에도 있었고 현재도 진행중인 몰래카메라와 같은 문제를 이곳에 끌고 오면 이 문제는 예상치 못한 지점에 맥락이 닿는다. 


몰래카메라가 유발하는 공포는 말 그대로 몰래 관찰당한다는 행위에 성의 담론이 결합됨으로써 생겨난다. 은폐된 카메라를 통해 포착된 대상은 세계에 포착당할 권리를 기계에 빼앗기게 되고, 그렇게 빼앗긴 권리가 성적인 무언가라면 그것은 성적 주체이기를 강탈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문제는 주로 여성들, 평등에 관한 담화가 이루어지는 현시점에서 여성의 주권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해석되었으며 그런 이유로 이는 성적 자기 결정권을 위한 투쟁이 되었다. 


N번 방의 문제로 넘어가면, 사건의 발원지가 ‘일탈계(일탈을 위한 비공개 계정)’와 같은 성적 자기 결정권을 익명의 힘을 빌려 수행하는 어떤 행위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문제 되는 이유를 지적해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자의와 타의의 문제다. 일탈계가 개인의 측면에서는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엄격한 규율에 대한 일탈, 그로부터의 해방감, 말하자면 금기의 위반에서 생성되는 폭발적인 리비도 같은 것을 확보하는 행위이지만. 자신이 원해서 하는 것과 타의에 의해 하게 되는 건 명백한 차이가 있다. 이 과정에서 타의에 의한 것을 분류하는 과정은 복잡하고 어렵지만, 큰 틀에서는 최면적인 공감을 얻는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약점을 잡힐 만한 행동을 했기에 자신이 이런 고통을 겪고 있다는 생각은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는 행동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주변 사람의 신상을 파헤쳐 그걸 빌미로 협박하는 건 명백한 범죄이고 책임 소재도 거기에 있다. 여기까지가 우리의 생각이라면, 이런 절차를 코로나와 이레귤러에 대한 이야기로 옮기면 옆 나라 일본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일본에서는 코로나 검사에 응하고 그로 인해 확진자가 되면 그것 자체로 엄청난 민폐라는 생각이 있다. 이는 비단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일본의 민폐문화는 다른 나라보다 그쪽 방면에서 더 엄격하기에 동선 공개라던가 하는 면이 터부시되는 분위기가 없지 않다.  


여기서 두 개의 사건을 나란히 배치해보자. N번방은 ‘노예’라는 멸칭을 붙여가면서 이름을 하사한 자와 하사받은 자의 관계를 통해 보이지 않는 목줄을 만들어냈다. 이 목줄은 실체가 없는 것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서 대상을 옭아맨다. 이는 마치 주술사가 좀비를 부리는 것처럼, 피해자를 좀비로 만드는 방식을 통해 그들은 사람이 아니고 절대로 죽지 않고, 화면 안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생명체이고 주술을 통해 속박된 주종관계이기에 절대로 해체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것과도 같다. 즉 여기서 피해자는 자신이 이레귤러라는 생각을 하기에 자신의 말은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며, 그런 폐쇄성은 사태를 악화시켰다.


코로나 사태에 관한 일본의 대응도 마찬가지다. 코로나에 걸린 사람이 일종의 이레귤러로 취급되는 상황에서 자신이 코로나 확진자와 접촉했다는 말은 터부시되고, 심지어는 자신의 직장과 동네에 중대한 민폐를 끼칠 수도 있으므로 되도록이면 숨기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코로나 확진자는 한 명의 개인이 아닌 좀비가 되어 되도록 만나고 싶지 않고, 피해가고 싶지만 평시에는 은폐되었기에 전혀 알아볼 수 없고, 그러므로 발각되는 순간의 공포가 더욱 커지게 되고, 이게 다시금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은폐해야만 할 이유를 제공한다. 


마치 두 개의 차원이 있는 것만 같다. 질병이 있는 세계와 질병이 없는 세계다. 혹은 주인의 세상과 노예의 세상이다. 자칭 주인이라는 사람들은 자기만의 네트워크에서 그들의 주인됨을 공유하지만, 밖으로 나오면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평범한 이들일 뿐이다. 반대로, 노예가 되어버린 사람들은 계속해서 세상에 갇혀 있지만 바깥사람이 그들을 먼저 알아볼 방법은 없으므로 그곳에 계속해서 갇혀 있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N번 방이라는 세상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버린 우리에게도 메타인지에 따른 충격이 뒤따른다. 이 경우, 그것은 좀비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이나 다름없다. 가십으로서의 소비라는 뜻이다. 


그리고 몰래카메라는 이런 메커니즘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몰래카메라는 갇혀 있으려는 이들을 억지로 끌어내었기에 문제가 된다. 섹스 비디오를 찍는 것 자체는 피사체가 되는 것에 합의했다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둘 만의 세계가 어떤 이유로 지켜지지 못하고 깨어질 때,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세계가 붕괴하고 나면 그곳에 침투하는 시선은 내외 압력차에 따른 힘을 갖는다. 그렇게 강한 수압으로 밀려 들어오는 시선을 그 안의 사람들은 절대로 막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 후의 뒷처리가 쉬운 것도 아니다. 디지털 시대는 불멸하는 것들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파일이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며, 그 파일이 좀비처럼 인터넷을 횡단하게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결국, 두 사람이 행복하더라도 어떤 자료를 만들어두지 않는 게 좋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을 하려던 건 아니다. 다만 모든 사물은 양면성을 지닌다. 코로나에 시작이 있었다면 언젠가는 끝도 있을 것이다. 착한 사람이 사실은 나쁜 사람일 수도 있고, 착한 사람이라도 내면에는 작은 악이 자리 잡고 있을 수도 있다. 허나 중요한 것은 그걸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분리되어선 안 된다는 점이다. 현실은 땅따먹기처럼 금을 넘어간다고 해서 세계가 바뀌지 않는다. 


인터넷 세계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세계로 들어간다고 해서 우리가 변하는 건 아니다. 공간이 바뀌었으니 물리 법칙이 좀 달라졌을지는 몰라도 기본적으로 사람 사는 곳인 건 같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현실에서의 자신과 인터넷에서의 자신을 은연중에 구분 짓곤 한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가 살면서 여러 가면을 만들 필요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면을 쓸 얼굴 공간을 완전히 비워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얼굴을 잃으면 모두를 잃는 것이다. 가면을 열었을 때 텅 빈 공허만이 있다면 그건 더는 사람이 아니다. 불이 켜지고 나면 영화의 어둠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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