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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Apr 08. 2020

영화와 장례 사이에서 길을 잃다


1.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영화 <겨울왕국2>에는 이런 노래가 등장한다. “사랑이란 숲에서 길을 잃다”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7~80년대 영국 락을 연상케 하는 리듬과 영상을 통해 어른들에게 어필한다. 어쩌면 촌스럽거나, 당혹스러울 수도 있는 이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 전체에서 해당 장면이 결이 다른 이유에 대해 자문하게 된다. 애들 만화에 왜 이런 장면이 등장하는 걸까? 답은 하나다. <겨울왕국> 1편의 성공도 그랬지만, 그에 힘입은 2편에서는 어른들이 아이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몇몇 코드를 넣어 놔야 이것이 단순한 보여주기로 소비되는 걸 막을 수 있다. 예컨대, 아이를 극장에 데려가는 것도 어른이고 돈을 내는 것도 어른이므로, 돈 쓰는 사람이 돈을 쓸 만한 이유를 만들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면 1편의 주제의식이 안나와 엘사의 자매애였다는 점을 지적해볼 수 있다. 알다시피 2편의 주제의식은 1편에서 더 나아간 광대한 사랑이다. 종족 간의 오랜 갈등이 해결된다는 점, 자연과 인간의 화해라는 점에서 이는 범지구적이고 탈인간적인 사랑이다. 이때 개인 간의 사랑은 상대적으로 후순위로 밀려나게 되며, 그게 바로 안나와 크리스토프의 사랑이다. 이 과정에서 안나와 엘사 간의 자매애는 1편에서 내재화한 상태이므로 딱히 부가적인 언급을 하거나, 설명하려는 모습을 영화는 보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안나와 크리스토프의 사랑은 1편의 자매애와는 결이 다르며, 이는 비교적 아이들에게 교훈을 전달하려던 1편의 자매애와는 달리 어른들에게 두 사람의 사랑을 어필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물론 이러한 결론이 <겨울왕국 2>를 어른을 위한 동화로 만들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결론에서 작품 하나에 두 갈래의 길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아이가 보는 시각이 있고, 어른이 보는 시각이 있는데, 이 중에 한쪽 시야가 다른 한쪽을 일시적으로 침범하는 게 “사랑이란 숲에서 길을 잃다”라는 노래라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작품 해석의 다양한 갈래를 보여주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이 성찰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에게 주어진 해석의 다양성이 아니라 그 해석의 중첩에 질문의 요체가 있다.


먼저, 영화 안에 여러 갈래의 해석이 있다는 점에 대해 말해보자. 한 편의 영화는 프리즘과도 같아서 하나의 시선으로도 여러 빛을 투과해내곤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투과되는 빛을 일방통행로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 지각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깊게 보려면 여러 번 다시 보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한 번의 시청에 한 번의 길만을 따를 수 있고, 여러 번 걸어보아야만 비로소 다른 길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겨울왕국 2>의 경우에는 영화 중반에 갑작스럽게 어른의 길로 이탈함으로써 이곳이 일방통행로가 아니라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비록 해당 시퀀스가 끝나면 원상 복귀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탈은 적어도 영화를 다 보고 난 후가 아닌 ‘영화를 보는 도중에도’ 사유의 탈고가 이루어진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어른의 시선으로 보는 아동 영화가 사뭇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잠깐의 탈고를 통해 사유를 전환하게 될 때 이 세상에는 두 개의 길이 나란히 놓이게 된다. 


2.  


잠시나마 다른 시선을 체험하게 되는 사례는 오래전에 종영한 <체험 삶의 현장>과 같은 프로그램에서 찾아볼 수 있었는데, 장례를 치르는 것도 그 범주 안에 포함된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의 장례식은 적어도 3일 동안 일상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에 조문객으로서 방문하는 게 아닌, 상가의 일원으로서 조문객을 맞이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 죽음에 다가서 있게 된다. 이는 병상에 누워 직접 체험하는 것이 아닌, 죽음의 당사자의 주변부에 자리하며 그것을 목격하는 자로서 일종의 관찰자적 성격을 갖기에 영화 관람이라는 형식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는 언젠가 끝을 마주해야 하는 찰나의 터널과도 같은 경험이다. 극장에 들어가면 언젠가는 나와야 한다. 그 안에서의 경험이 즐거웠든 슬펐든 철학적이든 단순무식하든 간에 그곳은 우리네 일상이 아닌 장소이고, 그렇기에 영화를 본다는 경험은 터널에 침전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이런 비일상성이 장례의 경험과 유사하다. 장례라는 것은 고인을 떠나보내는 3일간의 여정이고, 이때 우리는 저승으로 향하는 고인을 마중 나가는 상주의 지위를 갖는다. 그러나 마중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그를 보내고 난 후 제자리로 돌아가 일상을 영위해야 한다. 이 영화, 그 어둠 안으로 온전히 빠져들고 싶지만 결코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이다. 


혹자는 영화와 장례가 죽음이라는 테마로 공통점을 얻기에는 너무 뚜렷한 도덕관 차이가 있음을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영화는 유희를 위한 도구로부터 시작했고 예술로 인정받은 현재에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즉, 영화를 장례에 빗대는 건 장례라는 죽음에 대한 엄숙함과 고인에 대한 예우 모두를 망쳐버릴 수 있는 치명적 위험성을 그 안에 품고 있다. 이는 세상의 모든 은유가 품는 위험성이기도 하다. 


위의 은유에서 이 논의는 확실히 극단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위험성에도 우리는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통행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영화가 장례에 빗대어질 수 있다면, 장례가 영화에 빗대어질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전의 구도가 만들어내는 의미의 부유는 ‘장례가 영화라는 콘텐츠가 됨’을 의미하는 것만큼이나 ‘장례만큼이나 숙고되어야 할 엄숙함으로서의 영화’를 뜻한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구도 속에서 영화를 통해 무언가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행위가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두 의미가 일방통행으로만 작동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종의 권력관계가 성립함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영화가 장례가 될 수 있다면 장례 또한 영화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윤리적 태도와 지향에 대해 어떠한 불안을 느낀다면 그것은 필시 영화가 상품이라는 점에 대한 우려의 표시일 테다. 말하자면 우리는 상품이 장례가 될 수는 있어도 장례가 상품이 될 수는 없다고 느낀다. 같은 말처럼 보이지만 전자는 장례라는 행위를 세일즈하는 상조들의 모습에 가깝고, 후자는 장례라는 행위를 두고서 물질적 가치로 재단하려 하는 물화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고인을 기린다는 것에 중점을 두는 장례에서 그 가능성은 완벽한 윤리적 모순으로 기능한다. 더 나아가서 사람들에게는 배반이 된다. 


이런 생각 속에서 내가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추상은 위의 두 가지 사례가 사실은 완벽한 한 유기체의 두 가지 면모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개의 생각, 그 갈래에서 하나만을 선택하거나 혹은 그렇게 돌아온 길에서 다시금 숙고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렇지만 <겨울왕국 2>의 결이 다른 장면처럼 중간에 잠시나마 길을 이탈함으로써 관객에게 사유의 재점화를 유도한다면 어떨까. 


영화라는 관객과 장례식의 상주는 비일상을 경유해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자기 삶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여기서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몇몇 소수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멜랑꼴리한 기분에 휩싸인다. “나는 아직 그를 보내지 못했다”는 말은 장례를 치른 이에게나 통용될 법하지만,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후에 휴우증에 시달리는 영화광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문구다. 이는 다른 맥락에서 ‘인생영화’라는 말이나 ‘N차 관람’이라는 행위로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그 점에서 영화와 장례는 떼놓을 수 없는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윤리적 전제를 하자면 장례식의 엄숙함이 영화관의 조용함과 비교될 수는 없다. (설사 디지털 이전의 시네마라 하더라도) 영화는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지만 고인은 영영 다시 마주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장례가 상품이 될 수 없는 것만큼이나 영화도 상품이 될 수 없다는 게 윤리적 측면에서의 판단이다. 자본주의 시장에서의 상품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다. 적어도 자본주의적 측면에서라면 물질로 환원되지 못할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반대로, 자본주의를 벗어난 윤리와 미의 형식에서는 상품으로 환원되지 않을 만남의 장이 발견된다. 그것은 보고 싶다는 마음과 언젠가 헤어져야만 한다는 영화의 양가성과 장례라는 3일간의 유예에 대해 우리 (영화광이)가 내놓는 하나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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